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병원 밖에 도착했다.성혜인은 차를 멈추고 반대쪽으로 가서 설우현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그를 부축하여 대문으로 들어갔다.한편 반승제는 차에 앉아서 그녀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어쩐지 이 뒷모습이 그 어떤 말보다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온시환은 서둘러 반승제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 그를 끌고 내렸다.병원 안으로 들어가, 온시환은 더욱 과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의사 선생님! 빨리 여기 와서 한번 봐주세요!”설우현과 반승제는 바로 인접한 두 병실에 앉아 있었고, 의사들은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검사해주었다.반승제의 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가슴도 크게 긁혀져 있었다. 설우현이 독하게 손을 쓴 결과였다.의사는 지혈 소독을 하고 그의 목과 가슴에 붕대를 감았다.옆 병실에 있는 설우현도 손바닥을 싸매고 있었다. 그의 외상은 반승제에 비해 심하지 않았으나 손바닥이 찢어진 깊이는 거의 뼈가 보일 정도였다.성혜인도 그 상처를 보고 적잖이 놀란 것이 아니다.‘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되네...’“우현 씨, 도대체 두 사람 왜 싸운 거예요?”그러나 설우현 본인도 그와 반승제가 도대체 왜 싸웠는지 의아했다.‘그러게, 반승제는 자기 어머니가 페니 씨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면서, 왜 또 페니 씨를 그렇게 의식하는 거야? 나는 그냥 신이한과 몇 마디 농담 주고받은 것뿐인데, 나한테 감히 직접 손을 대?’“반 대표는 미쳤어요.”설씨 가문과 반씨 집안은 전혀 접점이 없었다. 지위만 놓고 보면 두 집안은 거의 막상막하이다. 그래서 지금 그들이 싸운 일이 알려지자, 온 무리가 떠들썩해졌다.우선 반승제. 그가 무리 내의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도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이다.다음은 설우현. 이 재벌가 도련님은 성격도 꽤 좋아 보였는데, 뜻밖에도 반승제와 그렇게 사납게 싸우다니... 무리 내의 어느도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마치 서로 원수인 것처럼 어떻
성혜인이 이런 상처 주는 말을 할 수 있다니, 반승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입을 뻐끔 벌려보았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사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하는 수 없이 반승제는 고개를 떨구고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꺼져.”성혜인 역시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지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또 그의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온시환에게 일러주었다.“의사에게 와서 다시 처치해주라고 하세요.”그러나 반승제는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침대 맡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네 관심 따위 필요 없어, 꺼져.”그러자 온시환의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승제야, 적당히 해.”이전부터 반승제는 소위 말하는 입만 산 놈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성혜인의 몇 마디 말에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반승제는 그녀를 미워하는 것처럼 행동했다.곧이어 그의 입술이 몇 번 떨리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만 살짝 감았다.성혜인도 마치 개미가 심장을 갉아 먹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 백화점에서 깡패들과 함께 싸우며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으나 지금은...성혜인도 더는 말하지 않고 병실을 떠나자, 뒤에서 컵이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그녀는 다시 설우현의 병실로 돌아갔다. 때마침 그는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진 것으로 진단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반승제랑 싸우러 가지 말아요, 백 여사님이 또 찾아오면 어떡하려고요. 저쪽도 지금 다쳤으니, 아마 반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병원에 올 겁니다.”설우현의 부상은 병원에 일주일 정도 입원해있어야 하는 정도였다. 물론 옆방 반승제도 비슷한 처지였다. 때문에 그들은 앞으로 피하려야 피할 수 없이 마주칠 것이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설우현에게 물을 뿐이었다.“뭐 필요하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설우현은 확실히 갈아입을 새 옷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혜인이 직접 다녀올 필요는 없었다.“괜
“그건 대표님이랑 상관없는 일이예요.”반승제는 그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일이 끝나고 바지를 입은 뒤에 나 몰라라 하는 남자는 많이 봤어도, 여자는 처음이네... 오히려 더 심해.’두 사람이 침대에 오른 횟수는 결코 적지 않고, 반승제는 그녀의 몸에 점이 몇 개나 있는지조차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아마 그는 성혜인의 전남편을 제외하고 그녀의 몸을 가장 잘 아는 남자일 것이다.심지어 반승제는 그녀의 모든 예민한 곳도 잘 알고 있다.“나랑 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서리같이 차가운 그의 눈빛에 번뜩 불빛이 잠깐 지나가는 것 같았다.마치 그녀가 자백하기만 하면 바로 목 졸라 죽일 것처럼 말이다.성혜인은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반승제가 성큼성큼 다가가서더니 그녀의 앞에 섰다.“서천 백화점에서 나를 보고 울면서 내 품에 안겼을 때, 너는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 침대에서 나 때문에 울었을 때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그러자 성혜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 이런 기세에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이내 반승제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한쪽에 큰 나무 뒤로 끌어당겼다.큰 나무들 뒤에는 CCTV가 없고, 오직 그다지 밝지 않은 가로등만 켜져 있었다.놀란 성혜인은 그의 손을 두드리며 물었다.“뭐 하시려고요?”말이 끝나자마자 반승제는 성혜인을 나무에 밀치고 그녀의 옷 지퍼를 확 열었다.“반승제 씨!”그녀는 화가 나서 직접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러나 반승제는 멈추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다리로는 그녀의 두 다리를 묶어두었다.이 순간, 성혜인은 자신이 곧 사람에게 베일 도마 위의 물고기와 같아 보였다.반승제의 다른 손은 그녀의 목부터 배꼽까지 샅샅이 훑어보며 옷을 걷어냈다. 그렇게 새로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반승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혜인은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이 시간에 누군가 이곳을 지나가면 모든 것이 훤히 보일 테니 말이다.그녀가 떨고 있는 것을
성혜인은 설우현의 차를 그의 별장으로 가져간 다음 포레스트로 돌아갔다. 잠들기 전, 강민지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설우현이랑 반승제 소문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완전 난리가 났어. 그 두 사람이 너를 두고 싸웠다면서 말이야.”강민지는 딱 보아도 이 가십을 즐기는 것 같았다.“혜인아, 너 진짜 반승제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아니.”그녀의 말투에서 피곤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을 알아차린 강민지도 얼른 말을 건넸다. “우리 한참 못 만난 것 같은데, 내일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민지야, 나 내일 일이 좀 있어.”“그래, 그럼 바쁜 일 먼저 봐.”성혜인이 말한 일이 있다는 것은 바로 반씨 고택에 가서 반태승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또 백연서에게 끌려갈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한편, 자신의 차를 탄 후에도 반승제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심인우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했다.그러나 오늘 밤의 사건이 워낙 컸던지라, 이 소식은 벌써 반태승의 귀에 들어갔다.그래서 반승제의 차가 거의 절반쯤 도착했을 때, 반태승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얼마전 금방 2차 훈계를 받은 반승제는 혹시 자신이 페니 때문에 3차 훈계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고택에 도착했을 때, 그는 또 밖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고택은 고요했다.곧이어 집사가 문을 열더니 그를 보고 얼른 옆으로 몸을 돌려 길을 비켰다.안에 들어가 보니 반태승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좀 늦었기 때문에 그는 차를 마시지 않았고, 앞에 끓인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반승제가 생각했던 칼싸움은 없었고 의외로 분위기가 평화로웠다.“할아버지.”그는 반태승을 한번 부른 뒤 천천히 다가갔다.그러자 두루마기 차림의 반태승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꽉 쥐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오늘 밤, 너 설우현이랑 한 여자를 두고 싸웠니?”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반태승은 조
그는 이제 더 할 말이 없다 생각했는지 기침을 몇 번 하고 손사래를 쳤다.“전에 내가 혜인이랑 약속한 게 있다. 언제 한번 다 같이 모여앉아 식사하기로 말이다. 너도 반드시 참석해야 해.”진작 모든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손을 놓겠다 했던 반태승이었지만, 어쩐지 요즘 소문이 너무 무성했다.반승제도 그가 페니에 대해 추궁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 시점에서 할아버지를 화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알겠습니다, 할아버지.”고택을 떠날 때, 반승제는 침울한 눈빛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심인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반승제가 훈계를 받지 않고 돌아오는 걸 보니 의외라고 여겨졌다.네이처 빌리지로 돌아와 거실로 들어갔을 때, 도우미는 반승제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얼른 옆에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꺼냈다.“대표님, 이건 온시환 씨께서 보낸 선물입니다.”반승제는 휙 무심하게 받아들며 뜯어보지조차 않았다.그렇게 그는 침실 욕실로 가서 상처를 피해 간단히 목욕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나온 후에야 선물을 열어보았다.포장을 막 열자, 바로 라는 적나라한 글자가 몇 개 드러났다.그러자 반승제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곧장 책을 한쪽에 버렸는데, 마침 침대 머리맡에 가서 부딪혀 떨어졌다.‘역시 온시환 이 자식은 믿으면 안 돼.’그는 한쪽에 있는 컴퓨터를 들고 침대에 오른 후 등받이에 기댔다. 그러고는 키보드를 두드려 몇 개의 서류를 처리한 후에야 컴퓨터를 껐다.하지만 그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사실 최근 그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늘 이 방 안은 페니의 냄새로 가득했으니 말이다.그는 방 안의 가장 밝은 불빛을 끄고 침대맡 스탠드 등만 켜고는, 귀신같이 그 라고 불리는 책을 집어 들어 보기 시작했다.책은 알기 쉽게 쓰여 있는데, 한눈에 봐도 연애 경험이 전무한 모태솔로를 위해 쓰인 것이다.전체 내용은 몇 가지 기교의 소개로 이뤄졌는데, 잘못을 인정하는 법, 달래는 법, 수영할 줄 알
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는 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이 식사도 평온하지 못했다. 중간에 백연서가 한 차례 전화를 걸어와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한마디만 듣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의 차가 번화가의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 두 대의 차가 그녀를 왼쪽, 오른쪽으로 가로막았다.뒤이어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고, 차창을 내린 후 성혜인은 반기태를 보았다.반기태는 그녀에게 약 한 병을 주면서 반승제를 죽이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은 3억을 받고 지금까지 반기태에게 단 한 번만 연락했었다. 그러니 반기태가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반기태 씨.”성혜인이 먼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러자 반기태는 차갑게 입술을 오므렸다.“페니 양, 설마 내가 페니 양한테 말한 걸 잊은 건 아니겠죠?”“어떻게 감히 잊을 수 있겠어요. 최근 병에 걸려서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던 것 뿐입니다. 이따가 반 대표님한테 가서 계속 반기태 씨의 분부에 따라 임무를 수행할 거예요.”반기태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페니의 가족을 위협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페니 양이 더 지체하면, 페니 양 가족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요.”하지만 성혜인은 그녀 자신조차도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천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외숙모와 외삼촌의 시신은 지금까지 아무도 수습하러 가지 않아 유골은 여전히 병원에 놓여 있다.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반기태는 성혜인이 무서워하는 줄 알고 더욱 냉소하기 시작했다.“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나한테 페니 양을 없애는 건 개미를 죽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니까.”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차가 자리를 떴다.성혜인의 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는데 곧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백연서, 반기태... 반드시 할아버지께 말씀 드려야 해. 안 그러면 정말 죽게 될지도 몰라. 게다가 백연서는 지금 미쳐버렸으니...’그러나 그녀가 반씨 고택
“승혜가 그러는데 당시 납치범들이 승혜랑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성혜인은 승혜를 혼자 남겨둔 채 혼자 숨을 곳을 찾아갔다 하더군요. 그래서 승혜가... 아무튼 그게 승혜 마음에 맺힌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성혜인을 두둔한다고 해도 그 아이는 외부인일 뿐이에요. 만약 성혜인이 나와서 사과하지 않는다면 승혜는 계속 울 것 같습니다.”“내가 승혜를 보러 가마.”‘분명 이제 손을 놓고 고택 문도 다 닫아버리겠다고 했는데, 왜 사건이 줄줄이 터지는지...’그는 서둘러 반희월과 함께 반승혜가 지금 사는 곳으로 갔다.아니나 다를까, 집 문을 막 열자 안에서 반승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되뇌고 있었다.“이게 다 성혜인 탓이야. 성혜인만 아니었으면 난 이 모든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성혜인이 일부러 그랬어. 승제 오빠가 3년 동안 자기를 냉대했기 때문에 나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살고 싶지 않아, 정말 더는 살고 싶지 않아.”며칠 동안 병원에 있을 때, 반승혜는 성혜인에게 누명을 씌우기만 하면 자신이 매우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사실 그녀는 일단 눈을 감으면, 그 역겨운 남자의 얼굴이 반복되어 토하고 싶게 만들었다.그래서 반승혜는 성혜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 그녀를 완전히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매우 터무니없는 생각이긴 하나 지금 반승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성혜인이 너무 싫으므로, 그녀는 반승제가 성혜인과 잘되는 꼴을 볼 수가 없다. 때문에 이 두 사람이 헤어져야만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반태승이 집에 들어온 것을 보고 반승혜는 더욱 크게 울었다.“할아버지, 흑흑...”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반태승은 머리가 아팠지만, 반승혜의 처지가 너무 딱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네 고모가 이 일이 혜인이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혜인이도 그 건물에 있었느냐?”반승혜는 고개를 끄덕였고, 눈은 부어서 한 가닥의 틈만 보일 뿐이었다.“할아버지, 저 정말 너무 괴로워요
서주혁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아름다운 단발머리와 몸매, 반승제는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변장을 하든 다 알아볼 수 있었다.‘그나저나 웨이트리스 옷을 입고 뭘 하려는 거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서주혁은 담담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페니 씨 그렇게 확고하게 거절했는데, 너한테 굳이 자기 일정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반승제도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았다.‘그래도 분명 내가 다시 빌러 올 거라 말했는데...’성혜인은 정말로 반승제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줄 알았다. 그렇게 그녀는 배식 카트를 끌고 편안하게 반기태가 있는 룸에 도착했다.안에서 반기태와 홍재강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홍재강의 옆에는 홍규연이 앉아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방우찬도 이 자리에 함께 데려왔다.성혜인은 방우찬이 이런 일에까지 관여할 줄은 몰랐던지라, 더 일찍 빨리 장하리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환각제를 술잔에 넣고 공손하게 반기태에게 건네주었다.아무도 이 종업원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고, 반기태도 평소처럼 한 잔의 술을 꿀꺽 마셨다.이 환각제는 그의 현재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하며, 어떤 여자든지 그가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성혜인은 진작에 이 반기태가 밖에서 불성실하게 놀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여태껏 몰래 만난 애인만 해도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모든 것을 마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 복도 끝에서 이 룸에 사고가 나기를 기다렸다.이윽고 반기태는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홍규연도 화장실로 향하는 것이다.그렇게 두 사람은 어김없이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반기태는 술에 취한 데다 환각제까지 더해져 홍규연을 얼른 끌어안았다.“자기야, 여기는 왜 왔어. 내가 요즘은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으아아아!”놀란 홍규연은 소리를 지르며 필사적으로 그를 밀쳤지만, 반기태는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