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은은 조용히 뒷좌석 가림막을 올렸다.유월영은 그와 가림막 사이에 갇힌 자세가 되었다.공간이 비좁아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유월영은 울먹이며 그를 밀어냈다.“왜 이래요! 놔요!”연재준은 한 손으로 그녀를 받치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잡은 채, 눈을 직시했다.“신연우를 위해서는 되지도 않은 핑계까지 갖다 붙이며 널 속인 것조차 용서하고, 나한테는 온갖 있지도 않은 죄명을 같아 붙이다니. 유월영 너 참 대단하다.”남자의 얼음장 같은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도망가지 못하게 그녀를 옥죄었다.“소은혜가 나 때문에 너를 수림에 갖다 버렸다고 했지? 하지만 우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왜 그걸 해명을 하고 있지?유월영은 웃음이 나왔다.“둘이 어떤 관계인지 나는 관심 없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유월영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억세게 그녀를 압박했다.“넌 항상 소문만 듣고 너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나를 천하에 악인으로 만들었어. 내가 그랬지. 네가 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선박에서 내가 언제 너를 내주는 조건으로 프로젝트를 손에 넣겠다고 말한 적 있어?”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유월영도 화가 치밀었다.“그런 얘기 하셨잖아요!”“내가 양보한다고 한 건 가면 무도회 파트너를 이야기한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말해야 하지?”“결국 난 양보도 하지 않았잖아. 처음부터 너한테 왼쪽으로 가라고 했지? 그런데 너는 어땠지?”“그건!”유월영은 이를 갈고 울먹이며 말했다.“증거도 없고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 거짓말을 해도 아는 사람이 없겠죠. 물론 핑계를 댈 거면 그냥 대세요. 어차피 지금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거나 빨리 풀어줘요.”연재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신경 안 써도 내가 신경 쓰여. 네가 뭔데 날 원망해?”유월영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결국 그녀는 속에서 참았던 말을 입밖으로 뱉고 말았다.“3년 동안 저는 대
유월영은 본능적으로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격했다.하지만 이미 한번 당했던 연재준이 두 번 기회를 줄 리 없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벽에 꽉 붙이고 다리를 들자 그래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유월영도 그가 많이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물론 그는 화를 안 내고 있을 때가 더 드물었다.그는 원망을 쏟아내듯이 거칠게 그녀의 숨결을 탐했다.‘왜 나를 이토록 미워하지?’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문이 열리자 연재준은 재빨리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너무 물 흐르듯이 진행되어서 유월영은 미처 반항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꼭두각시처럼 끌려 다니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났다.“왜 이래요? 이거 놓으라고요!”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연재준은 더 이상 정욕을 숨기지 않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절대 안 놔줘.”그 말에 유월영은 소름이 돋았다.“하! 처음부터 이러려고 모든 걸 꾸민 거였죠?”연재준이 웃으며 답했다.“응. 안고 싶은지 한참 됐거든.”유월영은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소리쳤다.“내가 싫다고 하면요? 또 사진 따위로 날 협박할 건가요!”방 안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어차피 넌 나한테 호응할 수밖에 없어.”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연재준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가지고 싶은 건 수단 방법 다 동원해서 가지는 거.유월영은 감정에 벅차 씩씩거리며 손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연재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결국 반항하다 지친 그녀가 먼저 힘을 풀었다. 그리고 자포자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진 지워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사진 얘기 내 앞에서 꺼내지 말아요.”이가 갈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싸늘하게 울려퍼졌다.연재준은 그녀를 안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상처에는 방수 밴드를 붙였기에 샤워가 가능
하늘에서 마지막 한줄기 빛마저 사라지고 실내에는 무거운 어둠이 뒤덮였다.오후 다섯 시가 좀 지났는데 벌써 하늘은 시커멓게 어두워졌다.유월영은 피로를 느끼며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았다.눈가는 뻘겋게 부었고 얼굴에는 마르지 않는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펴주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가 자신을 만지는데도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연재준은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만족감이었다. 수억에 달하는 계약서에 사인했을 때도 가질 수 없었던 만족감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유월영이 퇴사한 후로 성격이 완전히 변하고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면서 없던 정복 욕구가 생긴 것 같았다.자신의 앞에서 무너지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담배를 다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깜빡거렸다.그는 벨이 울리기 전에 다가가서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렸다.발신자는 신연우였다.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신연우의 온화한 목소리가 전해졌다.“월영 씨, 병실에 갔는데 자리에 없어서요. 혹시 주변에 산책 나갔어요?”연재준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아니. 유월영 지금 자고 있어.”잠시 긴 침묵이 흘렀고 연재준의 입꼬리가 괴이하게 올라갔다.수화기 너머로 신연우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재준, 유월영 씨 너 아니라도 힘든 사람이야. 대체 왜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거지? 왜 그렇게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거야? 너 주변에 여자들 많잖아.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을 가만히 놔두면 안 돼?”연재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그래서 걔가 원하는 조용한 삶을 너는 줄 수 있어?”“너만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안정적인 삶을 찾아갈 거야!”“그랬군. 그래서 유월영 모르게 주영문을 처리해 버린 거군.”연재준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싸늘했다.“의도는 좋지만 넌 유월영에 대해서 몰라. 개는 잔혹한 진실보다 거품
유월영은 이가 갈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렀다.연재준은 차라리 이런 모습의 그녀가 예전의 싸늘하고 차분한 모습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머금었다.“애기야, 가만히 있어.”그의 입술에서 알싸한 담배 향기가 풍기면서 유월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하지만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속지 말자고 이를 갈면서 차갑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 역겨워!”연재준은 이 상황에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계속 울려대며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유월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연우라면 연재준과 같이 있는 것을 알고 한번 안 받으면 더 이상 통화 시도를 할 리가 없었다.그가 전화를 걸어댈수록 연재준을 자극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그런 판단을 했을 리 없었다.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바둥거렸다.“연재준! 비켜! 누구 전화인지 확인은 해야 할 것 아니야?”그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노려보았다.멀리서도 발신자가 똑똑히 보였다.“이승연 변호사.”그 말을 들은 그녀는 급하게 그를 밀쳐냈다.이번에 연재준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낯익은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이혁재 아내라는 것이 떠올랐다.이승연이 유월영 아버지 사건을 맡았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유월영은 재빨리 몸에 가운을 걸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통화버튼을 눌렀다.“이 변호사님….”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그녀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이승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 씨, 아버님이 사고를 당하셨어요.”유월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머리가 어지러웠다.이승연이 간단한 상황을 설명했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지금 영안에 있어요.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향했다.옆에 있던 연재준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어디 가?”유월영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연재준은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말 안 하면 못 나가.”유월영은 창
유월영은 부랴부랴 옷을 입고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그녀는 어두운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항공편을 검색했다.가장 빠른 탑승이라고 해도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공항까지 가는 것도 한 시간이 걸렸다.유월영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항공편을 예약한 뒤 콜택시를 불렀다.하필이면 퇴근 시간이라 콜택시도 안 잡히고 길에 오가는 택시도 없었다.그녀는 낯선 도시의 길가에 홀로 서서 반짝이는 등불들을 바라보며 절망감을 느꼈다.그러던 순간 외제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추었다.“타.”연재준이었다.찬밥 가릴 신세가 아니었기에 유월영은 재빨리 차에 올랐다.차는 곧장 공항으로 질주했다.연재준은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유월영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아무 말도 하지 마!”운전 중이던 하정은은 저도 모르게 백미러로 뒷좌석 눈치를 살폈다.연재준은 그녀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그가 옆에 다가와서 앉을 때도 유월영은 그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세 시간 뒤, 비행기가 신주 공항에 착륙했다. 유월영은 출구를 나오자 마자 택시를 잡으러 길가로 향했다.연재준이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내 차 타고 가. 이 시간에 택시 잡기 힘든 거 알잖아.”유월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차에 오르자 하정은이 물었다.“어디로 갈까요?”“승형 로펌이요.”잠시 후, 그들을 태운 차가 로펌에 도착했다. 유월영은 차가 멈추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갔다.연재준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유월영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좀 알아봐.”“네, 대표님.”다 퇴근한 로펌 사무실에 이승연만 남아서 유월영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월영을 보고는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일단 진정하고 이거부터 마셔요.”유월영은 우유컵을 두 손으로 붙잡고 온기를 느끼며 물었다.“왜 이렇게 된 거예요?”조금 전 통화에서 이승연은
유월영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집이 여기서 안 멀어요. 택시 타면 30분 정도면 도착해요.”“최근에 계속 출장 가 있었다면서요? 서희 씨도 고향에 돌아갔으니 장기간 비어 있었던 집인데 불편해서 안 돼요.”이승연이 말했다.“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같이 병원에 가요.”유월영은 부부가 사는 집에 가기가 난감했다.이승연도 그녀의 우려를 눈치챈 건지 솔직하게 말했다.“최근에 남편이랑 싸워서 집에 안 가고 내 명의로 된 오피스텔에 혼자 있어요.”그렇다면 유월영은 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가치 로펌을 떠나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유월영은 샤워를 마친 뒤에 이승연의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제대로 잠이 들 수 없었다.결국 그녀는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아침이 되자 접견 신청을 마친 이승연이 그녀의 방으로 와서 말했다.“이제 출발해도 돼요.”유월영은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다.수감자 신분이라 유현석은 일인 실에 수갑에 묶인 채로 누워 있었다.유월영은 안색이 퍼렇게 질리고 흰 머리가 부쩍 많아진 아버지를 보고 눈물이 나왔다.“월영아!”그녀를 본 유현석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유월영은 다급히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움직이지 마.”옆에 있던 교도관이 경고를 주었다.“마음 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유현석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교도관님!”유월영은 울먹이며 아버지를 부축해서 침대에 앉혔다.유현석은 미안해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월영아, 네 엄마는 이 일 모르지?”“엄마는 아직 몰라. 알려서도 안 되고.”의자에 앉은 유월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어쩌다가 수감자랑 싸움이 난 야? 이러다 추가건으로 형기가 연장될 수도 있어. 며칠만 참으면 집에 올 수 있었는데 왜 그랬어?”“나… 난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어.”유현석이 다급히 말했다.“성주 그
유월영은 성주라는 인물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교도관이 그녀를 재촉했다.“시간 다 됐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변호사랑 상애해 볼게. 아빠는 아무 걱정 말고 치료나 잘 받아.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아빠 무사히 나오는 날 가족끼리 모여 맛있는 거 먹자.”유현석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너희만 괜찮으면 됐어.”밖으로 나오자 이승연이 기다리고 있었다.“조금 전에 교도관들한테 상황을 알아봤는데 다른 수감자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성주라는 수감자가 일부러 아버님을 도발한 게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쌍방 폭행이라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얼마나요?”“7일 정도요.”결국 유현석의 형기는 며칠 더 연장된다는 얘기였다.하지만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였다. 그녀가 접견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관들이 와서 들것에 유현석을 싣고 구치소로 압송했다.유월영은 경찰차에 실려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승연은 그녀를 데리고 벤치로 갔다. 그리고 슈퍼에 가서 간단한 먹을 것도 사다 챙겨주었다.그 시각 연재준은 회사로 가는 차 안에 있었다.하정은이 조수석에서 업무 보고를 했다.“영안 프로젝트의 초반 준비작업은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서 대표님과 심 대표님이 맡아서 할 거예요. 며칠만 지나면 아마 완공하고 돌아올 것 같습니다.”연재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하정은은 그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다는 느낌에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유 비서님 아버지는 수감자랑 싸우다가 둘 다 크게 다치면서 어제 병원으로 이송되었대요.”“구치소 안에서 싸워?”연재준이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사람이니까 칼 들고 의료진을 협박했겠지.”하정은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연재준은 그녀가 그런 가족들에게 왜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3년 전에 그들과 연을 끊고 그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했던 그녀였다.그는 인상을
전화를 받은 이승연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곧 갈게.”유월영은 바쁜 사람을 잡고 싶지 않아서 웃으며 말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런데 지금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네. 병원에 보조 배터리 대여하는 거 있을 것 같은데 언니가 대여 좀 해줘.”이승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안내데스크로 가면 있을 거야. 지금 가자.”병원 로비로 향하며 유월영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엄마한테는 아빠 형기가 연기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돼. 싸웠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되고… 지금 입원해 있거든.”“그런 건 사실을 말하면 안 되지.”유월영은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히 말했다.“그거 알면 엄마 쓰러질 거야.”그 시각, 신주 병원.의사가 회진을 돌기 전이었다. 간병인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이영화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유신영은 아침을 사러 나가고 자리를 비웠다.이영화는 오늘 따라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간병인에게 말했다.“수고가 많아요.”“수고는요. 제 할 일인걸요.”간병인도 흔쾌히 이영화와 담소를 나누었다.“딸이 출장 중이라던데 올 때가 되지 않았나요.”유월영 얘기가 나오자 이영화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렇죠. 며칠 전에 전화했을 때는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돌아올 거랬어요.”“남편도 곧 나온다면서요.”그래서 그런지 이영화는 오늘 따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기억력도 좋으시네요. 내일 나오는 날이에요.”그런데 눈알을 굴리던 간병인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내일은 못 나올걸요?”이영화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죠?”간병인은 환자복을 가져오며 주절거렸다.“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어제 남편분이 구치소에서 같은 방 수감자랑 피 터지게 싸우다가 둘이 같이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들었어요.”이영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리더니 벌떡 일어났다.“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요?”간병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감 중에 폭행 사건을 일으키면 엄벌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