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서라야, 일단 둘이 나가 있어. 난 괜찮을 거야.”진서준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응, 그러면 밖에서 기다릴게.”진서라와 유지수는 방에서 나간 뒤 방문을 닫았다.유지수와 진서라가 떠난 뒤 왕우림은 진서준이 허리춤에 찬 옥패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옥패를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진서준은 구창욱이 그에게 줬던 옥패를 왕우림에게 건넸다.왕우림은 그것을 자세히 살피더니 곧 폭발적인 살기를 내뿜었다.“이런! 감히 우리 각주님의 옥패를 훔친 겁니까?”왕우림이 갑자기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진서준은 멈칫하더니 서둘러 말했다.“이 옥패는 제 사부님이 주신 겁니다!”“사부님이요?”“네. 저와 사부님은 감옥에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제가 출소하기 직전에 사부님께서 이 옥패를 주셨습니다.”진서준이 설명했다.“말도 안 돼요! 전 반년 전에 이 옥패를 본 적이 있어요!”왕우림은 곧바로 부정했고 진서준은 당황했다.그는 감옥에서 나온 지 겨우 석 달밖에 되지 않았다.“누구에게서 이 옥패를 본 겁니까?”진서준이 서둘러 물었다.“당연히 현임 각주님이시죠!”“현임 각주요?”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구창욱 어르신이요?”진서준은 미간을 찡그렸다.“당연히 아닙니다. 구창욱 어르신은 전대 각주님이시죠. 그는 이 옥패를 한 중년 남성에게 주었습니다.”왕우림이 말했다.진서준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구창욱은 이 옥패가 하나뿐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천기각 각주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이 옥패를 가진 사람이 바로 천기각의 각주였다.그러므로 이 옥패가 하나 더 존재할 리는 없었다.구창욱이 정말로 중년 남성에게 준 적이 있거나 누군가 이 옥패를 모방해서 하나를 만들었을 것이다.“당신이 말한 중년 남성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옥패는 확실히 구창욱 어르신께서 주신 겁니다. 구창욱 어르신은 제 사부님이에요.”진서준은 말을 마친 뒤 체내의 영기를 운용했고 그 순간 엄청난 힘이 진서준의 몸
“다시 사부님을 만났을 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습니다.”“구창욱 어르신 몸은 어떠십니까?”왕우림이 물었다.“아주 정정하십니다. 저보다 더 건강하실 겁니다.”진서준은 호탕하게 웃었다.그는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왜 유지수를 도와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진서준은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왕우림처럼 대단한 사람은 유지수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전에 옥패를 지니고 절 찾아왔던 사람이 제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왕우림이 말했다.“네? 또 만난 적이 있는 겁니까?”“아뇨. 그 사람은 제게 편지로 연락했습니다. 편지 내용은 전에 저희가 얘기했던 암호로 적혀 있었습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자 곧바로 깨달았다.“그 사람은 확실히 가짜군요. 분명 대단한 장인을 찾아가서 똑같은 옥패를 만난 게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유지수가 진서라를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어쩌면 유지수는 그 사칭범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몰랐다.진서준은 잠시 뒤 유지수를 찾아가서 물어볼 생각이었다.“각주님, 제가 조금 전에 재앙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왕우림이 입을 열었다.왕우림이 천기각의 사람이란 걸 알고 난 뒤 진서준은 그의 말을 조금은 믿었다.“또 다른 걸 보아냈습니까?”진서준은 서둘러 물었다.“각주님께서 정혈 한 방울을 주시지 않는 이상 더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각주님의 신분은 워낙 베일에 감싸여져 있어 제 능력으로만 알아보기에는 역부족입니다.”왕우림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진서준은 사실 구창욱이 했던 말들을 별로 믿지 않았다.구창욱은 그에게 용의 혈맥을 타고났고 왕이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했었다.그때 진서준은 구창욱이 농담하는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보니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좋아요. 우선 정혈을 드리겠습니다.”진서준은 손가락을 깨물더니 정혈 한 방울을 짜냈다.왕우림은 곧바로 술법을 시전하였다. 그는 진서준의 정혈을 감싸서
진서준은 사원 대청에서 나온 뒤 사원 밖에 진서라 혼자만 남아있고 유지수는 감쪽같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진서준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내가 사칭범에 관한 일을 물을 걸 예상하고 먼저 도망쳤나 보네. 하지만 또 만날 테니 상관없어. 일단 급선무는 돌아가는 거야.”진서준은 빠르게 진서라에게 다가갔다.“서라야, 유지수는? 그냥 간 거야?”“응. 볼일 있다면서 먼저 가보겠다고 했어.”진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서라야, 그동안 유지수 그 여자가 널 괴롭히지는 않았어?”진서준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서라를 바라보았다.그는 유지수가 그동안 진서라를 학대했을까 봐서 걱정이었다.“아니. 난 며칠 전 이곳으로 보내졌고 그 뒤로 줄곧 이곳에서 지냈어. 도사님은 내게 아주 잘해주셨고 날 때리거나 욕한 적은 한 번도 없어.”진서라가 말했다.“그러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진서준은 진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가자. 우리 산에서 내려가자!”“응!”진서라는 얌전히 진서준을 따라서 하산할 준비를 했다.이때 사람 한 명이 사원 문 앞에 도착했다.평소 사원을 찾는 사람은 없었기에 갑자기 누군가 찾아오자 진서준은 곧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진서준은 상대방을 빤히 바라보았고 상대방의 체내에 진기가 있는 걸 발견했다.그 사람도 술법을 수련한 도사였다.“왕우림 그 노친네 여기 있어?”원재경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왕우림을 노친네라고 부르자 진서준은 미간을 찡그렸다.“당신은 누구야?”“이 자식, 내가 먼저 물었잖아. 얼른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원재경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딱 봐도 악의를 품고 찾아온 사람이 분명했다.왕우림은 조금 전 진서준의 관상을 보느라 중상을 입어서 지금 원재경과 싸운다면 틀림없이 질 것이다.진서준은 천기각의 각주였기에 당연히 다른 사람이 자기 부하를 다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서라야, 물러서!”진서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응, 오빠 조심해.”진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서준
“각주님, 조심하세요!”왕우림은 서둘러 외쳤다.“전 괜찮으니까 우리 동생 좀 지켜주세요!”진서준이 말했다.“네!”왕우림은 황급히 진서라의 앞으로 달려가서 그녀를 지켰다.안개가 아주 자욱해서 50cm 밖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진서준이 영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반경 3m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주위가 아주 고요해졌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안개 속에서 들려왔다.그리고 몇 초 뒤 진서준의 앞에 있던 흰색 안개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무언가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진서준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체내의 영기를 조금씩 사용했다.다음 순간,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진서준의 앞에 나타나서 20cm는 될 법한 치아를 드러내며 진서준을 덮쳤다.“같잖은 수작질이네.”진서준은 경멸에 찬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의 멸시를 느낀 건지 호랑이는 크게 울부짖었다.소리가 아주 쩌렁쩌렁해서 근처의 흰 안개가 흩어질 정도였다.“파괴!”자줏빛 번개가 진서준의 손바닥에서 쏘아져서 호랑이를 공격했다.호랑이는 번개에 공격당하는 순간 몸이 갈기갈기 찢기더니 허공에서 사라졌다.몸을 숨기고 있던 원재경은 그 광경에 동공이 떨렸다.“이 자식, 꽤 실력이 있네. 하지만 네가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오늘은 여기서 죽어야 해!”말을 마치자마자 원재경은 체내의 진기를 모두 발산했다.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총 8마리의 맹수가 원재경의 앞에 나타났다.곧 8명의 맹수는 진서준을 노리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순간 땅이 은근히 흔들렸다.“당신만 소환할 줄 알아?”장청의 힘과 혈기가 진서준의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저번에 탁현수와 싸울 때 푸른색과 붉은색의 거대한 용이 진서준의 앞에 나타났었다.용의 울부짖음과 함께 사원을 뒤덮었던 흰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크릉!”귀청을 찢는 듯한 용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진서준을 향해 달려들던 8마리의 맹수는 허공에 떠 있는 용을 보더니 뒷걸음질 쳤다. 맹수들은 겁에 질린 듯 보였다.“용
원재경의 말을 들은 진서준은 당황했다.인의방 1위면 실력이 완전히 다른 차원일 것이다.전에 제마 법왕은 실력으로 진서준을 압도했었다. 그런 그조차도 겨우 인의방 3위였고 1위와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만약 정말로 원재경을 죽인다면 원재경의 아버지가 복수하러 찾아올지도 몰랐다.그렇게 되면 국안부조차 진서준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자식을 죽인 원한은 그 어떤 원한보다도 컸기 때문이다.진서준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자 원재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점점 더 기고만장해졌다.‘난 널 이길 수 없지만 내게는 아버지가 있어!’“이 자식, 지금 당장 비켜.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에게 이를 줄 알아!”원재경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감히 인의방 1위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지의방에서 거꾸로 10위 안에 드는 사람들도 감히 원재경의 아버지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소문에 따르면 원재경의 아버지가 지의방에 들지 않은 이유는 그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일 때문에 원재경의 아버지는 직접 국안부에 찾아가기까지 했었다.그래서 많은 무인들이 원재경의 아버지를 인의방의 수문장이라고 불렀다.“내가 정말로 당신을 어쩌지 못할 것 같아?”진서준은 칼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원재경을 바라보았다.원재경은 그의 눈빛에 겁을 먹고 연달아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당장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이 순간, 그는 얼음 동굴에 갇힌 듯 몸이 서늘했고,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진서준은 마치 눈동자에 칼날을 숨겨 놓고 있는 듯했고, 그 칼날이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금 당장 꺼져.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줄 알아.”진서준은 차갑게 말했다.원재경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된 것처럼 말이다.‘저놈 눈빛에 겁을 먹은 건가?’원재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셋!”진서준은 이미 카운트를 시작했다.원재경은 정신을 차린 뒤 화를 냈다.“날 위협하려고? 그럴 실력
지금의 진서준은 국안부의 상경이었다.만약 정말 생명이 위험하다면 호국장군의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비록 소문이 나면 창피하지만 적어도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살아 있는 한 기회는 있는 법이다. 체면을 잃는다고 해도 다시 찾아오면 그만이다.하지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각주님, 제가 가서 죽었는지 보고 올게요.”왕우림이 말했다.“볼 필요가 없어요. 무조건 아직 살아 있을 거예요. 방금 한방에는 단지 그의 오른팔을 부러뜨렸을 뿐이죠.”진서준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구급차를 불러줘요. 서라를 데리고 먼저 갈게요.”“네!”왕우림은 다급히 휴대 전화를 꺼내 구급차를 불렀다.“서라야, 가자!”진서라는 즉시 진서준을 따라 산 아래로 향해 걸어갔다.산에서 내려올 때 진서준이 물었다.“방금 많이 놀랐지?”“아니야.”진서라가 고개를 내저었다.“서라야, 내가 어떻게 이런 강한 힘을 얻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진서준이 물었다.아까부터 지금까지 진서라는 조금 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줄곧 평온한 표정이었다.진서준은 심지어 진서라에게 어떻게 말할지 이미 다 생각했다.예전에 진서준은 진서라에게 이런 장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좀 궁금해. 하지만 오빠가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있겠지.”진서라가 얌전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서준은 진서라의 말에 감동했고 손을 내밀어 진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너 같은 동생이 있다는 게 나의 행운이야.”“그건 나도 그래.”진서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참. 엄마는 어떻게 되셨어?”진서라는 갑자기 조희선이 생각났다.지금 진서준이 돌아왔으니 아마 조희선의 다리는 이미 나았을지도 몰랐다.“어머니는 이미 일어나셨어. 며칠 뒤에 어머니를 뵈러 집으로 가자.”지금 바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허윤진이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기 때문이었다.진서준은 허윤진의 건강에 문제가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서라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알겠어.”진서라는 여전히
진서준은 한제성이 진서라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한제성은 인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전에 자기 누나를 구하기 위해 보운산에 직접 사람을 이끌고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영약을 찾으러 갔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한제성을 잘 다듬어 주기만 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독보적인 큰 인물이 될 것이다.한제성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실력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진서준이 충분히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앞으로 한제성이 진서라의 곁을 지키더라도 진서준은 안심할 수 있었다.“서준 씨가 산 위에서 진서라 씨를 구한 거예요?”한제성은 운전하며 가끔 룸미러 쪽으로 눈을 흘기며 진서라를 훔쳐보았다.“그렇죠. 서라가 요 며칠은 산에서 보냈고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어요.”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그렇군요. 진서라 씨... 그 나쁜 자식들이 서라 씨를 괴롭히지 않았어요?”한제성은 용기를 내어 진서라를 바라보면서 물었다.“아니요. 누구도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진서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저를 편하게 불러 주세요. 한제성 씨와 제 오빠는 친구 사이니, 나중에 우리도 친구가 될 거예요.”한제성은 그 말을 듣고 너무 흥분해서 기절할 뻔했고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끼익!차가 왼쪽으로 심하게 휘어져 하나터면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운전 열심히 하고 딴생각하지 마세요.”진서준은 한제성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네. 열심히 운전할게요.”한제성은 그제야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한씨 저택에 거의 도착했을 때야 한제성은 긴장이 풀렸다.“서준 씨, 서라랑 언제 돌아갈 계획이에요?”“며칠 후에 윤진 씨의 몸 상태가 좋아지면 돌아가려고요.”진서준이 말했다.진서준의 집은 서울시에 있었고 조희선도 진서준과 진서라를 기다리고 있었다.허윤진이 아니라면 진서준은 오늘 밤에 바로 진서라를 데리고 집에 갔을 것이다.며칠 후면 진서준이 떠난다는 말에 한제성의 얼굴에는 서
“아빠, 서준 씨는 또 어디로 가는 거죠?”한제성은 진서준이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물었다.“진 마스터는 병원에 있는 허윤진 씨를 보러 갔어. 진 마스터의 여동생이 우리 집에 잠시 묵고 있으니 넌 진서라 씨를 잘 대접해야 해. 함부로 했다가는 내가 네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야.”한서강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알겠어요. 명심할게요. 절대로 서라 씨를 홀대하지 않을게요.”한제성은 감격에 찬 어조로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준은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했다.“윤진 씨, 윤진 씨!”진서준은 거의 문을 부술 정도로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진서준...”허윤진은 진서준이 나타나자 앵두 같은 입술을 조금 벌리고 진서준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허윤진은 몸이 너무 허약해서 목소리가 낮은 나머지 옆에 서 있는 한보영도 허윤진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진서준은 빠른 걸음으로 허윤진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맥을 짚었다.허윤진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정신도 흐리멍덩해 보였지만 목숨에는 이미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진서준은 허윤진의 체내에 약간의 영기를 주입한 후 눈시울을 붉혔다.“바보 같은 윤진 씨, 왜 그날에 갑자기 달려들었던 거예요. 그 사람은 절 죽이지 못했을 텐데 말이죠. 만약 은영과가 없었다면 윤진 씨는 어쩌면 정말... 윤진 씨가 죽으면 제가 무슨 체면으로 사연 씨와 아버님을 볼 수 있겠어요? 저도 무슨 용기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어요?”진서준은 손을 뻗어 허윤진의 창백한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매번 허윤진의 창백한 모습을 볼 때마다 진서준의 마음은 칼에 베인 듯 아팠다.“저도... 형부가... 죽은 꼴을 보지 못해요. 제가 죽으면... 형부는 언니가 있겠지만... 형부가 죽으면... 나와 언니는... 살 수가 없어요...”허윤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진서준은 매우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지만 대략적인 것만 들을 수 있었다.“바보 같은 계집애!”진서준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처음에 허
그 말을 듣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곤륜 문주의 딸을 감히 죽이려고 하다니, 대체 어느 미친놈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꾸민 거지?“두목은 장강훈이라는 놈인데 서남 지역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에요.”신수란이 한마디 더 보탰다.“뭐라고요? 그놈을 만났다고요?”유기명이 깜짝 놀랐다.“아는 사람이에요?”신수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기명을 쳐다봤다.“들어본 적은 있죠. 얼마 전 내 동생 유기태가 국안부에서 그놈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놈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행방이 오리무중이라 찾기가 어려웠죠.”유기명은 신수란을 보며 물었다.“그래서 아가씨들은 어떻게 그놈 손에서 빠져나온 거죠?”신수란은 순간 머뭇거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우리를 구해줬어요.”“네? 누가 아가씨를 구한 거죠? 내가 알기로 장강훈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서남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유기명이 흥미를 보였다.서남 무도계의 강자들은 유기명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대다수가 유씨 가문에 초빙되어 가문의 귀빈으로 섬기고 있고 거절한 이들은 전부 세상과 연을 끊은 은둔 고수뿐이었다.설마 유기명이 모르는 강자가 더 있다는 건가?신수란이 곧 이름을 밝히려 하자 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가 됐든 간에 그 강도가 죽었다면 된 거죠.”갑작스러운 개입에 신수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유기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흘끗 쳐다보고는 진서준의 말투를 곱씹으며 속으로 추측했다.이 여자들을 구한 건 진서준이 틀림없을 것이다.“이장로님, 그놈들은 단순히 아가씨를 납치하려 했을 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어요.”신수란이 상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렇다면 그놈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거겠군.”이장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설상가상으로 슬기가 이번에 우리랑 함께 하산한 걸 아는 사람은 종문 내부 제자들뿐이야. 그런데 곤륜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소식이 그놈들 귀에 들어갔다고? 그렇다면..
이때의 조슬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조금만 가까이 가도 조슬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신수란은 조슬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바로 옆방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로 자기 체온을 되찾으려 했다.조슬기를 업고 오는 내내 신수란 또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조슬기의 체온은 거의 0도에 가까웠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통에 신음하는 조슬기를 보며 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내가 일단 치료할게. 성약당 장로가 도착하려면 최소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해.”“네가 치료한다고? 경호원 주제에 뭘 안다고 사람을 살린다고 지껄여?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네가 뭔데 이렇게 나대?”은청준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누가 경호원이라고 해서 사람을 못 구한다고 했죠?”유정이 즉각 반박했다.은청준이 지속적으로 진서준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 영 거슬렸는데 이제는 대놓고 모욕까지 하니 유정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유 아가씨, 경호원이 사람을 못 구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전 그냥 저 사람이 자격이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은청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유정이 유 가주의 딸만 아니었다면 유정에게 욕설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아까 진서준과 대련하려고 할 때에도 유정 때문에 망신당했는데 지금은 또 저 하찮은 경호원 따위를 위해 유정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니, 이러다간 정말 곤륜 차세대 천재 일인자인 자기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유씨 가문의 경호원이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니 기막힌 일이었다.“김평안 오빠는 우리 유씨 가문을 여러 번 구한 의술이 뛰어난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 목숨도 이분이 살리셨죠. 그런 분이 왜 자격이 없다는 거죠?”유정은 전혀 기죽지 않고 은청준과 눈을 맞추며 쏘아붙였다.은청준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목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유 아가씨, 아가씨는 제 후배 신분을 아나요? 제 후배는 우리 종문 문주의 따님입니다.
하지만 두 검의 차이는 누가 봐도 너무나도 컸고 이건 진서준에게 손해 보는 장사였다.“이봐요, 은청준 씨, 곤륜 제자로서 이런 요구를 하는 건 곤륜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요?”유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은청준도 유정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유 아가씨, 그 말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제 검도 희귀한 명검 중 하나입니다.”은청준은 굳은 얼굴로 즉시 반박했다.“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바로 시작하자.”은청준은 진서준의 말에 바로 반응하며 유정이 더 이상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이 참선검은 반드시 자기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규칙은 간단해. 검이 먼저 상대의 몸에 닿는 쪽이 승리야, 어때?”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오직 실력으로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었다.“문제 없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막 대련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갑자기 집사가 허겁지겁 뛰어왔다.“가주님! 조슬기 아가씨의 소식을 받았습니다!”“뭐라고? 아가씨가 어디 있어?”유기명이 즉시 반응하자 이장로가 손을 내저었다.“이 대련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먼저 슬기부터 찾자.”그 말을 듣자 은청준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일그러졌지만 이장로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다.“김평안, 그 검 잘 보관해 둬라. 내가 반드시 가져갈 거니까.”은청준은 검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리를 떠났다.“조슬기 아가씨가 이미 금도에 도착해서 우리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즉시 날 거기로 데려가 주세요.”이장로가 급히 말하자 유기명이 서둘러 제안했다.“이장로님, 제가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셔 오겠습니다. 여기서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겠습니다.”이장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거절했다.조슬기가 과연 무사한지 이장로는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알겠습니다. 이봐, 즉시 이장로님을 모시고 출발해.”
식사도 아직 하지 않았는데 분위기는 이미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유정은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쭉 진서준에게 머물렀다.진서준이 이따가 대련 중에 다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유씨 가문에 머무르는 동안, 유정은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예를 들면 곤륜을 비롯한 4대 은세 종문에 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가장 오래 유지되어 온 은세 세력이었다.심지어 경성의 4대 가문조차도 이 4대 종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게다가 종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은 천재였다.은청준이 곤륜의 차세대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로 손꼽힌다면 그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대단한 실력을 갖췄을 가능성이 컸다.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만약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반면 진서준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고 전혀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한 모습이었다.진서준의 여유로운 태도에 은청준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흥, 대련이 시작되면 네놈이 나와의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은청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저녁 식사 내내 유기명과 이장로만 가끔 대화를 나눴다.곧 식사가 끝나자 곤륜의 다른 제자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몰려왔다.다들 유씨 가문 저택 뒤편의 넓은 공터에 모여 구경하기 시작했다.“저 녀석 미친 거 아냐? 감히 은 선배와 대련하겠다고? 살고 싶지 않은 건가?”“은 선배는 이미 사급 대종사야. 선배의 실력은 끔찍할 정도로 강해. 웬만한 사람은 상대도 안 되지.”“내기나 해볼까? 저 자식이 선배의 검을 몇 번이나 막아낼 수 있을지?”“난 한 방도 못 버틴다고 봐. 선배는 이미 검의를 깨우쳤잖아.”곤륜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진서준을 과소평가했다.다들 은청준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또래 중에서 아무도 은청준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반면, 진서준은 겉보기에는 40대로 보였지만 전혀 강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이런 사람이 실력자라고 한다
“김평안 씨는 내가 엄청난 공을 들여서 모셔 온 분입니다.”유기명이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며 진서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겉보기엔 40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그 실력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어마어마하다고? 그럼 나랑 한번 붙어볼래?”은청준이 비웃으며 말했다.은청준은 스물여섯 살에 이미 사급 대종사가 되었는데 반면 이 경호원은 체내에 강기가 거의 없었다.아무래도 겨우 종사의 문턱을 밟은 무인인 것 같은데 이런 쓰레기가 세속에서는 강자로 불리는 건가?유기명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은청준 씨와는 비교할 수 없죠. 하지만 김평안 씨 검술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실력입니다.”“마침 나도 검술이 특기인데, 한 번 겨뤄볼까?”은청준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청준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무도는 남과 다투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이장로가 차분하게 말하자 은청준은 곧바로 태도를 고쳐잡고 공손하게 말했다.“이장로님, 저는 그냥 세속 무인과 가볍게 한 수 겨뤄볼 생각이었습니다.”이장로는 은청준을 흘긋 보았으나 그의 속마음을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은청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같은 종문 사람이니 체면은 세워줘야 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진서준이 다시 강조하자 은청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쏘아봤다.이 녀석 왜 이렇게 말이 많지? 혹시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건가?“은범은 내 사촌 동생이야. 네가 그 못난 동생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은청준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신농산에서 만난 적이 있어.”“뭐라고? 걔가 신농산에 갔다고?”이 말에 은청준은 흥미가 동했다.“그 녀석 실력으로는 신농산 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 텐데?”은청준은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은범이 어떤 인물인지 은청준은 잘 알고 있었다.애매한 실력과 어중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은범이 은씨 가문에서 빛을 볼 일은 없었다.은청준과 은범의 격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컸다.“그 녀석은 테
진서준은 아버지 진요한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이렇게 닮은 꼴로 곤륜 사람들을 만나면 곤륜 장로가 진서준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진서준은 곤륜에 관해 잘 알지 못했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인피면구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목소리까지 완전히 변해버린 진서준을 보고 유정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진서준이 자기를 해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진서준이 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알겠어요, 진서준 오빠.”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름 잘못 불렀어. 지금 난 김평안이야.”진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그냥 김평안이라고 부르면 돼.”“알았어요.”그렇게 진서준은 유정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인피면구를 쓴 진서준을 본 유기명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진서준이 슬쩍 보낸 눈짓을 보고 유기명은 즉시 이 사람이 진서준이란 걸 깨달았다.“유정아, 이리 와 앉아. 네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유기명이 유정을 옆에 앉히며 말했다.이때, 곤륜의 이장로가 진서준을 흘끗 보더니 별다른 반응 없이 바로 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주님, 따님 건강이 막 회복된 것 같은데, 맞나요?”이장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네? 이장로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유기명은 깜짝 놀랐다.유기명은 아직 딸의 병에 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장로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큰 병을 앓았다는 걸 눈치챘다.이건 거의 신의 영역 아닌가?“따님께서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지만 눈에 피곤한 기운이 남아 있고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불안정합니다.”이장로가 천천히 해명했다.“역시 곤륜 장로님이십니다.”유기명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딸은 최근 큰 병에서 막 회복된 참입니다.”“따님을 치료한 의사는 보통 인물이 아닐 것 같네요.”이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큰 병인데도 이 정도로 빠르게 완치하다니, 의술이 보통이 아닐 텐데... 혹시 성약당 장로가 아닙니까?”유기명은 순간 멈칫하더니 곁눈질로 진서준이 살짝 고개를 젓는 것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도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정도였다.“가주님, 이번에 찾아온 건 부탁할 일이 따로 있어서입니다.”이장로가 용건을 말하자 유기명이 시원하게 대답했다.“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유씨 가문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곤륜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건 곧 곤륜이 유씨 가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강 종문 중 하나였다.곤륜이 유씨 가문에 빚을 진다면 훗날 유씨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 종주님 따님도 이번에 곤륜에서 내려왔습니다.”이장로가 말문을 열었다.“네? 조슬기 아가씨도 왔습니까? 근데 아가씨는 어디에...”유기명이 멈칫하더니 이장로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어제 하산할 때 슬기와 경호원 두 사람이 따로 움직였고 밤에 저희와 다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군요. 나중에 수소문해 봤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슬기를 찾아주신다면 이 늙은 몸이 신세를 지는 셈 치겠습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장로님, 과한 말씀입니다. 제가 즉시 서남 지역 전체에 조슬기 아가씨를 찾으라고 명령하겠습니다.”유기명은 망설일 틈도 없이 즉시 지시를 내렸다.서남에서 유씨 가문은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명령이 내려가자 서남의 크고 작은 도시, 심지어 작은 마을까지도 조슬기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모두가 조슬기를 찾기 위해 분주한 사이, 진서준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오빠!”진서준을 보자마자 유정이 반갑게 소리쳤다.“유정아, 몸은 좀 어때?”진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많이 좋아졌어요.”유정은 대답하며 진서준을 위아래로 살폈고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서야 안심했다.혹시라도 진서준이 자기를 위해 묘강에 가서 복수라도 했던 게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진서준이 앞으로 다가가 유정의 맥을 짚었다.“확실히 거의 다 나았네. 이틀만 더 쉬면 원래 상태로 돌
“가주님! 대문 앞에 중요한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유씨 가문의 집사가 황급히 유기명을 찾아 소리쳤다.“중요한 손님이라고?”유기명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서남 지역에서 유씨 가문을 찾아 올 만한 중요한 손님이라면 꽤 오랜만이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유씨 가문에서 중요한 손님으로 인정할 만한 인물 자체가 거의 없었다.설령 그것이 경성의 4대 가문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방문해야만 중요한 손님이라고 할 수 있었다.“누가 왔어?”유기명이 물었다.“곤륜의 이장로입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유기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뭘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안으로 모셔 와야지!”유기명은 집사를 따라 급히 장원 입구로 향했다.그곳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그들은 모두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사극에서 튀어나온 듯한 복장이었고 등에는 검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운도 비범했다.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극단에서 뛰쳐나온 배우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었다.“이장로님, 이 유씨 가문이란 곳,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 있습니까?”무리의 맨 앞에 선 잘생긴 청년이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우리 곤륜이 오랫동안 여기를 찾지 않은 건 맞지만 이런 대우는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잖아요.”그들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이전에도 곤륜산에서 내려와 세속의 여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를 가든 귀빈처럼 모시며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다.하지만 유씨 가문이 이들을 이렇게 문 앞에 세워두고 있다니, 그 격차가 너무 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다 떠들었으면 이제 조용히 해.”그 순간, 백발의 이장로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장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간적으로 모든 이가 입을 다물었다.“종주님의 따님이 사라졌는데 너희는 지금 대접 타령이나 하고 있어? 이번에도 슬기를 못
진서라는 재빨리 움직여 유정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고마워, 서라야.”유정은 물컵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다.“몸은 어때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진서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이제 괜찮아.”유정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참 다행이네요.”진서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근데 진서준 오빠는 어디 있어? 왜 안 보이지?”유정이 문밖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유정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진서준이었다.진서라는 급히 둘러대기 시작했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나갔다고? 혹시 묘강으로 간 건 아니겠지?”유정도 바보는 아닌지라 진서라의 표정을 보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아, 아니에요. 묘강은 워낙 위험한 곳이라 우리 오빠도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서라의 마음은 누구보다 더 초조했다.벌써 하루가 지나도록 진서준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다.점심때 국제 뉴스를 본 진서라는 배논국의 묘강 지역에서 큰 소란이 있어 배논국이 결국 묘강 지역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확인했다.하지만 진서준의 소식은 단 한 줄도 없었다.그러니 자연스레 진서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유기명이 방으로 들어왔다.딸이 깨어난 걸 보자 유기명은 눈물을 글썽이며 격동한 말투로 말했다.“유정아, 드디어 깨어났구나!”“죄송해요, 아버지. 걱정 끼쳐드려서...”유정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절반이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바보 같은 소리 마. 사과할 사람은 나야.”유기명은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그때 내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그 자식을 죽였더라면 네가 중독될 일도 없었을 거야.”“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그 얘긴 그만하세요.”진서라가 서둘러 다독였다.“그래,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야. 더 이상 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