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 연상이 허리띠를 가리키며 물었다.“마마,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그녀는 대체 뭘 하고 다녔기에 고결한 황후가 남자의 허리띠를 들고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감히 의문을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봉구안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허리띠를 탁자에 내려놓고 한참을 노려보았다.당연히 이걸 남겨둘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폭군을 위해 독을 치료해 줘야 하는데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큰일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황제의 흉금이 그렇게까지 옹졸하진 않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일단은 숨겨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번에 독을 치료하러 갈 때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연상이 무심코 물었다.“마마, 이 허리띠의 주인은 누구인가요?”“폐하야.”순간 연상의 두 눈이 당황함으로 동그랗게 떠졌다.“마마, 밤에 나가서 폐하의 허리띠를 훔쳐 온 건가요?”봉구안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여? 허리띠는 어쩌다 보니 잡아당긴 거야.”연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황제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다니! 대체 우리 마마는….’자진궁.소욱은 침대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다.머릿속에는 온통 그 자객의 모습만 떠올랐다.‘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니!’그는 괘씸하다고 생각하며 다음에는 절대 쉽게 도망치게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다음 날.조정에서 황제는 폭노했고 대신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힘겹게 해산 시기까지 버틴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평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니겠지?”“황후께서 후궁들에게 골고루 총애를 나눠주라고 폐하를 압박하였다던데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것 같군.”“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황귀비 한 사람만 총애하지 않았나.”황제의 서
영화궁봉구안이 한창 저녁을 들고 있을 때, 최 상궁이 보신탕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마마, 강빈 마마께서 보내신 보신탕입니다. 꼭 드셔보시라고 하더군요.”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식탁을 가리켰다.“저기 두거라.”최 상궁이 나간 뒤, 연상은 재빨리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조금 전 올라온 탕에서 적수관음이라는 독이 발견되었고 봉구안도 황궁에 들어온 뒤로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에 먹기 전에 독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확인 결과, 은침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봉구안은 숟가락으로 탕을 떠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적수관음의 독을 해독하는 약이 들었군.”“해독약이요? 마마, 설마 강빈이….”봉구안은 담담히 고기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뻔하지. 사람 시켜서 독을 넣은 사람이 강빈이야.”“예? 그런데 왜….”“애증이 분명하고 성격이 고약해서 그렇지 본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강빈의 성격은 그녀가 알던 옛 지인의 성격과 매우 흡사했다.“마마, 매수당한 자를 찾아야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급할 건 없어. 영화궁의 구멍이 어디 한둘이겠니.”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최근 궁 안에 자객을 잡는다고 외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그래.”봉구안은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에 잠겼다. 다음 번 해독 과정은 아마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상화전.강빈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병풍을 바라보았다.시종이 그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왔다.“마마, 해독약은 보신탕에 섞어 보내드렸으니 황후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강빈은 찻잔을 들며 쓴웃음을 지었다.“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일을 황후가 알고 있었다니.”돌아오기 전, 유사양은 그녀에게 전에 황후가 황제에게 간언드리며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고 감명을 받은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사람들은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바라고 자존심 다 버리고 황귀비 앞에서 아양을 떤다고만 생각했었지.”“사실
조검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황귀비에게 전했고 황귀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후궁들에게는 매달 녹봉이 나오고는 있지만 평소에 하인들에게 포상을 주고 안팎으로 인맥을 관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다른 비빈들의 뇌물을 잃는다면 크나큰 손해였다.“서 대인 말고 또 누가 영화궁에 뇌물을 보냈는지 알아오거라.”그날 밤, 황제는 서 귀인의 처소를 방문했다.서 귀인은 직접 황제의 반찬 시중을 들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폐하, 어서 드시지요.”소욱은 심드렁하게 수저를 들었다.오늘 밤이 자객과 약속한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하지만 지난번에 하마터면 그에게 잡힐 뻔했기에 그녀가 화청궁에 다시 방문할지는 미지수였다.“폐하….”서 귀인은 황제의 국그릇을 챙겨주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은 뭇 여자들과 식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꼈던 참이었고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국그릇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귀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올린 국에는 욕구를 자극하는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다른 비빈들은 폐하와의 한끼 식사에 만족할지 몰라도 그녀는 특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황제가 절대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위험하지만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것이다!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뿐이었다.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서 귀인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그녀는 젊은 황제의 준수한 얼굴을 취한 듯 올려다보았다.곧 약효가 발동할 시간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자신의 처소에 묵도록 만들 것이다.하지만 식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났다.“이만 자진궁으로 돌아가자.”소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 귀인은 조급해졌다.“폐하! 신첩이… 신첩이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노래만 듣고 가시지요.”소욱은 짜증스럽게 서 귀인을 노려보며 말
봉구안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마비산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사내는 거대한 체구로 그녀를 감싸고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고 뜨거워지고 있었다.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몸을 비추는 것처럼 덥고 불편하더니 점점 그녀의 몸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으나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출구가 눈앞에 있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그녀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에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눈처럼 하얀 의복을 차려입은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구안아, 정신 차려….”그 순간 봉구안은 눈을 부릅떴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은침으로 자신의 혈자리를 찔러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임시 방편일 뿐, 해독약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이대로 폭군의 해독약이 되는 것일까.그 순간 남자의 거친 순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봉구안은 살짝 그를 밀쳐 보았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점점 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사라졌던 은사가 또 나타나 있었다.천수독은 냉성 독이라 열성 약을 만나면 서로 약성이 상호작용하여 독성이 배로 강해진다.의지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피를 뿜으며 죽었을 것이다.이대로 가다가 폭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하지만 그녀 본인도 마비산에 당한 상태라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소욱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그의 복부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다른 부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얼음과 불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상충하며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소욱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최음제의 작용으로 간신히 억눌렀던 천수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해독을… 해다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린 목소리
깊은 밤, 밖에서 매복하고 있던 시위대는 한참을 기다려도 방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불안감이 엄습했다.하지만 황제가 들어오라는 말이 없으니 계속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 시진을 기다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그 자객이었다.그들이 상대를 포위하려던 순간, 내전 안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보내!”시위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시위대 대장이 내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밖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소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꺼져!”시위대 대장은 혼란스러웠다.‘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목소리를 들어보면 거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한참 후, 유사양이 명을 듣고 안으로 들었다.소욱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침상 앞에 서 있었다.“다 태우거라.”유사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최근에 폐하께서 비빈들의 처소로 걸음하시어 식사만 하고 나오시더니 설마….’금욕의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래도 냉궁에서 여인을 품은 건 놀랄만한 일이었다.소욱은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사양을 보자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도 궁금해하지도 말거라. 안 그러면 그 눈알 파 버리기 전에!”유사양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송구합니다, 폐하!”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은 옷을 벗어던지고 욕탕으로 들어갔다.그는 눈을 감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고약한 것!’비록 바지 위로 침술을 시전하였고 무례한 동작은 전혀 없었지만 그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은 사실이었다.만약 그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당장에서 목을 비틀어버렸을 것이다!영화궁.침소로 돌아온 봉구안은 옷을 벗고 오른쪽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아까는 대충 약을 발라 마무리했지만 더 섬세한 치료가 필요했다.뜨거운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온 연상은 그녀의 상
황귀비는 황제의 팔에 매달리며 유유히 말했다.“신첩도 들은 소문인데 서 대인이 얼마전에 황후께 선물을 보냈다네요.”소욱의 두 눈에 냉기가 스쳤다.후궁은 조정과 엮여서는 아니 되며 특히나 뇌물은 금기시 되어 있었다.황귀비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어쩌면 황후께서 궁중 법도를 잘 몰라서 실수한 모양인데 신첩은 걱정이 되네요. 서 귀인은 폐하를 시해하려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황후께서도 서 대인과 접촉이 있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두 분이 짜고 벌인 일이라고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이네요.”“후궁 중에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황후만 예외였잖아요. 오히려 폐하를 다른 비빈들 궁으로 밀어내기까지 하셨으니….”소욱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다른 건 몰라도 조중 대신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실만 놓고 봐도 황후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영화궁.최 상궁은 문밖에 도착한 황제의 대오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이 기다렸는데 드디어 황제가 영화궁을 방문한 것이다.그녀는 다급히 마중을 나갔지만 유사양이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내쳤다.‘설마 마마께서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소욱은 곧장 내전으로 들어갔다.어깨에 약을 바르고 있던 봉구안은 신속히 옷매무시를 정돈했다.“신첩, 폐하를….”“수색해!”소욱은 그녀를 무시하고 뒷짐을 지고 서서 차갑게 명령했다.시위대들이 영화궁 안팎을 뒤지기 시작했다.소욱은 자리에 앉았고 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잠시 후, 시위대가 수색한 물건을 가지고 왔다.그 중에는 서 대인이 선물한 귀중품도 들어 있었다.“폐하, 뇌물 받은 것들이 전부 여기 있습니다!”소욱은 한 상자나 되는 귀중품들을 바닥에 내던졌다.쾅!“황후, 네 죄를 알겠느냐.”담담한 말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연상은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봤다.이때, 시위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시위대가 들어와서 봉구안을 끌고 가려고 했다.그녀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발각되는 날에 엄벌을 받을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신첩이 홀로 모든 죄를 감당하는 것이 다른 비빈들이 함께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다만 신첩도 조건이 있습니다. 벌은 달게 받겠으나, 폐하께서 이 물건들을 포상으로 각 비빈들의 손에 전달하여 주십시오.”“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신첩은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소욱은 집요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파괴 욕구가 치밀었다.그녀는 찍어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처럼 단단해서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밀었다.그녀가 이럴수록 그는 그녀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자존심을 짓밟고 싶었다.“끌고 가라!”연상은 다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폐하, 소인이 마마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소욱은 한번 뱉은 명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그는 싸늘한 눈으로 연상을 노려보며 말했다.“예의 법도도 모르는 것. 끌고 가서 목을 치거라.”황후를 끌고 가라고 했을 때는 그나마 눈치를 보던 시위대였지만 시종인 연상을 끌고가는 것에는 주저함이 없었다.그들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의 손이 연상에게 뻗는 순간, 봉구안은 손을 뻗어 연상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소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자신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을 때는 전혀 동요함이 없던 황후가 한낱 노비를 벌한다고 하니 이처럼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연상의 앞을 단단히 막고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연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소욱이 차갑게 반박했다.“황후를 대신해서 벌을 받겠다고 했으니 목을 치라고 한 거다.”연상은 폭군이 이 정도로 잔인한 사람일 줄은 처음 알았다.하지만 자신을 지키려고 나선 황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동이 몰려왔다.정말 이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었다.봉구안은 싸늘한 눈으로
황후가 궁중 법규를 베끼게 되었다는 소문은 곧 후궁 전체에 퍼졌다.그리고 비빈들 모두가 그 내막을 알게 되었다.“거기엔 관원들의 선물도 있었지만 우리가 보낸 것도 있었잖아. 그런데 황후께서는 우리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시고 혼자 벌을 감당하려 하셨어.”“영화궁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까 황후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원래부터 그것들을 우리한테 돌려주려고 하셨나 봐. 장부까지 기입했다던데.”“우리를 대신해 혼자 감당하려 하셨다니….”비빈들은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후궁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진심이고 가장 희귀한 것이 진심이었다.물론 그렇지 않은 비빈도 있었다.녕비가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멍청하기는. 이유 없는 친절이 어디 있겠어? 황후께서 과연 이득을 안 챙겼을까? 지금 다들 그분께 감동하고 있는 게 그분이 바라는 상황이라고.”“서로 이용하고 이득을 공유하는 것뿐이지 진심은 무슨.”현비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찌 됐건 폐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신 것으로도 감사해야지. 황후께서 홀로 벌을 감당하겠다고 하셔서 이루어낸 결과 아니겠어? 그러니 궁중 법규 베끼는 일에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해.”녕비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난 못 해. 최근에 고모께서 불경을 베끼라고 하셨거든.”녕비는 평소에 현비와 가장 친했다. 그 이유는 현비만이 신분이나 지위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했던 현비마저 자신과 한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난 뒤, 강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현비 마마 말씀이 맞아요. 이번에 폐하께서 각 궁을 돌아보신 것도 황후마마께서 이루어내신 것이니 저희가 도와야죠.”현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비빈들도 같은 생각이었다.“신첩도 하겠습니다.”“저도요! 아버지께서 서신에서 말씀하셨는데 예전에 금은보화를 영소전에 보낸 것이 그렇게 후회된답니다. 2년 동안 그쪽
막사를 열고 들어온 황제의 키 큰 실루엣은 위엄과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봉구안은 소욱이 이렇게 빨리 선성에 도착한 것을 보고 다소 놀란 기색이었다.‘어떻게 이렇게 빨리 선성까지 온 거지?’소욱은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성큼성큼 다가와 아직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그녀를 단숨에 끌어안았다.“왜, 나를 못 알아보겠느냐?”봉구안은 정신을 차리고 팔을 들어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폐하께서 친히 군을 이끄셨다… 고생 많으셨습니다.”소욱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턱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너를 보니 수고로움도 잊게 되는구나. 오늘 밤, 저들을 공격하려는 것이냐?”그리움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 터. 지금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었다.봉구안은 표정을 단단히 가다듬고 대답했다.“예, 이제 때가 왔습니다.”원래 계획은 봉구안이 병력을 이끌고 선성의 적군을 고립시키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차단하여 적국이 원군을 파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후 소욱 황제와 스승이 ‘거미줄’ 기계 장치를 활용해 적의 원군을 소멸시키고, 이어 선성 내의 적군을 몰살하는 계획이었다.그렇게 되면 적군은 식량 부족과 내부 갈등, 공포로 인해 기세를 잃게 될 터였다.이런 방식으로 남제는 적은 병력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봉구안은 그날 밤의 공성 계획을 황제에게 설명하였다.소욱은 그녀의 여윈 얼굴을 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알겠다. 먼저 좀 쉬는 게 좋겠구나. 군사 업무는 내가 맡으마. 밤에 적을 치려면 너도 푹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소욱이 나타나자 봉구안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하지만 ‘쉰다’는 건 그녀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더구나 소욱과 비교하자면 그녀는 몇 달간 큰 고생도 아니었다.“지금은 기세를 몰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소욱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알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그저 한마디 덧붙였다.“밤에 공성을 시작할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봉구안은 적군을 밑으로 내리차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땅굴로 던졌다.옆에 있던 은이는 재빨리 반응해 구멍을 방패로 막았다.곧이어 땅굴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땅굴 안.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전진하던 중, 전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무슨 일이냐!"곧 누군가 소리쳤다."장수말벌이다! 장수말벌이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라!"‘장수말벌?’‘어디서 장수말벌이 나타났단 말인가!’황제는 생각할 틈도 없이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후퇴를 했다.비좁은 땅굴 속에서 후방 병사들은 탈출하려고 앞으로 밀치고, 앞쪽 병사들은 장수말벌을 피해 후방으로 되돌아오며 두 무리가 엉켜 서로 밀치고 싸웠다.결국 병사들은 장수말벌에 쏘여 온몸이 붓고 고통 속에 비명을 질렀다.다시 선성으로 돌아왔을 때, 병사들의 모습은 완전히 엉망이었다.북연 황제는 호위병들의 보호로 장수말벌의 공격은 피했지만,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대체 어디서 장수말벌이 나온 거냐!"한 병사가 대답했다."폐하, 남제군입니다! 그들이 땅굴을 발견하고 저희를 막았습니다!"단춘은 얼굴 곳곳에 벌에 쏘인 자국이 생겨 눈꺼풀까지 부어올랐다.그는 분노를 참으며 얼굴이 검게 변해갔다."남제 놈들이 어떻게 땅굴의 존재를 알았단 말인가! 분명 적의 간첩이 있는 거겠지!"북연 황제도 단춘의 생각에 동의하며 소리쳤다."그 밀정을 찾아내라! 가죽을 벗겨버리겠다!"하지만 밀정을 찾지 못한 사이, 연합군의 군량은 거의 바닥이 났고, 병사들은 생존을 위해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거기에 밤마다 음병의 괴롭힘까지 더해져, 병사들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선성 밖.맑은 하늘 아래, 남제군이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고기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선성 안 병사들까지도 그 냄새를 맡고 침을 삼켰다.주막 안.봉구안은 몇몇 장수들과 전략 회의를 하고 있었다.그때 은삼이 들어와 공손히 말했다."황후마마, 진나라가 항복을 요청했습니다."봉구안은 고개를 들
남강 왕궁.서왕은 상객으로 예우받았다.남강왕은 술잔을 들며 거창하게 말했다.“내가 짐작했지. 남제는 큰 책략을 가지고 있다.”“서왕, 남제가 요즘 기세가 대단하군. 한 달 남짓 만에 적국의 원군 십여만을 섬멸했다니, 정말 감탄스럽구나.”“이렇게 가면 곧 적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서왕은 자만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남제가 적군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전원이 한마음으로 뭉쳤기 때문입니다.”“아직 전세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남강왕과 아래에 앉은 신하가 눈빛을 주고받았다.이윽고, 그 신하가 일어서며 말했다.“서왕 전하, 귀국이 승전가를 이어가며 구름을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남강 외곽의 수화부 연합군도 물러갔으니, 이제 남강을 귀국의 주둔군이 지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서왕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이것이 바로 남강 군신들의 진짜 속셈은 남제 군대를 남강에서 철수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서왕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렇다면, 내일 제가 병력을 데리고 떠나겠습니다.”애초에 떠날 생각이었다.남강에 주둔했던 것은 남강을 지원하고, 수화부를 막으며, 남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수화부 연합군이 이미 물러났으니, 황상과 황후의 계획에 따라 그는 확실히 귀국해야 했고, 5만 군사를 이끌고 동방을 증원해 조유관을 지킬 때였다.남강왕은 무척 만족한 듯 술잔을 들어 함께 건배했다.“남제와 남강은 형제의 맹약을 맺은 사이. 서왕, 이 잔을 비우며 남제가 이 난관을 넘기고 대승을 거두길 기원하자구나!”서왕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왕좌에 앉은 남강왕은 남몰래 서왕을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남제는 심모원려한 나라였다. 전쟁도 허실을 섞어 대하기 어려웠다.작은 실수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에, 남강은 항상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수화부 연합군이 물러났으니, 남강에 남제 주둔군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남강 땅에 남제 군사 한 명도 남길 수 없었다!
3월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고 꽃들이 만개했다.각국의 원군이 남제 땅으로 들어오자 소욱이 이끄는 남제 군대가 그들을 포위 공격했다.'거미줄'은 아래에 있고 사람은 위에 있으니, 적들은 그 전술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각국 장병들은 이런 전투 방식을 본 적이 없었다. 기습적으로 나타나는 함정과 계략이 그들을 괴롭혔고, 남제군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했다.'병귀신속'이란 말 그대로, 소욱은 직접 전장에 나가 결단력 있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한편, 선성에서는 연합군이 본국의 추가 지원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들은 3개월째 고립되어 있었고, 식량은 점점 바닥났다. 더는 병사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이대로 가면 설령 선성의 보물을 찾아도 살아서 누릴 수 없을 터였다.그간 계속해서 성문 자물쇠를 열어보려 했지만, 50만이 넘는 병사들 중 그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단춘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끼와 대검을 들고 성문을 부수려 했지만, 철벽 같은 그 방어 장치는 칼도 창도 통하지 않았다.주국공부.북연 황제는 눈앞의 음식을 보고 젓가락을 세게 내려놨다.탁!그는 곧 질책하듯 물었다.“이게 전부냐? 고기는 어디 갔느냐!”호위병이 답했다.“폐하,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황제가 호위병들을 훑어보니 그들 모두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이대로 가다간 남제군이 공격해 오기도 전에 굶어 죽을 판이었다.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뒤엎었다.“쾅!”“오늘 밤, 야습해서 탈출한다!”이대로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성문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그들은 운제와 벽에 매단 밧줄을 이용해 성벽을 넘어가야 했다.그날 밤, 북연군은 북쪽 성문을 통해 탈출하려 했다.밤하늘 아래, 모두가 조심스레 움직이며 성 밖의 남제군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운제를 설치한 뒤, 병사들은 운제를 타고 성벽으로 올라갔다.그 후 밧줄을 붙잡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하지만, 내려가는 도중 갑자기 화광이 비춰왔다.밝은 불빛이 그들을 드러내며
대하국의 지원군은 초조함에 휩싸였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옥석비가 있다지만, 겨우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남제 황제가 그들의 10만 대군과 싸우려 하다니, 너무나 오만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그러나 곧 이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땅이 갑자기 들썩이며 사방에서 수천의 병사가 솟아나 그들을 포위해 버렸다.대하국 선봉 지휘관은 망연자실했고, 후방 병사들은 무기를 움켜쥔 채 외쳤다.“장군님, 매복입니다!”소욱의 눈은 서늘하게 얼어붙어, 차갑기만 했다.“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다.”대하국 병사들은 전투용 쇠뇌를 준비하며 진영을 구축했고, 선봉 장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 남제군을 모두 쓸어 버려라!”소욱의 얼굴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멀리서 준비를 마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올렸다.같은 시각, 북부에서는 북연의 10만 대군이 남제군의 기습을 받았다.맹건은 북방군을 이끌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그의 옆에는 옥석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북연 병사들은 맹건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북방군은 이미 궤멸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맹건은 흙 언덕 위에 서서 강렬한 눈빛과 함께 살기를 뿜어냈다.남제를 공격하는 여러 나라들이 한창 공세를 펼칠 때, 그는 이미 황제와 봉구안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두고 있었다.처음에는 북방을 포기하라는 명령이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곧 남제가 이미 ‘거미줄’로 불리는 비밀 통로를 구축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북방군은 패한 척하며 은밀히 거미줄 통로 속에서 숨었고, 그동안 백성들을 대피시키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제야말로 반격의 때가 온 것이다.맹건은 장검을 뽑아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선조의 옥석비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남제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갇혀 있던 늑대처럼 전의를 불태우던 북방군은 순식간에 몰려들어 포효했다.“돌격하라!”북연의 주
단춘의 손이 떨렸다.“뭐라고? 죽였다고?”보고하던 병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는 무릎을 꿇으며 성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음병들이 지나간 후, 병사 수십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장군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단춘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그 자신도 답을 몰랐다.평생 사람과의 전투만 치러왔던 그에게, 이번에는 귀신과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주국공부.시위병이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어왔다.“폐하! 음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북연의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내가 말했지! 귀신이면 귀신도 베란 말이다! 당장 음병들을 모두 없애라!”황제의 광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광기가 귀신을 향해 번졌다.시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폐하, 그들은 음병입니다. 신출귀몰하며 잡으려 하면 금세 사라집니다.”“야간 경계 중인 우리 병사들이 수십 명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도저히 손쓸 수가 없습니다!”북연 황제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설마, 이 선성에 진짜 귀신이 있다는 것인가?그는 고심하며 생각을 이어가다가,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만지더니, 문득 얼굴이 굳어졌다.“내 옥쇄가 어디 갔느냐!”시위병들은 놀라며 어리둥절해했다.황제의 옥쇄가 사라졌다니!제국의 상징이자 중요한 물건이 어째서 사라진 걸까?……다음 날, 선성 밖.남제군은 성 안에서 음병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몇몇 적군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야기는 너무도 황당해서 믿기 힘들었다.본진 안.장수들은 일제히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봉구안도 차분히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머리가 빠른 자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이 황후의 계략임을 간파했다.음병들은 분명 살아 있는 병사들이었다.남제군이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한 전례가 있는 만큼, 선성 내부에도 비밀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음병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은 만큼, 이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이
귀신이 출몰했다는 한 병사의 외침에, 선성을 경계하던 병사들은 순간 굳어버렸다.텅 비었던 선성 내부의 광장에 갑자기 수많은 장병들이 나타난 것이다.그들은 남제 갑옷을 입고, 천둥소리가 어우러진 밤하늘 아래 규칙적으로 걸어갔다.그들 몸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성벽 위, 누군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음병이다! 음병이 나타났다!”음병이 길을 지나간다는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사람들은 평소 죄를 짓지 않으면 한밤중에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을 흔히 하곤 했다.하지만 현실에서는 비겁한 자들뿐만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도 귀신을 무서워했다.세상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 음병의 등장에 병사들은 모두 몸을 떨었다.그래도 그나마 용기를 내는 병사들이 장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음병들의 창백한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던 그 순간, 단춘 장군은 바로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나왔다.그조차도 음병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제 장병들이 기괴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보자, 단춘은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병사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고개를 돌려라! 눈을 감아라! 그들을 보지 말아라!”이는 오래된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었다.음병이 길을 지나갈 때 이를 보면, 음병들이 자신도 같은 동료로 착각해 데려간다는 것이다.여기서 데려간다는 건,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뜻이었다.귀신과 신령은 가까이하기보다는 멀리해야 했다.단춘 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 역시 병사들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다.천둥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이는 번개의 울림인지 음병들의 말발굽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한편, 북연의 황제는 선성의 국공부에서 자다가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깼다.“밖에 무슨 일이냐!”경호병이 급히 보고했다.“폐하, 음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음병?”황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이건 틀림없이 남제의 계략이다. 무장을 갖춰라! 그 음병들이란 놈들을
성문이 잠긴 것은 자명했지만, 그 열쇠를 쥔 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명백한 것은 이 일이 연합군 내부의 소행일 리 없다는 것이다.즉, 그들 사이에 이미 남제의 첩자가 스며들었다는 뜻이었다.연합군은 차가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놀람이 가시자마자, 각 군대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수화부 연합군은 대하국 동부 연합군을 비난하며 말했다.“첩자는 분명 당신들 안에 숨어있을 것이오! 동방군과 교전한 건 당신들밖에 없지 않소!”“우리 수화부는 남부에서 바로 온 병사들이란 말이오!”단춘은 즉각 반박했다.“북연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남제와 싸웠소!”“그리고 남부에서 왔다고 해서 첩자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오히려 이미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소!”북연 황제는 이때 상대적으로 침착한 태도로 그들의 다툼을 제지했다.“그만하라! 너희의 소리가 귀를 찌르니 멈추거라!”“첩자가 어디에 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성문이 잠겼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적도 성문을 뚫지 못하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황제의 이 말은 언뜻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단춘 같은 경험 많은 장수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단춘은 그의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며 물었다.“폐하, 혹시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신 겁니까?”“저희가 성문을 나갈 수 없다는 건, 결국 여기서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이 말이 나오자, 군대는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포위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남제군이 서두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두고 연합군의 식량을 고갈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했다.……선성 밖.남제군은 자리를 잡고 주둔 중이었다.지휘소에서는 봉구안이 침착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한 장군이 허리를 굽혀 물었다.“황후마마, 병사들이 선성을 언제 공격하냐고 묻고 있습니다.”봉구안은 그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