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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건우가 씩씩거리며 그냥 가버렸다.

물론 엄마의 목청이 터질 듯한 욕설도 차와 함께 멀어져갔다.

차가 내 앞을 쌩하고 지나갈 때 성수지의 오만한 표정을 나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분명 자기가 이겼다고 여기겠지.

나는 또 한 번 가족에게 버림받은 외롭고 가여운 애벌레가 되었다.

다만 이젠 진짜 신경이 안 쓰였다.

부모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다 필요가 없다.

성수지가 원한다면 넙죽 건네지 뭐.

생각은 이토록 쿨하게 했지만 너무 열악한 환경 탓인지 자꾸만 안 좋은 추억들이 떠오르고 그 가증스러운 화면들이 하나둘씩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나는 무척 울고 싶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단순히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감히 울 수가 없었다. 눈물 때문에 얼굴이 따가워지면 설상가상인 격이 돼버리니까.

결국 나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두 다리가 뻣뻣해지고 머리가 눈에 꽁꽁 얼어붙어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까지 쉴 새 없이 걸었다.

드디어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고 또 마침 운이 좋아서 택시까지 잡았다. 하지만 그 택시가 내 앞에 멈춰서면서 길이 미끄러워진 바람에 그만 나를 들이받고 말았다.

사실 그리 심하게 부딪힌 것도 아니지만 눈밭에 털썩 드러눕고 또 너무 오래 눈을 맞고 다니다 보니 몸에 체온이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났을 때 온몸이 차에 한 번 짓눌린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으며 온몸이 불구덩이처럼 활활 타올랐다. 목구멍엔 또 불덩이를 쑤셔 넣은 듯 꽉 막혀버렸다.

안간힘을 쓰며 눈을 떠보니 침대 맡에 준수하고 깔끔한 외모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젊은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깼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여긴 병원이에요. 그쪽 고열로 무려 이틀이나 기절해 있었어요.”

그가 너무 가까이 들이댄 바람에 내 얼굴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 두 볼이 간질거렸다.

이성과 이토록 가깝게 지내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던지라 나는 저도 몰래 꺼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얼른 반듯하게 앉고 귓불이 빨개진 채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름은 배선재이고 아빠의 병 치료 때문에 돈이 시급하여 출근하지 않을 땐 우버로 부수입을 벌어서 생활비를 보태고 있다고 한다.

그도 충분히 조심스럽게 운전했지만 길이 미끄러워진 바람에 차가 통제력을 잃었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손목을 살짝 다친 것 말고 딱히 큰 부상을 안 입었다.

그밖에도 의사는 내가 빈혈이 심하고 혈당 수치가 너무 낮은 데다가 고열이 내리지 않아 폐렴이 우려된다고 했다. 결국 배선재가 이틀 꼬박 내 옆에 있어 줬다.

나는 그런 배선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얌전한 외모,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동안인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이 유독 촉촉하게 빛났다. 마치 속세에 때 묻지 않은 듯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옷차림을 쭉 훑어봤는데 브랜드 로고는 없지만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깃든 코트였다.

‘요 녀석,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 참 잘하네!’

다만 나는 그를 까발린 게 아니라 오히려 이때 내 옆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웠다.

“고마워요. 이만 가보셔도 돼요. 보험사 부르면 되거든요.”

이에 배선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실은 저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경찰이든 의사든 전부 그쪽 가족들과 연락이 안 닿아서 마지못해 병원까지 따라왔어요.”

그런 거였구나.

그 사람들 전부 성수지 모녀의 잔꾀에 넘어가 날 거들떠보지 않았구나.

이때 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선재가 대신 갖다 줬는데 화면에 [남편]이란 두 글자가 떴다.

이 남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이 있는데 병원에서 꼬박 이틀을 홀로 누워있었으니까. 세상에 이런 부부도 있나 싶은 얼굴이었다.

전화를 받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배선재가 이미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리고 자상하게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전화기 너머로 이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하은, 너 대체 이틀 동안 어디 간 거야?”

나는 두 눈을 희번덕거릴 뿐 더는 이런 멍청이와 말 한마디 섞고 싶지 않았다.

이건우의 말투가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지금 어디 있든 당장 튀어와. 얼른 와서 수지랑 서아한테 사과하란 말이야. 의사 선생님께서 서아가 그해 그 일로 트라우마가 남았대. 일단 감정이 격해지면 바로 기절한다잖아.”

“너 때문에 수지랑 서아 두 모녀가 무슨 죄야? 진짜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거니?”

나는 그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미간을 찌푸렸다.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건우가 계속 제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어머님, 아버님도 오셨어. 네가 수지한테 무릎 꿇고 사과만 한다면 바로 용서하시겠대.”

“어머님, 아버님이랑 줄곧 화해하고 싶었잖아? 이런 기회 놓치면 더는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당장 튀어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배선재가 대뜸 가로챘다.

“하은 씨 못 가요. 이미 죽어서 장례식장에 있어요. 궁금하면 가서 찾아보시든가요?!”

“더 지체하면 유골도 못 챙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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