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궁봉구안이 한창 저녁을 들고 있을 때, 최 상궁이 보신탕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마마, 강빈 마마께서 보내신 보신탕입니다. 꼭 드셔보시라고 하더군요.”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식탁을 가리켰다.“저기 두거라.”최 상궁이 나간 뒤, 연상은 재빨리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조금 전 올라온 탕에서 적수관음이라는 독이 발견되었고 봉구안도 황궁에 들어온 뒤로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에 먹기 전에 독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확인 결과, 은침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봉구안은 숟가락으로 탕을 떠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적수관음의 독을 해독하는 약이 들었군.”“해독약이요? 마마, 설마 강빈이….”봉구안은 담담히 고기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뻔하지. 사람 시켜서 독을 넣은 사람이 강빈이야.”“예? 그런데 왜….”“애증이 분명하고 성격이 고약해서 그렇지 본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강빈의 성격은 그녀가 알던 옛 지인의 성격과 매우 흡사했다.“마마, 매수당한 자를 찾아야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급할 건 없어. 영화궁의 구멍이 어디 한둘이겠니.”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최근 궁 안에 자객을 잡는다고 외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그래.”봉구안은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에 잠겼다. 다음 번 해독 과정은 아마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상화전.강빈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병풍을 바라보았다.시종이 그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왔다.“마마, 해독약은 보신탕에 섞어 보내드렸으니 황후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강빈은 찻잔을 들며 쓴웃음을 지었다.“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일을 황후가 알고 있었다니.”돌아오기 전, 유사양은 그녀에게 전에 황후가 황제에게 간언드리며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고 감명을 받은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사람들은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바라고 자존심 다 버리고 황귀비 앞에서 아양을 떤다고만 생각했었지.”“사실
조검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황귀비에게 전했고 황귀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후궁들에게는 매달 녹봉이 나오고는 있지만 평소에 하인들에게 포상을 주고 안팎으로 인맥을 관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다른 비빈들의 뇌물을 잃는다면 크나큰 손해였다.“서 대인 말고 또 누가 영화궁에 뇌물을 보냈는지 알아오거라.”그날 밤, 황제는 서 귀인의 처소를 방문했다.서 귀인은 직접 황제의 반찬 시중을 들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폐하, 어서 드시지요.”소욱은 심드렁하게 수저를 들었다.오늘 밤이 자객과 약속한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하지만 지난번에 하마터면 그에게 잡힐 뻔했기에 그녀가 화청궁에 다시 방문할지는 미지수였다.“폐하….”서 귀인은 황제의 국그릇을 챙겨주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은 뭇 여자들과 식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꼈던 참이었고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국그릇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귀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올린 국에는 욕구를 자극하는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다른 비빈들은 폐하와의 한끼 식사에 만족할지 몰라도 그녀는 특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황제가 절대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위험하지만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것이다!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뿐이었다.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서 귀인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그녀는 젊은 황제의 준수한 얼굴을 취한 듯 올려다보았다.곧 약효가 발동할 시간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자신의 처소에 묵도록 만들 것이다.하지만 식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났다.“이만 자진궁으로 돌아가자.”소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 귀인은 조급해졌다.“폐하! 신첩이… 신첩이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노래만 듣고 가시지요.”소욱은 짜증스럽게 서 귀인을 노려보며 말
봉구안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마비산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사내는 거대한 체구로 그녀를 감싸고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고 뜨거워지고 있었다.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몸을 비추는 것처럼 덥고 불편하더니 점점 그녀의 몸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으나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출구가 눈앞에 있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그녀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에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눈처럼 하얀 의복을 차려입은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구안아, 정신 차려….”그 순간 봉구안은 눈을 부릅떴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은침으로 자신의 혈자리를 찔러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임시 방편일 뿐, 해독약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이대로 폭군의 해독약이 되는 것일까.그 순간 남자의 거친 순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봉구안은 살짝 그를 밀쳐 보았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점점 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사라졌던 은사가 또 나타나 있었다.천수독은 냉성 독이라 열성 약을 만나면 서로 약성이 상호작용하여 독성이 배로 강해진다.의지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피를 뿜으며 죽었을 것이다.이대로 가다가 폭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하지만 그녀 본인도 마비산에 당한 상태라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소욱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그의 복부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다른 부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얼음과 불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상충하며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소욱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최음제의 작용으로 간신히 억눌렀던 천수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해독을… 해다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린 목소리
깊은 밤, 밖에서 매복하고 있던 시위대는 한참을 기다려도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불안감이 엄습했다.하지만 황제가 들어오라는 말이 없으니 계속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 시진을 기다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그 자객이었다.그들이 상대를 포위하려던 순간, 내전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보내!”시위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시위대 대장이 내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밖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소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시위대 대장은 혼란스러웠다.‘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목소리를 들어보면 거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한참 후, 유사양이 명을 듣고 안으로 들었다.소욱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침상 앞에 서 있었다.“다 태우거라.”유사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최근에 폐하께서 비빈들의 처소로 걸음하시어 식사만 하고 나오시더니 설마….’금욕의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래도 냉궁에서 여인을 품은 건 놀랄만한 일이었다.소욱은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사양을 보자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도 궁금해하지도 말거라. 안 그러면 그 눈알 파 버리기 전에!”유사양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송구합니다, 폐하!”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은 옷을 벗어던지고 욕탕으로 들어갔다.그는 눈을 감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고약한 것!’비록 바지 위로 침술을 시전하였고 무례한 동작은 전혀 없었지만 그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만약 그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당장에서 목을 비틀어버렸을 것이다!영화궁.침소로 돌아온 봉구안은 옷을 벗고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아까는 대충 약을 발라 마무리했지만 더 섬세한 치료가 필요했다.뜨거운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온 연상은 그녀의 상
황귀비는 황제의 팔에 매달리며 유유히 말했다.“신첩도 들은 소문인데 서 대인이 얼마전에 황후께 선물을 보냈다네요.”소욱의 두 눈에 냉기가 스쳤다.후궁은 조정과 엮여서는 아니 되며 특히나 뇌물은 금기시 되어 있었다.황귀비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어쩌면 황후께서 궁중 법도를 잘 몰라서 실수한 모양인데 신첩은 걱정이 되네요. 서 귀인은 폐하를 시해하려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황후께서도 서 대인과 접촉이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두 분이 짜고 벌인 일이라고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이네요.”“후궁 중에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황후만 예외였잖아요. 오히려 폐하를 다른 비빈들 궁으로 밀어내기까지 하셨으니….”소욱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다른 건 몰라도 조중 대신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실만 놓고 봐도 황후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영화궁.최 상궁은 문밖에 도착한 황제의 대오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이 기다렸는데 드디어 황제가 영화궁을 방문한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마중을 나갔지만 유사양이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내쳤다.‘설마 마마께서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소욱은 곧장 내전으로 들어갔다.어깨에 약을 바르고 있던 봉구안은 신속히 옷매무시를 정돈했다.“신첩, 폐하를….”“수색해!”소욱은 그녀를 무시하고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갑게 명령했다.시위대들이 영화궁 안팎을 뒤지기 시작했다.소욱은 자리에 앉았고 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잠시 후, 시위대가 수색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그 중에는 서 대인이 선물한 귀중품도 들어 있었다.“폐하, 뇌물 받은 것들이 전부 여기 있습니다!”소욱은 한 상자나 되는 귀중품들을 바닥에 내던졌다.쾅!“황후, 네 죄를 알겠느냐.”담담한 말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연상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이때, 시위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시위대가 들어와서 봉구안을 끌고 가려고 했다.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발각되는 날에 엄벌을 받을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신첩이 홀로 모든 죄를 감당하는 것이 다른 비빈들이 함께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다만 신첩도 조건이 있습니다. 벌은 달게 받겠으나, 폐하께서 이 물건들을 포상으로 각 비빈들의 손에 전달하여 주십시오.”“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신첩은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소욱은 집요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파괴 욕구가 치밀었다.그녀는 찍어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처럼 단단해서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밀었다.그녀가 이럴수록 그는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자존심을 짓밟고 싶었다.“끌고 가라!”연상은 다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폐하, 소인이 마마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소욱은 한번 뱉은 명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연상을 노려보며 말했다.“예의 법도도 모르는 것. 끌고 가서 목을 치거라.”황후를 끌고 가라고 했을 때는 그나마 눈치를 보던 시위대였지만 시종인 연상을 끌고가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었다.그들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의 손이 연상에게 뻗는 순간, 봉구안은 손을 뻗어 연상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소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자신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을 때는 전혀 동요함이 없던 황후가 한낱 노비를 벌한다고 하니 이처럼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연상의 앞을 단단히 막고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연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소욱이 차갑게 반박했다.“황후를 대신해서 벌을 받겠다고 했으니 목을 치라고 한 거다.”연상은 폭군이 이 정도로 잔인한 사람일 줄은 처음 알았다.하지만 자신을 지키려고 나선 황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동이 몰려왔다.정말 이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황후가 궁중 법규를 베끼게 되었다는 소문은 곧 후궁 전체에 퍼졌다.그리고 비빈들 모두가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거기엔 관원들의 선물도 있었지만 우리가 보낸 것도 있었잖아. 그런데 황후께서는 우리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시고 혼자 벌을 감당하려 하셨어.”“영화궁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까 황후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원래부터 그것들을 우리한테 돌려주려고 하셨나 봐. 장부까지 기입했다던데.”“우리를 대신해 혼자 감당하려 하셨다니….”비빈들은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후궁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진심이고 가장 희귀한 것이 진심이었다.물론 그렇지 않은 비빈도 있었다.녕비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멍청하기는. 이유 없는 친절이 어디 있겠어? 황후께서 과연 이득을 안 챙겼을까? 지금 다들 그분께 감동하고 있는 게 그분이 바라는 상황이라고.”“서로 이용하고 이득을 공유하는 것뿐이지 진심은 무슨.”현비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 됐건 폐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신 것으로도 감사해야지. 황후께서 홀로 벌을 감당하겠다고 하셔서 이루어낸 결과 아니겠어? 그러니 궁중 법규 베끼는 일에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해.”녕비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난 못 해. 최근에 고모께서 불경을 베끼라고 하셨거든.”녕비는 평소에 현비와 가장 친했다. 그 이유는 현비만이 신분이나 지위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했던 현비마저 자신과 한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난 뒤, 강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현비 마마 말씀이 맞아요. 이번에 폐하께서 각 궁을 돌아보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이루어내신 것이니 저희가 도와야죠.”현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비빈들도 같은 생각이었다.“신첩도 하겠습니다.”“저도요! 아버지께서 서신에서 말씀하셨는데 예전에 금은보화를 영소전에 보낸 것이 그렇게 후회된답니다. 2년 동안 그쪽
황귀비는 자리에 앉아 봉구안을 관찰했다.봉씨 가문의 여식들은 하나같이 현명하고 단아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이 정도로 미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봉장미가 가진 화려하고 귀티 나는 이목구비는 주변의 여인들을 평범하게 만들 정도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자에게 황제가 과연 마음이 동한 적 없을까?황귀비는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찾아왔다.“황후마마, 며칠 전에 폐하께서 매일 저의 침소에 들러서 늦게까지 폐하를 모시느라 피곤하여 이제야 찾아뵙게 되네요. 송구합니다.”그녀는 봉구안에게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황후마마께서 폐하께 후궁들을 골고루 총애하라고 간언하신 덕분에 신첩도 드디어 쉴 시간이 주어졌네요.”봉구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황귀비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앞으로 내 힘이 닿는 대로 자네가 쉴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지.”황귀비는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황후마마는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군요. 지난번에 두통이 발작했을 때, 약을 가져다주셔서 감사했습니다.”“그러고 보니 폐하와의 신혼밤에 신첩이 두통이 발작하는 바람에 폐하께서 신첩의 궁으로 드셨었지요. 마마께서는 그런데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약까지 보내주셨으니 그 은혜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이렇게 선량하신 분이니 앞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잘되실 겁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착한 사람이 일이 잘 풀리는 건 모르겠고 악인은 무조건 벌을 받게 되는 법이지.”순간 황귀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곧이어 그녀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다만, 신첩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혼밤에 신첩 때문에 합방이 연기되었다고는 하지만 그후에도 폐하께서 영화궁을 방문하신 거로 아는데 왜 그때 기회를 잡지 않았나요?”“그리고 폐하께 후궁 비빈들에게 총애를 나눠주라고까지 간언하셨다고 들었는데 폐하께서는 그 와중에 영화중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으셨지요.”“왜 매번 황후께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폐하의 총애가 두려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
약쟁이 거래의 배후를 묻자, 구학은 당황한 듯 보였다.그는 소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모릅니다…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그자들은 항상 밀서로만 연락했습니다. 밀서에 물건을 받으러 갈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고, 저희는 그 지시에 따라 물건을 받은 뒤 구매자에게 가져다주기만 했습니다.”“그들은 매번 신중히 움직였고, 접선 장소도 항상 달랐으며, 저희와는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폐하, 소인이 드리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며, 감히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구학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절을 올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소인은 올해 나이가 예순셋입니다. 무릎 아래 자식 하나 없는데, 제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설령 재물과 명예를 얻는다 한들, 제가 얼마나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운산파의 천 명 넘는 제자들을 굶기지 않는 것뿐입니다!”소욱은 냉담하게 반응했다.“약쟁이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거라.”구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털어놓았다.“소인은 약쟁이 거래가 그렇게 돈벌이가 좋다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약쟁이 한 명을 운송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면, 우리 운산파가 직접 약쟁이를 만들어 팔면 얼마나 큰돈을 벌겠는가 하고요.”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짐작한 게 맞습니다. 동쪽 별채에 있던 그 '단약'들은 사실 약쟁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수년간 실패했고, 약쟁이를 만드는 데 참고할 생각으로 약쟁이 하나를 빼돌렸다가 그자들에게 발각돼 제자 몇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구학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약쟁이 제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봉구안이 차갑게 물었다.“무고한 이들을 납치한 것도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느냐?”구학은 싸늘한 질문에 더듬지 않고 대답했다.“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골라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 잡아
구학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 앞에서 가면을 쓴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이내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철통같이 방비했다고 자부했건만, 결국은 이 지경이 되다니.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도 자신을 구하러 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뻔히 보이는 듯했다.황제의 손에 떨어지고 만 이상,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란 없었다.열무신이 손에 든 단도를 툭툭 튕기며 말했다.“모두 나가시오.”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앞둔 늑대처럼 구학을 응시했고, 바라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사람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구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좀 만나게 해주시오!”그는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폐하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열무신이 돌아서서 봉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찌할까요?”봉구안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자가 스스로 자백하겠다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소욱을 방 안으로 들였다.소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나가도, 그녀만큼은 반드시 남아야 했다.열무신은 나가기 전 봉구안에게 당부했다.“우린 밖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네.” 봉구안은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닫히자 구학은 소욱을 빤히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폐하이십니까?”소욱은 가면을 벗고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얼굴을 확인한 구학은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침을 삼켰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구학은 아까의 당당함을 온데간데없이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은침 하나를 쥐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운산파의 목적이 줄곧 황제를 암살하고 약쟁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구학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구학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구학은 관아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운산파 장문인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끌려가게 될 줄이야.그는 부장문에게 당부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문파의 모든 일을 자네가 맡아 처리하게. 부디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게.”부장문은 진중히 고개를 숙였다.“염려 마십시오, 장문!”관아 사람들은 구학뿐 아니라 엄 장로와 봉구안까지 함께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유골 또한 가져갔다.소욱이 운산파에 온 것은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실마리가 보이자 그는 관아 사람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봉구안은 떠나기 전 바닥에 누운 정원아의 시신을 깊게 바라보았다.정원아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그녀는 차선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차 부장문, 정 사저를 부디 잘 안장해 주십시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운산파 밖 공터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구학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죄인을 호송하는데 언제부터 이런 호사가 있었던가?관아 사람들이 각자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며 말했다.“당신들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난 인사들이니 특별히 비밀리에 심문을 받을 것이오.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차에 타시오! 가는 길에 소리치거나 소란을 피우면 망신당하는 건 당신들이오!”구학은 떳떳한 척하며 제일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치 이러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듯이 말이다.봉구안과 소욱은 한 마차에 타고 침묵 속에서 어두운 눈빛을 주고받았다.관아 사람들은 이들을 산 아래로 호송해 관아 쪽으로 향했다.한참 길을 가던 중 구학은 갑자기 몸이 몹시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두 명의 관아 사람을 바라보았다.“너희들…”관아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노인네, 눈치는 빠르구나.”말을 마친 관아 사람이 순식간에 구학의 목덜미를 강타했다.구학은 쇠고랑을 찬 상태라 저항이 어려웠고, 그 약간의 미향까지 더해지니 그대로 의식
엄 장로는 싸늘한 눈빛으로 높은 자리에 앉은 구학을 바라보았다.“장문, 제 허락 없이 동쪽 별채에 들어간 건 저의 잘못입니다.”“운산파의 규율대로 이 일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부친의 유골이 왜 동쪽 별채에 있는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오백도 품에 안긴 유골을 들며 당당히 턱을 들었다.“옳습니다! 남의 아버지 유골을 이런 꼴로 만든 이유부터 제대로 설명하란 말입니다!”구학은 답답한 얼굴로 엄 장로를 쳐다보았다.“이들이 의도적으로 나를 모함하는 게 보이지 않소?”“내가 뭘 설명하길 바라오? 난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소!”“조금 전 곳곳에서 불이 난 것도 필시 저들이 벌인 짓이오. 그 틈을 타 유골을 동쪽 별채로 옮긴 것이 분명하오! 저들에게 이용당한 것이오!”“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한 사형제이지 않소? 내 사람됨을 아직 모르시오? 내가 어떻게 사부님을 해칠 수 있단 말이오!”엄 장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저는 오늘 그저 진실을 원할 뿐입니다.”봉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모든 물증이 구 장문의 범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 장문께서 엄 장문의 자리를 탐내 스승을 살해했고, 혹은 스승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신을 훔쳐 별채에 숨겨두고 모욕한 것이겠죠.”“헛소리다! 감히 나를 욕먹이려고 하다니!” 구학은 봉구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며, 늙고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그는 다시 엄 장로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저 여인의 말을 믿고 나를 의심한단 말이오? 사부님은 나를 친아들처럼 여겨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셨고, 직접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장문직을 물려주셨소. 내가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범하겠소? 게다가 내가 무슨 이유로 사부님을 해친단 말이오?”주변 사람들도 동조했다.“맞소. 구 장문은 부족함이 없고, 사형 간의 정이 깊었는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소?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요.”“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전 장문님께서는 생전에 구학 장문을 가장 아끼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