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진주시의 한 보육원에서.원장실 안에서 정수미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원장님, 제 친딸이 지금 어디에 있나요?”원장은 정수미를 먼저 앉히고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했다.정수미는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수미는 항상 친딸을 찾고 싶어 했고 이제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드디어 작은 실마리를 찾은 것이었다.“며칠 전 보육원의 선생님께서 누군가가 28년 전에 이곳에서 한 여자아이를 입양해 갔다며 그 아이의 친부모가 누구인지 물어봤다고 하더군요.”원장은 그 당시 입양 기록을 꺼내 들었다.기록부 이미 누렇게 변색하여 많은 부분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겨울에 입양된 여자아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그중 하나가 정수미의 딸이었다.“그 아이가 이제 자라서 친부모를 찾으러 온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기록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 아이가 정수민 씨의 딸일 확률은 반반이죠.”정수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정수미는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원장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분이 혹시라도 정체가 드러날까, 걱정했는지 이름이나 거주지를 남기지 않았어요.”정수미의 마음은 계속해서 조마조마했다.“그러면 제가 어떻게 그분을 찾을 수 있죠?”“그 아이가 오늘 오후에 다시 와서 등록하고 친자 확인을 위해 혈연 정보를 남기겠다고 약속했어요.”정수미는 가슴속에 얹혀 있던 돌이 조금이나마 내려가는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좋아요. 제가 여기서 그분을 기다리겠어요.”정수미는 친딸을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딸이 어떻게 생겼을지, 지금 잘 지내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정수미는 딸이 좋은 가정에 입양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정수미는 이미 결심했다. 아이를 찾기만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최상의 삶을 제공하고 결코 아이에게 다시는 어떤 고통이나 억울함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윤소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정수미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윤소현의 마음속 불안이 점점 커져만 갔다. ‘보육원? 엄마가 보육원에? 일하러 간다더니, 무슨 일이지?’윤소현은 입양된 딸로서 늘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까 두려웠다. 정수미와는 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정수미가 자신을 버릴 가능성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윤소현은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저의 엄마가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한수민 씨 말씀인가요? 아니면 정 대표님?”윤소현은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당연히 정수미 씨죠. 한수민 씨는 엄마 자격도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네, 네. 알겠습니다.”비서는 전화를 끊고 속으로 윤소현을 은근히 경멸했다.친어머니조차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정말 배은망덕하다고 여겼다.그러나 비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정수미라면, 원하기만 하면 자녀조차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비서는 정수미의 일정을 살피기 시작했고 윤소현은 혹시라도 정수미가 보육원에서 새로운 동생을 데려올까 불안했다....박씨 가문 옛 저택.박민정은 집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오늘 하루는 지치고 고단했다.박윤우는 엄마 옆에서 조용히 서서 아무 말 없이 박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민수아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왜 유남준이 박민정과 이혼했는지 심지어 아이까지 돌보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수아는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게 흔한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민정아,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는 게 어때?”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나 안 피곤해.”민수아는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박민정은 일어나며 생각했다.‘이상하네. 이 시간에 누구지?’민수아가 나서며 말했다.“내가 나가볼게.”“고마워.”민수아가 문을 열고 나가
박민정의 말에도 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았고 달빛 아래 유남준의 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어떻게 해야 네가 진주시를 떠나겠어? 1800억이면 충분하지 않아?”유남준은 곧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많은 고민 끝에 박민정과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가 또다시 돈을 언급하자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날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죠? 난 떠나지 않을 거고 진주시에 남아서 호산에도 계속 다닐 거예요.”박민정은 유남준이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지켜보려 했다. 만약 유남준에게 정말 다른 여자가 생겼다면,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박민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의 고집을 알기에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서다희가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됐나요?”“동의하지 않았어.”유남준은 짧게 대답했다.서다희는 예상했던 대로 박민정이 거절할 거로 생각했다.“그럼 어떻게 할까요? 강제로 데리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서다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차에 올라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만두자.”박민정의 성격상 강제로 데리고 가면 오히려 의심만 커지고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게다가 박민정과 박윤우는 쉽게 데려갈 수 있지만, 정민기와 박예찬까지 데리고 가는 건 복잡한 일이었다.서다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조용히 있었다.“이제 돌아갈까요?”“넌 돌아가. 난 여기 좀 더 있을게.”유남준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서다희는 그가 박민정을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한편, 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에게 민수아와 박윤우가 다가와 물었다.“유남준이 왜 왔어?”“별일 아니야.”박민정은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밤이 되자 박민정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열었다. 카톡에 냉지석으로부터 메
“만약 실패해도 괜찮아. 자책하지 마. 넌 그저 최선을 다하면 돼.”유남준의 얼굴은 담담했고 그는 곧 닥쳐올 일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듯 보였다.김인우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반드시 최선을 다할게.”...다른 병원에서 윤소현은 밤새워 기다렸지만, 다음 날에도 정수미는 오지 않았다.대신 정수미의 비서가 찾아왔다.“윤소현 씨.”“어떻게 됐어요? 알아낸 게 있나요?”윤소현은 다급하게 물었다.비서는 침착하게 대답했다.“정 대표님께서 보육원에서 친딸을 찾고 계신다는 소식입니다.”윤소현의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정수미가 친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정수미는 윤소현이 철이 들기 시작한 때부터 줄곧 딸을 찾아왔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친딸을 찾고 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친딸을 찾고 있다니. 나를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가?'윤소현은 손을 꽉 쥐며 분노에 휩싸였다.‘나는 엄마를 위해 친엄마와의 관계도 끊었는데, 왜 엄마는 나를 위해 친딸 찾는 걸 포기할 수 없는 거지?'비서는 윤소현의 얼굴에서 무서운 감정이 엿보였지만, 말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맞장구쳤다.“20년 넘게 못 찾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 같아요.”윤소현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어제 정수미가 너무 격앙된 모습을 보면서 뭔가 단서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서 엄마를 주시하게 해요. 절대 들키지 말고 엄마가 친딸에 대해 무슨 단서를 쥐고 있는지 확인해요.”“알겠습니다.”비서는 즉시 대답했다.비서가 떠난 후에도 윤소현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원래는 정수미가 다른 아이를 입양할까 봐 걱정했지만, 이제는 정수미가 친딸을 찾을까 봐 더욱 불안했다.정수미 같은 사람이라면 친딸에게는 절대 소홀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정씨 가문의 재산은 더 이상 윤소현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윤소현은 더는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윤소현은 곧바로 정수미에게
윤소현은 즉시 침대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더 초췌하고 불쌍해 보이도록 만들었다.“소현아, 괜찮니?”정수미는 급하게 방으로 들어오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소현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많이 나아졌어요. 이제 좀 덜 아파요.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윤소현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만약 죽으면 엄마는 혼자 남아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윤소현은 정수미를 끌어안았다.정수미는 윤소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소중한 딸이 어떻게 죽겠니?”윤소현은 훌쩍이며 말했다.“엄마, 방금 생각해 봤는데요. 동생이 엄마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제가 죽더라도 동생이 있으니까요.”정수미는 윤소현이 자신이 친딸을 찾는 것을 반대할까 봐 걱정했는데 윤소현이 직접 언급하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소현아, 엄마는 네 동생을 찾는 걸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어. 하늘이 도와주는 건지, 이제 곧 네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윤소현의 마음이 싸늘해졌다.정수미가 친딸을 찾으면 윤소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하지만 겉으로는 너그러운 척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정말이에요?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정수미는 약간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아직 찾지는 못했어. 단지 실마리가 생긴 것뿐이야.”“그렇군요. 엄마,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윤소현은 정수미를 위로했다.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바란다.”윤소현은 어떻게 단서를 찾았는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사업에서는 날카롭고 능숙했지만, 윤소현 앞에서는 그렇게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어제 원장이 한 말을 다시 한번 윤소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그렇군요. 그러면 가능성은 반반인 거네요. 그 사람이 엄마의 딸이 아닐 가능성도 있는 거죠?”윤소현이 물었다.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도 그 반의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윤소현은 겉으로는 더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
악몽에서 깨어난 한수민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꿈에 그녀는 끝까지 박형식의 용서를 받지 못했으며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녀 곁을 깡그리 떠나버렸다.정신이 흐리터분한 한수민은 두 팔로 자기의 앙상한 몸을 감싸안고 한쪽 구석에 옹송그려 앉아있었다.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꽈르릉!’창문을 진동하는 천둥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린 한수민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리고 채 못 뜬 목도리를 마저 마무리 짓고, 정리해 두었던 모든 물건은 수납함에 넣어두었다.계속해서 그녀는 편지를 썼다.이 모든 것을 마친 뒤, 비로소 한시름 놓인 듯 침대에 올라가서 누웠다.심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뱃속은 수많은 칼로 휘젓는 듯 아팠다. 의사를 부르려 했지만, 부를 힘도 없거니와 와주는 의사조차도 없었다.그녀는 스스로 오늘 저녁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느껴졌다.몸을 뒤척일 힘마저 잃은 한수민은 쏟아지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렇게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제발 누군가 다가와서 곁을 지켜주길 갈망했다.“아파…”안간힘을 다 써서 외쳤지만, 어렴풋한 이 한마디밖에 뱉지 못했다.간병인은 이미 깊숙이 잠들었는지라 깨워지질 않았다.기진맥진한 한수민은 곁에 있는 초인종마저 누를 힘이 없었다.‘이게 바로 천벌인가 봐!’그녀는 한없이 후회했다. 한데 인제 와서 땅을 친 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헉…’동틀 무렵, 한수민은 드디어 가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검은 지금의 한수민으로 말하면 일종의 해탈이라 할 수 있다.간병인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두 시간 지난 뒤였다. 시체는 이미 싸늘히 식어 있었다.“부인님…”간병인은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내가 깊게 잠들지만 않았어도…’간병인은 크게 후회했다. 한수민을 간호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변화를 차츰차츰 보아온지라 슬퍼서 눈물을 몇 방울 떨군 후 박민정한테 전화했다.박씨 가문 옛 저택오늘도 평범
“엄마!”싸늘하게 식어 눕혀져 있는 한수민의 시신을 본 박민호는 끝내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박민호는 생전에 윤소현만 감싸고 도는 한수민이 너무 원망스럽고 얄미워 그가 심하게 앓고 있을 때도 전혀 관심하지 않았다.하지만 시신을 보는 순간, 비로소 자기가 정말로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졌다.“엄마, 가지 마…. 엄마….”옆에서 서 있는 박민정은 왜서인지 울컥하고 목멘 듯했다.한수민은 박민정의 친어머니도 아니거니와 생전에 늘 구박하고 영원히 아물지 못할 것 같은 상처만 주어왔지만, 그들은 함께 10년 넘은 긴긴 시간을 보내왔었다.마음이 쓰린 박민정은 영안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복도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는 머리를 깊숙이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자기의 앞을 막고 서 있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짙은 색의 정장 차림을 한 유남우가 앞에 서 있었다. “너 괜찮아?”유남우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다.박민정은 붉어진 눈시울을 유남우한테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유남우를 외면했다. “어, 나 괜찮아.”그녀는 자신이 아주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수민이 죽으면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어도 시원찮을 판에 슬퍼할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유남우는 박민정이 억지로 아닌 척을 연기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어릴 적, 박민정과 유남우가 함께 길러왔던 고양이가 죽었을 때도 그녀는 오랫동안 울었댔다.하물며 한수민은 어린 시절의 박민정이 우러러보는 우상이었댔다. 설사 생전에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고 상처를 줬다 해도 감정이 없을 리 만무하다. 인간의 감정이란 참 이상한 물건 이기도 하다.유남우는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박민정에게 천천히 다가서 무릎을 굽혀 그녀를 품에 당겨 안고 토닥토닥 뒤 등을 두드려 주면서 위로했다.“울고 싶으면 소리 내여 울어도 돼. 아무도 안 웃어.”박민정은 울컥하고 무언가가 못 안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그
박민정은 그 편지를 읽기 싫어 거절하려 하는데 박민호가 날렵하게 편지를 낚아채면서 말했다.“누나, 내가 대신 읽어줄게. 엄마가 대체 뭐라고 썼는지.”박민호는 한수민이 소송을 통해 거액의 재산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뜻밖으로 편지에는 박민정한테 남긴 말밖에 없었다.“민정아, 미안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구나. 난 인간이 아니야, 네 엄마 될 자격은 더 없으며, 또 다행히도 네 엄마가 아니야...”여기까지 읽은 박민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왜 다행히 박민정의 엄마가 아니라고 하지?’워낙 생각이라는 걸 별로 할 줄 모르는 박민우는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편지를 읽었지만, 끝까지 전부 한수민이 박민정에게 속죄하는 말들이었다. 계속하여 읽어가던 박민우는 드디어 제일 관심하는 재산에 관한 내용을 보았다.“나의 전부의 재산을 너한테로 물려줄 것을 변호사한테 지시했어.”여기까지 읽은 박민우는 순간 머리가 날아오는 방망이에 맞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박민우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나한테 뭐라도 남겨준 건 없어?""없는데요."간병인은 가물에 콩 나듯 병문안을 거의 안 오다시피 하는 박민우를 보면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박민우의 가슴은 실망과 분노의 불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유남우가 옆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누나는 엄마가 나를 제일 이뻐 한다고, 내 편 이라고 했지? 봤어? 이게 내 편 맞아? 재산은 전부 누나한테만 남겨준다고 하잖아!"박민정도 한수민이 유산을 자기한테 남겨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간병인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려 하는데, 유남우가 입을 열었다."민정아, 이모님이 생전에 유산에 대한 일은 나한테 부탁했댔어. 변호사도 우리 회사직원이야. 아마도 지금쯤은 막 달려오고 있을 거야."유남우도 사실이라 증언하니 틀림없을 것이다,박민우는 한수민이 더없이 미웠다. 옛날에는 윤소현만 감싸고 돌더니, 지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