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집이 여기서 안 멀어요. 택시 타면 30분 정도면 도착해요.”“최근에 계속 출장 가 있었다면서요? 서희 씨도 고향에 돌아갔으니 장기간 비어 있었던 집인데 불편해서 안 돼요.”이승연이 말했다.“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같이 병원에 가요.”유월영은 부부가 사는 집에 가기가 난감했다.이승연도 그녀의 우려를 눈치챈 건지 솔직하게 말했다.“최근에 남편이랑 싸워서 집에 안 가고 내 명의로 된 오피스텔에 혼자 있어요.”그렇다면 유월영은 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가치 로펌을 떠나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유월영은 샤워를 마친 뒤에 이승연의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제대로 잠이 들 수 없었다.결국 그녀는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아침이 되자 접견 신청을 마친 이승연이 그녀의 방으로 와서 말했다.“이제 출발해도 돼요.”유월영은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다.수감자 신분이라 유현석은 일인 실에 수갑에 묶인 채로 누워 있었다.유월영은 안색이 퍼렇게 질리고 흰 머리가 부쩍 많아진 아버지를 보고 눈물이 나왔다.“월영아!”그녀를 본 유현석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유월영은 다급히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움직이지 마.”옆에 있던 교도관이 경고를 주었다.“마음 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유현석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교도관님!”유월영은 울먹이며 아버지를 부축해서 침대에 앉혔다.유현석은 미안해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월영아, 네 엄마는 이 일 모르지?”“엄마는 아직 몰라. 알려서도 안 되고.”의자에 앉은 유월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어쩌다가 수감자랑 싸움이 난 야? 이러다 추가건으로 형기가 연장될 수도 있어. 며칠만 참으면 집에 올 수 있었는데 왜 그랬어?”“나… 난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어.”유현석이 다급히 말했다.“성주 그
유월영은 성주라는 인물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교도관이 그녀를 재촉했다.“시간 다 됐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변호사랑 상애해 볼게. 아빠는 아무 걱정 말고 치료나 잘 받아.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아빠 무사히 나오는 날 가족끼리 모여 맛있는 거 먹자.”유현석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너희만 괜찮으면 됐어.”밖으로 나오자 이승연이 기다리고 있었다.“조금 전에 교도관들한테 상황을 알아봤는데 다른 수감자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성주라는 수감자가 일부러 아버님을 도발한 게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쌍방 폭행이라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얼마나요?”“7일 정도요.”결국 유현석의 형기는 며칠 더 연장된다는 얘기였다.하지만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였다. 그녀가 접견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관들이 와서 들것에 유현석을 싣고 구치소로 압송했다.유월영은 경찰차에 실려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승연은 그녀를 데리고 벤치로 갔다. 그리고 슈퍼에 가서 간단한 먹을 것도 사다 챙겨주었다.그 시각 연재준은 회사로 가는 차 안에 있었다.하정은이 조수석에서 업무 보고를 했다.“영안 프로젝트의 초반 준비작업은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서 대표님과 심 대표님이 맡아서 할 거예요. 며칠만 지나면 아마 완공하고 돌아올 것 같습니다.”연재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하정은은 그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다는 느낌에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유 비서님 아버지는 수감자랑 싸우다가 둘 다 크게 다치면서 어제 병원으로 이송되었대요.”“구치소 안에서 싸워?”연재준이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사람이니까 칼 들고 의료진을 협박했겠지.”하정은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연재준은 그녀가 그런 가족들에게 왜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3년 전에 그들과 연을 끊고 그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라고 말했던 그녀였다.그는 인상을
전화를 받은 이승연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곧 갈게.”유월영은 바쁜 사람을 잡고 싶지 않아서 웃으며 말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런데 지금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됐네. 병원에 보조 배터리 대여하는 거 있을 것 같은데 언니가 대여 좀 해줘.”이승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안내데스크로 가면 있을 거야. 지금 가자.”병원 로비로 향하며 유월영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엄마한테는 아빠 형기가 연기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돼. 싸웠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되고… 지금 입원해 있거든.”“그런 건 사실을 말하면 안 되지.”유월영은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히 말했다.“그거 알면 엄마 쓰러질 거야.”그 시각, 신주 병원.의사가 회진을 돌기 전이었다. 간병인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이영화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유신영은 아침을 사러 나가고 자리를 비웠다.이영화는 오늘 따라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간병인에게 말했다.“수고가 많아요.”“수고는요. 제 할 일인걸요.”간병인도 흔쾌히 이영화와 담소를 나누었다.“딸이 출장 중이라던데 올 때가 되지 않았나요.”유월영 얘기가 나오자 이영화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렇죠. 며칠 전에 전화했을 때는 오늘이나 내일 안으로 돌아올 거랬어요.”“남편도 곧 나온다면서요.”그래서 그런지 이영화는 오늘 따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기억력도 좋으시네요. 내일 나오는 날이에요.”그런데 눈알을 굴리던 간병인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내일은 못 나올걸요?”이영화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죠?”간병인은 환자복을 가져오며 주절거렸다.“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어제 남편분이 구치소에서 같은 방 수감자랑 피 터지게 싸우다가 둘이 같이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들었어요.”이영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리더니 벌떡 일어났다.“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요?”간병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감 중에 폭행 사건을 일으키면 엄벌
유신영은 넋이 나간 채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인공심장… 위험하다면서요….”‘하지만 사람이 죽을 판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일까.’‘월영이도 결정을 못한 건데 내가 할 수 있을까?’‘혹시 수술이 실패하면… 비싼 수술비랑 치료비는 어떻게 감당하지?’유신영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고막을 자극하는 기계음이 그녀에게 결정을 재촉하고 있었다.다시 유월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의사가 계속 재촉했다.“가족분! 빨리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유신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흘렸다.살면서 남들 다 다니는 일반 대학에 다니고 부모님 뜻에 따라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온 여자였다. 그녀는 한 번도 스스로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었다.이렇게 중대한 일을 앞두고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녀는 의사를 붙잡고 절규했다.“다른 방법은 없나요? 방법 좀 생각해 주세요. 차라리 할 수 있다 없다로 얘기해 주세요! 선생님들 말에 따를게요.”하지만 의사가 가족 대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곤란하시면 일단은 ECMO생명 연장 장치로 잠깐 시간을 끌 수는 있어요. 동생이 오면 그때 결정하죠.”유신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뭔데요?”“중태에 빠진 환자에게 체외에서 호흡순환을 도와주는 기계입이다. 임시방편일 뿐 시간을 많이 끌 수는 없어요.”유신영이 물었다.“위험한가요?”“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환자의 생명을 잠깐 연장하는 용도예요.”유신영은 주저없이 대답했다.“할게요! 그렇게 해주세요!”의사가 계속해서 말했다.“다만 장치를 가동하는 비용이 천문학적 숫자예요. 수술 후에는 중환자실로 옮겨야 하고요. 결정을 내릴 때까지 시간만 연장해 주는 용도예요.”하지만 유신영에게는 엄마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말만 중요했다.“그렇게 할게요! 동생이 와서 비용 지불할 거예요!”유월영은 보조배터리를 연결하고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
윤미숙이 말했다.“네 아빠 병원에서 난동 부린 사건 회장님이 뒤를 봐주셨잖니. 그 뒤로 아래 직원들은 회장님이 이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신 줄 알고 약간 무슨 소식 있으면 우리한테 보고하더라. 아부하는 거지.”주변을 둘러보던 윤미숙이 말했다.“여기 서서 얘기하지 말고 어디 들어가자. 커피숍은 어때?”유월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병원을 나서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유월영은 운전기사에게서 우산을 받아 들고 윤미숙과 함께 커피숍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마침 병원 근처로 왔던 연재준이 보게 되었다.그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커피숍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들이 창가에 자리하자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주문하시겠습니까?”윤미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월영이 네가 주문하렴.”“화이트 모카랑 카페라떼로 따뜻한 거로 주세요.”윤미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내가 화이트 모카만 마시는 거 기억하고 있었네. 너처럼 다른 사람 취향을 다 기억하는 애들도 흔치 않아. 작년에 회장님 생일에 네가 바둑판을 선물한 뒤로 회장님은 지금도 그 바둑판만 사용하고 계시잖아.”유월영은 비서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두 분께 도움을 받은 게 얼마인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죠.”윤미숙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예쁘니까 잘해주는 건 당연한 거야. 우린 여전히 널 며느리로 생각한다고.”“사모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랑 대표님 이제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래, 알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래도 난 널 딸처럼 생각하는 거 알지?”윤미숙은 흐뭇한 얼굴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유월영은 조금 불편한 감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윤미숙이 화제를 돌렸다.“아버지는 좀 어때?”유월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골절상이라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사람이 나이가 들면 뼈가 잘 안 붙어. 게다가 구치소 환경이야 안 봐도 뻔하지. 제대로 치료나 되겠어? 빨리 나오게 하면 좋은데.
아니나 다를까, 윤미숙이 계속해서 말했다.“시은이 3개월 지나면 출산해. 우리는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공개하기로 했어. 그래서 월영이 너도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면 해.”유월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입술을 깨물었다.설탕을 두 스푼이나 넣은 커피에서 쓴맛이 느껴졌다.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윤미숙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사모님, 제 친구가 일부러 그분을 알아보러 다닌 건 아니에요. 원래 호기심이 많은 친구라서 그래요. 어디에 소문 내고 다닐 만큼 철이 없는 아이는 아니에요.”“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제가 친구를 대신해서 사과 드릴게요. 그러니 사모님도 제 친구를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윤미숙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월영이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네 엄마는 입원해 있고 아버지도 나오면 치료를 받아야 해서 힘들 텐데. 네가 곧 SK로 들어간다는 얘기는 들었어. 너도 바쁠 텐데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어.”유월영은 이야기를 들으며 윤미숙이 자신의 일정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일종의 경고가 아닐까?그녀는 다른 시선으로 윤미숙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온화하고 자상한 이 사모님의 내면에 다른 모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윤미숙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계속해서 말했다.“비가 점점 더 세게 내리네. 이만 돌아가야겠어. 월영이 너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 비 맞으면 감기 걸려.”“네, 살펴가세요.”윤미숙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유월영을 향해 손을 젓고는 혼자 커피숍을 나갔다.유월영은 자리에 앉아 인상을 찌푸렸다.‘서희한테 전화해 봐야겠어.’하지만 핸드폰을 꺼낸 순간 액정이 깨졌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쓴웃음을 지었다.망가진 건지 아예 켜지지도 않는 핸드폰을 보며 유월영은 짜증을 삼켰다.조서희한테서 들은 바로는 시은이라는 그 여자는 윤미숙을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했다.그렇다면 시은은 윤미숙의 숨겨둔 자식이거나 며느리라는 얘기였다.만약 후자라면 연 회장에게는
유월영은 미처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연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모르게 저 여자랑 따로 만난 게 미안하기는 한가 보네.”유월영은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하고 담담히 물었다.“그걸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죠?”그는 윤미숙이 마시던 커피를 옆으로 밀고 차갑게 물었다.“둘이 무슨 얘기했어?”“그걸 대표님께 보고해야 하나요?”유월영은 짜증스럽게 대꾸하고는 계속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재준은 다 안다는 듯이 질문을 계속했다.“네 아버지가 사고친 거 수습해 달라고 불렀어?”핸드폰은 여전히 전원이 돌아오지 않았다.빗소리가 거세질수록 유월영은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면서 가슴이 갑갑했다.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핸드폰은 그냥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지금 시대에 핸드폰이 없으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재준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이거 놔요.”“분명 눈앞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건 무슨 심보야? 게다가 다들 능력도 없는 것들을 상대로 말이지.”유월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이 말씀하신 능력 없는 사람들은 저를 도와줄 때 부가조건이 붙지 않잖아요.”연재준이 웃으며 받아쳤다.“또 내가 한 말 잊었어? 값을 매길 수 없는 게 가장 비싼 법이야. 난 대놓고 가격을 제시하고 거래를 하자는데 넌 안 된다고 거부만 하잖아. 그리고는 어디 제대로 도움도 줄 수 없는 인간들이나 찾아 다니고 말이야.”여태까지 반응 없던 핸드폰에 갑자기 진동이 들어왔다.그녀는 억지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향했다.깨진 액정을 통해 간신히 확인해 보니 언니에게서 여덟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언니는 전화를 안 받는다고 계속 전화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유월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언니의 울음 섞인 목소
이영화는 금방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가족들은 면회를 할 수 없기에 언니와 형부가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월영은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갔다.“언니!”눈물범벅이 된 언니가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그녀의 어깨를 치며 울부짖었다.“왜 전화를 안 받았어! 왜!”유월영은 간신히 버티고 서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엄마 대체 무슨 상황이야?”그녀는 울부짖는 언니를 보자 숨이 막혀왔다. 그녀도 어제 한가하게 보낸 건 아니었다. 아버지 일 때문에 안 그래도 잠을 못 잤는데 지금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형부는 유월영과 함께 병실 창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유리 창 너머로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깜빡이며 그래프를 그리는 바이탈 기계만이 엄마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유월영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왜 이렇게 된 거지?어쩌다가….분명 며칠 전에 통화했을 때도 괜찮다고 했고 아빠가 나오면 엄마 컨디션 봐서 집으로 돌아가 가족끼리 밥을 먹자고 했었다.무슨 요리를 하고 누가 장을 보고 설거지를 할지 의논하기도 했는데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도니 걸까?이영화는 전에도 병증이 발작한 적 있지만 지금처럼 온몸에 삽관하고 멀리 떠날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너무 큰 충격에 눈앞이 캄캄했다.형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선생님은 지금 상황으로는 오래 못 버틸 거라고 했어. 이제 어떻게 할지는 우리한테 결정하라는데… 치료 포기할 거면 사인하고 장치 제거할 거래. 차라리 이럴 거면 편하게 보내드리는 게 좋을까 싶기도 하고.”유월영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사고 났다고 했을 때는 그나마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어차피 최악의 결과라고 해봐야 형기가 며칠 더 늘어날 뿐이고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하지만 엄마는 어쩌면 영원히 그들을 떠날 수도 있었다.어떻게든 치료는 포기할 수 없었다.형부가 계속해서 말했다.“처제,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
연재준은 의사가 산모와 아이의 상태를 알리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들었다.그는 곧장 유월영 곁으로 달려갔다.분만대에 누워 있는 유월영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몸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흐릿한 의식 속에 있었다.연재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눈물이 유월영의 얼굴에 떨어져 그녀의 땀과 함께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연재준이 쉰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괜찮아? 많이 아파?”유월영은 흐릿한 시야로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요.”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마를 그녀의 손등에 대며 말했다.“미안해.”“고마워.”“사랑해.”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유월영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다시는 수술실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유월영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괜찮아요.”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일주일 후, 유월영은 봉현진 마을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딸의 정식 이름과 성씨는 여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신 임신 때부터 부르던 애칭 ‘찹쌀떡’으로 불렀다. 이는 엄마, 아빠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하지만 한 달 이내에 출생 신고를 해야 했기에 아이의 정식 이름은 반드시 정해야 했다.연재준은 더 이상 유월영을 고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와 ‘고’를 각각 종이에 적어 공 모양으로 말아 병에 넣고 침대에 있는 모녀에게 다가갔다.유월영은 그가 딸에게 뽑기를 시켜 성씨를 정하게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병의 입구를 유월영에게 내밀며 말했다.“당신이 뽑아.”“내가요?”“당신이 낳은 아이니까, 당신이 성씨와 이름을 결정할 권리가 있어.”유월영은 웃으며 손을 뻗어 종이 하나를 뽑아 펼쳤다.“고.”그녀는 종이를 보고 연재준과 눈을 맞췄다. 연재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고씨로 하자. 좋아, 아주 좋네.”마침내 딸의 정식 이름이
“...”조서희의 말은 황당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이승연은 전문 변호사로서 논리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다.“우선, 너의 신분증과 호적에는 여전히 ‘유월영’으로 기록되어 있잖아. ‘고민서’라는 이름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름이지.”“그러니까 너의 아이가 너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면 유씨 성을 따르는 게 더 안전한 선택이야. 예를 들어, 현시우처럼 다른 성씨로 인해 가문에서 배척받는 일을 막을 수 있지.”그녀는 말을 이어갔다.“지금 너의 가문에서 상속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게 좋아. 그래서 나는 유씨 성에 한 표야.”“게다가, 유씨 성을 따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 너의 이름처럼 유씨 성 여자 이름이든 남자 이름이든 독특한 멋이 있잖아. ‘유월영’, 달빛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운치 있는 이름이잖아.”이승연의 말에 유월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은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그러나 유씨와 고씨 모두 한 표씩 얻으면서 결국 2 대 2,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유월영은 고민 끝에 투표 범위를 더 넓혀 이혁재, 서지욱 부부와 노현재, 심지어 현시우에게까지 의견을 물었다. 다섯 사람의 투표 결과는 유씨와 고씨에 각각 두 표씩으로 또다시 동점이었다.결정적인 한 표는 서지욱에게 달려 있었다. 서지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내 생각엔, 너희 아이의 성씨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게 어때? 딸이면 유씨, 아들이면 고씨로 하는 거야.”하지만 이 말에 모두가 반대했다.“왜 딸이면 꼭 유씨여야 해? 딸도 고씨 성을 따를 수 있어.”“왜 아들이면 꼭 고씨여야 해? 아들도 유씨 성을 따를 수 있잖아.”서지욱은 이내 두 손을 들며 물러섰다.“알겠어. 내가 헛소리했네. 기권할게.”결국 성씨 문제는 출산 직전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유월영의 출산은 최고의 의료팀이 관리하며 그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를 판단한 후 제왕절개를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