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으로 올린 글에 의외로 예전 고등학교 친구들이 적잖게 찾아와서 댓글을 남겼다.성수지가 한때 저질렀던 만행도 곧바로 폭로됐다.그뿐만 아니라 이건우와 나의 부모님까지 타격을 받았다.그 뒤로 며칠 동안 쏟아지는 전화에 내 휴대폰이 터질 지경이었다.나는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 일의 장본인 배선재를 바라보며 속절없이 웃었다.“야 이 자식아, 누가 너더러 끼어들래?”배선재는 배시시 웃으며 이제 막 구운 소고기 한 점을 내 앞 접시에 내려놓았다.“화내지 마. 누나는 본인이 받은 상처로 남들에게 죄책감을 쌓아주는 사람이 아니잖아. 하지만 왜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해? 누나가 시달린 고통을 모르면 그들도 아주 잠깐 죄책감을 느낄 뿐 절대 누나 마음에 보상이 되어줄 순 없어.”“또한 누나도 이 상처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을 테고.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해준 거야. 그 인간들도 똑같이 겪어보고 종일 괴로움에 시달려야 해. 앞으로 살아가면서 기분 나쁠 때 그 사람들이 더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될 거야.”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그의 말대로 나는 단지 너무 지쳐있어서 타협하기로 선택했을 뿐 제대로 내려놓진 못했다.극심한 마음의 병으로 일찌감치 삶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성수지를 감방에 처넣은 건 단지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다만 이로써 내가 수년간 받아온 그 상처를 절대 보상할 순 없었다.손목시계를 어루만지며 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고마워.”“뭘 새삼스럽게. 그 인간들이 계속 누나를 괴롭히는 게 거슬려서 조처를 했을 뿐이야.”배선재는 지금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그걸 느낄 수가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에야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사실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우울증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어. 그때 내가 해외에 있어서 가족들이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숨겼었거든.”“나중에 돌아와 보니 동생은 어느
이혼합의서는 내가 30분 전에 금방 프린트해놓았다.그전엔 거실 소파에서 밤새 앉아 있었고...식탁 위엔 내가 정성껏 차려놓은 열몇 개의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울트라맨 케이크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림이 녹아버렸다.실은 어제가 아들 이유준의 생일이었다.남편 이건우는 친히 나더러 집에서 잘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유준이를 데려와서 함께 생일을 보낼 거라면서...다만 종일 기다린 결과 성수지의 SNS에 넷이 찍은 가족사진이 떡하니 올라왔다.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이건우는 내 입에서 이혼 얘기가 나올 줄 몰랐던지 미간을 찌푸리고 이혼합의서를 갈기갈기 찢었다.“강하은! 또 무슨 수작이야? 유준이 데리고 수지네 집에 간 걸 까먹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잖아.”말을 마친 후 한 상 가득 차린 음식과 케이크를 보더니 눈가에 죄책감이 살짝 스쳤다.그의 말투가 조금은 느슨해졌다.“그래, 알았어. 어젠 내가 까먹고 얘기하지 못했어. 앞으론 주의할게.”“여긴 내가 치울 테니 가서 좀 자. 점심에 유준이랑 셋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그는 늘 이런 식이다. 병 주고 약 주는 한심한 인간이다.본인이 도가 지나친 걸 뻔히 알면서도 사과는 안 하고 그저 조금만 자세를 낮추는 척한다.이때 내가 얌전히 순응하지 않으면 바로 냉전에 돌입하고 그 결말은 늘 내가 먼저 찾아가서 고개를 숙이는 식이었다.전에는 늘 그래왔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나는 탁자 밑에서 이혼합의서를 한 부 더 꺼내 그에게 밀어붙였다.“몇십 부 준비했으니까 찢고 싶으면 실컷 찢어.”화가 난 이건우는 그릇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내게 쏘아붙였다.“까놓고 말해서 넌 그냥 유준이가 수지를 더 좋아해서 질투 난 거잖아?!”“강하은, 잊지 마! 이건 네가 수지한테 빚진 거야.”“나랑 유준이가 수지 모녀를 챙겨주는 건 너 대신 속죄하는 것뿐이라고!”‘속죄? 대체 내 죄가 뭔데?!’나랑 성수지는 한때 절친한 사이였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그
이건우는 내가 짐까지 다 싸놓을 줄은 몰랐던지 재빨리 달려와서 앞길을 가로챘다.바로 이때 문밖에서 지문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성수지가 딸 서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우리 집 도어락에 그녀의 지문이 등록되어 있다니.내가 분명 이 집에 성수지를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우가 끝내...성수지는 나를 능멸하고 내 모든 걸 뺏어갔다. 나는 그녀가 죽도록 원망스럽다.아쉽게도 이건우는 내 말을 전혀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나를 본 성수지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갖은 가여운 척을 떨었다.“하은아...”이때 그녀 옆에 있던 서아가 뒤로 몸을 숨더니 마치 내가 미친 야수라도 된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음을 터트렸다.“아줌마, 우리 엄마 때리지 말아요!”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가, 이토록 순진한 얼굴을 한 어린애가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을까? 나는 한없이 차가운 눈길로 서아를 쳐다봤다.바로 이 아이가 추석날 우리 부모님 댁에서 내가 성수지를 때렸다고 모함했다.내가 수년을 바라온 추석인데, 한 가족이 오붓하게 모일 수 있는 명절인데 서아가 모든 걸 망쳐놨다.그해 추석은 그 사고가 일어난 뒤 부모님이 처음으로 나를 집에 초대한 명절이었다.나도 어떻게든 부모님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노력하고 싶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성수지가 글쎄 나를 위층 계단으로 질질 끌고 가더니 뜬금없이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다.나는 다리까지 부러졌지만 아무도 내 안부를 안 물었다.모두가 성수지의 편을 들고 있었다.다들 그녀에게 둘러싸여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눈물로 호소했다.“수지가 날 밀쳤다고요.”한편 성수지는 딱히 변명하지 않고 빨개진 눈시울에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하은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뭐.”이때 서아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리더니 계단을 내려오며 내게 쏘아붙였다.“아줌마! 대체 왜 우리 엄마를 밀쳤어요?”“엄마도 굳이 아줌마네 가족 모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한사코 초대하시니 마지못해 온
서아는 아직 어린아이였던지라 나의 숨긴 감정을 온전히 읽어내지 못했다.이 집이 곧 본인들 집이라고 하자 아이가 대뜸 흥분하며 되물었다.“정말요?”이때 성수지가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서아야, 그만!”“여긴 하은 아줌마네 집이야.”곧이어 빨개진 눈시울에 속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하은아, 난 단 한 번도 너랑 건우 오빠 감정을 깨트리려고 한 적 없어.”“지금 바로 갈게. 그만 화 풀어, 응?”이 말을 들은 이건우가 앞으로 나서며 성수지의 팔을 붙잡았다.성수지도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기울었다.이건우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황급히 손을 내려놓았다.성수지의 눈가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서러움으로 바뀌었다.“오빠, 나 말리지 말아요. 원래 우리가 방해한 거잖아요.”그녀는 말하면서 꼭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흩날렸다.서아도 그녀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엄마, 울지 말아요. 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짐 덩어리가 돼서 엄마를 힘들게 했잖아요.”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이들 모녀가 연기자로 데뷔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연예계의 막대한 손실이었다.한편 이건우는 안쓰러운 눈길로 두 모녀를 바라봤다.그들이 안쓰러울수록 울화가 더 차오르는 모양이다. 그는 불쑥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두 사람 이사 오라고 했어. 수지네 집 천장에 물이 새서 며칠 수리해야 해. 어차피 우리 집 별장이라 방이 많으니 이리로 오라고 한 거야.”“너희 두 사람 이 기회에 서로 오해도 풀고 좋잖아. 근데 넌 어떻게 아직도 수지랑 서아한테 이토록 적대적이야? 서아 저 어린애를 꼭 그렇게 속상하게 해야만 만족하겠어?”비록 이젠 이건우의 그 어떤 말도 타격이 없다고는 하지만 무식한 저 발언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나는 결국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건우야, 눈이 멀었으면 병원을 가. 쟤네가 와서부터 지금까지 나 딱 한 마디밖에 안 했어.”“너희들이 온갖 스토리를 짜낸 거
이건우가 씩씩거리며 그냥 가버렸다.물론 엄마의 목청이 터질 듯한 욕설도 차와 함께 멀어져갔다.차가 내 앞을 쌩하고 지나갈 때 성수지의 오만한 표정을 나는 똑똑히 지켜보았다.분명 자기가 이겼다고 여기겠지.나는 또 한 번 가족에게 버림받은 외롭고 가여운 애벌레가 되었다.다만 이젠 진짜 신경이 안 쓰였다.부모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다 필요가 없다.성수지가 원한다면 넙죽 건네지 뭐.생각은 이토록 쿨하게 했지만 너무 열악한 환경 탓인지 자꾸만 안 좋은 추억들이 떠오르고 그 가증스러운 화면들이 하나둘씩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나는 무척 울고 싶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단순히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였다.하지만 감히 울 수가 없었다. 눈물 때문에 얼굴이 따가워지면 설상가상인 격이 돼버리니까.결국 나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두 다리가 뻣뻣해지고 머리가 눈에 꽁꽁 얼어붙어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까지 쉴 새 없이 걸었다.드디어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고 또 마침 운이 좋아서 택시까지 잡았다. 하지만 그 택시가 내 앞에 멈춰서면서 길이 미끄러워진 바람에 그만 나를 들이받고 말았다.사실 그리 심하게 부딪힌 것도 아니지만 눈밭에 털썩 드러눕고 또 너무 오래 눈을 맞고 다니다 보니 몸에 체온이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시 깨났을 때 온몸이 차에 한 번 짓눌린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머리가 어지럽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으며 온몸이 불구덩이처럼 활활 타올랐다. 목구멍엔 또 불덩이를 쑤셔 넣은 듯 꽉 막혀버렸다.안간힘을 쓰며 눈을 떠보니 침대 맡에 준수하고 깔끔한 외모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여기 어디예요?”젊은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깼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여긴 병원이에요. 그쪽 고열로 무려 이틀이나 기절해 있었어요.”그가 너무 가까이 들이댄 바람에 내 얼굴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 두 볼이 간질거렸다.이성과 이토록 가깝게 지내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던지라 나는 저도
배선재의 충격적인 말에 나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전화기 너머로 이건우도 목청이 터질세라 소리를 질렀다.“뭐라고? 넌 누구야?”이에 배선재가 전화를 끊고 아예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내가 힘껏 째려보니 그는 머쓱한 듯 가볍게 웃었다.“일부러 죽었다고 한 건 아니고요. 그쪽 남편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랬어요.”“본인 와이프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좀처럼 연락이 안 되더니 이틀 만에 전화 와서 말하는 꼬락서니가 뭐냐고요? 안부 한 마디조차 없잖아요.”“솔직히 말해서... 누나 참 남편복 없네요.”나는 속절없이 웃다가 누나라는 호칭에 편하게 말을 놓았다.“어디 그뿐이겠어? 부모복도, 친구복도 죄다 꽝이야.”자식 복마저 없는 나는 그런 여자였다.침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내가 먼저 물었다.“너도 편하게 말 놔. 그리고 나 점심밥 좀 시켜줄래?”어제부터 오늘까지 통 안 먹었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배선재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나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나는 그다지 입맛이 없어서 죽 한 그릇만 시켜달라고 했다.이에 배선재가 바로 거절했다.“의사 선생님께서 영양 섭취가 꼭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고작 죽으론 안 되지!”“됐고, 내가 시키는 대로 먹어. 알아서 주문할게.”나는 조금 놀랍기도 하고 미처 적응이 안 됐다. 얼마 만에 받아본 관심인가? 하지만 정작 낯선 이가 베푸는 관심이라니...“고마워. 바쁘면 이만 가봐. 나 이제 멀쩡하잖아.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아.”이 말을 들은 배선재가 고개를 내저었다.“그건 안 돼. 나 때문에 입원했는데 끝까지 책임져야지 않겠어?”나는 더 거절하고 싶었지만 마침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결국 나도 이쯤에서 멈췄다.그렇게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까지 다 먹은 후 배선재가 내게 물 한잔 따라주었다. 나는 가방에서 약을 꺼내 이제 막 입가에 갖다 댔는데 그가 대뜸 낚아채 가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알약을 살펴봤다.“이건... 설트랄린이잖아?”이런 것까지 알다니? 나
전남편이라는 나의 호칭에 이건우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또 예전처럼 내가 밀당을 한다고, 제멋대로 고집을 피운다고 질책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 인간이 한숨을 내쉬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아직도 화 안 풀렸어? 여보, 전에는 내가 당신 소홀히 했어. 인정해. 앞으론 꼭 더 잘할게. 그러니까 이만 화 풀어. 당신 나 없이 어디 갈 데라도 있어?”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이 한마디가 상당히 거슬렸다.“이 큰 세상에 어디인들 못 갈까?”이건우가 재빨리 덧붙였다.“그런 뜻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래?”나는 더 이상 짜증 나고 귀찮아서 이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무래도 재산 분할이 망설여지나 보다. 그게 아니면 도저히 이건우가 이혼하지 않을 이유를 못 찾겠으니까.나는 시선을 돌리고 성수지를 노려보며 그녀에게 화살을 겨눴다.“넌 제발 좀 이 병실에서 꺼져줄래?”순간 성수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미안해, 하은아. 난 그냥 널 챙겨주고 싶어서 남아있었던 건데...”말하면서 기대 어린 눈길로 이건우를 쳐다보는 그녀, 늘 그랬듯 이건우가 편들어주길 바라고 있었다.이건우도 확실히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이번엔 그녀를 위해 나서주진 않았다.“수지야, 먼저 돌아가 있어. 하은이는 내가 보살피면 돼.”나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부탁인데 너도 싹 다 꺼져!”옆에서 사과를 깎던 배선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없이 짙어진 이건우의 안색을 바라보며 과감하게 말을 이었다.“아이고, 웃겨 죽네. 누구는 아내가 떠나버리고 나서야 달래러 온 거야? 진작 뭐 하고 있었대?!”이건우는 분노에 찬 눈길로 그를 째려봤다.“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만 나가시지!”배선재는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내게 물었다.“나 이만 갈까? 누나?”나는 그가 지금 일부러 이건우를 약 올리는 걸 알아채고 센스 있게 맞장구를 쳐주었다.“가긴 어딜 가. 너 때문에 사고가
하찮은 여자들의 하찮은 꼼수를 간파하는 능력은 정말이지 배선재가 이건우보다 훨씬 뛰어났다.나는 그가 다시 깎아준 사과를 건네받으며 야유 조로 말했다.“아마도 우울증이 도졌나 봐.”잠시 머뭇거린 후 내가 거듭 강조했다.“그것도 중증으로다가.”순간 배선재가 피식 웃었다.“에이, 이게 뭐가 중증 우울증이야? 그냥 조현병이지. 저 정도면 정신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증상에 맞게 치료해야 빨리 낫지, 안 그래?”나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이건우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내가 이토록 매정할 줄은 몰랐었나 보다. 딴사람과 함께 병든 성수지를 놀릴 거라곤 꿈에도 예상치 못했었나 보다.다만 그를 가장 괴롭힌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그를 대할 땐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이 딱딱하게 굴더니 딴 남자 앞에선 너무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내가 적응하기 어려운 듯싶었다.질투의 불씨가 활활 타올라 끝내 터져버리고 말았다.“그만해, 강하은!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이러니까 어머님, 아버님도 실망하시고 우리 아들 유준이도 널 싫어하는 거잖아. 넌 정말 양심도 없는 사악한 여자야!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후회돼. 진작 이혼할 걸 그랬어.”“진작 널 차버릴 걸 그랬어. 초라하게 길바닥에 나앉는 그 꼴을 모두에게 보여줄 걸 그랬다고!”그의 품에 안긴 성수지는 입꼬리를 씩 올렸지만 금세 또 고상한 척을 떨었다.“오빠, 그만 해요... 나 때문에 충동적으로 굴진 말라고요!”“괜찮아, 수지야. 내가 이혼하는 게 다 너 때문만은 아니야. 하은이가 정말 너무 실망스러워서 그래.”나는 유유하게 사과를 먹을 뿐 아무런 피드백도 없었다.이건우는 그런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왜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겠지.작년 내 생일 때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가 나의 초대를 거절했다고 기분이 무너져내리고 대성통곡을 했으니 말이다.그날 나는 술을 엄청 많이 마셨다. 이건우도 더는 말릴 수 없어 또다시 내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이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