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어렸을 때 한수민을 위해 산 위에서 꽃을 따려고 하다가 산 밑으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한수민은 팔짱을 끼고서 말했었다.“민정아,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지. 세상의 모든 일을 남에게만 의지하면 안 돼.”박민정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수민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켰다는 걸 말이다.박민정은 조하랑과 함께 한수민의 저주와 욕설을 뒤로 하고 떠났다.“이 못된 년. 넌 이 세상에 있을 년이 아니야...”일면식이 없는 남을 욕해도 이 정도로 욕하진 않을 것이다.조하랑은 한수민의 욕설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어떻게 자신의 딸을 죽도록 저주하는 어머니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밖으로 나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박민정은 한동안 서 있었다. 그녀는 결국 지나가던 직원에게 말했다.“안에 사람이 넘어졌어요.”한수민이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박민정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조하랑은 박민정이 마음이 약한 사람인 걸 잘 알고 있어 그녀의 팔을 끌어안고는 말했다.“민정아, 너 너무 착해.”조하랑은 전에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수민을 보니 박민정이 한수민을 도와주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이미 어두워진 밤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도 조금 어두워졌다.“하랑아, 그거 알아? 한 여사님은 항상 내가 자기 딸 같지 않다고 했어. 내가 너무 나약하다고 했지. 정말 그런가 봐.”“그 사람처럼 마음 독하게 먹지 못하겠어.”조하랑은 그녀의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민정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한 여사님도 벌을 받았잖아.”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괜찮아. 이미 익숙해졌어.”조하랑은 그녀와 함께 차에 탔다. 밖은 너무 추웠다.차에 올라탄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민정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응.”“한 여사님이 네 친엄마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조하랑은 이 질문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그렇
“엄마, 이제 괜찮으세요?”윤소현은 침대 옆에 앉았다.한수민은 윤소현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자기 곁에 있어 주는 것을 보더니 이전의 불만이 모두 사라졌다.“많이 좋아졌어. 오늘 수고했어.”“아니에요. 엄마는 제 친엄마니까 효도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윤소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엄마가 혹시 불쾌하게 생각하실까 봐 걱정돼서요.”“무슨 일? 말해 봐.”“엄마 지금 몸 상태를 생각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윤소현은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하지만 한수민은 여전히 그 말속에 숨겨진 뜻을 알아챘다.“네 말은 유언장을 준비하라는 거야? 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잖니. 내가 치료를 잘 받으면 2년은 더 살 수 있다고.”“엄마, 화내지 마세요. 저도 당연히 엄마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다만 어떤 일들은 미리 대비하는 게 좋잖아요.”“만약 오늘 같은 일이 엄마에게 또 생긴다면.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엄마가 남긴 것들을 남겼는지 저는 모를 거란 말이에요.”그 말을 들은 한수민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소현아, 엄마 돈 얼마 없어.”한수민이 계속 알려주지 않으려 하자 윤소현은 화가 났다.“엄마,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제가 엄마 비상금을 노린다고 생각하세요?”“잊으셨나 본데 저는 엄마와 아빠의 딸일 뿐만 아니라 정수미의 양녀이기도 해요. 정수미는 이미 모든 재산을 저에게 남겨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해 두셨다고요.”“정씨 가문이 그렇게 돈이 많고 권력도 대단한데 제가 엄마 비상금을 탐내겠어요?”“그리고 정수미는 제 양어머니지만 엄마는 제 친어머니잖아요. 양어머니보다도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윤소현의 마지막 한마디는 한수민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한수민은 윤소현을 낳은 후 윤석후와의 관계 때문에 그녀를 버렸었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윤소현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딸이 친어머니보다 양어머니가 더 낫다고 하자
윤석후는 돈을 받자마자 회사의 운영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는 최근 회사가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예전에 수익을 많이 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큰 손해는 보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무슨 일을 하든 방해를 받았고 대부분의 거래처가 IM 그룹이라는 회사에 빼앗겼다. 그래서 그는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한수민은 아직 자기 돈이 윤소현에게 넘어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기사 하나가 실검에 떴다.[국제 유명 무용가, 아픈 계모를 뮤지컬 극장으로 데려가다.]클릭해 보니 윤소현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계모를 돌보고 있는지, 얼마나 효심이 깊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그녀는 계모가 병이 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더럽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계모를 병원으로 모셔갔다고 적혀 있었다.박민정은 이 기사를 보더니 어이가 없었다.어젯밤 그녀는 윤소현이 한수민을 병원으로 데려가지도, 직접 돌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박민정은 기사를 잠깐 읽다가 바로 꺼버렸다.박민정은 소송에서 이겼기 때문에 한수민은 반드시 15일 내로 돈을 반환해야 했다. 만약 반환하지 않으면 강제 집행을 신청할 수 있다.한수민과 윤씨 가문이 이 기간에 자산을 빼돌릴 것을 염려해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사람 시켜 감시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민기는 그녀에게 몇 장의 사진과 자료를 보내왔다.“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수민은 상당한 금액의 저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윤석후가 그 돈을 인출했어요.”박민정은 미간을 구겼다.역시 그들은 돈을 반환할 생각이 없었다.“아쉽게도 15일은 기다려야 하네요.”이 증거들은 나중에 강제 집행을 위한 증거로 그들이 돈을 어디로 빼돌렸는지 찾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말했다.“계속 감시해 줘요. 무슨 증거가 있으면 즉시 확보하고요.”“네, 알겠습니다.”정민기가 전화를 끊은 후 박민정은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누나, 돈 받았지? 어젯밤에 신청했으니까 지금쯤이면 입금됐을 거야.”박민호가 말했다.박민정은 계좌에 새로 들어온 돈을 보고 말했다.“응, 들어왔어.”“그럼 다행이네.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난 누나의 친동생이잖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거 잊지 않았지?”박민호는 전과는 달리 성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그의 이러한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박민호가 정말 변했을까? 철이 든 걸까?박민정은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녀와 박민호는 같은 부모를 둔 친남매였기에 박민호가 진심으로 변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그를 다시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그게 진심이었으면 좋겠네.”박민정이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당연히 이렇게 쉽게 박민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박민호는 한때 돈 때문에 그녀를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아넘기려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박민정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훤칠한 키의 유남준이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테이블 위에 디저트 몇 개를 놓았다.박민정이 정신을 차리고 유남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자기가 좋아하는 디저트가 놓여 있다는 걸 발견했다.다만 그 가게는 매일 한정된 양만 만들었다. 예약도 받지 않아서 일찍 가서 줄을 서야 살 수 있었다.“남준 씨가 직접 산 거예요?”“당연히 부하를 시켰지.”유남준이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혼자 가서 줄을 서? 사람 시켜 일찍 가서 줄을 서게 하면 쉽게 살 수 있는데 말이야.’박민정은 그 말을 듣더니 머리를 콩 때렸다.“임신하면 멍청해진다더니, 진짠가 보네.”유남준은 그녀의 말에서 박민정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다른 뜻을 읽었다.그는 박민정이 자신이 직접 사지 않았다고 서운해할까 봐 생각했다.사실 박민정은 그저 자신의 질문이 너무 바보 같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유남준은 돈이 많아 굳이 직접 줄 서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물어본 것이다.유남준은 다음번에는 직접 사러 가겠다는
서다희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박민정이 오늘 유남우와 통화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유남준은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동생에게 완전히 실망했다. 한 번 또 한 번 자기와 박민정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니 말이다.유남준은 윤씨 가문을 무너뜨린 후 더 이상 유남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그가 더는 박민정을 찾지 못하게 제대로 벌을 주려고 했다.YN그룹은 새로 유입된 자금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주주들이 주식을 매도했고 많은 임원들이 이직했다.YN그룹의 주가는 급락했으며 회사 직원들의 불안한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우리 회사 망하는 거 아니야? 며칠 전에 고 매니저님도 사무실 정리하고 나가는 거 봤어.”“그래. 우리 부장님도 사표 냈다니까. 우리한테 빨리 다른 직장 알아보라고 했어.”“어떻게 된 거지?”YN그룹 본사는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윤석후는 회사 내부에서 이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을 전혀 몰랐다. 임원들의 연이은 이직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려움에 휩싸였다.그는 단 한 번이라도 회사를 제대로 관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문제가 발생하자 바로 자신의 딸인 윤소현에게 연락했다.“소현아, 얼른 남우 집으로 데려와. 저녁에 같이 식사 좀 하자. 아빠가 할 말이 있어.”윤소현은 임신 보약을 마시던 중 그 말을 듣고서는 의아해했다.“무슨 일 있어요?”“와보면 알게 될 거야.”윤석후는 사위인 유남우가 능력자인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그는 유남준의 손에서 유앤케이 그룹을 넘겨받지 못했을 것이다.“알겠어요.”윤소현은 전화를 끊은 후 그릇을 내려놓고는 거실로 향했다. 멀리서 유남우가 베란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보였다.유남우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윤소현이 그에게 다가갔다.“남우 씨, 아빠가 저녁에 우리 집에 가서 식사 좀 하자고 하는데요. 할 말이 있으신가 봐요.”평소 자존심이 강한 윤소현도 유남우 앞에서는 순한 토끼처럼 행동했다.그 말을 들은 유
유씨 가문에 도착한 후.윤석후가 두 사람을 반겼다.“음식은 이미 준비했어. 얼른 들어와서 밥 먹어.”“아빠, 왜 갑자기 이러세요? 무슨 일 있으면 남우 씨에게 말하면 되죠.”윤소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유남우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유남우도 말했다.“아버님, 소현이에게서 들었어요. 절 찾으신다고요. 먼저 본론부터 말씀하시죠.”“그럼... 식사하면서 얘기하자고.”윤석후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을 식탁으로 안내했다.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고서야 윤석후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천천히 털어놓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모두 얘기하진 않았다.유남우는 아직 자신의 사위가 되지 않았다. 만약 유남우가 윤씨 가문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어 파혼하려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상황은 이렇다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문제지.”윤석후는 유남우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살폈다.유남우는 조용히 듣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윤석후는 말문이 막혔다. 유남우가 자기에게 되물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사실 아무 대책이 없어 유남우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유남우가 자기 대신 IM 그룹을 혼내주길 바랐다.“남우야, 혹시 나를 도와 내 프로젝트를 맡아주면 안 되겠나? 내가 자금이 충분해지면 다시 프로젝트를 되찾아가도록 하지. 절대로 손해 보게 하지 않겠네.”윤석후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했다.하지만 유남우는 YN그룹의 상황을 조사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유남우는 여우처럼 교활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아버님, 이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호산 그룹의 CEO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큰 권력은 없어서요.”“월요일에 임원 회의를 소집해 YN그룹 프로젝트 인수 여부를 논의해 보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윤석후는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건 명백한 거절이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유남우가 정말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
윤소현이 한수민의 비상금을 가지게 된 이후로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도 걸지 않았다.한수민은 혼자 병원에서 지내며 딸을 몹시 그리워했다.“소현아, 보고 싶어. 언제 나 보러 올 거야?”“엄마, 죄송해요. 요즘 너무 바빠서요. 일이 끝나면 찾아뵐게요, 네?”윤소현이 대충 얼버무렸다.한수민의 눈빛은 한껏 어두워졌다.“알겠어. 근데 매일 무슨 일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은 전화를 끊었다.한수민은 전화를 내려놓으며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오늘 한수민을 돌보는 간병인의 딸이 찾아와 간병인과 담소를 나눴다.“엄마, 나 이제 돈 벌기 시작했으니 이런 일은 그만두세요. 제가 돈을 넉넉히 드릴게요.”“괜찮아. 엄마 아직 젊으니까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어.”“엄마가 걱정돼서 그래요. 이 돈으로 맛있는 음식이나 많이 사 드세요. 돈 아까워하지 말고.”한수민은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박민정을 떠올렸다.6, 7년 전 박민정은 무릎을 꿇고 그녀 앞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엄마, 이제 우리 힘으로 살아가요. 제가 엄마를 모실게요.”한수민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그녀는 베개를 집어 들어 문 쪽으로 던지며 소리쳤다.“나 돌보러 온 거야? 아니면 딸과 수다를 떨려고 왔어?”간병인이 그 말을 듣고는 바로 딸을 돌려보냈다.그리고 병실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한수민은 이미 간병인을 두 번 바꿨었다. 전에 있었던 두 명은 한수민의 성격 때문에 그만두었다.간병인은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의자에 바로 놓았다. 그리고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요. 화를 낼수록 병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하시면 돼요.”그 말을 들은 한수민은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난 돈도 있고, 권력도 있어. 그런데 마음에 걸릴 게 뭐가 있어? 웃기고 있네.”한수민은 강한 척했지만 간병인은 그게 연기라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간병인이 빠르게 손을 뻗어 한수민을 붙잡아 준 덕분에 한수민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았다.한수민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자리에 앉고는 간병인을 향해 박민정을 가리키며 말했다.“봤지? 이게 내 딸이야. 배은망덕한 불효녀라고. 돈을 달라고 해서 안 주니까 강제 집행을 신청하겠다는 거야!”간병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박민정을 바라봤다.나이 든 간병인은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했다.그녀의 눈에 박민정은 순하고 온화한 모습이라 불효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박민정은 변명하지 않고 단지 한마디만 남겼다.“돈이 없다고 하면 윤씨 가문에 가서 받을 거예요.”그녀는 한수민이 돈을 모두 윤씨 가문에 넘겼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어디 한 번 그렇게 해봐!”한수민은 분노에 차 있었다.지금의 한수민은 박민정의 눈에 그저 우스꽝스러운 광대에 불과했다.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또 물었다.“윤소현은 어디 있어요? 당신의 착한 딸은 왜 한 번도 병문안 오지 않았나요?”한수민은 박민정의 말에 격분하여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집어 던졌다.박민정은 당연히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 모두 날렵하게 피했다.“앞으로 매주 시간을 내서 여사님을 보러 올게요. 여사님이 그러셨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요. 당신이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거예요.”박민정이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는 이 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오늘 아침 정민기가 박민정에게 한수민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정확히 한수민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고 했다.박민정이 병원을 떠난 후에도 한수민은 여전히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간병인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사모님에게 딸이 하나뿐이라고 들었는데요?”한수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방금 그 애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야. 내 딸이 아니라고. 내 딸은 유명한 무용가 윤소현이야. 인터넷에 치면 바로 찾을 수 있는 유명한 인물이지.”“아, 그렇군요.”간병인은 마음속으로 의심을
박민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어요.”“역시! 내가 어쩐지 민정 씨 기본기가 너무 좋다 했지. 정말 귀한 인재를 만났네!” 무용 선생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매년 직원들에게 춤을 연습시키며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몸이 굳어 안무를 익히는 데 애를 먹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빠르게 연습을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가 퇴근 준비를 하러 갔다.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들에는 구경거리 보듯 즐기는 눈빛도, 적대적인 눈빛도, 안쓰러운 눈빛도 섞여 있었다.박민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막 앉으려는 순간 주영리가 사장실에서 나오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민정 씨, 아까 작업을 다 끝냈다고 했죠? 서랍을 열어서 그 문서들 좀 가져와요. 사장님께 보여 드리게.”박민정은 주저하지 않고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고 문서들을 꺼냈다.주영리는 그것들을 받아 펼쳐 보더니 눈에 띄게 동공이 흔들렸다.잠시 후, 주영리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이렇게 많은 문서 중에서 민정 씨가 번역한 건 고작 몇 장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빈칸이잖아? 이래놓고 일을 다 끝냈다고?”“내가 말했잖아요. 뒷문으로 들어온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고.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네!”하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비난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주영리는 계속 몰아붙였다.“좋아요, 사장님 만나러 가요. 민정 씨가 얼마나 일을 대충 했는지 직접 보여 드리자고!”그녀는 박민정의 팔을 붙잡고 사장실로 향했다. 이미 사장에게 상황을 미리 고발해 둔 터라,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사장은 외국인이었다.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태도나 무책임한 행동을 싫어했다.박민정과 주영리가 들어오는 것을 본 사장은 의자에 기대앉아 외국어로 물었다.“영리 씨, 민정 씨가 정말 일을 다 안 끝냈나?”그는 원래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주영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편하게 지시하세요.”주영리를 본 순간 박민정은 이번 직장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이 일을 꼭 지켜내리라 마음먹었다.일자리가 생기면 유남우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주영리는 박민정의 태도에 더욱 거만해져서 온갖 잡다한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다.일을 지시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그저 허드렛일이었다.이 직원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저 직원의 서류를 출력하는 일 따위였다.심지어 주영리는 동료들에게 은밀히 말했다.“앞으로 일이 많아서 힘들면 여기에 다 넘겨. 여유롭게 써먹으면 되잖아.”이는 명백히 박민정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앞다투어 일을 떠넘겼다.“듣자 하니 번역이 전공이라던데, 이 문서들 좀 번역해 줘요. 절대 실수하면 안 돼요.”“제 것도 부탁드려요. 오늘까지 해야 해요.”“...”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박민정에게 맡기며 떠넘기기에 바빴다.그녀에게 쏟아진 업무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게다가 오후에는 고객 응대를 위한 댄스 연습도 예정되어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이며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동료들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보고 은근히 비웃었다.“원래부터 이렇게 만만한 사람이었나 봐. 앞으로 일 다 넘겨도 되겠네.”“그러게. 공짜 노동력을 안 써먹으면 바보지.”주영리도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박민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춤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야.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오래 못 버틸걸.”다들 한마디씩 던지며 박민정을 험담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박민정은 모든 서류를 정리해 들고 곧장 댄스 스튜디오로 향했다.주영리는 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재빨리 가로막았다.“민정 씨, 일 다 끝냈나
홍주영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저는 정말로 누군지 모릅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윤소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홍 비서가 무슨 내막을 알고도 숨기고 있다면 정말 끝장인 줄 알아요.”매서운 경고를 남긴 채 그녀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홍주영은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오늘 있었던 일을 유남우에게 문자로 알렸다.유남우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간발의 차로 윤소현에게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아직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주영아, 고마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그가 답장을 보냈다.홍주영은 그의 메시지를 보며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정말로 둘째 도련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았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밖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홍주영은 그 눈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쓸쓸한 뒷모습을 남겼다.며칠 전, 그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었다.“너도 이제 나이가 얼마인데, 변변한 직장도 없으면서 결혼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니? 설마 남자를 안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이번엔 꼭 집에 와서 소개팅 나가야 해.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네 아빠에게 뭐라 설명하겠니?”“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엄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나중에 네가 혼자가 늙을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아.”홍주영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둘째 도련님.”“무슨 일이야?”“어머니가 저를 부르셔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휴가를 내도 될까요?”유남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래, 다녀와.”전화를 끊기 전 그는 물었다.“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홍주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별일은 없고요. 그냥 어머니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홍주영은 유남우를 모신 이후로 집에 잘 내려가지 못했다.올해 설에도
홍주영은 유남우가 너무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와 대화 중인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을 자제했으나 살짝 보니 그는 한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홍주영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더는 보지 않으려 했다.마음속에서 믿기 어려운 생각이 들었다.자신이 알던 유남우는 항상 곧고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설마 바람을 피우는 걸까?그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윤소현일 리 없다는 건 분명했다.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홍주영은 유남우가 여전히 박민정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깊은 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겼었다.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실망감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퇴근길에서 홍주영은 한 차량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을 발견했다.차 창문이 내려오자 나타난 건 고고하게 웃고 있는 윤소현의 얼굴이었다.홍주영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고 윤소현은 그런 그녀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홍 비서, 걱정 마세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홍주영은 감정을 숨기며 무표정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차에 올라타서 이야기하죠,” 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여기서 말씀하시죠.”그녀는 윤소현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특히 오늘 유남우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한 일로 인해 윤소현이 자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하지만 홍주영은 틀렸다.윤소현은 그녀가 차에 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재미있어하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내가 그리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복수하려는 것도 아니고요.”그녀는 홍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제야 홍주영은 그녀가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건 아닌 듯 보였고 근처의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윤소현은 직접 메뉴를 가져와 홍주영에게 건네며 말했다.“먹고 싶은
윤소현은 유남우가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고 마침 비서 홍주영이 유남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자의 직감으로 홍주영이 자신의 남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던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유남우 앞에서 홍주영의 뺨을 후려쳤다.“아직 설 연휴인데 홍 비서는 왜 남우 씨를 직접 나서게 해요? 일을 그 정도로 못 하나?”홍주영의 뺨은 화끈거렸고 그녀는 한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해 있었다.그제야 유남우가 사태를 파악하고 급히 다가와 윤소현의 팔을 붙잡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의 날 선 질문에 윤소현은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남우 씨, 그냥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명절에 당신이 나랑 다혜를 두고 가버리다니...”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네가 무고한 사람을 때린 이유야?”그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 눈빛에 겁먹은 윤소현은 몸을 떨었고 손목이 점점 아파왔다.“남우 씨, 아파요...”하지만 유남우는 전혀 풀어줄 기색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홍 비서에게 사과해.”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나더러 부하 직원한테 사과를 하라고요?”“홍 비서는 단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야. 내 친구이기도 해. 그러니까 얼른 사과해.” 유남우는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윤소현은 마지못해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홍 비서.”홍주영은 얼얼한 뺨의 통증을 참으며 유남우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됐죠?” 윤소현은 다시 유남우를 바라봤다.그제야 유남우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손목이 풀리자마자 윤소현은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손목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세게 잡
“방금 그 여자요? 이제 막 온 사람이잖아요. 그 춤을 완전히 익히지도 않았는데요.” 리더는 여전히 억울해했다.그녀는 겨우 얻은 리더 자리를 놓칠 수 없다. 이번 공연만 잘 끝내면 성과가 두 배로 오를 텐데 이제 와서 신입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될 줄은 몰랐다.“주 비서가 방금 못 했던 동작, 그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해냈잖아.”무용 선생님의 눈엔 명백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주 비서, 전에 나한테 사람을 바꾸라고 했잖아? 그럼 이제 내가 바꿨는데 왜 불만이야?”주영리라는 이름의 리더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었다. 후회하면 그야말로 자존심이 말도 못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럼 안 하면 되죠. 제가 이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하지만 오늘 선생님이 매니저님에게 뒷문으로 부탁한 일, 전 꼭 대표님에게 보고할 거예요.”무용 선생님은 주영리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럼 가서 고자질해 봐.”주영리는 무용 선생님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이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며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무용 선생님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잠깐만, 그 무용 복장은 두고 가.”주영리는 결국 무용 복장을 남기고 떠났지만 마음속으로는 박민정을 수십 번 욕하며 씩씩대었다.박민정은 집에서 메시지를 확인하며 재채기를 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국내에 도착했어요? 오늘 면접은 성공했는데, 인턴이에요.”그때 해외에서 돌아온 유남우는 윤소현에게 아이를 잠시 돌봐달라고 요구받아 할 수 없이 아이를 안고 한쪽으로 갔다.윤소현은 그를 지켜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남우의 휴대전화 화면이 켜지는 것을 봤다.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봤지만 그녀는 박민정의 메시지를 발견했다.유남우는 박민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이 메시지가 박민정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그녀는 재빨리 유남우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려 했지만 비밀번호를 알 수 없어서 열지 못했다.그
“어때요? 아무거나 해내면 돼요.” 무용 선생님이 박민정에게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그리고 넓은 공간으로 걸어갔다.무용을 하고 있는 직원들은 모두 박민정을 주목하며 그녀가 실수하는 모습을 기다렸다.아까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고 그들은 박민정이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지 의심했다.박민정이 그 동작을 따라 하긴커녕, 아마 우스꽝스럽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박민정은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을 완벽하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동작을 더 깔끔하고 정확하게 소화했다.“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한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리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반 달 동안 연습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동작을 박민정이 그렇게 쉽게 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언제 우리 회사에 이런 춤 잘 추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또 다른 사람이 투덜거렸다.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을 보며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저기, 어느 부서 사람이에요? 제가 매니저님께 얘기해서 앞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랑 같이 춤 연습을 해요. 공연 끝난 후에는 보너스도 줄게요.”박민정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에요. 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이에요.”무용 선생님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아, 그럼 면접은 합격했나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무용 선생님은 그 말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합격 못했지? 이렇게 춤도 잘 추고 예쁘기까지 한데, 정말 판매직에 딱 맞을 사람인데.”박민정은 자신의 장점은 알지만‘경력'란을 채우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잠깐만 기다려 줘요.”무용 선생님은 박민정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잠시만요, 금방 돌아올게요.”박민정은 의아했지만 결국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네.”무용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우리 회사
실내는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고 박민정은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리며 아팠다.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며 어색하게 말했다.“저는 예전에 어떤 일도 해본 적이 없어요.”매니저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전업주부로 계셨던 건가요?”이곳에서는 전업주부도 일종의 직업으로 여겨졌다.하지만 박민정은 자신이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매니저는 더욱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결혼 후 육아 때문에 일을 안 했다는 거라면 몰라도 졸업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일한 적이 없다니.‘이건 게으르거나, 아니면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매니저는 곤란한 듯 말했다.“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는 경력이 필요한 자리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는 표정을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녀는 자신의 이력서를 꽉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사실,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왜 졸업 이후로 단 한번도 일을 하지 않았던 걸까?’유남우는 그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전혀 이상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건물 밖으로 나온 박민정은 각양각색의 면접자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들은 학력도 뛰어나고 경력도 풍부해 보였으며 어떤 이는 그녀보다 더 어려 보였다.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자리를 다시 찾아보자.’그녀는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더 많은 공고를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돌아가는 길에서 그녀는 우연히 한 댄스 스튜디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안에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한 댄스 강사가 리더 자리에 서 있는 한 여성을 향해 소리쳤다.“너 대체 뭐 하는 거야? 2주나 배웠는데 아직도 실수야? 2주 후면 해외 VIP들 앞에서 공연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괜찮겠어?”리더로 보
아침이 밝자 의사가 집에 방문해 박민정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 뒤 약을 처방했다.의사는 약을 꼭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당부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유남우는 그를 배웅하며 차 안에서 물었다.“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예전 일을 꿈에 꾸는 거죠?”의사는 차분히 대답했다.“그건 정상입니다. 어떤 최면이라도 환자가 과거를 완전히 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녀의 상태는 안정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매달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그러나 의사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환자분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나 익숙한 물건을 접하면 기억이 자극받아 최면이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알겠습니다.”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의사를 배웅한 후 그는 방으로 돌아와 박민정이 약을 다 복용하는 것을 확인했다.약을 먹은 박민정은 졸음을 느꼈지만 일자리 지원을 잊지 않았다.그녀가 고른 회사는 현지에 위치한 곳으로, 출장도 필요하지 않아 유남우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그는 박민정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윤소현의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 씨, 오늘 새해잖아요. 왜 아직도 안 와요? 집에는 나랑 다혜밖에 없는데, 우리랑 시간을 안 보내줄 거예요?”그녀의 말에도 유남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소현아, 너도 알잖아. 나 지금 호산 그룹에서의 기반이 불안정해. 나도 다혜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하지만 윤소현은 물러서지 않았다.“대체 어떤 일이기에 꼭 외국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언제쯤 돌아올 건데요?”그는 잠들어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며칠 후에.”“안 돼요! 늦어도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