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마비산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사내는 거대한 체구로 그녀를 감싸고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고 뜨거워지고 있었다.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몸을 비추는 것처럼 덥고 불편하더니 점점 그녀의 몸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으나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출구가 눈앞에 있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그녀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에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눈처럼 하얀 의복을 차려입은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구안아, 정신 차려….”그 순간 봉구안은 눈을 부릅떴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은침으로 자신의 혈자리를 찔러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임시 방편일 뿐, 해독약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이대로 폭군의 해독약이 되는 것일까.그 순간 남자의 거친 순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봉구안은 살짝 그를 밀쳐 보았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점점 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사라졌던 은사가 또 나타나 있었다.천수독은 냉성 독이라 열성 약을 만나면 서로 약성이 상호작용하여 독성이 배로 강해진다.의지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피를 뿜으며 죽었을 것이다.이대로 가다가 폭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하지만 그녀 본인도 마비산에 당한 상태라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소욱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그의 복부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다른 부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얼음과 불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상충하며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소욱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최음제의 작용으로 간신히 억눌렀던 천수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해독을… 해다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린 목소리
깊은 밤, 밖에서 매복하고 있던 시위대는 한참을 기다려도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불안감이 엄습했다.하지만 황제가 들어오라는 말이 없으니 계속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 시진을 기다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그 자객이었다.그들이 상대를 포위하려던 순간, 내전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보내!”시위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시위대 대장이 내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밖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소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시위대 대장은 혼란스러웠다.‘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목소리를 들어보면 거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한참 후, 유사양이 명을 듣고 안으로 들었다.소욱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침상 앞에 서 있었다.“다 태우거라.”유사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최근에 폐하께서 비빈들의 처소로 걸음하시어 식사만 하고 나오시더니 설마….’금욕의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래도 냉궁에서 여인을 품은 건 놀랄만한 일이었다.소욱은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사양을 보자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도 궁금해하지도 말거라. 안 그러면 그 눈알 파 버리기 전에!”유사양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송구합니다, 폐하!”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은 옷을 벗어던지고 욕탕으로 들어갔다.그는 눈을 감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고약한 것!’비록 바지 위로 침술을 시전하였고 무례한 동작은 전혀 없었지만 그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만약 그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당장에서 목을 비틀어버렸을 것이다!영화궁.침소로 돌아온 봉구안은 옷을 벗고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아까는 대충 약을 발라 마무리했지만 더 섬세한 치료가 필요했다.뜨거운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온 연상은 그녀의 상
황귀비는 황제의 팔에 매달리며 유유히 말했다.“신첩도 들은 소문인데 서 대인이 얼마전에 황후께 선물을 보냈다네요.”소욱의 두 눈에 냉기가 스쳤다.후궁은 조정과 엮여서는 아니 되며 특히나 뇌물은 금기시 되어 있었다.황귀비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어쩌면 황후께서 궁중 법도를 잘 몰라서 실수한 모양인데 신첩은 걱정이 되네요. 서 귀인은 폐하를 시해하려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황후께서도 서 대인과 접촉이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두 분이 짜고 벌인 일이라고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이네요.”“후궁 중에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황후만 예외였잖아요. 오히려 폐하를 다른 비빈들 궁으로 밀어내기까지 하셨으니….”소욱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다른 건 몰라도 조중 대신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실만 놓고 봐도 황후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영화궁.최 상궁은 문밖에 도착한 황제의 대오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이 기다렸는데 드디어 황제가 영화궁을 방문한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마중을 나갔지만 유사양이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내쳤다.‘설마 마마께서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소욱은 곧장 내전으로 들어갔다.어깨에 약을 바르고 있던 봉구안은 신속히 옷매무시를 정돈했다.“신첩, 폐하를….”“수색해!”소욱은 그녀를 무시하고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갑게 명령했다.시위대들이 영화궁 안팎을 뒤지기 시작했다.소욱은 자리에 앉았고 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잠시 후, 시위대가 수색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그 중에는 서 대인이 선물한 귀중품도 들어 있었다.“폐하, 뇌물 받은 것들이 전부 여기 있습니다!”소욱은 한 상자나 되는 귀중품들을 바닥에 내던졌다.쾅!“황후, 네 죄를 알겠느냐.”담담한 말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연상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이때, 시위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시위대가 들어와서 봉구안을 끌고 가려고 했다.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발각되는 날에 엄벌을 받을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신첩이 홀로 모든 죄를 감당하는 것이 다른 비빈들이 함께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다만 신첩도 조건이 있습니다. 벌은 달게 받겠으나, 폐하께서 이 물건들을 포상으로 각 비빈들의 손에 전달하여 주십시오.”“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신첩은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소욱은 집요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파괴 욕구가 치밀었다.그녀는 찍어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처럼 단단해서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밀었다.그녀가 이럴수록 그는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자존심을 짓밟고 싶었다.“끌고 가라!”연상은 다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폐하, 소인이 마마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소욱은 한번 뱉은 명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연상을 노려보며 말했다.“예의 법도도 모르는 것. 끌고 가서 목을 치거라.”황후를 끌고 가라고 했을 때는 그나마 눈치를 보던 시위대였지만 시종인 연상을 끌고가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었다.그들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의 손이 연상에게 뻗는 순간, 봉구안은 손을 뻗어 연상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소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자신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을 때는 전혀 동요함이 없던 황후가 한낱 노비를 벌한다고 하니 이처럼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연상의 앞을 단단히 막고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연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소욱이 차갑게 반박했다.“황후를 대신해서 벌을 받겠다고 했으니 목을 치라고 한 거다.”연상은 폭군이 이 정도로 잔인한 사람일 줄은 처음 알았다.하지만 자신을 지키려고 나선 황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동이 몰려왔다.정말 이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황후가 궁중 법규를 베끼게 되었다는 소문은 곧 후궁 전체에 퍼졌다.그리고 비빈들 모두가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거기엔 관원들의 선물도 있었지만 우리가 보낸 것도 있었잖아. 그런데 황후께서는 우리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시고 혼자 벌을 감당하려 하셨어.”“영화궁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까 황후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원래부터 그것들을 우리한테 돌려주려고 하셨나 봐. 장부까지 기입했다던데.”“우리를 대신해 혼자 감당하려 하셨다니….”비빈들은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후궁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진심이고 가장 희귀한 것이 진심이었다.물론 그렇지 않은 비빈도 있었다.녕비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멍청하기는. 이유 없는 친절이 어디 있겠어? 황후께서 과연 이득을 안 챙겼을까? 지금 다들 그분께 감동하고 있는 게 그분이 바라는 상황이라고.”“서로 이용하고 이득을 공유하는 것뿐이지 진심은 무슨.”현비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 됐건 폐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신 것으로도 감사해야지. 황후께서 홀로 벌을 감당하겠다고 하셔서 이루어낸 결과 아니겠어? 그러니 궁중 법규 베끼는 일에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해.”녕비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난 못 해. 최근에 고모께서 불경을 베끼라고 하셨거든.”녕비는 평소에 현비와 가장 친했다. 그 이유는 현비만이 신분이나 지위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했던 현비마저 자신과 한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난 뒤, 강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현비 마마 말씀이 맞아요. 이번에 폐하께서 각 궁을 돌아보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이루어내신 것이니 저희가 도와야죠.”현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비빈들도 같은 생각이었다.“신첩도 하겠습니다.”“저도요! 아버지께서 서신에서 말씀하셨는데 예전에 금은보화를 영소전에 보낸 것이 그렇게 후회된답니다. 2년 동안 그쪽
황귀비는 자리에 앉아 봉구안을 관찰했다.봉씨 가문의 여식들은 하나같이 현명하고 단아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이 정도로 미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봉장미가 가진 화려하고 귀티 나는 이목구비는 주변의 여인들을 평범하게 만들 정도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자에게 황제가 과연 마음이 동한 적 없을까?황귀비는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찾아왔다.“황후마마, 며칠 전에 폐하께서 매일 저의 침소에 들러서 늦게까지 폐하를 모시느라 피곤하여 이제야 찾아뵙게 되네요. 송구합니다.”그녀는 봉구안에게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황후마마께서 폐하께 후궁들을 골고루 총애하라고 간언하신 덕분에 신첩도 드디어 쉴 시간이 주어졌네요.”봉구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황귀비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앞으로 내 힘이 닿는 대로 자네가 쉴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지.”황귀비는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황후마마는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군요. 지난번에 두통이 발작했을 때, 약을 가져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그러고 보니 폐하와의 신혼밤에 신첩이 두통이 발작하는 바람에 폐하께서 신첩의 궁으로 드셨었지요. 마마께서는 그런데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약까지 보내주셨으니 그 은혜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이렇게 선량하신 분이니 앞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잘되실 겁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착한 사람이 일이 잘 풀리는 건 모르겠고 악인은 무조건 벌을 받게 되는 법이지.”순간 황귀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곧이어 그녀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다만, 신첩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혼밤에 신첩 때문에 합방이 연기되었다고는 하지만 그후에도 폐하께서 영화궁을 방문하신 거로 아는데 왜 그때 기회를 잡지 않았나요?”“그리고 폐하께 후궁 비빈들에게 총애를 나눠주라고까지 간언하셨다고 들었는데 폐하께서는 그 와중에 영화중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으셨지요.”“왜 매번 황후께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폐하의 총애가 두려
황귀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상석에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황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상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폐하께서 비빈들의 궁에 방문하시고 비빈들의 가족들이 더 이상 영소전에 선물을 보내지 않게 되었으니 넌 그게 신경 쓰였겠지.”“당당한척, 고상한 척하지만 전혀 성실하지 않군.”“그렇게 신경 쓰이고 날 죽이고 싶겠지만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으니.”“황귀비, 지금 네 모습은 잘 훈련된 개 같아. 분명 두려운데 사람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니 개가 아니면 뭐겠어?”황귀비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뭐라고?”시종 춘화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황후가 이런 식으로 황귀비를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태후마저도 황귀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국이었다.봉구안은 그녀를 빤히 노려보다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마당을 지키는 개 같다고. 이빨은 예리하지만 사람을 물지는 못해.”“뭐라?”봉구안은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순결을 잃었다고 하는데 증거 있느냐?”“이 속옷 한 장으로 증거라 우기려고?”“하지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게 정녕 내 물건이 맞는지 위조한 것은 아닌지,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산적들에게 잡혀갔다는 소문은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졌어. 황귀비,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지. 계속 지난 일을 붙잡고 있는 건 무능한 처사야!”황귀비는 곧장 허리를 펴고 황후를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무능하다 하였습니까?”그녀는 입가에 농후한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뒤돌아섰다.“가자, 춘화야!”“예, 마마.”춘화는 여전히 황후의 뻔뻔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영화궁을 나온 후, 춘화는 심기가 뒤틀린 황귀비를 달랬다.“마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황후는 순결을 잃었으면서 발뺌하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고 있을지 몰라요.”가마에 오른 황귀비는 독사 같은 눈빛으로 영화궁을 노려보았다.‘날 건드린 대가
며칠 사이에 황후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서 조정의 관원들 귀에까지 들어갔다.태후는 그냥 무시로 일관하려 했지만 방법이 통하지 않자 조바심이 났다.“황후는 폐하의 정실이자 황실의 체면이야. 입궁하기 전에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입궁한 순간부터는 그 어떤 오명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돼.”계 상궁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소인이 궁인들을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계속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하겠다고요.”소문이 두려운 건 그것을 완전히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태후까지 나섰지만 황후의 순결 문제는 여전히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돌고 있었다.수다를 좋아하는 몇몇 비빈들이 한곳에 모였다.“영화궁에서 아무런 반격도 없는 것을 보면 사실인 것 같지 않나요?”“설마 그 소문들이 진짜라고요? 황후께서 순결의 몸이 아니라면… 어찌 폐하와 혼례를 올렸단 말인가요!”“나도 알아왔는데 황후께서 혼례식 전에 산적에게 잡혀간 적이 있는 건 사실이래. 비록 의심의 여지는 있긴 하지만 궁 안까지 소문이 새어 들어온 걸 보면 아예 뜬구름 잡는 소문은 아닌 것 같아.”“궁 안팎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황후마마의 입지는 괜찮을까요?”영소전.황귀비는 흔들의자에 앉아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손톱을 칠하고 있었다.안으로 들어온 춘화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마마, 조정의 몇몇 관원들이 황후를 폐하라는 첩지를 올렸다고 하옵니다.”황귀비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지어졌다.“영화궁은 이 소식을 알고 있다더냐?”“지금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할 생각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황후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네요.”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봉씨 가문에게는 폐후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봉가의 모든 영예는 결국 봉장미의 손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영화궁.궁중 법규 백 벌은 결국 대부분은 연상의 손에서 완성되었다.그렇다고 봉구안이 한가롭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봉장미의 글씨를 전보다는 쉽게 써낼 수 있을
영비는 서왕에게 목을 졸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비록 전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전하를 용서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폐하께 전하께서 저를 궁에서 데리고 나갔고,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가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전하는 저를 정말로 해칠 수 없으십니다.”결국 서왕은 손을 풀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용란,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영비는 여전히 여린 모습을 보였다.“그 말은 제가 전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저희는 모두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그저 저희의 선택일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서왕의 앞에 다가가 그의 허리띠에서 옥패를 살짝 빼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기억하십니까? 저희 셋은 서로를 지키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서왕은 갑자기 기분 나쁜 한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모용란,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그는 단호히 말을 마친 후, 거침없이 돌담을 빠져나갔다.영비는 어두운 바위 속에 혼자 남아, 서왕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나는 널 용서했어, 정말로.”…자녕궁.영비가 궁에 돌아온 이후, 태후는 한 번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영비가 궁으로 돌아온 그날, 태후에게 와서는 여러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그중에는 과거의 행동을 용서할 것이며, 황제가 태후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태후는 영비의 말 속에서, 언젠가 복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태후마마, 약을 드셔야 하옵니다.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약을 드시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실 거라 하였사옵니다.”태후는 깊은 갈색 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약을 밀쳐내며 말했다.“아
검은 옷을 입은 자는 감옥에 갇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나 독을 먹어 목숨을 끊을까 염려해, 그의 입에는 철제 입막이가 씌워져 있었다.봉구안이 감옥에 들어서자, 검은 옷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였다.입막이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가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두 눈은 끝이 위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고 사납게 보였다.봉구안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그려보았던 원수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그녀는 옥졸에게 명령했다.“그 입막이를 벗겨라.”쇠사슬이 풀리자, 검은 옷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장군, 요즘은 평안한가?”그는 마치 죄인이 아닌 듯,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감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봉구안은 서두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단회욱은 대체 어떻게 죽였지?”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검은 옷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는 그대에게 날아든 천수지독을 대신 막아내고, 독이 퍼져 죽었소.”봉구안의 눈빛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왜 그가 내 목숨으로 5년을 바꾸었다고 말한 거지?”검은 옷은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눈을 위로 굴렸다.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런 일이 있었나? 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요?”봉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그의 얼굴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외쳤다.“당장 말하거라!”검은 옷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태연히 답했다.“북대영의 전신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일 뿐이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네가 죽음을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검은 옷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가 천옥이란 걸 알고 있소. 심문이든 고문이든, 하고
궁중에는 영비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들이 많았다.이 순간, 소욱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봉구안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다른 비빈들에게는 늘 냉담했던 그의 눈에, 눈앞의 여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영비…”소욱의 미간에는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그 여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폐하, 소첩입니다. 소첩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소첩이 돌아왔나이다!”옆에 있던 녕비는 이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반면, 현비는 품위 있게 말을 보탰다.“폐하께서 대승을 거두셨고, 영비마마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소욱은 어색한 듯 품에 안긴 여인을 살짝 밀쳐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황후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듯했다.“황후마마.”봉구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예를 생략하거라.”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본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로 보아 영비의 죽음에는 분명 감춰진 진실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봉구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관한 일이었다.영비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바로 그 검은 옷을 입은 독인이었다.그녀는 반드시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영화궁.봉구안이 돌아오자마자, 최 상궁은 급히 그녀를 따라와 영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마마, 오늘 영비마마를 보셨사옵니까?”“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며칠 전부터 영비마마의 소식으로 궁중이 온통 뒤집혔다 하옵니다.”“듣자 하니, 그녀께서 과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태황태후마마의 비밀스러운 보살핌을 받아왔고, 이제야 완쾌되어 돌아오셨다 하옵니다….”봉구안은 마음에 짙은 불쾌함이 스쳤다.“물러가라.”연상은 그녀의 심중을 눈치챘으나, 감히 더 묻
쾅!봉구안의 주먹이 날아들자, 소욱의 턱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는 다음 날 밤, 또다시 장막을 버려두고 봉구안의 곁으로 몰래 들어왔다.이번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그녀에게 손을 대거나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그 덕에 봉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묵인하였다.하지만, 이내 그의 본성이 또 드러나고 말았다.며칠 뒤, 그들이 묵은 역참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밖에서는 두 사람이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으나, 문이 닫히자 봉구안은 바로 바닥에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그러나 소욱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너는 침상에서 자거라.”봉구안은 단호히 거절했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당연히 침상에서 주무셔야 합니다.”그러자 소욱은 느긋하게 반박하였다.“황제와 황후라면 본디 같은 침상을 쓰는 것이 맞지 않느냐. 이후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되겠구나…”이 말에 봉구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그러하오면, 이 바닥은 폐하께 양보하겠나이다.”소욱은 잠시 벽 쪽을 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그는 조용히 누웠으나, 몸을 옆으로 돌려 침상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침상에 올라가자, 곧바로 비단 장막이 내려졌다.밤이 깊었고, 봉구안은 편히 잠들었다.그러나 한밤중, 그녀는 누군가 곁에 있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그곳에 누워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밀쳤으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닥에 쥐가 있어, 침상에서 자는 것이 안전하겠다.”봉구안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쥐라니요? 이는 분명 폐하께서 지어낸 거짓말이옵니다!”소욱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정말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쥐가 있더라도, 폐하께서 그것을 무서워하실 리가 없사옵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섭
황성.진왕이 군량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증거가 명백했으므로, 서왕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진왕은 억울함을 외치며, 서왕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 주장했다.이 일은 태황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하지만 태황태후가 나서도 서왕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한편, 황제가 이끄는 대군은 반송길에 접어들었고, 사수성을 나선 후 여정이 험해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군은 야영을 선택했다.봉구안은 말했다.“소첩은 마차 안에서 지내겠사옵니다.”같은 자리에서 소욱과 함께 지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요며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니 매우 불편했다.소욱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치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들 부부의 냉랭한 분위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요 며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자주 다투시는 듯하네.”“그러게. 얼마 전까지는 화목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그중 한 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들은 게 있네.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서 말해 보게.”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어제 말에 물을 먹이러 갔는데, 마차 안에서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사과하는 소리를 들었지.”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거짓말 말게나.”병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라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아직도 화났느냐? 어서 이리 와서 네 작은 손을…’”“닥치게!” 다른 병사가 발로 찼다.농담이라며 대꾸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그 병사는 엉덩이를 만지며 헤헤 웃었다.사실 그들 간의 대화는 그 병사가 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황제가 황후에게 사과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다.…마차 안.봉구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한밤중, 누군가 마차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긴장하며 몸을
남대영.대군들은 황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손덕방은 속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폐하께서 군영에서 무사히 돌아가시니,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그는 격하게 경례하며 소리쳤다.“장수 손덕방, 폐하와 황후마마의 출발을 배웅하겠습니다!”소욱은 올 때는 말을 탔으나,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기로 했다.마차 안에서 그는 손수 귤 하나를 까서 반으로 나눠 봉구안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이리 좀 먹어보거라.”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얼굴을 돌리며 답했다.“먹고싶지 않사옵니다.”소욱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짐도 사실 귤 따위는 좋아하지 않지. 시큼한 것은 줄곧 입맛에 맞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황후와 짐의 입맛이 참으로…”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봉구안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귤을 집어들더니 한 입에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맞서려 한다는 걸 알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흥미를 느낀 듯, 미소를 지었다.최소한 어젯밤처럼 냉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마차 밖에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급히 전해드릴 밀서가 있사옵니다!”소욱은 손을 내밀어 밀서를 받아들었다.그러면서 봉구안을 힐끗 바라보며 밀서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네가 먼저 보겠느냐?”봉구안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런 농은 그만두십시오. 어찌 중요한 정무를 두고 저와 농을 하는 것입니까?”소욱은 밀서를 열어 훑어본 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그는 곧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 짐이 네게 약조했던 큰 선물, 이미 준비해 두었다.”봉구안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그런 건 필요 없사옵니다.”소욱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끌더니, 허리를 가로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짐의 사람들이 독을 쓴 그 검은 옷을 붙잡았는데, 이 선물도 필요 없다 하겠느냐?”봉구안은 순간 놀라며 되물었다.“정말이십니까?”“짐이 거짓을 말하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