조검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황귀비에게 전했고 황귀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후궁들에게는 매달 녹봉이 나오고는 있지만 평소에 하인들에게 포상을 주고 안팎으로 인맥을 관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다른 비빈들의 뇌물을 잃는다면 크나큰 손해였다.“서 대인 말고 또 누가 영화궁에 뇌물을 보냈는지 알아오거라.”그날 밤, 황제는 서 귀인의 처소를 방문했다.서 귀인은 직접 황제의 반찬 시중을 들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폐하, 어서 드시지요.”소욱은 심드렁하게 수저를 들었다.오늘 밤이 자객과 약속한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하지만 지난번에 하마터면 그에게 잡힐 뻔했기에 그녀가 화청궁에 다시 방문할지는 미지수였다.“폐하….”서 귀인은 황제의 국그릇을 챙겨주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은 뭇 여자들과 식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꼈던 참이었고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국그릇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귀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올린 국에는 욕구를 자극하는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다른 비빈들은 폐하와의 한끼 식사에 만족할지 몰라도 그녀는 특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황제가 절대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위험하지만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것이다!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뿐이었다.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서 귀인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그녀는 젊은 황제의 준수한 얼굴을 취한 듯 올려다보았다.곧 약효가 발동할 시간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자신의 처소에 묵도록 만들 것이다.하지만 식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났다.“이만 자진궁으로 돌아가자.”소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 귀인은 조급해졌다.“폐하! 신첩이… 신첩이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노래만 듣고 가시지요.”소욱은 짜증스럽게 서 귀인을 노려보며 말
봉구안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마비산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사내는 거대한 체구로 그녀를 감싸고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고 뜨거워지고 있었다.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몸을 비추는 것처럼 덥고 불편하더니 점점 그녀의 몸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으나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출구가 눈앞에 있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그녀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에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눈처럼 하얀 의복을 차려입은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구안아, 정신 차려….”그 순간 봉구안은 눈을 부릅떴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은침으로 자신의 혈자리를 찔러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임시 방편일 뿐, 해독약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이대로 폭군의 해독약이 되는 것일까.그 순간 남자의 거친 순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봉구안은 살짝 그를 밀쳐 보았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점점 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사라졌던 은사가 또 나타나 있었다.천수독은 냉성 독이라 열성 약을 만나면 서로 약성이 상호작용하여 독성이 배로 강해진다.의지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피를 뿜으며 죽었을 것이다.이대로 가다가 폭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하지만 그녀 본인도 마비산에 당한 상태라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소욱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그의 복부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다른 부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얼음과 불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상충하며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소욱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최음제의 작용으로 간신히 억눌렀던 천수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해독을… 해다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린 목소리
깊은 밤, 밖에서 매복하고 있던 시위대는 한참을 기다려도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불안감이 엄습했다.하지만 황제가 들어오라는 말이 없으니 계속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 시진을 기다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그 자객이었다.그들이 상대를 포위하려던 순간, 내전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보내!”시위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시위대 대장이 내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밖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소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시위대 대장은 혼란스러웠다.‘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목소리를 들어보면 거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한참 후, 유사양이 명을 듣고 안으로 들었다.소욱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침상 앞에 서 있었다.“다 태우거라.”유사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최근에 폐하께서 비빈들의 처소로 걸음하시어 식사만 하고 나오시더니 설마….’금욕의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래도 냉궁에서 여인을 품은 건 놀랄만한 일이었다.소욱은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사양을 보자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도 궁금해하지도 말거라. 안 그러면 그 눈알 파 버리기 전에!”유사양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송구합니다, 폐하!”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은 옷을 벗어던지고 욕탕으로 들어갔다.그는 눈을 감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고약한 것!’비록 바지 위로 침술을 시전하였고 무례한 동작은 전혀 없었지만 그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만약 그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당장에서 목을 비틀어버렸을 것이다!영화궁.침소로 돌아온 봉구안은 옷을 벗고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아까는 대충 약을 발라 마무리했지만 더 섬세한 치료가 필요했다.뜨거운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온 연상은 그녀의 상
황귀비는 황제의 팔에 매달리며 유유히 말했다.“신첩도 들은 소문인데 서 대인이 얼마전에 황후께 선물을 보냈다네요.”소욱의 두 눈에 냉기가 스쳤다.후궁은 조정과 엮여서는 아니 되며 특히나 뇌물은 금기시 되어 있었다.황귀비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어쩌면 황후께서 궁중 법도를 잘 몰라서 실수한 모양인데 신첩은 걱정이 되네요. 서 귀인은 폐하를 시해하려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황후께서도 서 대인과 접촉이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두 분이 짜고 벌인 일이라고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이네요.”“후궁 중에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황후만 예외였잖아요. 오히려 폐하를 다른 비빈들 궁으로 밀어내기까지 하셨으니….”소욱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다른 건 몰라도 조중 대신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실만 놓고 봐도 황후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영화궁.최 상궁은 문밖에 도착한 황제의 대오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이 기다렸는데 드디어 황제가 영화궁을 방문한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마중을 나갔지만 유사양이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내쳤다.‘설마 마마께서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소욱은 곧장 내전으로 들어갔다.어깨에 약을 바르고 있던 봉구안은 신속히 옷매무시를 정돈했다.“신첩, 폐하를….”“수색해!”소욱은 그녀를 무시하고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갑게 명령했다.시위대들이 영화궁 안팎을 뒤지기 시작했다.소욱은 자리에 앉았고 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잠시 후, 시위대가 수색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그 중에는 서 대인이 선물한 귀중품도 들어 있었다.“폐하, 뇌물 받은 것들이 전부 여기 있습니다!”소욱은 한 상자나 되는 귀중품들을 바닥에 내던졌다.쾅!“황후, 네 죄를 알겠느냐.”담담한 말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연상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이때, 시위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시위대가 들어와서 봉구안을 끌고 가려고 했다.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발각되는 날에 엄벌을 받을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신첩이 홀로 모든 죄를 감당하는 것이 다른 비빈들이 함께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다만 신첩도 조건이 있습니다. 벌은 달게 받겠으나, 폐하께서 이 물건들을 포상으로 각 비빈들의 손에 전달하여 주십시오.”“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신첩은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소욱은 집요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파괴 욕구가 치밀었다.그녀는 찍어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처럼 단단해서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밀었다.그녀가 이럴수록 그는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자존심을 짓밟고 싶었다.“끌고 가라!”연상은 다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폐하, 소인이 마마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소욱은 한번 뱉은 명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연상을 노려보며 말했다.“예의 법도도 모르는 것. 끌고 가서 목을 치거라.”황후를 끌고 가라고 했을 때는 그나마 눈치를 보던 시위대였지만 시종인 연상을 끌고가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었다.그들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의 손이 연상에게 뻗는 순간, 봉구안은 손을 뻗어 연상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소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자신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을 때는 전혀 동요함이 없던 황후가 한낱 노비를 벌한다고 하니 이처럼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연상의 앞을 단단히 막고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연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소욱이 차갑게 반박했다.“황후를 대신해서 벌을 받겠다고 했으니 목을 치라고 한 거다.”연상은 폭군이 이 정도로 잔인한 사람일 줄은 처음 알았다.하지만 자신을 지키려고 나선 황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동이 몰려왔다.정말 이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황후가 궁중 법규를 베끼게 되었다는 소문은 곧 후궁 전체에 퍼졌다.그리고 비빈들 모두가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거기엔 관원들의 선물도 있었지만 우리가 보낸 것도 있었잖아. 그런데 황후께서는 우리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시고 혼자 벌을 감당하려 하셨어.”“영화궁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까 황후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원래부터 그것들을 우리한테 돌려주려고 하셨나 봐. 장부까지 기입했다던데.”“우리를 대신해 혼자 감당하려 하셨다니….”비빈들은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후궁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진심이고 가장 희귀한 것이 진심이었다.물론 그렇지 않은 비빈도 있었다.녕비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멍청하기는. 이유 없는 친절이 어디 있겠어? 황후께서 과연 이득을 안 챙겼을까? 지금 다들 그분께 감동하고 있는 게 그분이 바라는 상황이라고.”“서로 이용하고 이득을 공유하는 것뿐이지 진심은 무슨.”현비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 됐건 폐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신 것으로도 감사해야지. 황후께서 홀로 벌을 감당하겠다고 하셔서 이루어낸 결과 아니겠어? 그러니 궁중 법규 베끼는 일에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해.”녕비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난 못 해. 최근에 고모께서 불경을 베끼라고 하셨거든.”녕비는 평소에 현비와 가장 친했다. 그 이유는 현비만이 신분이나 지위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했던 현비마저 자신과 한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난 뒤, 강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현비 마마 말씀이 맞아요. 이번에 폐하께서 각 궁을 돌아보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이루어내신 것이니 저희가 도와야죠.”현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비빈들도 같은 생각이었다.“신첩도 하겠습니다.”“저도요! 아버지께서 서신에서 말씀하셨는데 예전에 금은보화를 영소전에 보낸 것이 그렇게 후회된답니다. 2년 동안 그쪽
황귀비는 자리에 앉아 봉구안을 관찰했다.봉씨 가문의 여식들은 하나같이 현명하고 단아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이 정도로 미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봉장미가 가진 화려하고 귀티 나는 이목구비는 주변의 여인들을 평범하게 만들 정도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자에게 황제가 과연 마음이 동한 적 없을까?황귀비는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찾아왔다.“황후마마, 며칠 전에 폐하께서 매일 저의 침소에 들러서 늦게까지 폐하를 모시느라 피곤하여 이제야 찾아뵙게 되네요. 송구합니다.”그녀는 봉구안에게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황후마마께서 폐하께 후궁들을 골고루 총애하라고 간언하신 덕분에 신첩도 드디어 쉴 시간이 주어졌네요.”봉구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황귀비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앞으로 내 힘이 닿는 대로 자네가 쉴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지.”황귀비는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황후마마는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군요. 지난번에 두통이 발작했을 때, 약을 가져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그러고 보니 폐하와의 신혼밤에 신첩이 두통이 발작하는 바람에 폐하께서 신첩의 궁으로 드셨었지요. 마마께서는 그런데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약까지 보내주셨으니 그 은혜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이렇게 선량하신 분이니 앞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잘되실 겁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착한 사람이 일이 잘 풀리는 건 모르겠고 악인은 무조건 벌을 받게 되는 법이지.”순간 황귀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곧이어 그녀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다만, 신첩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혼밤에 신첩 때문에 합방이 연기되었다고는 하지만 그후에도 폐하께서 영화궁을 방문하신 거로 아는데 왜 그때 기회를 잡지 않았나요?”“그리고 폐하께 후궁 비빈들에게 총애를 나눠주라고까지 간언하셨다고 들었는데 폐하께서는 그 와중에 영화중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으셨지요.”“왜 매번 황후께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폐하의 총애가 두려
황귀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상석에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황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상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폐하께서 비빈들의 궁에 방문하시고 비빈들의 가족들이 더 이상 영소전에 선물을 보내지 않게 되었으니 넌 그게 신경 쓰였겠지.”“당당한척, 고상한 척하지만 전혀 성실하지 않군.”“그렇게 신경 쓰이고 날 죽이고 싶겠지만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으니.”“황귀비, 지금 네 모습은 잘 훈련된 개 같아. 분명 두려운데 사람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니 개가 아니면 뭐겠어?”황귀비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뭐라고?”시종 춘화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황후가 이런 식으로 황귀비를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태후마저도 황귀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국이었다.봉구안은 그녀를 빤히 노려보다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마당을 지키는 개 같다고. 이빨은 예리하지만 사람을 물지는 못해.”“뭐라?”봉구안은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순결을 잃었다고 하는데 증거 있느냐?”“이 속옷 한 장으로 증거라 우기려고?”“하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게 정녕 내 물건이 맞는지 위조한 것은 아닌지,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산적들에게 잡혀갔다는 소문은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졌어. 황귀비,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지. 계속 지난 일을 붙잡고 있는 건 무능한 처사야!”황귀비는 곧장 허리를 펴고 황후를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무능하다 하였습니까?”그녀는 입가에 농후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뒤돌아섰다.“가자, 춘화야!”“예, 마마.”춘화는 여전히 황후의 뻔뻔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영화궁을 나온 후, 춘화는 심기가 뒤틀린 황귀비를 달랬다.“마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황후는 순결을 잃었으면서 발뺌하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고 있을지 몰라요.”가마에 오른 황귀비는 독사 같은 눈빛으로 영화궁을 노려보았다.‘날 건드린 대가
서왕은 곧장 완부옥이 원하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서왕부에서 일하는 여종이었다.그는 방 밖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한 시진 후.안에서 물을 가져오라는 소리가 들렸다.이내 문이 열리고, 여종이 조심스레 나왔다.서왕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들고 나온 것은 커다란 대야, 그 안에는 새빨간 핏물이 가득했다.서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부인은 괜찮느냐?”정충을 해독하려면 사람과 동침하는 것이 전부일 터.그런데, 이 많은 피는 대체…?여종은 겁에 질린 듯 몸을 떨며 대답했다.“부인께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소첩은 부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목욕을 도와드렸을 뿐입니다…”서왕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이 여종은… 어디까지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정말로 목욕만 시킨 것이냐?”여종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서왕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완부옥이 ‘여자를 데려오라’고 했던 말이… 해독과는 다른 의미였던 것인가?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방 안에는 강렬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그리고 욕조 안,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완부옥이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그러나 서왕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촉촉한 눈동자가 가볍게 일렁였다.“무슨 일이세요? 제가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신 건가요?”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유령처럼 보였다.서왕은 차갑게 말했다.“대체 여종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완부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저… 저를 도와 몸 속 독들을 빼달라고 했을 뿐이예요.”서왕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정충의 모충이 죽으면, 즉시 독이 온몸으로 퍼진다.이를 막으려면, 온몸의 혈을 돌려 독을 모두 빼내야만 했다.하지만 이 과정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그게 전부냐?”완부옥은 피식 웃었다.“아니면 뭐가 더 있어야 하죠?
“콱!”완부옥의 바늘이 서왕의 몸을 찌르는 순간, 그의 몸속에 있던 정충이 폭발하였다. 곧바로 서왕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서왕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치 몇 달 동안 짓눌려 있던 무거운 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정충이… 드디어 사라졌다.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독이 이렇게 쉽게…그러나 바로 그때, 눈앞에서 완부옥이 마른 낙엽처럼 휘청이더니 앞으로 쓰러졌다.서왕은 즉시 그녀를 부축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냐?”방금 전까지 멀쩡하지 않았던가?그녀를 내려다보니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 사이로 아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그제야 서왕은 깨달았다. 부작용이었다.정충을 심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몸에도 ‘모충’을 함께 심어야 한다.그런데 이제 그의 몸속에 있던 ‘자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서왕은 정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목숨에 지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는 주저 없이 명을 내렸다.“유화! 어의를 불러...”“그럴 필요 없어요.”서왕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완부옥이 힘겹게 그를 저지했다.여전히 그의 품에 기대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그냥… 저를 눕혀 주세요.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서왕은 마지못해 그녀의 뜻을 따랐다.완부옥은 자리에 눕자,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그녀는 서왕을 올려다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옷 안 입으셨어요? 저를 유혹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장막 밖으로 나가, 옆에 걸려 있던 옷을 주워들었다. 한 겹 한 겹 옷을 입는 손길이 빠르면서도 능숙했지만, 귓불이 살짝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그가 옷을 정리하는 동안, 완부옥은 아픈 감각을 잊으려는 듯 흐릿한 눈빛으로 과거를 떠올렸다.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어머니
유영은 서여국 사신 자격으로 입궁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다.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외출 중이었고,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궁인들은 즉시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궁 안.황후가 부재한 궁에서는 녕비가 후궁의 대소사를 총괄하고 있었다.“서여국 사신이 찾아왔다고?”소식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그녀는 후궁의 일만 맡을 뿐, 국사에는 개입한 적이 없었다.‘이런 큰 상황을 내가 처리할 수는 없어.’ “당장 서왕 전화를 모셔오거라!”그녀는 최근 며칠간 겨우 여유를 찾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사신이 찾아오다니.또다시 궁중 연회를 준비하고 사신을 접대해야 한단 말인가?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이럴 때 황후가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이 궁궐이란 곳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서왕 역시 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는 직접 나서서 유영을 접견했다.유영은 초조한 얼굴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주장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그럼에도 서왕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즉시 사람을 보내 실종된 사신단을 찾도록 명령했다.그제야 유영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신들은 이미 이른 새벽에 성을 빠져나갔으며, 빠르게 말을 달려 이제는 황성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까지 달아났다는 사실을 말이다.……밤이 깊어가고 있었다.서왕부완부옥은 대문 앞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이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걸음을 멈추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그 단아하고 정숙하던 여인이 정말 완부옥이 맞단 말인가?"전하~”완부옥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마치 사람의 혼을 빼앗을 듯한 요녀와도 같았다.방심한 순간, 그녀에게 푹 빠져 모든 걸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서왕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었다.더군다나 그는 정충에 걸려 있었기에 그녀와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하지만 완부옥은 더욱 매혹적인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숙연과 관련된 진실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소욱 역시 국사를 돌봐야 했기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갈라섰다.황성그날, 유영 모녀는 사신 자격으로 황성에 도착했다.객잔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던 그들은 다음 날, 뜻밖의 사건을 맞닥뜨렸다.이른 아침, 정희가 황급히 뛰어와 다급하게 외쳤다.“어머니! 어머니! 사람들이 다 사라졌어요!”유영은 눈을 크게 떴다.그들과 함께 온 사신단에는 남제의 대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유영은 급히 숙소 곳곳을 살폈다.그러나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마주하는 건 텅 빈 방뿐이었다.정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어머니, 혹시 우리가 간첩으로 몰려 잡혀간 건 아닐까요?”유영은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럴 리 없다.”서여국과 남제는 동맹을 맺은 나라였다.남제가 사신단을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관청에 가야겠다. 당장 신고하러 가자.”관청관청의 아전은 유영 모녀를 이당으로 안내했다.이당은 심문을 벌이는 대당과 달리, 관리가 일반적인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사적인 곳이기에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했다.관원들은 유영이 서여국의 특사라고 하자, 급히 응대하면서도 속으로 의아해했다.‘서여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한 적이 없는데…?’관청 측은 그녀에게 국서와 통관 문서를 제출해 신분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그러자 유영은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제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죠! 국서와 문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서여국에서 출발할 때, 대신들이 국서를 잃어버릴까 염려해 그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보관했던 것이다.이 순간, 유영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혹시… 그들이 서여국을 위협하려는 간첩이었던 건 아닐까?’관청 측은 그녀가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자 즉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 일은 상부에
봉구안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야말로 원래 유씨 가문의 장녀, 유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추측일 뿐, 완벽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녀의 가설은 ‘압명’이라는 미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서여국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다.이제야 나이가 맞지 않다는 문제도 해결된 것이다.황제는 봉 부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한층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너야말로 내 여동생이다. 유씨 부부는 너를 ‘대신 희생될 아이’로 삼아 유녕의 신분을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매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다.”봉 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남제로 돌아가면, 저는 이 사실을 더욱 철저히 조사할 것입니다.”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봉 부인이 남제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불안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때, 봉구안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와 함께 남제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서여국에 남으시겠습니까?”봉 부인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갈등했다.지금까지 그녀는 남제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원했다.하지만 봉구안이 말한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다.만약 정말 자신이 숙연이라면?그렇다면 서여국 황제는 그녀의 친언니였다.지금 황제는 위독한 상태였다.그녀가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만약 이후에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다면?그때 후회해도 이미 늦을 터였다.황제는 묵묵히 봉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은 조용하지만 간절했다.그녀에게 있어 봉 부인은 이미 숙연이었다.이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기다려온 동생을 만난 것 같았다
봉 부인은 충격에 휩싸였다.자신이 서여국 황제의 여동생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분명 그녀는 부모님의 친딸이었다.마을의 이웃과 친척들, 모두가 증언할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켜보지 않았던가.그러나 봉구안은 차분히 한 장의 그림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유씨 가문의 가족 초상이었다.“이 그림을 보면, 어머니께서는 외조부모님과 닮지 않았습니다.”봉 부인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만약 내가 친딸이 아니라면, 부모님은 왜 나를 키운 것일까? 그리고 그 끊어진 비녀… 그것은 분명 유영의 것이 아니었던가?’혼란스러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그때, 봉구안이 황제를 한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유씨 부부는 첫째 딸을 낳고 그 아이를 ‘유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녕은 태어나자마자 몸이 허약했고, 밤마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악귀에 씌였다’며, 원혼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고 합니다.”봉 부인은 이 이야기에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이야기는 들었어. 부모님께서도 내게 말씀하신 적 있지. 나는 마을의 산파에게 받아졌고, 부모님의 친딸이라고 했어. 어릴 적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의원들을 찾아다녔다고도 들었지.”봉구안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맞습니다. 유씨 부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손을 쓰지 못했죠. 그러던 중, 마을의 한 무당이 아이의 병은 평범한 약으로는 낫지 않는다고 했다 합니다. 다른 생명을 바쳐 아이의 명을 대신해야 한다고요…”봉 부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그런 미신을 믿었다는 거니?”“네. 당시 조부모님께서는 절박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유녕’이라는 이름을 새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요. 그때 조부모님께서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외조부께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며, 새로운 벼
침전 안.황제는 용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그때 정희가 방으로 들어서며 눈을 반짝였다.“이모님, 어디 가시려고요?”황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방의 수로를 점검하러 가는 길이다.”정희는 황제의 팔을 붙잡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이모님은 정말 백성을 위해 헌신하시네요!”“세상에 이모님처럼 성실한 군주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요, 아까 남제 황후를 봤어요. 그 자가 왜 여기에 온 거죠?”황제는 흔들림 없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남제 황후는 황제와 함께 변장하고 각지를 돌며 민심을 살피고 있다. 서여국에도 방문해 두 나라의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온 것이다.”“아, 그렇군요.”정희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황제 폐하도 같이 온 건가요?”그녀는 이모의 건강보다는 남제 황제의 행방에 더 관심을 보였다.그러나 정희는 알아채지 못했다.황제의 입술은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그때 모신 상궁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황제 폐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황제는 정희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며 떠나기 전 당부했다.“너와 네 어머니는 궁에서 잘 머물며, 내일 남제로 출발할 준비를 하거라.”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뒷모습을 배웅했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났다.‘이모님은 황제가 왔는지 안 왔는지 말도 안 해 주고 그냥 가버리시다니!’그녀는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남제 황후가 서여국에 왔다는 말을 듣자, 유영의 얼굴이 굳어졌다.“그 여자가 여길 왜 왔지? 혹시 언니를 찾으러 온 건가?”정희는 어머니의 팔을 꼭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머니, 그들 모녀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모님께서 우리에게 내일 출사 준비를 하라고 하셨어요. 이번 사절단 파견은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제 혼인은 물론이고, 어머니가 서여국의 황실 상인이 되어 각국의 교역로를 장악할 기회이기도 하잖아요. 지금은 다른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딸이 드물게 현실적인 판단을 하자, 유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맞아. 지금 그런 작은
서여국 황제의 침전 “다들 물러가거라.” 황제는 신하들에게 명령한 뒤, 모신 상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봉구안을 들여라.” 잠시 후, 봉구안이 침전으로 들어섰다. 몸에 꼭 맞는 청색 협소포를 걸친 그녀는 냉정한 기운이 감도는 단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손짓으로 궁녀들과 내관들을 물리쳤다. 모신 상궁만이 남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봉구안은 곧장 침상에 누운 황제를 향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봉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침상 위 황제를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황제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고,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봉구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황제께서 숙연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가 그분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황제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어머니는 내 부친과 많이 닮…콜록”그러나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갑작스러운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모신 상궁이 급히 앞으로 나서 황제의 등을 받쳐 주었다. 황제는 손수건을 입에 가져다 댔고,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황제는 겨우 숨을 가다듬고 봉구안을 바라보았다. “황후… 이리 와 보거라.” 그러나 봉구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신 상궁이 다급히 그녀를 보며 말했다. “황후 마마, 황제 폐하는 마마의 이모님이십니다!” 그 말에 봉구안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머니가 숙연이라는 것은 그녀도 의심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확신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미 무언가를 알아낸 것일까? 황제는 힘겹게 손을 들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할 말이 있다.” 봉구안은 짧은 침묵 끝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
봉 부인은 절망에 빠졌다.모신 상궁이 봉 부인이 의자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봉 부인, 괜찮으십니까?”유영 또한 놀란 척하며 다가왔다.“모신, 어서 어의를 불러! 갑자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시잖아!”얼마 지나지 않아 어의가 도착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봉 부인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했다.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깊은 혼란과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한편, 정희는 어머니 곁에서 봉 부인을 노려보았다.그녀의 눈빛 속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감히 입이라도 놀려 봐!’하지만, 설령 황제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결국 자신과 어머니야말로 황제의 진짜 혈육이었다.이 늙은 여자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봉 부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이만 저는 남제로 돌아가겠습니다.”모신 상궁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황제 폐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유영은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황제께서 왜 모신을 직접 보냈을까?’그녀는 황제가 봉 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곧 그녀의 의심은 사라졌다.황제는 봉 부인의 부탁을 쉽게 허락했다.봉 부인의 출궁 날.유영은 그녀를 직접 배웅했다.이별의 순간, 유영은 애써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가시는 길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방금 전 편전에서, 제가 한 말이 너무 심했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평생을 함께한 자매 아닌가요?”그러나 봉 부인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유영아, 스스로를 잘 돌보고, 이 곳에서도 잘 지내렴.”그녀는 단 한마디만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유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서늘했다.‘잘 돌보아야 하는 건 네 쪽이겠지.’서여국 황제의 침전.황제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오양련이 그녀 곁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 폐하, 틀림없습니다.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