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하예솔을 비롯한 10명 이상의 동창생이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했다.박민정은 자기만 모임에 참가하겠다고 하면 하예솔도 반드시 참가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였다.내일이면 휴가철 마지막 날이다.과 반장은 내일 저녁 8시에 만나자면서 레스토랑 위치를 채팅방에 올렸다.하예솔은 더욱더 정확한 소식을 얻고자 바로 이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너 대학교 채팅방 봤어?”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이지원이다.내내 박민정으로부터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지원은 지난번 일이 자기한테 파급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박민정의 답장을 따로 받지 못했다.모임에 참가하겠다고 올린 답장 외에는...“봤어. 근데 왜?”이지원은 애써 덤덤한 척을 했다.“같이 가자. 박민정 걔가 지금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하예솔 역시 박민정이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지가 아무리 잘나 봤자 박민정이지!’하지만 이지원은 살짝 망설였다.“그냥 안 갈래. 나 지금 걔 때문에 숨어 살고 있어. 모임에 갔다가 도려 당하게 될지도 몰라.”그 말을 듣고서 하예솔이 오히려 발끈했다.“안 돼! 너 꼭 와! 걔가 아무리 잘나가는 작곡가라고 하더라도 제삼자인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 제삼자는 이유가 어찌 됐든 세상 제일 나쁜 년이고 욕을 아무리 먹어도 싸!”그렇다, 하예솔은 아직도 박민정이 이지원과 유남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그만하고 너도 간다고 반장한테 말할게.”하예솔은 이지원의 동의도 없이 바로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우리 이지원 스타님도 가실 거야. 그러니 끼지 말아야 할 사람은 알아서 끼지 않은 게 좋을 거야.]채팅방을 확인한 이지원은 바로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먼저 하예솔이 박민정에게 미움을 사게 하고 자기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풀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이내 마음이 약한 박민정이므로 하예솔과의 ‘싸움’에서 박
유남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다시 박민정을 끌어안았다.그러자 박민정은 손을 뿌리치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옆으로 몸을 옮겼다.“내 몸에 손대지 마요.”나지막한 소리로 ‘경고’까지 하면서 말이다.박민정의 말과 행동에 지금 몹시나 답답한 유남준이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다친 유남준을 위해 눈물을 뚝뚝 흘렸던 박민정이기 때문이다.유남준이 괜찮아진 것을 보고 난 뒤,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그럼, 네가 내 몸에 손대.”박민정의 손을 덥석 잡고서 유남준은 자기 가슴 위에 놓았다.졸음이 밀려온 박민정은 이내 귀찮아하면서 그 손을 뿌리쳐버렸다.유남준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오기라도 발동한 듯이 또 손을 덥석 잡아 가슴에 놓았다.임신한 박민정은 지금 호르몬 분비 변화로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그만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린 채 소리까지 치고 말았다.“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짜증 난다고요!”말을 마치고 이불을 돌돌 말고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멍해진 유남준만 침대 중간에 덩그러니 남겨 둔 채 박민정은 바로 꿀잠에 들었다.유남준에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큰 소리로 말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하는 사람은 오직 박민정 한 명뿐일 것이다.그렇게 유남준은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이튿날 아침, 유남준은 어두운 얼굴로 차에 올랐다.주위 공기마저 무거워지는 것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았다.숨 막히는 듯한 상황에 서다희는 자기도 모르게 유남준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도저히 보고를 올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유남준의 이성을 잃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박민정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다희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대표님, 윤석후 회사에 관한 사안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사모님께 말씀해 드릴까요?”박민정에게 알려주면 반드시 기뻐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은 무려 시장 최저 가격으로 윤석후의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하지만 어젯밤 박민정에게 하대를 당한 것을
오늘 이지원은 예전과 달리 메이크업에도 옷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얼굴도 약간 창백한 것이 수심에 잔뜩 녹아내린 모습이었다.박민정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예를 갖춘 채 먼저 눈웃음을 건넸다.며칠 전과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기고만장함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자리를 찾아 앉은 박민정은 따뜻한 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거의 다 모이게 되자, 과 반장이 나서서 바삐 돌기 시작했다.“자, 다들 얼른 자리 찾아 앉아. 이렇게 다시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더욱 즐겁게 지내도록 하자.”박민정 곁에 앉은 누군가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정아, 얼마 전에 기사에서 그러던데, 네가 바로 그 유명한 작곡가 민 선생이라면서? 그게 사실이야?”“맞아. 그게 나야.”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리를 듣고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박민정에게 시선을 쏠리게 되었다.저마다 다양한 시선과 표정으로 말이다.“민정아, 너 진짜 성공했구나!”“너 난청 환자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서 배워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민정이 네가 작곡가로 성공하다니 너무 놀랍고 대단한 것 같아!”“...”다들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재수 없어.’계속 듣기에 거북했던 하예솔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그딴 곡 몇 개 쓴 거 가지고 유난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다들?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하예솔의 말에 조금 전까지 박민정에게 칭찬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절대로 말려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말이다.그러나 오히려 예상치 못한 사람인 이지원이 박민정의 손을 잡고서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민정아, 마음에 담아주지 마. 예솔이 여기로 오기 전에 술 좀 마셨거든 아마 취한 김에 하는 소리일 거야.”“지원아!”하예솔은 이지원을 부를 때 음을 길게 뺐다.“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 술 마시고 온 거 아니야. 취할
“그럴 리가.”박민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 웃음 한 번에 이지원은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우리 계속 예전처럼 친한 사이로 지내는 건 어때?”이지원이 말하면서 천천히 다가가 박민정의 팔짱을 꼈다.그러나 박민정은 바로 이지원의 손길을 뿌리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그 이유가 뭔지 알아? 너한테 화낼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야.”“나 죽이려고 했었지? 나라고 너 가만히 둘 것 같아? 앞으로 넌 생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그대로 제자리에 굳어버린 이지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하지만 박민정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이지원은 곧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박민정, 나한테 얼마든지 복수해도 좋아. 근데 유남준도 연지석에게도 도움 청하지 마. 그건 좀 불공평하잖아.”이지원은 지금껏 박민정을 자기 상대로 여기지 않고 있다.박민정이 자기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지원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박민정은 권해신에게 납치를 당하고 나서 이지원도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유남준에게 알리지 않았다.이지원의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비아냥거리면서 웃었다.“걱정하지 마. 절대 그럴 리 없어.”머지않아 곧 그 보복을 당하게 될 이지원이니 말이다.남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확답을 듣게 되자 이지원은 박민정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곧바로 가식적인 모습을 거두어들이고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앞장서서 테이블로 돌아갔다.어느 정도 분위기 무르익자, 사람들은 서서히 오락을 즐기려고 했다.본격적으로 2차를 시작하기 전에 과 반장이 운을 떼기 시작했다.“자, 다들 5년 전에 우리가 했었던 약속 기억나? 5년 후의 만남에서 그때 학교에서 찍었던 사진이랑 동영상 풀기로 했었잖아.”사람들은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흥분하기 시작했다.동영상과 사진을 얼른 보여달라면서 다들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이윽고 과 반장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동영상을 틀기 시작했다.순간 대학교 시
과연 말을 뱉자마자 이지원은 후회하고 말았다.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산 이지원은 하예솔마저 잃을 수 없었다.하예솔이 또다시 뺨을 후려치려고 하자 이지원은 단번에 그 손을 막아버렸다.“예솔아, 이러지 마. 보는 눈도 많은데...”하예솔은 그제야 그동안 박민정이 느꼈던 그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단 한 번도 후회라는 것을 한 적이 없는 하예솔인데, 지금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다.“이지원, 앞으로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린 더 이상 친구도 뭐도 아니야. 난 평생을 널 원수로 생각하면서 살 거야!”역시나 당사자가 되어야만 당사자의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법인 듯싶다.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박민정에게 온갖 심한 말을 퍼부었던 하예솔의 언행을 옆에서 지켜봤었으니 말이다.유남준과 혼인 신고까지 마친 박민정에게 제삼자라고 했던 하예솔.이유를 불문하고 사랑받지 않는 쪽이 제삼자라고 주장했던 하예솔.그릇된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하예솔을 사람들은 도와줄 리가 없었다.이지원은 지금 하예솔과 사적으로 이 일을 해결하고 싶은 심정뿐이다.“예솔아, 우리 다른 데로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제발 여기서 하지 말고 다른 데로 가자.”“꺼져!”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하예솔은 이를 악물고 덧붙였다.“지금 당장 진주시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생지옥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고 말 거야!”홧김에 하는 말도 과장된 말도 아니다.하씨 가문에서 나서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니 말이다.애지중지 키운 자기 딸을 배신했다는 소리를 하예솔의 부모님이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제법 진지해 보이는 하예솔의 반응에 이지원은 주위를 훑어보았다.이윽고 이지원의 시선은 박민정에게 떨어졌다.“네가 꾸민 짓이지?”조금 전 화장실 앞에서 박민정이 했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이지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필경 과 반장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과 반장이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내
박민정 역시 자기도 모르게 롤스로이스에 시선이 쏠리게 되었다.어디서 많이 본 듯한 차인 것 같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자기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먼저 떠나려고 할 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차 문이 열리고 서다희가 차에서 내려왔다.“사모님.”서다희는 성큼성큼 박민정을 향해 걸어갔다.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서다희가 바로 유남준의 비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의외라는 듯 눈이 동그래진 박민정이다.“서 비서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대표님도 함께 오셨습니다.”서다희는 눈으로 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차창이 내려오자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콧날과 남자다운 턱선이 시야로 들어왔다.“대표님께서 사모님과 함께 귀가하자고 하셨습니다.”서다희의 말을 듣고 난 뒤 사람들의 시선은 롤스로이스에 앉아 있는 유남준에게 쏠리게 되었다.다들 자기도 모르게 부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눈멀었다고 하지 않았어?’‘근데 왜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하물며 지금 유남준이 타고 온 롤스로이스는 실거래가 없는 한정판이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기를 직접 데리러 올 것으로 생각지 못했다.“네.”입꼬리를 올리면서 박민정은 동창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롤스로이스에 오른 박민정을 보고서 하예솔과 이지원은 마음이 꽤 복잡했다.그때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남준이 박민정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남준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지원이라고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어? 이지원과 유남준이야말로 찐사랑이라고 박민정이 제삼자라고 그러지 않았어?”그 말을 이지원과 하예솔이 했었다.지금 하예솔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무척이나 수치스럽고 비할 데 없이 후회하고 있다.‘이지원 저 미친년의 말에 넘어가다니! 하예솔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이지원이 어디로 가든 유남준은 단 한 번도 직접 데리러 온 적이 없다.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덧붙였다.“앞으로 헛소리하는 거 듣지도 말고 대꾸도
두원 별장에 도착하자 유남준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목이 빠지게 유남준을 기다리고 있었던 추경은은 그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남준 오빠, 많이 늦었네? 어디서 오는 길이야?”활짝 웃으면서 말을 거는 그 순간 잇달아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서 금세 입꼬리가 내려갔다.“새언니도 같이 오셨네요. 동창 모임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유남준이 이에 대해 모르고 있을까 봐 추경은은 일부러 ‘동창 모임’에 어세를 높여 말했다.‘난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박윤우에게만 말해줬던 일을 추경은 역시 알고 있어서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윤우가 말했나?’하지만 박윤우는 대놓고 추경은을 싫어하고 있다.그 말인즉슨, 절대 추경은에게 알려줄 리가 없다는 뜻이다.그 당시 동창 모임에 간다고 박윤우에게 말했을 때, 가정부도 옆에 함께 있었다.요즘 가정부는 추경은과 유난히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지난번 추경은한테 차 사고가 났을 때도 가정부는 추경은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있다.가정부와 함께 보내온 세월이 있는 박민정은 상대가 아주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종종 상황에 따라서 본다면 가정부는 지금 추경은의 말에 넘어가고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조만간 기회를 찾아 가정부 앞에서 추경은의 가면을 벗기겠다면서 박민정은 속으로 다짐했다.“네, 동창 모임 끝나고 오는 길이에요. 남준 씨가 직접 모임 장소까지 데리러 온 거 있죠.”추경은의 기분을 망치려고 박민정은 일부러 약을 올렸다.역시나 추경은은 단번에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남준 오빠 새언니한테 참 지극정성이네요. 저도 남준 오빠처럼 와이프만 바라보는 남자랑 결혼했으면 좋겠는데...”박민정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날카로운 모습으로 말했다.“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남준 씨는 딱 한 명이잖아요.”소리 없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유남준은 서서히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자기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박민정의
그 말을 듣고서 유남준은 오기가 발동했다.“네가 배우고 싶은 거 나 역시 가르쳐줄 수 있어.”유남우보다 못난 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유남준이다.안타깝게도 박민정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이불을 꼭 덮으면서 중얼거렸다.“알았어요. 앞으로 남준 씨한테 물어보도록 할 게요.”눈까지 감고서 성의 없이 대답하는 박민정의 태도에 유남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또다시 ‘짜증 난다고요’라고 했었던 박민정의 말을 듣게 될까 봐 입을 다물었다.‘그래... 민정이 하고 싶은 대로 해.’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유남우가 내내 신경 쓰였다.출근 시간에 맞추어 박민정은 일부러 알람까지 맞추어 놓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알람 소리가 울렸고 박민정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자기보다 훨씬 더 일찍 준비를 마친 유남준이 보였다.“남준 씨, 출근 안 해요?”박민정은 의문이 가득한 두 눈으로 물었다.“앞으로 너랑 출퇴근 같이할 생각이야.”유남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아내를 직장까지 바래다주고 퇴근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가는 건 남편으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물며 유남우에게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돈독하고 깊은지 보여주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어요.”유남준의 마음도 모르고 박민정은 바로 거절해 버렸다.운전기사도 따로 있고 시간 낭비에 너무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유남준은 박민정과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일단 아침부터 먹어. 다 먹고 바래다줄게.”상대가 거절을 하든 말든 유남준은 자기 뜻대로 밀어붙였다.그 모습을 보고서 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납치 사건으로 트라우마라도 생겼나? 내가 걱정되나?’“알았어요. 아침 먹고 올게요.”추경은은 오늘 유남준이 자기와 박민정을 회사까지 바래다준다는 것을 알고 아침부터 흥얼거렸다.박민정이 아침을 다 먹고 나오자마자 바로 달려 나와 가식을 떨었다.“새언니, 가방 저 주세요.”오늘따라 유난히 예쁘고 과하게 꾸민 추경은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