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석은 자기가 나설 때가 됐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사, 비싸지도 않네, 뭘. 아내가 좋아하는 거라면 별도 따줘야지.”이아영은 그를 껴안으며 볼에 뽀뽀했다.“사랑해, 여보. 이런 남편이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정민아는 두 사람의 발연기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김예훈은 매장 통째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까짓 샤넬 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여기 괜찮네. 마음에 들어?”김예훈이 정민아 곁으로 다가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매장을 둘러보고 있는 그를 보며 정민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김예훈은 도대체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그녀가 고개만 끄덕인다면 김예훈은 매장 전체를 살 게 분명했다.“민아 언니 마음에 들면 사주려고요? 배보다 배꼽이 크네요.”이아영은 김예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그러나 김예훈은 그녀를 무시하고 정민아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마음에 든다면 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얼마 후 청혼할 것이니 이걸 선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정민아는 백운산 프로젝트 때문에 워낙 골치가 아파 매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여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관심 없어.”“민아 언니, 예훈 씨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거야. 내가 보기엔 여기 있는 백 하나도 살 수 없는걸? 어차피 왔으니까 하나 골라. 우리 남편이 사면 그만이니까.”이아영이 그녀를 유혹했다.“아니야, 집에 많아. 아직 다 써보지도 못했는걸.”정민아는 솔직하게 답했다.“칫!”이아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돈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 왜 저런 소리를 해?’하지만 그녀는 바로 표정을 숨기고 웃으며 말했다.“언니, 남편이 사줄 수 없다는 거 알아. 그러지 말고 하나 골라. 우리 남편이 살 거라니까?”이렇게 말을 했지만 아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백 하나에 몇백만 원을 호가했으니 말이다.
이아영의 끝없는 조롱에 정민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이윽고 정민아는 가장 비싼 백이 전시된 존으로 향했다. 이아영은 순간 머리가 저릿했다. 정민아가 향한 곳에 있는 백은 모두 천만 원이 넘었기 때문이다.그녀가 평소 쳐다보지도 못하는 백을 사려 한다는 생각에 저절로 이가 깨물어졌다.정민아가 가장 비싼 백을 든 순간, 이아영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언니, 너무 하는 거 아니야? 그건 한정판 4억짜리라고!”이아영의 목소리가 떨렸다.“아무거나 고르라며? 그러면 가장 비싼 거로 사야지. 연봉이 억 단위인데 몇억짜리도 못 사줘?”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정민아한테 선물하려고 한 건 김예훈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민아의 욕심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언니는 양심도 없어? 선물한다고 했지, 이렇게 비싼 걸 사준다고는 안 했어!”이아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이것도 못 산다고? 그럼 됐어.”정민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오늘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끝없이 남편을 조롱하는 이아영 때문에 이미 화가 가득 나 있었다.김예훈은 곁에서 흥미진진하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에 정씨 가문의 괴롭힘을 받던 그 여자가 아니었다.“그게 아니라 이렇게 비싼 선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일부러 이걸 고른 거잖아!”이아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남편한테 사달라고 해. 내 남편이 왜 사줘야 하는데? 아, 참, 남편이 그걸 살 돈이 없지?”그녀는 김예훈을 조롱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만약 자기 때문에 정민아가 이혼한다면 그녀의 공로는 엄청나게 된다.이때, 누군가가 매장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이 한정판 백, 포장해주세요.”
이에 모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비싼 백을 망설임도 없이 사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이아영과 유문석은 고개를 돌렸다.“헉! 송준?”이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아침에 터진 뉴스 덕분에 정민아는 바로 송준을 알아봤다. 그러나 그녀는 송준이 왜 이 백을 사고 자기한테 주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아침에 사진에 뒷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진짜 김예훈이란 말인가?정민아는 고개를 돌려 김예훈을 봤다. 송준도 고개를 돌려 김예훈의 눈치를 봤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예훈 옆에서 1년여 동안 경호를 맡은 송준은 바로 그가 화났음을 알아챘다.이에 송준은 바로 설명하기 시작했다.“정 대표님, 갑작스럽겠지만 얼마 전 CY그룹 회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 대표님이 마침 우리 쇼핑몰의 십만 번째 고객이라 이 선물을 주려는 겁니다.”비록 억지스러웠지만 유문석과 이아영은 바로 믿었다. 그들은 정민아와 송준이 무슨 사이라도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유문석은 자신감을 되찾고 송준한테로 다가갔다.“송 대표님, 저 기억나죠?”송준은 그를 훑어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김예훈의 체면을 봐서 조심스레 물었다.“이분은...”“전 CY그룹의 팀장 유문석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만난 적이 있죠...”유문석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는 송준이 자기를 알아보길 바랐다.“팀장?”송준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누군지 모르겠고 당신과 알고 지낼 필요도 없습니다.”송준의 솔직한 답변 때문에 유문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이때, 임은숙이 의문스레 물었다.“송 대표님, 유문석이랑 친구 사이 아니세요?”그녀는 유문석을 깎아내릴 생각이 없었다. 단지 송준이 기억하지 못한 거라고 믿었다.송준은 김예훈의 표정을 살피고 말을 이어갔다.“죄송합니다. 누군지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죠.”말을 마친 송준은 매장을 나섰다.총사령관이 화가 났으니 얼른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송준이 떠난 후에야 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늘 좋은 사람을 만났네요. 저분이 화를 내지 않은 게 다행이에요.”이아영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언니, 우리 남편이 송준이랑 친구가 아니라고 해도 언니 남편보다 백배, 아니 천 배는 나아!”“그래? 하지만 우리 남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그건...”이아영은 화가 나 몸이 부르르 떨렸다.이때, 임은숙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가족끼리 왜 이러는 거야? 남들이 보면 웃어.”정민아는 입을 다물었다. 임은숙은 이아영 편이었다.‘모두 같은 편이었네.’하지만 김예훈은 화를 내지 않고 임은숙과 장미순을 보기만 했다. 이건 그한테 게임에 불과했다. 이 게임이 어떻게 끝날지 그도 궁금했다.이들은 샤넬 매장에서 나온 후 다른 매장으로 향했다.“잠시만요, 제가 뭘 두고 온 것 같아요.”김예훈이 갑자기 말했다. 그는 재빨리 샤넬 매장으로 달려갔다.“아마 백 사러 간 것 같네요. 뭐, 세일 백이나 사러 간 거겠죠.”이아영은 득의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김예훈이 아내 카드로 백 사는 광경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정민아는 김예훈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함이 들었다.‘진짜 백 사러 간 건 아니겠지?’김예훈이 또다시 예전처럼 매장 전체를 살까 봐 걱정되었다.“방금 저 백 포장해주세요.”김예훈은 샤넬 매장으로 들어오자마자 블랙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그제야 직원들은 송준이 왜 그렇게 예의를 갖췄는지 알게 되었다. 김예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잠시 후, 김예훈은 백 포장을 들고 매장을 나섰다.“진짜 산 거예요? 얼마짜리에요? 20만 원?”이아영이 조롱하듯 웃었다.김예훈은 아무 말도 없이 정민아 곁으로 다가가 포장을 쥐여줬다.“여보, 수고했어.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그래.”정민아는 남편이 주는 선물이라면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언니, 그래도 어떤 백인지 한번 열어봐.”이아영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집에 가서 볼게.”정민아가 거절했다.
곧이어 이아영은 정민아의 손에 든 물건을 잽싸게 낚아채더니 피식 웃었다.“언니, 무슨 볼썽사나운 물건도 아니고 굳이 집에 가서 봐야 할 이유라도 있어? 설마 너무 싸구려라서 망신당할까 봐?”“이아영, 작작해!”정민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김예훈이 자신한테 준 선물인데, 이아영이 대체 무슨 명목으로 뺏어간단 말인가!이아영은 본인의 무례함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이게 다 언니를 위해서야. 무능한 언니 남편이 눈속임하려고 아무거나 가져오면 어떡해? 99.5% 할인해서 40만 원 정도는 되는 구형 모델일 수도 있으니까 다른 선물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이아영은 말을 이어가면서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하지만 포장지 속의 내용물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한정판이라니? 그것도 무려 4억짜리 한정판이라고?!순간, 이아영은 잘못 본 줄 알고 연신 눈을 비볐다.이때 유문석도 다가와 한 마디 거들었다.“누나, 만약 쓰레기 같은 물건이라면 내가 10배 더 좋은...”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을 닫고 얼굴을 찡그렸다. 김예훈이 다름 아닌 이 한정판 가방을 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순간 유문석도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이내 김예훈을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고작 병신같은 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사람이 무슨 돈이 이렇게 많단 말이지?4억에 육박하는 액수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평생 벌어도 4억이 없는 일반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김예훈, 너 혹시 훔친 거야?”이아영은 김예훈의 코앞에서 손가락질하며 따졌다.“이제 말 놓기로 한 건가? 네가 살 형편이 안 된다고 남들도 살 수 없는 건 아니잖아?”김예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하지만 이아영은 김예훈이 샀다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이 쓸모없는 자식한테 몇십만이 있으면 몰라도 몇억 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그나마 이 자식이 싸구려 물건을 사서 점원이 방심한
“다들 눈이 멀었어요? 이렇게 귀한 제품이 바꿔치기 당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어요?”이아영은 도도한 걸음걸이로 매장으로 들어서자 큰소리로 외쳤다.몇몇 점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점장이 다가와서 물었다.“손님,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이해가 안 가다니? 저기 좀 보세요. 저 사람이 가방을 사고 실제로는 뭘 들고 나갔는지!”이아영은 등 뒤의 김예훈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점장은 오리무중한 표정으로 이아영을 바라보더니 김예훈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저분께서 이 가방을 산 게 맞는데요?”점장의 공손한 태도는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방금 훔쳐본 김예훈의 잔액이 대체 0이 몇 개 있는지 아직도 가늠이 안 갔다.“그럴 리가! 두 눈 크게 뜨고 똑똑히 확인해봐요! 저런 인간이 어떻게 이 가방을 살 수 있단 말이죠?”이아영은 점점 조바심이 났다. 어디까지나 김예훈을 망신시키기 위해서였지, 스스로 체면 깎이려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손님, 예의 좀 지켜주시겠어요? 그리고 저분께서 구매한 가방이 확실해요. 영수증도 있으니까 잘 보세요!”점장은 불쾌한 티를 팍팍 났다.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봤어도 이렇게 막무가내인 적은 처음이었다.남이 무엇을 사든 본인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이아영은 그 말을 듣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뒤적거리며 영수증을 꺼내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영수증에는 금액이 찍혀 있었고, 정확하게 3억 5150만 원이었다.그렇다면 이 가방을 진짜 김예훈이 돈 주고 샀단 말인가? 이럴 수가?!고작 쓰레기 같은 녀석한테 무슨 돈이 이렇게 많지?이아영은 무의식중에 정민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김예훈이 그녀의 카드를 긁었나?“언니 진짜 대단하구나. 고작 체면치레를 위해 이런 짓까지 서슴없이 해? 언니를 너무 얕잡아 봤나 봐.”이아영이 냉소를 지었다.“내가 왜?”정민아는 어리둥절하기만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또 뭐 하려고?”이아영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설마 매장에 다시 들어왔으니 민아 언니한테 또 선물 사준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주 가관이네, 그럼 사! 어디 한번 매장에 있는 가방 싹 다 결재해보지? 그게 가능하다면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해줄 테니까.”이아영은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다. 김예훈이 4억 가까이 되는 가방을 샀다는 자체만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따라서 매장에 있는 가방을 전부 구매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적어도 수십억이 넘지 않겠냐는 말이다.“그래?”김예훈은 피식 웃더니 정민아를 힐긋 바라보았다.“이따가 잊지 말고 찍어.”말을 마친 김예훈은 점장을 돌아보았다.“여기 있는 거 다 포장해주세요.”내내 대꾸하느라 바쁜 점장은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진짜 다 구매한단 말인가? 매장에 있는 제품을 전부 더하면 족히 몇십 억은 넘었다!“손님, 농담이시죠?”점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아니요.”김예훈이 딱 잘라 말했다.점장은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비록 김예훈이 돈이 많은 건 알고 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으로 물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순간 그녀는 머리가 띵해 나더니 멍한 느낌이 들었다.반면, 이아영은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김예훈이 진짜 그녀의 도발에 응할 줄이야! 그녀를 망신 주려고 작정한 건가?다만 말은 쉽게 내뱉어도 과연 결제할 돈이 있냐는 말이다.정민아가 아무리 대표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몇십억에 육박하는 현금이 있을 리가 없다고 장담했다.“얼른 포장해서 계산하지 않고 뭐해요?”이때, 이아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이아영은 점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저런 못난 놈이 자기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꼴을 어찌 눈 뜨고 지켜볼 수 있냐는 말이다.반면, 옆에 있던 유문석은 식은땀이 확 났다.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으로서 그는 김예훈의 태연한 모습은 진짜 아무렇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며, 절대로 허세 부리는 느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
임은숙도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말했다.“민아야, 내가 몇 번을 얘기했니? 아무리 돈이 있어도 이렇게 함부로 쓰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대체 어디서 생긴 돈인지 제대로 확인해봐야지 않겠어? 만약 또 빌린 돈이라면 김예훈한테 본인이 갚을 예정이며 우리랑 상관없다는 내용으로 서명하도록 해.”임은숙의 말을 듣자 장미순 가족은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돈을 빌려서 허세를 부려? 나중에 어떻게 갚을지 두고 볼 테야!정민아는 의혹이 가득 담긴 얼굴로 김예훈을 바라보았다.비록 김예훈의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돈을 빌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어쨌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이상 무려 몇십억을 섣불리 빌려주는 집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더 중요한 건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김예훈은 방금 전화할 틈조차 없었다.일단 마음속으로 스멀스멀 번지는 의구심을 지우고 정민아는 느릿느릿 말했다.“엄마, 미순 이모, 오늘 누구한테 본때를 보여주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방금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매장까지 돌아와 소란 피운 사람을 다들 직접 목격했을 텐데, 쟤가 저한테 함부로 대하는 건 당연하고,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지만 남을 괴롭히는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요?”이아영의 지나친 행동에 정민아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순간 눈이 마주친 장미순과 임은숙은 너나 할 것 없이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오늘에 있었던 모든 일은 정민아가 김예훈을 싫어하거나 김예훈의 체면을 잃게 하는 계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망신당하는 꼴이 되었다.이때, 김예훈이 입을 열었다.“이아영, 네가 했던 말을 잊은 건 아니지?”김예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사람이 그를 째려보았다.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방금 이아영은 김예훈이 모든 제품을 결제하는 순간 무릎이라도 꿇고 절을 하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그런데 문제는 김예훈 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는 이아영이 어찌 진짜 무릎 꿇고 절을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이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고작 데릴사위한테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