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우현이 차갑고 깊은 검은 눈동자로 백연서를 바라볼 때 눈 밑에 알 수 없는 감정의 기운이 감돌았다. 겉으로 바람둥이인 설우현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막돼먹지 않았다. 설우현은 사람들과 같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현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몇 마디 인사도 나누고 나서 자리를 떠났다. 차에 돌아오자, 성혜인은 이미 뒷좌석에 있었다. 그는 성혜인을 자기가 거주하는 별장 2층 방에 눕히고 여자 하녀를 불러 목욕을 시키고 이마에 약도 바르고 의사를 불러 검사했다.“큰 충격을 받았을 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설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씨 가문의 행위를 생각하더니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어떻게 그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한 여자를 대하는 거지!’백연서는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급히 경호원에게 물었다.“찾았어?”“사모님, 못 찾았습니다.”“쓸모없는 것들! 어떻게 멀쩡한 사람이 그냥 사라져? 계속 찾아. 무슨 짓을 하든 꼭 찾아내!”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반승제의 목소리가 들렸다.“뭘 찾아요?”백연서는 순간 겁에 질려 몸이 굳어버렸다.‘왜 왔지?’“승제야, 오늘은 웬일로 여기에 왔어?”반승제는 정말로 아주 오랜만에 돌아왔다. 반승제는 담담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최근에 집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하던데요.”아직 점심시간인데 백연서가 연회를 벌였다는 건 일반 상황이 아니었다. 백연서는 자기가 성혜인에게 한 일을 들킬까 봐 군침을 삼켰다.“네 아빠가 나와 이혼하겠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반승제는 짜증을 내며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자료를 가지러 위층으로 가려던 찰나 구석에 있는 뱀을 발견했다.“이런 게 왜 별장에 있어요?”별장은 3일에 한 번씩 모기, 뱀, 개미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향을 피웠기에 고의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가 없었다. 백연서는 황급히 사람을 시켜 치우라고 하고 설명했다.“아마도 향을 피우는 사람이 게으름을 피웠나
반승제는 녹색 길을 걷다가 빛이 비치는 무언가를 보았는데 매우 반짝이는 것이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물건을 집어 들었는데 그건 보석이 박혀 있고 여자들이 사용하는 비싸 보이는 머리핀이었다.‘반씨 저택의 하인들은 이런 것을 하고 다니지 않는데, 혹시 파티에 온 여자가 떨어뜨리고 간 것일까?’그는 머리핀에 대하여 아무 인상이 없었지만 버리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라온 백연서가 보고는 그 머리핀이 성혜인 것이라는 알아봤다.“승제야, 그건 다과회에 왔던 여자가 두고 간 것 같은데, 나한테 주면 그 사람에게 돌려줄게.”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핀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백연서가 손을 뻗어 머리핀을 가져가려는 순간, 그가 천천히 물었다.“페니가 여기 왔어요?”백연서의 머리핀을 가져오려던 손이 떨렸다.“페니? 난 몰라?”최근 들어 백연서는 감정이 불안정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폭발할 수 있는 상태였다. 반승제는 그녀의 생각을 한눈에 알아차리고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이 머리핀은...”백연서가 뺏으려고 했지만 반승제는 머리핀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게 있었는데 머리핀이 쓸모 있을 것 같다는 강렬한 직감을 받았다.“승제야, 여자 물건을 가지고 뭐 하려고 그래?”백연서는 조금 당황했지만 반승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백연서가 조급해하며 따라가고 있었는데 반승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다시는 어머니와 아버지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니까, 어머니도 제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백연서의 얼굴은 더욱 추해졌고, 왜 애초에 죽은 사람은 반승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큰아들은 그녀한테 아주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아들 하나뿐인데 그녀와 친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와 반기훈의 관계 회복은 더 힘들어진 것이다.“승제야...”그녀가 말투를 낮춰 말해보려고 했지만 반승제는 이미 자리를 떴다. BH 그룹에 돌아간 반승제는 머리핀을 꺼내서 자세히 살폈다. 그때 마침 사무실에 들어오
“반씨 집안사람들이 페니 씨를 이렇게 대하는데, 정말 원망스럽지 않아요?”설우현은 그녀와 반씨 집안 사이의 얽히고설킨 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지난번 백연서가 심하게 욕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듯했다.‘황당하네. 반 대표는 페니 씨를 그렇게 성가시게 굴면서, 집사람들이 페니 씨를 괴롭힐 땐 신경도 안 쓰는 거야? 정말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하는가?’반승제가 자신의 전처에게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는 페니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태생부터 오만함을 갖고 태어난 반승제에게 전처인 성혜인은 개미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그와 같은 하늘의 신선이 땅강아지가 어떻게 구차하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터무니없고 황당한 일이다.이 모든 것이 그러하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그릇에 담긴 죽을 먹고 있었다.곧이어 설우현은 침대 맡에 앉았다. 그러고는 성혜인의 손에 있는 그릇을 옆에 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아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울고 싶으면 울어요.”설우현에게 안겨 돌아온 후부터 현재까지, 성혜인은 잠을 자거나 천장을 바라보며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이번 일이 매우 큰 충격을 안겨준 탓에, 성혜인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설우현은 귓가에서 훌쩍이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성혜인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울음소리에서는 여전히 애써 참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설우현은 이미 성혜인에 대한 간단한 조사를 끝마쳤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대학에서는 하마터면 졸업장을 못 받을 뻔했으며, 졸업 후 3년 동안 마치 과부와 같은 삶을 살았고, 이혼을 비롯한 온갖 미움도 받았다는 것을 말이다.그는 한숨을 쉬고 성혜인의 등을 두드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틀 동안 성혜인은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설우현이 물어볼 때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만 할 뿐.한바탕 울고 나니 집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는지, 성혜인은 얼른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설
저녁, 설우현은 술을 마시러 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으나, 도저히 성혜인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 신신당부했다.“여기서 꼭 잘 쉬고 있어요, 다른 건 몸이 다 회복한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으니까. 백 여사님은 쉽게 페니 씨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페니 씨가 이곳을 떠나면, 백 여사님은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가려고 애를 쓰실 거예요. 그러니 페니 씨는 먼저 대책을 잘 세워두는 게 좋을 겁니다.”그녀 혼자서는 절대 반씨 집안을 이길 수 없다....술집에 온 설우현은 공교롭게 반승제도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는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신이한의 곁에 앉았다.사실 오늘 밤 신이한은 성혜인에게도 연락을 취했었다. 그러나 성혜인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설우현네 별장에 있겠다고 말했다.그래서 신이한은 설우현을 보자마자 뾰로통하게 말했다.“설우현 씨는 정말 여기저기 정을 많이 뿌리고 다니시네요. 대체 어떤 감언이설로 속이셨길래 페니 씨가 우현 씨네 별장에 남아있겠다고 하는지...”이는 신이한에게 일거양득의 방법이다. 첫째는 반승제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고, 둘째는 설우현을 떠보려는 것이다.신이한은 설우현보다도 더욱 놀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여자가 처음인지 아닌지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도 깨끗한 몸이 아니면서 여자가 꼭 깨끗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게 매우 몹쓸 짓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그가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바로 성혜인의 인품과 성격이었다.원래 이런 모임에 참가할 마음이 없던 반승제는 신이한이 말하는 것을 듣자 눈을 번쩍 뜨며 설우현을 쳐다보았다.설우현은 신이한의 속셈이 무엇인지 진작 꿰뚫고 있었다.‘속은 시꺼매가지고. 쯧쯧’그러나 그도 두렵지 않았다. 사실 그도 반승제를 화나게 할 생각이었으니.“감언이설이라고요? 글쎄요, 그냥 페니 씨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준 게 아닐까요?”신이한은 득의양양한 설우현의 눈빛을 보자 어딘가 조금 아니꼬웠다.“우현 씨네 별장에 이틀이나 있었는데 페니 씨를 데리고 나오지도 않고,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전부 밖으로 도망갔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반승제가 싸움질을 다 하고!’이성과 냉정함으로 이뤄진 반승제는 무리 안에서 줄곧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설우현과 한 치의 양보 없이 주먹을 주고받고 있다니?신이한과 온시환은 모두 멍해졌다. 신이한은 반승제가 곧바로 손을 쓸 줄도, 게다가 설우현이 또 반격할 줄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온시환은 이미 거의 패닉에 빠져 서둘러 신이한에게 말했다.“멍하니 뭐 하고 있어요! 신이한 씨는 설우현 씨을, 나는 승제를 잡을게요!”그렇지 않고 계속 싸우게 놔둔다면 나중에 반씨 집안과 설씨 집안 어른들이 나설 수 있었다.게다가 한 여자를 두고 난투극을 벌였다는 것은 결코 듣기 좋은 소문이 아니다.신이한은 서둘러 설우현을 잡아당겼고, 온시환은 반승제를 덥석 끌어안았다.반승제는 배에 한 대, 입가에 두 대를 맞아 이미 피를 토하고 있었다.설우현은 괜찮은 것 같지만 사실 그가 다친 것은 내장이었다. 그래도 겉모습은 반승제보다 덜 흉측하고, 그저 입가만 부어있었다.반승제는 온시환에게 끌어안긴 뒤에도 여전히 늑대처럼 설우현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러나 설우현도 절대 승복하지 않았다.‘이게 감히 날 때려? 우리 아버지도 때린 적이 없는 날, 반승제가 뭔데?!’그는 한쪽에 있는 술잔을 움켜쥐고 반승제를 향해 내리쳤다.그러나 반승제는 손을 휘둘러 잔을 깼고, 주위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다시 한번 물어볼게, 페니 건드렸어?”“당신이 뭔 상관인데!”설우현이 여전히 강경한 것을 보고, 결국 반승제는 탁자 위의 과도를 잡고 그를 향해 던졌다.그의 정확도는 매우 뛰어났다. 칼은 설우현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신이한조차 놀라서 몸을 피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승제를 쳐다보았다.설우현이 귀를 만지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반 대표,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하마터면 사람을 죽일 뻔했어요.”신이한은 자신의 가슴을 토닥이며 말했다.한편, 온시환은 이 일이 커지는
그는 무슨 반박이라도 해보려고 입을 벌렸지만, 그저 멍하니 성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이미 설우현을 부축하고 일어선 그녀는 거듭해서 괜찮은지 묻고 있었다.설우현은 고개를 흔들었고, 손바닥의 핏자국은 손끝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천천히 떨어졌다.“병원 데려다줄게요.”오늘 밤 설우현은 혼자 이곳에 온 터라, 운전은 성혜인이 맡아야 했다.그는 수년 동안 피를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손바닥을 오므리니 어쩐지 피가 더 많이 흐르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즉시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그의 손바닥에 빙글빙글 감았다.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성혜인은 반승제의 상처가 어떠한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성난 사자처럼 설우현을 찢어죽이지 못해 안달났던 반승제는 그저 돌덩이처럼 침묵을 지키며 서있을 뿐이었다.온시환은 그가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반승제를 도와 말했다.“병원 갈거예요? 그럼 우리도 데려가줘요. 승제 부상도 병원에 가서 보여야 하니까.”말을 마친 온시환은 반승제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챘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온시환은 확실히 기대와 비슷한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기대에는 분노가 더 컸고, 분노 속에는 약간의 억울함도 있었다.아마 반승제는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껴봤을 것이다. 이미 여러해 동안 반승제와 알고 지낸 온시환도 그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러나 성혜인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설우현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설우현도 체면이 있었던지라,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맞아서 가슴과 배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몸을 꼿꼿이 펴고 있었다.그때, 온시환이 재빨리 외쳤다.“기다려요! 같이 가요!”그리고 이내 온시환은 반승제에게 다가갔다.하지만 반승제는 마치 떼를 쓰는 아이와 같이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누가 같이 간다고 했어? 다른 사람이 좋으면 그냥 가라고 해.”그 말을 듣자, 설우현도 뒤 돌아 조롱하듯 반승제에게 말했다.
차는 병원 밖에 도착했다.성혜인은 차를 멈추고 반대쪽으로 가서 설우현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그를 부축하여 대문으로 들어갔다.한편 반승제는 차에 앉아서 그녀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어쩐지 이 뒷모습이 그 어떤 말보다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온시환은 서둘러 반승제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 그를 끌고 내렸다.병원 안으로 들어가, 온시환은 더욱 과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의사 선생님! 빨리 여기 와서 한번 봐주세요!”설우현과 반승제는 바로 인접한 두 병실에 앉아 있었고, 의사들은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검사해주었다.반승제의 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가슴도 크게 긁혀져 있었다. 설우현이 독하게 손을 쓴 결과였다.의사는 지혈 소독을 하고 그의 목과 가슴에 붕대를 감았다.옆 병실에 있는 설우현도 손바닥을 싸매고 있었다. 그의 외상은 반승제에 비해 심하지 않았으나 손바닥이 찢어진 깊이는 거의 뼈가 보일 정도였다.성혜인도 그 상처를 보고 적잖이 놀란 것이 아니다.‘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되네...’“우현 씨, 도대체 두 사람 왜 싸운 거예요?”그러나 설우현 본인도 그와 반승제가 도대체 왜 싸웠는지 의아했다.‘그러게, 반승제는 자기 어머니가 페니 씨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면서, 왜 또 페니 씨를 그렇게 의식하는 거야? 나는 그냥 신이한과 몇 마디 농담 주고받은 것뿐인데, 나한테 감히 직접 손을 대?’“반 대표는 미쳤어요.”설씨 가문과 반씨 집안은 전혀 접점이 없었다. 지위만 놓고 보면 두 집안은 거의 막상막하이다. 그래서 지금 그들이 싸운 일이 알려지자, 온 무리가 떠들썩해졌다.우선 반승제. 그가 무리 내의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이다.다음은 설우현. 이 재벌가 도련님은 성격도 꽤 좋아 보였는데, 뜻밖에도 반승제와 그렇게 사납게 싸우다니... 무리 내의 어느도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마치 서로 원수인 것처럼 어떻
성혜인이 이런 상처 주는 말을 할 수 있다니, 반승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입을 뻐끔 벌려보았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사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하는 수 없이 반승제는 고개를 떨구고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꺼져.”성혜인 역시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지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또 그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온시환에게 일러주었다.“의사에게 와서 다시 처치해주라고 하세요.”그러나 반승제는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침대 맡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네 관심 따위 필요 없어, 꺼져.”그러자 온시환의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승제야, 적당히 해.”이전부터 반승제는 소위 말하는 입만 산 놈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성혜인의 몇 마디 말에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반승제는 그녀를 미워하는 것처럼 행동했다.곧이어 그의 입술이 몇 번 떨리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만 살짝 감았다.성혜인도 마치 개미가 심장을 갉아 먹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 백화점에서 깡패들과 함께 싸우며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으나 지금은...성혜인도 더는 말하지 않고 병실을 떠나자, 뒤에서 컵이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그녀는 다시 설우현의 병실로 돌아갔다. 때마침 그는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것으로 진단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반승제랑 싸우러 가지 말아요, 백 여사님이 또 찾아오면 어떡하려고요. 저쪽도 지금 다쳤으니, 아마 반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병원에 올 겁니다.”설우현의 부상은 병원에 일주일 정도 입원해있어야 하는 정도였다. 물론 옆방 반승제도 비슷한 처지였다. 때문에 그들은 앞으로 피하려야 피할 수 없이 마주칠 것이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설우현에게 물을 뿐이었다.“뭐 필요하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설우현은 확실히 갈아입을 새 옷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혜인이 직접 다녀올 필요는 없었다.“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