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빈은 놀랍기도 하고 기쁜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나갔다.금빛 찬란한 상자들을 보자 그녀는 조금 전의 불쾌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옆에 있던 시종이 말했다.“마마, 폐하께서는 영화궁을 떠난 후에 영소전에 잠깐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마 황귀비께서 폐하께 뭐라고 말씀하시어 보상을 하사하신 것 같아요. 황귀비께 고마움을 표해야겠어요!”강빈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시는 건 황귀비마마뿐이야. 그분은 황후랑 달라!”황후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다시 분노가 솟구쳤다.‘황후, 복수할 거야!’한편, 자진궁.대전 안은 삭막하게 고요했다.그날 밤.사내는 짜증을 못참고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소욱은 옷섶을 풀어헤친 채, 침상에 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영화궁에서 나눴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며 잠이 오지 않았다.‘뭔가 이상해! 난 분명 황후의 시종들을 곤장을 쳐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어.’‘그런데 어쩌다가 황후한테 말렸지?’아마 그녀가 강빈의 아버지와 형제들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 시점인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사실 확인을 위해 서신의 필적까지 감정하면서 영화궁에 온 목적은 완전히 잊은 채, 황후에게 끌려다닌 것 같았다.그 뒤로 대화가 끝나기까지 그는 황후가 자진궁에 허락도 없이 비빈을 들여보낸 것에 대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황후가 만약 진심으로 강빈을 위로할 생각이었다면 일찌감치 그를 찾아와서 상의했어야 했다. 하지만 먼저 저지르고 궁지에 몰리자 강빈 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위기에서 빠져나갔다.아무리 생각해도 황후가 그의 실수를 유도한 게 분명했다.‘젠장!’소욱은 짜증스럽게 침대를 내렸다.소리를 들은 유사양이 안으로 들어와 촛불을 켰다.“폐하, 어디 나가시려고요?”소욱은 유사양을 보자 오늘 있었던 일들이 또 떠올라서 홧김에 발로 그의 배를 걷어찼다.유사양은 겁에 질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폐하, 소인이 뭘 잘못했는지 말씀만 해주시면 저절로 벌을 받겠습니다. 소인 때문에 폐하의 옥
황귀비는 제 귀를 의심했다.조검이 계속해서 말했다.“유 태감이 마마께 기다리지 말라고 전하셨으니 사실일 겁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강빈의 처소에서 저녁을 드시고 계신답니다.”황귀비는 갑자기 불쾌감이 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리 저녁을 같이 하더라도 어차피 황제는 강빈을 품어주지 않을 것이다.‘이런 일로 당황하지 말자. 난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귀비야!’황제가 강빈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뭇 비빈들은 충격에 빠졌다.가장 분개한 건 단연 녕비였다. 그녀는 홧김에 찻잔을 집어던졌다.“강빈이 입궁한지 얼마나 된다고! 왜 걔가 나보다 먼저 승은을 입는다는 것이냐!”그녀의 시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는 어쩌면 강빈의 부친인 강 장군이 전장에서 승리하였다고 하여 격려 차 가신 걸 수도 있어요.”녕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렸다.“고모 말이 정말 맞는 걸까? 황후가 뒤에서 강빈을 밀어주고 있다는 말 말이야.”시종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마마, 그건 저도 모르겠사옵니다.”“하지만 황후께서는 아직 출입금지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수로 강빈을 돕겠어요?”녕비는 이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황후가 정말 대단한 수완을 가진 지략가라면 자신이 아닌 강빈을 밀어준 것이 이상했다.그녀는 후궁에 황제의 총애를 바라지 않는 여자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가장 신이 난 사람은 당연히 비빈 강씨였다.입궁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황제가 그녀의 처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폐하, 이것 좀 드셔보십시요. 진주삼계탕인데 폐하가 오신다고 하여 신첩이 직접 만든 겁니다.”“폐하는 매일 정무가 바쁘시니 피로에 좋은 차도 준비했어요!”“폐하…”소욱은 참다못해 젓가락을 내려놓고 싸늘한 눈빛으로 강빈을 보며 말했다.“강빈,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밥만 먹는 법이야.”강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소곳이 사과했다.“폐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신첩은 단지 너무 기뻐서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그녀의 쉴새없는 말에
심야의 자진궁.예리한 화살이 문틀에 날아와서 박혔다.순식간에 금위군이 출동했다.“자객이다!”내전.소욱은 비단 잠옷으로 갈아입고 흑발을 그대로 풀어헤친 채 침상에 앉아 느긋하게 물었다.“밖이 왜 이리 소란스럽느냐?”유사양은 두 손으로 화살과 그 위에 붙은 쪽지를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내밀었다.“폐하, 자객이 이걸 남기고 갔습니다.”소욱은 손을 뻗어 쪽지를 확인했다.[내일 밤 해시에 화청궁에서 폐하의 독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소욱의 동공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곧이어 그 쪽지는 그의 손에서 산산이 가루가 되었다.“감히 다시 올 생각을 하다니.”상대는 이미 그의 신분을 알고 쪽지를 대범하게 자진궁에 보낸 것이 분명했다.유사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군을 바라보았다.‘누굴 말씀하시는 거지? 설마 그날 밤 그 자객?’다음 날 저녁, 화청궁.그림자 호위들은 냉궁 근처에 잠복하고 자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해시 일각이 되자 궁녀 복장을 한 여자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곧 달려들어 그녀를 포위했다.이상한 건 자객이 그들을 보고도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봉구안은 태연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무사들을 바라보았다.제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예상했던 결과였다.‘고작 인원수가 이게 다라니. 날 무시해?’봉구안은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냈다.호위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뒤, 신호를 보냈다.“다 같이 달려들어!”슉!곧이어 공기를 가르는 아찔한 소리와 함께 봉구안이 잡은 채찍이 뱀처럼 허공을 갈랐다.채찍은 정확히 한 호위의 복부를 가격했다.그녀는 상대에게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손목의 힘을 이용해서 자유자재로 채찍을 휘둘렀다.눈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주변에 십여 명의 호위가 쓰러졌다.실력이 황궁에서도 알아주는 그들이었지만 채찍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그녀의 보법은 안정적이고도 빨랐으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채찍이 춤을 추듯이 흐느적거리며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슉!채찍
봉구안은 사내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여봐라!”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호위무사들이 안으로 달려들어왔다.“자객을 잡아라!”호위무사들이 덮쳐오자 봉구안은 무릎을 뻗어 소욱의 아랫도리를 공격했다.소욱은 옆으로 몸을 피하면서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강자의 대결에서 방심하는 쪽이 지는 법이다.그가 잠깐 틈을 준 사이에 봉구안은 그의 속박에서 풀려나 바지에 동인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슉!호위무사들은 제왕의 난처한 순간을 보지 않으려 순식간에 고개를 돌렸다.그 짧은 순간에 소욱은 바지를 잡으려고 손을 풀었고 그로 인해 봉구안은 완전히 그의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봉구안은 날렵하게 몸을 남겨 속박에서 풀려난 뒤, 호위들이 멍하니 정신을 못 추는 틈을 타 창밖으로 뛰쳐나갔다.그녀의 동작은 물 흐르듯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도주에 실패했을 것이다.호위들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방 안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았다.소욱은 긴 팔을 뻗어 책상을 잡고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맸다.그리고 자객이 사라진 방향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저 여인을 보는 즉시 죽여라!”군왕의 허리띠를 풀은 발칙한 여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자신의 독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잊고 오로지 그녀를 죽이고 싶은 생각만 있었다.정신을 차린 호위들은 다급히 그녀를 쫓아갔다.하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봉구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화청궁.소욱은 의자에 앉아 자객이 남기고 간 채찍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호위들은 그의 앞에서 바짝 긴장한 자세로 용서를 빌었다.“폐하, 소인들이 무능하여 자객을 잡지 못하였습니다!”제왕의 분노는 가끔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하지만 주변에 풍기는 살기는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소욱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호위들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각자 곤장 50대씩 맞거라.”곤장 50대면 목숨이 붙어 있어도 반 곤죽이 돼 있을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 연상이 허리띠를 가리키며 물었다.“마마, 이건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그녀는 대체 뭘 하고 다녔기에 고결한 황후가 남자의 허리띠를 들고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감히 의문을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봉구안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그녀는 허리띠를 탁자에 내려놓고 한참을 노려보았다.당연히 이걸 남겨둘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폭군을 위해 독을 치료해 줘야 하는데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큰일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황제의 흉금이 그렇게까지 옹졸하진 않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일단은 숨겨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번에 독을 치료하러 갈 때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연상이 무심코 물었다.“마마, 이 허리띠의 주인은 누구인가요?”“폐하야.”순간 연상의 두 눈이 당황함으로 동그랗게 떠졌다.“마마, 밤에 나가서 폐하의 허리띠를 훔쳐 온 건가요?”봉구안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여? 허리띠는 어쩌다 보니 잡아당긴 거야.”연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황제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다니! 대체 우리 마마는….’자진궁.소욱은 침대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다.머릿속에는 온통 그 자객의 모습만 떠올랐다.‘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여자가 있을 수 있다니!’그는 괘씸하다고 생각하며 다음에는 절대 쉽게 도망치게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다음 날.조정에서 황제는 폭노했고 대신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힘겹게 해산 시기까지 버틴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 평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니겠지?”“황후께서 후궁들에게 골고루 총애를 나눠주라고 폐하를 압박하였다던데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것 같군.”“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황귀비 한 사람만 총애하지 않았나.”황제의 서
영화궁봉구안이 한창 저녁을 들고 있을 때, 최 상궁이 보신탕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마마, 강빈 마마께서 보내신 보신탕입니다. 꼭 드셔보시라고 하더군요.”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식탁을 가리켰다.“저기 두거라.”최 상궁이 나간 뒤, 연상은 재빨리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조금 전 올라온 탕에서 적수관음이라는 독이 발견되었고 봉구안도 황궁에 들어온 뒤로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에 먹기 전에 독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확인 결과, 은침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봉구안은 숟가락으로 탕을 떠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적수관음의 독을 해독하는 약이 들었군.”“해독약이요? 마마, 설마 강빈이….”봉구안은 담담히 고기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뻔하지. 사람 시켜서 독을 넣은 사람이 강빈이야.”“예? 그런데 왜….”“애증이 분명하고 성격이 고약해서 그렇지 본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강빈의 성격은 그녀가 알던 옛 지인의 성격과 매우 흡사했다.“마마, 매수당한 자를 찾아야 합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급할 건 없어. 영화궁의 구멍이 어디 한둘이겠니.”연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마마, 최근 궁 안에 자객을 잡는다고 외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요.”“그래.”봉구안은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에 잠겼다. 다음 번 해독 과정은 아마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상화전.강빈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병풍을 바라보았다.시종이 그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왔다.“마마, 해독약은 보신탕에 섞어 보내드렸으니 황후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강빈은 찻잔을 들며 쓴웃음을 지었다.“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일을 황후가 알고 있었다니.”돌아오기 전, 유사양은 그녀에게 전에 황후가 황제에게 간언드리며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고 감명을 받은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사람들은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바라고 자존심 다 버리고 황귀비 앞에서 아양을 떤다고만 생각했었지.”“사실
조검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황귀비에게 전했고 황귀비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후궁들에게는 매달 녹봉이 나오고는 있지만 평소에 하인들에게 포상을 주고 안팎으로 인맥을 관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다른 비빈들의 뇌물을 잃는다면 크나큰 손해였다.“서 대인 말고 또 누가 영화궁에 뇌물을 보냈는지 알아오거라.”그날 밤, 황제는 서 귀인의 처소를 방문했다.서 귀인은 직접 황제의 반찬 시중을 들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폐하, 어서 드시지요.”소욱은 심드렁하게 수저를 들었다.오늘 밤이 자객과 약속한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하지만 지난번에 하마터면 그에게 잡힐 뻔했기에 그녀가 화청궁에 다시 방문할지는 미지수였다.“폐하….”서 귀인은 황제의 국그릇을 챙겨주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은 뭇 여자들과 식사하는 것에 싫증을 느꼈던 참이었고 오늘은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국그릇을 들고 한숨에 들이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귀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올린 국에는 욕구를 자극하는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다른 비빈들은 폐하와의 한끼 식사에 만족할지 몰라도 그녀는 특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황제가 절대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위험하지만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것이다!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뿐이었다.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서 귀인의 긴장감은 고조되었다.그녀는 젊은 황제의 준수한 얼굴을 취한 듯 올려다보았다.곧 약효가 발동할 시간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자신의 처소에 묵도록 만들 것이다.하지만 식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났다.“이만 자진궁으로 돌아가자.”소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 귀인은 조급해졌다.“폐하! 신첩이… 신첩이 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노래만 듣고 가시지요.”소욱은 짜증스럽게 서 귀인을 노려보며 말
봉구안은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마비산 때문에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사내는 거대한 체구로 그녀를 감싸고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고 뜨거워지고 있었다.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몸을 비추는 것처럼 덥고 불편하더니 점점 그녀의 몸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봉구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으나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출구가 눈앞에 있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그녀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에 머릿속에 갑자기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눈처럼 하얀 의복을 차려입은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구안아, 정신 차려….”그 순간 봉구안은 눈을 부릅떴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은침으로 자신의 혈자리를 찔러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임시 방편일 뿐, 해독약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이대로 폭군의 해독약이 되는 것일까.그 순간 남자의 거친 순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봉구안은 살짝 그를 밀쳐 보았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그는 점점 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목덜미를 쳐다보았다.사라졌던 은사가 또 나타나 있었다.천수독은 냉성 독이라 열성 약을 만나면 서로 약성이 상호작용하여 독성이 배로 강해진다.의지가 부족한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피를 뿜으며 죽었을 것이다.이대로 가다가 폭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하지만 그녀 본인도 마비산에 당한 상태라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소욱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그의 복부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다른 부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얼음과 불의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상충하며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소욱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최음제의 작용으로 간신히 억눌렀던 천수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해독을… 해다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린 목소리
영비는 서왕에게 목을 졸렸지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비록 전하께서... 저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도, 저는 여전히 전하를 용서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폐하께 전하께서 저를 궁에서 데리고 나갔고, 이렇게 오랜 세월 저를 가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전하는 저를 정말로 해칠 수 없으십니다.”결국 서왕은 손을 풀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용란,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야.”영비는 여전히 여린 모습을 보였다.“그 말은 제가 전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저희는 모두 폐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어떤 수단을 쓰느냐는 그저 저희의 선택일 뿐입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서왕의 앞에 다가가 그의 허리띠에서 옥패를 살짝 빼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기억하십니까? 저희 셋은 서로를 지키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서왕은 갑자기 기분 나쁜 한기를 느끼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모용란, 너는 정말 구제불능이야.”그는 단호히 말을 마친 후, 거침없이 돌담을 빠져나갔다.영비는 어두운 바위 속에 혼자 남아, 서왕의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다.“나는 널 용서했어, 정말로.”…자녕궁.영비가 궁에 돌아온 이후, 태후는 한 번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영비가 궁으로 돌아온 그날, 태후에게 와서는 여러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그중에는 과거의 행동을 용서할 것이며, 황제가 태후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태후는 영비의 말 속에서, 언젠가 복수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태후마마, 약을 드셔야 하옵니다. 어의께서 말씀하시길, 약을 드시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으실 거라 하였사옵니다.”태후는 깊은 갈색 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약을 밀쳐내며 말했다.“아
검은 옷을 입은 자는 감옥에 갇혀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혀를 깨물어 자결하거나 독을 먹어 목숨을 끊을까 염려해, 그의 입에는 철제 입막이가 씌워져 있었다.봉구안이 감옥에 들어서자, 검은 옷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웃고 있는 듯 보였다.입막이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가면이 벗겨진 그의 얼굴이 봉구안의 눈에 들어왔다.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두 눈은 끝이 위로 치켜올라가 날카롭고 사납게 보였다.봉구안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그려보았던 원수의 얼굴을 마침내 마주하게 되었다.그녀는 옥졸에게 명령했다.“그 입막이를 벗겨라.”쇠사슬이 풀리자, 검은 옷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장군, 요즘은 평안한가?”그는 마치 죄인이 아닌 듯,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가벼운 어조였다.감옥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봉구안은 서두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단회욱은 대체 어떻게 죽였지?”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검은 옷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이미 알고 있지 않소? 그는 그대에게 날아든 천수지독을 대신 막아내고, 독이 퍼져 죽었소.”봉구안의 눈빛은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왜 그가 내 목숨으로 5년을 바꾸었다고 말한 거지?”검은 옷은 일부러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눈을 위로 굴렸다.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그런 일이 있었나? 대체 어디서 들은 이야기요?”봉구안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그의 얼굴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외쳤다.“당장 말하거라!”검은 옷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태연히 답했다.“북대영의 전신의 손에 죽는다면, 영광일 뿐이오.”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봉구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네가 죽음을 원한다면, 내가 네 바람을 절대 들어줄 리 없다.”검은 옷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가 천옥이란 걸 알고 있소. 심문이든 고문이든, 하고
궁중에는 영비와 비슷한 모습의 여인들이 많았다.이 순간, 소욱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봉구안은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다른 비빈들에게는 늘 냉담했던 그의 눈에, 눈앞의 여인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영비…”소욱의 미간에는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그 순간, 그 여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폐하, 소첩입니다. 소첩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소첩이 돌아왔나이다!”옆에 있던 녕비는 이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반면, 현비는 품위 있게 말을 보탰다.“폐하께서 대승을 거두셨고, 영비마마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소욱은 어색한 듯 품에 안긴 여인을 살짝 밀쳐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담담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영비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황후를 바라보며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한 듯했다.“황후마마.”봉구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꾸했다.“예를 생략하거라.”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본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로 보아 영비의 죽음에는 분명 감춰진 진실이 있는 듯했다.하지만, 봉구안에게는 이 모든 것이 무관한 일이었다.영비보다 그녀가 더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바로 그 검은 옷을 입은 독인이었다.그녀는 반드시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영화궁.봉구안이 돌아오자마자, 최 상궁은 급히 그녀를 따라와 영비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마마, 오늘 영비마마를 보셨사옵니까?”“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며칠 전부터 영비마마의 소식으로 궁중이 온통 뒤집혔다 하옵니다.”“듣자 하니, 그녀께서 과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태황태후마마의 비밀스러운 보살핌을 받아왔고, 이제야 완쾌되어 돌아오셨다 하옵니다….”봉구안은 마음에 짙은 불쾌함이 스쳤다.“물러가라.”연상은 그녀의 심중을 눈치챘으나, 감히 더 묻
쾅!봉구안의 주먹이 날아들자, 소욱의 턱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는 다음 날 밤, 또다시 장막을 버려두고 봉구안의 곁으로 몰래 들어왔다.이번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그녀에게 손을 대거나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그 덕에 봉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묵인하였다.하지만, 이내 그의 본성이 또 드러나고 말았다.며칠 뒤, 그들이 묵은 역참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밖에서는 두 사람이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으나, 문이 닫히자 봉구안은 바로 바닥에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그러나 소욱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너는 침상에서 자거라.”봉구안은 단호히 거절했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당연히 침상에서 주무셔야 합니다.”그러자 소욱은 느긋하게 반박하였다.“황제와 황후라면 본디 같은 침상을 쓰는 것이 맞지 않느냐. 이후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되겠구나…”이 말에 봉구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그러하오면, 이 바닥은 폐하께 양보하겠나이다.”소욱은 잠시 벽 쪽을 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그는 조용히 누웠으나, 몸을 옆으로 돌려 침상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침상에 올라가자, 곧바로 비단 장막이 내려졌다.밤이 깊었고, 봉구안은 편히 잠들었다.그러나 한밤중, 그녀는 누군가 곁에 있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그곳에 누워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밀쳤으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닥에 쥐가 있어, 침상에서 자는 것이 안전하겠다.”봉구안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쥐라니요? 이는 분명 폐하께서 지어낸 거짓말이옵니다!”소욱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정말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쥐가 있더라도, 폐하께서 그것을 무서워하실 리가 없사옵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섭
황성.진왕이 군량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증거가 명백했으므로, 서왕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진왕은 억울함을 외치며, 서왕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 주장했다.이 일은 태황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하지만 태황태후가 나서도 서왕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한편, 황제가 이끄는 대군은 반송길에 접어들었고, 사수성을 나선 후 여정이 험해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군은 야영을 선택했다.봉구안은 말했다.“소첩은 마차 안에서 지내겠사옵니다.”같은 자리에서 소욱과 함께 지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요며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니 매우 불편했다.소욱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치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들 부부의 냉랭한 분위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요 며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자주 다투시는 듯하네.”“그러게. 얼마 전까지는 화목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그중 한 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들은 게 있네.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서 말해 보게.”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어제 말에 물을 먹이러 갔는데, 마차 안에서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사과하는 소리를 들었지.”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거짓말 말게나.”병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라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아직도 화났느냐? 어서 이리 와서 네 작은 손을…’”“닥치게!” 다른 병사가 발로 찼다.농담이라며 대꾸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그 병사는 엉덩이를 만지며 헤헤 웃었다.사실 그들 간의 대화는 그 병사가 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황제가 황후에게 사과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다.…마차 안.봉구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한밤중, 누군가 마차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긴장하며 몸을
남대영.대군들은 황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손덕방은 속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폐하께서 군영에서 무사히 돌아가시니,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그는 격하게 경례하며 소리쳤다.“장수 손덕방, 폐하와 황후마마의 출발을 배웅하겠습니다!”소욱은 올 때는 말을 탔으나,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기로 했다.마차 안에서 그는 손수 귤 하나를 까서 반으로 나눠 봉구안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이리 좀 먹어보거라.”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얼굴을 돌리며 답했다.“먹고싶지 않사옵니다.”소욱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짐도 사실 귤 따위는 좋아하지 않지. 시큼한 것은 줄곧 입맛에 맞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황후와 짐의 입맛이 참으로…”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봉구안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귤을 집어들더니 한 입에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맞서려 한다는 걸 알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흥미를 느낀 듯, 미소를 지었다.최소한 어젯밤처럼 냉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마차 밖에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급히 전해드릴 밀서가 있사옵니다!”소욱은 손을 내밀어 밀서를 받아들었다.그러면서 봉구안을 힐끗 바라보며 밀서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네가 먼저 보겠느냐?”봉구안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런 농은 그만두십시오. 어찌 중요한 정무를 두고 저와 농을 하는 것입니까?”소욱은 밀서를 열어 훑어본 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그는 곧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 짐이 네게 약조했던 큰 선물, 이미 준비해 두었다.”봉구안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그런 건 필요 없사옵니다.”소욱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끌더니, 허리를 가로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짐의 사람들이 독을 쓴 그 검은 옷을 붙잡았는데, 이 선물도 필요 없다 하겠느냐?”봉구안은 순간 놀라며 되물었다.“정말이십니까?”“짐이 거짓을 말하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