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택배 하나 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경비원이 박민정에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뭘 보내신 거지?’택배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 방에서 박윤우가 뛰쳐나왔다.택배는 언제나 설레는 법, 두 사람은 함께 택배를 확인하기 시작했다.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고 말았다.박스 안에는 여자아이의 장난감과 일상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장난감과 일부 용품은 하도 낡아서 누렇게 변하기도 했다.내용물을 보자마자 박민정은 단번에 어릴 적 자기가 사용했던 물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박민호와 한수민은 전에 박씨 가문 옛 저택을 법원에 공탁으로 넘겼었다.그 옛 저택을 이지원이 먼저 사들였고 나중에 유남준이 소유권을 차지하면서 박민정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다시 박씨 가문 옛 저택으로 들어갔을 때 박민정은 어릴 적 자기가 사용했었던 물건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었다.“한수민이 이 모든 걸 챙기고 있었다는 말이야?”박민정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수민이 챙겼을 리가 없다면서.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윤우는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엄마, 여기 안에 있는 거 다 엄마 것이야? 엄마가 어릴 적에 썼었던 물건들이야?”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박민정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일기장 위에는 ‘박민정’이라고 떡 하니 쓰여 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래. 학교 다닐 때 썼던 물건들이야.”이윽고 박민정은 누렇게 바래버린 일기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었다.첫 페이지에는 진주시 유씨 가문으로 처음 왔을 때의 심정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8월22일, 날씨 맑음. 드디어 아빠와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도 인제 아빠와 엄마가 있다. 너무 좋고 행복하다.][8월23일, 날씨 흐림.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나에게 있는 것 같다. 나만 잘하면 아빠도 엄마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아줌마께서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여 두
‘쓰레기?’한수민의 말을 듣고서도 박민정은 예전처럼 슬프거나 화나지 않았다.“그럼, 감사히 잘 받을게요.”“한 여사님, 앞으로 부디 천국으로 가시길 바랄게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박민정이었다.하지만 갑자기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되면서 서서히 흔들리고 말았다.한수민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한수민을 친엄마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매번 상처받고서도 괜찮은 척했었던 자신을 떠올리면서 조금씩 무너졌다.한편, 병원 안에서.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한수민은 박민정이 마지막으로 했던 그 말을 끊임없이 되새겼다.“한 여사님, 앞으로 부디 천국으로 가시길 바랄게요.”‘천국?’‘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건데... 천국은 무슨...’한숨을 내쉬면서 한수민은 앨범을 열어 보았다.그 안에는 어린 시절 박민정이 썼었던 그 일기들이 저장되어 있었다.실은 금고를 되찾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한수민이 먼저 확인했었다.박민정의 일기장을 한번 또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본 한수민이다.만약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박민정을 끔찍이 여기면서 살 것이라고 후회를 금치 못했다.간병인 역시 진심으로 후회하고 한수민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사모님, 제가 로펌에 문의를 해보았는데, 그쪽에서 의뢰 사안을 접수할 수 있다고 했어요. 다만 지금 사모님께서 금전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닌 점을 고려하여 벤처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어요. 패소하게 되면 변호사 수임료를 지급하지 않으셔도 되고 만약 승소하게 된다면 10%를 변호사 수임료로 지급해야 할 거예요.”거동이 불편한 한수민은 윤석후와의 이혼 소송 문의를 간병인에게 부탁했었다.만약 승소하게 된다면 한수민이 받게 될 모든 재산의 10%를 변호사 수임료로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그와 반대로 만약 패소하게 된다면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문적 박대를 당한 추경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뭐라도 듣고 싶어서 이내 안달 난 모습으로 말이다.다행히도 방음 효과가 꽤 뛰어났고 베란다에서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추경은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어? 꽉 막힌 공간에 남녀 단둘이 들어가다니!”일그러진 얼굴로 추경은이 내내 중얼거렸다.옆에 박윤우가 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한참 박민정을 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다리 쪽이 젖어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긴가민가하면서 고개를 숙인 추경은은 액체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박윤우를 보게 되었다.박윤우는 추경은의 다리에 그 액체를 붓고 있었고 그 냄새는 유난히 지독했다.“아! 박윤우! 뭐 하는 짓이야!”세상 순수한 눈빛으로 박윤우가 대답했다.“경은 이모, 이건 제가 아줌마한테서 가지고 온 거예요. 꽃에 주는 비료라고 하던데, 이거 이렇게 많이 뿌리면 꽃이 빠르게 자란다고 했었어요.”“경은 이모 다리가 하도 낫지를 않아서 이렇게라도 하면 좀 빨리 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비료 주고 있는 거예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은 바로 사색이 되어버렸다.이윽고 비명과 함께 미친 듯이 욕실로 뛰어갔다.허겁지겁 달려가는 그 모습을 보고서 박윤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까지 쳤다.“흥! 감히 우리 엄마를 욕하다니!”같은 시각, 방안에서.베란다에서 한창 얘기를 하고 있던 박민정과 정민기는 밖의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민정 씨, 제가 알아본 것에 따르면 그때 이지원은 진주시를 떠나지 않고 권진하를 찾아가서 그와 사적으로 만남을 유지했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권진하가 이지원에게 특별히 집까지 마련해줬다고 해요.”정민기의 말을 듣고 난 박민정은 조금 믿어지지 않았다.“네? 제 기억으로는 권진하에게 따로 약혼녀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지원의 친한 친구인 하예솔이 권진하의 약혼녀였던 것 같은데요?”정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예솔도 지금까지 속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알게 된다면 권진하와 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예솔을 비롯한 10명 이상의 동창생이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했다.박민정은 자기만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하면 하예솔도 반드시 참가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였다.내일이면 휴가철 마지막 날이다.과 반장은 내일 저녁 8시에 만나자면서 레스토랑 위치를 채팅방에 올렸다.하예솔은 더욱더 정확한 소식을 얻고자 바로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 대학교 채팅방 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이지원이다.내내 박민정으로부터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지원은 지난번 일이 자기한테 파급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박민정의 답장을 따로 받지 못했다.모임에 참가하겠다고 올린 답장 외에는...“봤어. 근데 왜?”이지원은 애써 덤덤한 척을 했다.“같이 가자. 박민정 걔가 지금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하예솔 역시 박민정이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지가 아무리 잘나 봤자 박민정이지!’하지만 이지원은 살짝 망설였다.“그냥 안 갈래. 나 지금 걔 때문에 숨어 살고 있어. 모임에 갔다가 도려 당하게 될지도 몰라.”그 말을 듣고서 하예솔이 오히려 발끈했다.“안 돼! 너 꼭 와! 걔가 아무리 잘나가는 작곡가라고 하더라도 제삼자인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제삼자는 이유가 어찌 됐든 세상 제일 나쁜 년이고 욕을 아무리 먹어도 싸!”그렇다, 하예솔은 아직도 박민정이 이지원과 유남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그만하고 너도 간다고 반장한테 말할게.”하예솔은 이지원의 동의도 없이 바로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우리 이지원 스타님도 가실 거야. 그러니 끼지 말아야 할 사람은 알아서 끼지 않은 게 좋을 거야.]채팅방을 확인한 이지원은 바로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먼저 하예솔이 박민정에게 미움을 사게 하고 자기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풀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이내 마음이 약한 박민정이므로 하예솔과의 ‘싸움’에서 박
유남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다시 박민정을 끌어안았다.그러자 박민정은 손을 뿌리치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옆으로 몸을 옮겼다.“내 몸에 손대지 마요.”나지막한 소리로 ‘경고’까지 하면서 말이다.박민정의 말과 행동에 지금 몹시나 답답한 유남준이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다친 유남준을 위해 눈물을 뚝뚝 흘렸던 박민정이기 때문이다.유남준이 괜찮아진 것을 보고 난 뒤,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럼, 네가 내 몸에 손대.”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고서 유남준은 자기 가슴 위에 놓았다.졸음이 밀려온 박민정은 이내 귀찮아하면서 그 손을 뿌리쳐버렸다.유남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오기라도 발동한 듯이 또 손을 덥석 잡아 가슴에 놓았다.임신한 박민정은 지금 호르몬 분비 변화로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그만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린 채 소리까지 치고 말았다.“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짜증 난다고요!”말을 마치고 이불을 돌돌 말고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멍해진 유남준만 침대 중간에 덩그러니 남겨 둔 채 박민정은 바로 꿀잠에 들었다.유남준에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큰 소리로 말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하는 사람은 오직 박민정 한 명뿐일 것이다.그렇게 유남준은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이튿날 아침, 유남준은 어두운 얼굴로 차에 올랐다.주위 공기마저 무거워지는 것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숨 막히는 듯한 상황에 서다희는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도저히 보고를 올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유남준의 이성을 잃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민정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다희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대표님, 윤석후 회사에 관한 사안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사모님께 말씀해 드릴까요?”박민정에게 알려주면 반드시 기뻐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무려 시장 최저 가격으로 윤석후의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하지만 어젯밤 박민정에게 하대를 당한 것을
오늘 이지원은 예전과 달리 메이크업에도 옷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얼굴도 약간 창백한 것이 수심에 잔뜩 녹아내린 모습이었다.박민정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예를 갖춘 채 먼저 눈웃음을 건넸다.며칠 전과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기고만장함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자리를 찾아 앉은 박민정은 따뜻한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거의 다 모이게 되자, 과 반장이 나서서 바삐 돌기 시작했다.“자, 다들 얼른 자리 찾아 앉아. 이렇게 다시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더욱 즐겁게 지내도록 하자.”박민정 곁에 앉은 누군가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정아, 얼마 전에 기사에서 그러던데, 네가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면서? 그게 사실이야?”“맞아. 그게 나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리를 듣고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박민정에게 시선을 쏠리게 되었다.저마다 다양한 시선과 표정으로 말이다.“민정아, 너 진짜 성공했구나!”“너 난청 환자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서 배워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민정이 네가 작곡가로 성공하다니 너무 놀랍고 대단한 것 같아!”“...”다들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재수 없어.’계속 듣기에 거북했던 하예솔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그딴 곡 몇 개 쓴 거 가지고 유난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다들?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하예솔의 말에 조금 전까지 박민정에게 칭찬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절대로 말려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이다.그러나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람인 이지원이 박민정의 손을 잡고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민정아, 마음에 담아주지 마. 예솔이 여기로 오기 전에 술 좀 마셨거든 아마 취한 김에 하는 소리일 거야.”“지원아!”하예솔은 이지원을 부를 때 음을 길게 뺐다.“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 술 마시고 온 거 아니야. 취할
“그럴 리가.”박민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 웃음 한 번에 이지원은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우리 계속 예전처럼 친한 사이로 지내는 건 어때?”이지원이 말하면서 천천히 다가가 박민정의 팔짱을 꼈다.그러나 박민정은 바로 이지원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그 이유가 뭔지 알아? 너한테 화낼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야.”“나 죽이려고 했었지? 나라고 너 가만히 둘 것 같아? 앞으로 넌 생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그대로 제자리에 굳어버린 이지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이지원은 곧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박민정, 나한테 얼마든지 복수해도 좋아. 근데 유남준도 연지석에게도 도움 청하지 마. 그건 좀 불공평하잖아.”이지원은 지금껏 박민정을 자기 상대로 여기지 않고 있다.박민정이 자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지원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박민정은 권해신에게 납치를 당하고 나서 이지원도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리지 않았다.이지원의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비아냥거리면서 웃었다.“걱정하지 마. 절대 그럴 리 없어.”머지않아 곧 그 보복을 당하게 될 이지원이니 말이다.남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확답을 듣게 되자 이지원은 박민정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곧바로 가식적인 모습을 거두어들이고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앞장서서 테이블로 돌아갔다.어느 정도 분위기 무르익자, 사람들은 서서히 오락을 즐기려고 했다.본격적으로 2차를 시작하기 전에 과 반장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자, 다들 5년 전에 우리가 했었던 약속 기억나? 5년 후의 만남에서 그때 학교에서 찍었던 사진이랑 동영상 풀기로 했었잖아.”사람들은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다.동영상과 사진을 얼른 보여달라면서 다들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이윽고 과 반장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동영상을 틀기 시작했다.순간 대학교 시
과연 말을 뱉자마자 이지원은 후회하고 말았다.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산 이지원은 하예솔마저 잃을 수 없었다.하예솔이 또다시 뺨을 후려치려고 하자 이지원은 단번에 그 손을 막아버렸다.“예솔아, 이러지 마. 보는 눈도 많은데...”하예솔은 그제야 그동안 박민정이 느꼈던 그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단 한 번도 후회라는 것을 한 적이 없는 하예솔인데, 지금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다.“이지원, 앞으로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린 더 이상 친구도 뭐도 아니야. 난 평생을 널 원수로 생각하면서 살 거야!”역시나 당사자가 되어야만 당사자의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법인 듯싶다.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박민정에게 온갖 심한 말을 퍼부었던 하예솔의 언행을 옆에서 지켜봤었으니 말이다.유남준과 혼인 신고까지 마친 박민정에게 제삼자라고 했던 하예솔.이유를 불문하고 사랑받지 않는 쪽이 제삼자라고 주장했던 하예솔.그릇된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하예솔을 사람들은 도와줄 리가 없었다.이지원은 지금 하예솔과 사적으로 이 일을 해결하고 싶은 심정뿐이다.“예솔아, 우리 다른 데로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제발 여기서 하지 말고 다른 데로 가자.”“꺼져!”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하예솔은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지금 당장 진주시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생지옥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고 말 거야!”홧김에 하는 말도 과장된 말도 아니다.하씨 가문에서 나서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니 말이다.애지중지 키운 자기 딸을 배신했다는 소리를 하예솔의 부모님이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제법 진지해 보이는 하예솔의 반응에 이지원은 주위를 훑어보았다.이윽고 이지원의 시선은 박민정에게 떨어졌다.“네가 꾸민 짓이지?”조금 전 화장실 앞에서 박민정이 했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이지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필경 과 반장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과 반장이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