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브레이크 소리도 윤서호 등 이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건달 몇몇이 진서준을 가운데 끼고 앞뒤로도 꼼짝 못 하게 하려던 그때 골목에서 복잡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안에 있는 x끼들아, 잘 들어.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튀어나와!”굵직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순간 윤서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인마, 너 경찰 불렀어?”그러자 진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찰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거 알 텐데.”윤서호는 화를 내려다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골목 맞은편에서 검은 옷차림의 십여 명이 칼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어찌나 살기등등한지 딱 봐도 진짜 건달 같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도 검은 무리가 나타났다.갑자기 동시에 나타난 검은 무리를 본 윤서호의 낯빛이 잿빛이 되었다.“여보, 저 사람들은 누구야?”왕나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마구 밀려왔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진서준의 모습을 보자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설마 진서준이 부른 사람들은 아니겠지?’이 사람들이 누구 편인지 한창 고민하던 그때 조금 전 큰소리로 외쳤던 건장한 남자가 왕나연과 윤서호의 뒤에 나타났다.퍽!한은호는 윤서호를 가차 없이 발로 차버렸다. 윤서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왕나연도 함께 칠팔 미터 날아갔다.윤서호가 데리고 있던 건달들은 한은호를 보자마자 감히 숨소리도 내질 못했다. 그들은 한은호를 본 적이 있었고 한은호의 신분과 명성을 익히 들었다. 호스텔 그룹과 비교하면 그들은 정말 한낱 개미 새끼에 불과했다.한은호는 바닥에 널브러진 윤서호와 왕나연을 밟고 지나 진서준에게 다가가더니 허리 굽혀 공손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서준 씨. 저희가 늦었어요.”그러자 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너무 늦은 건 아니야.”말을 마친 진서준은 넋을 놓은 왕나연과 윤서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바닥에 누운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보았다. 입을 어찌나 쩍 벌렸는지 주먹이 다
“무슨 얘기?”진서준의 싸늘한 눈빛에 왕나연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서준 씨, 이년이 무슨 중요한 얘기가 있겠어요? 그냥 몸으로 서준 씨를 유혹하려는 거겠죠.”윤서호가 다급하게 말했다.“웃기고 있네. 서준 씨가 너 같은 년을 쳐다나 보겠어?”옆에 있던 한은호가 코웃음을 쳤다. 왕나연의 얼굴에 멋쩍은 기색이 스치더니 진서준을 보며 말했다.“진서준, 내가 이 얘기를 하면 날 풀어줘. 어때?”“그건 네가 하려는 얘기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달렸지.”진서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만약 중요하지 않다면 진서준은 왕나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은호에게 맡겼을 것이다.“예전에 대학로에서 봤던 그 여자 네 여자친구지?”왕나연이 물었다.“그래. 그런데 그건 왜?”진서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장혜윤이 네 여자친구를 납치하겠다고 사람을 찾았어.”왕나연이 말했다.“뭐?”순간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가 진서준의 가슴에서 활활 타올랐다. 진서준은 누가 그의 가족을 건드리면 절대 참지 않았다.허사연이 아직은 그저 진서준의 여자친구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가족이 될 것이다.지난번 진서라가 납치된 후로 진서준은 가족을 건드린다면 절대 참지 않겠다고 했었다. 상대가 누구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으악!”진서준의 기세에 화들짝 놀란 왕나연은 소리까지 지르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왕나연은 자신이 진서준 앞에서는 한낱 개미 새끼에 불과하다는 걸 느꼈다. 진서준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누굴 찾았는데?”진서준은 왕나연을 보며 마음속의 살기를 최대한 억눌렀다.“나도 누군지 몰라. 어제 혜윤이랑 밥 먹었는데 나에게 그 얘기 하더라고. 그때 가서 재미난 구경 같이하자고 했어...”왕나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진서준이 버럭 화를 냈다.“지금 당장 장혜윤을 불러내.”“알았어. 전화할게. 하지만 그전에 날 풀어줘.”“넌 나와 협상할 자격도 없어.”진서준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의 살벌한 분위기에 왕나연은
어느 어둡고 습한 방.허사연의 두 눈이 얇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움직이고 있는 몇 사람만 어렴풋이 보였다.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누구인지 허사연은 알 리가 없었다. 비록 지금 허씨 가문이 많이 발전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 같지만 사실 적지 않은 경쟁자가 숨어있었다.2년 전 허사연이 허성태의 손에서 사해 그룹을 물려받을 당시 일주일에 다섯 번의 교통사고와 여섯 번의 납치를 당했었다. 그리고 독을 타는 등 파렴치한 수단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이번에 상대가 납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허사연이 너무 방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기에 죽을 위험까지 무릅쓰고 그녀를 건드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지금 그녀는 진서준의 여자친구이다. 신분이 사해 그룹 회장보다도 더 고귀했다. 남주성에서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동철 형님, 이 여자 생긴 게...”방 안, 동철 형님이라 불리는 중년 남자가 부하를 싸늘하게 째려보았다.“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마동철이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이곳에 오기 전 유지수는 그에게 허사연의 신분을 얘기해줬었다. 서울시 사해 그룹의 현 회장이자 허씨 가문의 큰아가씨라고 했다.그들이 비록 나쁜 짓을 일삼는 강도들이긴 하지만 생각이라는 게 있긴 있었다. 만약 진짜로 허사연을 건드렸다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유지수가 그들에게 허사연을 거의 반 죽여놓으라고 분부하긴 했지만 마동철은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돈에 눈이 멀진 않았다.마동철에게 한 소리 들은 남자는 주눅이 들어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허사연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욕망이 가득했다.“허사연 씨, 사연 씨를 뭐 어쩌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마동철은 실실 웃으면서 허사연의 앞으로 걸어갔다.“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할 얘기 있으면 그냥 해.”허사연은 그들과 쓸데없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납치됐다는 사실을 경호원이 무조건 진서준과 그녀의 아버지에게 보고
“알았어. 지금 당장 알아보라고 할게.”분부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성태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된 번호였다.“받으세요. 다 들리니까 스피커폰으로 할 필요 없어요.”진서준이 말했다.“알았어.”전화를 받자 마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성태 씨, 그쪽 딸이 지금 내 손에 있어. 딸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이틀 내로 현금 천억을 준비해. 룰은 당연히 알겠지? 경찰에 신고한다면 다신 딸을 볼 수 없을 거야.”그러자 허성태가 바로 큰소리로 말했다.“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까 내 딸만 다치게 하지 말아요.”“그래. 이틀 후에 연락해.”허성태는 전화를 끊고 진서준의 눈치를 살폈다. 진서준의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상대가 왜 돈을 요구하는지 진서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장혜윤은 분명 진서준과 허사연에게 복수하려고 사람을 찾았을 텐데.“장혜윤이 사람을 찾아서 사연 씨를 납치하게 한 거니까 지금 납치범을 만나러 가는 길일 거예요. 장혜윤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사연 씨를 구할 수 있어요.”진서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장혜윤이 누구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허성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사해 그룹의 경쟁자가 많고도 많았지만 장혜윤이라는 여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찮은 여자일 뿐이에요.”냉랭하게 말하는 진서준의 두 눈에 살기가 드러났다. 이번 일로 장혜윤은 진서준의 데스노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장혜윤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아주 가차 없이 죽여버릴 것이다.‘감히 내 가족을 건드려? 그럼 죽음뿐이야!’...장혜윤은 마동철이 보낸 주소를 받고 허사연이 납치된 곳에 도착했다.머리가 나름 똑똑한 마동철은 허사연을 교외로 데려가지 않고 서울시 노성동의 옛 골목거리로 데려왔다.오래된 골목이라 공간이 협소했고 쉽게 쳐들어올 수 없었다. 허성태가 그들의 위치를 찾아낸다고 해도 짧은 시간 내에는 그들의 방어선을 뚫기 어려울 것이다.노크 소리가 들리고 암호를 주고받고 나서야 방문이 열렸다
장혜윤의 외모가 허사연과 비교하면 많이 딸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예쁜 편이었다. 허사연을 건드리지 못하니까 적지 않은 부하들이 장혜윤에게 흑심을 품었다.납치범의 한마디에 장혜윤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비록 그녀는 몸을 팔면서 돈을 벌지만 항상 돈 많은 남자들만 상대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남자들은 전부 강도들이었다. 돈 많은 남자들과는 아예 비교도 되질 않았다.“웅웅...”입을 막고 있어 장혜윤이 뭐라 소리쳐도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그 모습에 마동철이 싸늘하게 웃었다.“인제 겁먹었어? 아까도 나대지 말았어야지.”겁에 질린 장혜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면 풀어줄게.”마동철의 말에 장혜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동철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젠 아무 일 없겠지 하고 생각하던 그때 마동철의 이어지는 한마디에 장혜윤은 절망에 빠졌다.“내가 널 풀어준다고는 했지만 우리 동생들이 널 가만히 둘지 모르겠네? 우리 동생들도 널 기꺼이 풀어주겠다고 한다면 그때 풀어줄게.”마동철은 부하들에게 시선을 옮겼다.“얼마 만에 여자를 만났는데 이대로 풀어줘서는 안 되죠. 아깝잖아요.”몇몇 부하들은 욕구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장혜윤에게 다가갔다. 장혜윤의 낯빛이 잿빛이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세 명의 납치범들에게 끌려 다른 안방으로 옮겨졌다....허씨 가문 별장.“서준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밖에서 걸어오는 진서준을 본 허윤진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아까 허성태는 진서준에게 허사연이 납치된 사실을 허윤진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했었다.“밥 얻어먹으러 왔어요.”진서준이 맥 빠진 얼굴로 말했다.“밥이요? 오후 두 시가 넘었는데 지금 밥 차려달라고요?”허윤진은 진서준을 아니꼽게 째려보았다. 그런데 곧바로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평소 허윤진이 진서준과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허성태가 꼭 그녀에게 뭐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
이런 일을 당한 게 한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허윤진도 예전에 납치당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상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우리 언니 납치됐어요?”허윤진이 앞으로 다가가 진서준의 팔을 잡고 물었다.“네. 그러니까 이거 놔요. 사연 씨 구하러 가야 하니까.”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이 가요.”허윤진이 확고한 눈빛으로 진서준을 보며 말했다.“도움은 못 주겠지만 절대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요. 그냥 언니가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서 그래요.”진서준이 허성태의 눈치를 살폈다.“데려가. 윤진이도 이젠 애가 아니야.”허성태가 말했다.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진서준과 허윤진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소형차를 타고 노성동의 옛 골목거리로 달려갔다.허성태는 허씨 가문의 경호원을 붙이지 않았다. 하나는 혹시라도 들킬 위험이 있을까 봐, 다른 하나는 진서준을 믿어서였다. 진서준이라면 천군만마보다도 더 믿음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노성동 옛 골목거리 근처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기 전 진서준은 체내의 영기로 자신의 얼굴을 바꾸었다. 이게 다 허사연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상대가 장혜윤이 찾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진서준의 얼굴을 알 것이다.“서준 씨 맞아요?”얼굴이 확 달라진 진서준을 보며 허윤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네.”진서준의 목소리마저 굵어졌다. 진서준과 계속 한 차에 타고 있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였다.“대박. 역용술도 할 줄 알았어요?”허윤진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가서 사연 씨 구하고 올게요.”진서준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옛 골목거리를 훑어보았다.장혜윤의 휴대 전화 위치가 대략 이쯤으로 잡혔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진서준이 직접 찾아야 했다.진서준이 건물을 일일이 뒤지며 찾아다니던 그때 작은 골목에서 걸어 나오는 두 남자의 모습이 진서준의 눈에 들어왔다.“그 여자 너무 맥이 없는 거 아니야? 애들이 별로 데리고 놀지도 못했는데 바로 기절
담배 연기가 작은 방 안에 자욱했고 짙은 비린내까지 섞여 있었다.“형님, 들어가서 해소하지 않으실래요?”한 부하가 장혜윤이 누워있는 방을 가리키며 헤벌쭉 웃으면서 물었다.“저 여자 맥이 없긴 하지만 기분은 죽여줘요.”마동철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돈만 손에 넣으면 더 예쁜 여자도 마음껏 데리고 놀 수 있어.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릴 때야. 절대 방심해선 안 돼. 누구 하나 방심하면 내가 가만 안 둬!”진지한 마동철의 모습에 부하 다섯 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의자에 앉아있는 허사연은 놀란 가슴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그들이 장혜윤의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처참한 비명이 정확히 들렸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옆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허사연은 알 것 같았다.다만 대체 어떤 여자가 제 발로 이곳에 들어왔는지는 알지 못했다.“사연 씨, 옆방에서 나는 소리 다 들었지?”마동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허사연은 대답하지 않고 눈앞의 검은 그림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만약 마동철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다면 당장 혀 깨물고 죽을 생각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아치들의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무서워하지 마. 우린 돈이 가장 중요해. 사연 씨 아버지가 무사히 돈을 우리에게 넘긴다면 사연 씨는 절대 아무 일이 없을 거야. 이건 내가 장담할게.”조금 전 마동철이 부하의 제안을 허락한 것도 허사연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마동철이 허사연에게 알아듣게 설명하던 그때 진서준은 이미 문 앞까지 도착했다. 노크 소리에 마동철의 한 부하가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 했다.“잠깐. 아직 암호를 얘기 안 했어.”다른 한 부하가 나서서 문을 열려는 부하를 막아섰다.“암호는 무슨. 인제 고작 한 시간이 지났어. 벌써 찾았을 리가 없어.”부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를 맞이하는 건 진서준의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진서준의 주먹 한 방에 문을 연 부하는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공격해!”
진서준이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한줄기의 파란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마동철의 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마동철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에 전해졌다. 총상보다도 더 힘든 고통이었는데 마치 누군가 칼로 그의 살을 베는 것만 같았다.“으악!”마동철의 처참한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바닥에서 뒹굴던 마동철은 1초도 채 안 되어 거품 물고 경련을 일으켰다.진서준은 쏜살같이 허사연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묶고 있던 끈을 풀고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벗겨냈다.“미안해요, 사연 씨. 내가 늦었어요.”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허사연을 본 진서준은 살짝 의아했다.‘아까 죽은 두 놈 사연 씨 말하는 거 아니었어? 사연 씨가 아니면 누구야?”“다시는 서준 씨를 못 보는 줄 알았어요.”허사연은 진서준을 꼭 끌어안았다. 어찌나 꽉 안았는지 그의 몸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진서준을 사랑하기 전까지 허사연은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언장 작성까지 마친 그녀였다.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허성태와 허윤진을 해외로 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뼛속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눈물을 비 오듯 흘리는 허사연을 보고 있자니 진서준은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인제 괜찮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진서준은 허사연의 등을 토닥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마동철은 아직도 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이러다가 아파서 죽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신이 흐릿해졌다 또렷해졌다 자꾸만 반복했다.조금 전 진서준이 쏜 파란 빛은 장철결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술법이었다. 그 술법을 맞은 사람은 누군가 몸을 칼로 쿡쿡 쑤시는 환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어디도 다치지 않았는데 말이다.진서준은 허사연을 납치한 이놈을 쭉 고통의 환각 속에 살게 할 생각이었다.허사연은 울음을 멈추고 옆방을 가리켰다.“아까 어떤 여자가 왔는데 그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에게 강간당했어요.”진서준은 그제야 아까 두 남자가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