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태는 자신이 반씨 집안에서 쫓겨난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 당황했다.“아버지, 이 일은 정말 오해십니다, 저는...”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또 반태승의 지팡이였다.“빨리 꺼져! 너는 앞으로 다시 제원에 돌아올 수 없다. 정리할 시간은 딱 하룻밤만 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내일 내가 직접 제원에서 쫓아낼 테니!”그는 자기 아들을 대할 때도 그는 가차 없었다.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반기태는 자신이 더 이상 몸부림쳐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는 놀라서 다른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으나, 방향을 잘못 잡아 성혜인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그녀는 깜짝 놀라 반기태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반기태는 그 순간 마음이 혼란스러웠던지라 확실히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자신이 엉뚱한 곳으로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재빨리 되돌아가 중간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그가 성혜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그녀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곧이어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사람들은 그제야 구석에 종업원 한 명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반승제는 한눈에 그것이 페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피식 냉소했다.하지만 이미 반태승은 홍재강을 향해 몸을 돌린 뒤였다. 홍재강도 오늘 밤 이 자리에 반태승이 있을 줄 몰랐던 지라 자연스레 공손해졌다.“회장님, 안심하세요. 이 정도면 이미 충분합니다. 제 딸을 위해 이렇게 사과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반태승은 일 처리가 확실했다. 식구들을 감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꾸물거리지 않았다.반기태의 그 당황한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시피, 나중에 그는 다시 제원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뒤이어 반태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이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씨 집안에는 쪽팔린 일이 아닌가.그는 몸을 돌려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다.룸들은 양쪽으로 즐비하게 있었는데, 다들 이 소동을 구경하러 나왔기 때문에 아주 가깝게 붙어있었다.설우현의 손바닥에는
반승제는 고개를 숙이고 줄곧 쭈그리고 앉아 일어나지 않는 여자를 보며 살짝 눈썹을 추켜올렸다.사람들은 이제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더욱이 반태승은 반승제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왜 아가씨 손을 밟고 그러냐!”그제야 반승제는 담담하게 구두를 거둬들였다.“앗, 그랬나요. 이거 죄송하게 됐어요.”말투가 차분하고 가벼운 게, 정말 조심하지 않고 밟은 것 같았다.‘개자식.’성혜인은 속으로 그를 수십 번 욕하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배인의 뒤를 따라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반희월이 입을 열었다.“거기 서요.”성혜인은 몸을 흠칫했고, 뒤에서는 발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그런데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촛불을 켠 케이크를 밀고 왔다.그러자 반승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밀치며 말했다.“케이크는 4001호로 보내줘요.”그건 서주혁이 있는 룸이었다. 오늘 저녁 그들 중에 누군가 생일을 쇠는 바람에 반승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마침 성혜인과 식사를 하자던 반태승의 부름도 지킬 수 있어 그는 양쪽 모두 지체하지 않았다.성혜인은 재빨리 빠른 걸음으로 배식 카트의 손잡이를 잡더니 다른 종업원을 밀어내고 4001호를 향해 들어갔다.일단 살고 보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반희월은 미심쩍은 듯 반승제를 힐끗 쳐다보았다.‘저 여자 페니랑 닮은 것 같은데...’그러나 당사자가 이미 사라졌으므로 그녀는 다시 잡으러 갈 수도 없었다.그리고 페니도 웨이트리스 차림으로 그 자리에 가면 안 됐다.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옅은 눈빛을 짓고 있었다. 그는 페니가 가족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그건 페니를 번거롭게만 할 뿐이니 말이다.반씨 집안 가족들은 모두 룸으로 돌아갔고, 반승제도 반태승에게 말했다.“4001호로 먼저 가 있을게요. 성혜인이 오면 다시 올 테니 잊지 말고 불러주시고요.”반태승은 그의 태도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바로 성혜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승제야, 됐어.”“우현 씨도 그만하세요.”화가 부쩍 가라앉은 반승제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자기 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보니 훨씬 진정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런 자식한테 신경 쓸 건 없지. 만약 페니가 이 자식을 좋아한다면 진작 도와달라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페니는 지금 내 품에 있잖아?’반승제는 설우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설우현의 시선은 성혜인에게 향해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이목구비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페니 씨가 불쌍해. 아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바람기가 있었네.’“반 대표, 페니 씨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빨리 포기해요. 다정한 척 연기나 하지 말고요.”설우현의 말 한마디에 현장은 또다시 고요해졌다. 반승제는 성혜인의 모자를 아래로 꾹 누르더니 부드러운 동작으로 곁에 앉혀두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두 사람이 또다시 싸움을 벌이려는 기세로 맞서는 것을 보고 신이한은 황급히 중간에 막아섰다.“이러지 말고, 우리 말로 해요. 네?”신이한의 말을 듣자, 반승제는 괜히 열받아서 언성을 높였다.“신 대표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면 어부지리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젠장...’반승제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 줄은 몰랐던 신이한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심호흡하고 나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미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요?”반승제의 안색은 삽시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가시 돋친 시선으로 신이한을 쏘아보면서 말했다.“아쉽게도 그 미인이 신 대표를 좋아하지 않네요.”신이한이 말한 미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반승제가 말한 미인은 누가 들어도 ‘페니’를 뜻했다.신이한은 성혜인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진지하게 그녀와 교제할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천천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여직원과 붙어
반태승은 룸 입구에 서 있었고, 그의 뒤로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물론 성혜인도 그 사이에 있었다. 구경꾼들이 너무 꽉 들어찬 탓에 도망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네 남자는 반태승의 말에도 전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무의식적으로 성혜인이 있는 방향을 힐끗 봤고, 서주혁도 따라서 시선을 보냈다.반태승은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다. 그래서 바로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가 성혜인을 발견했다. 그 자리에 있는 여자라고는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을 발견한 반태승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이 아이 때문에 싸움이 난 것이냐?”“...”반승제도 서주혁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 둘도 머리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아무리 강한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반태승은 존경할 만한 어른이자 선배이기 때문이다.반태승은 다시 머리를 돌려 네 남자를 바라봤다. 반승제는 싸웠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멀쩡한 반대로 설우현과 신이한은 얼굴이 약간 부어 있었다. 그리고 서주혁도 입꼬리가 찢어져 붉은 기가 돌았다.네 남자가 여전히 조용히 있는 것을 보고 반태승은 답답함에 결국 언성을 높였다.“주혁아, 네가 말해보거라! 오늘 무슨 이유로 싸운 것이냐?”“여자 때문이 맞습니다.”서주혁이 말을 마치자마자 반태승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반승제를 툭 쳤다.“네 놈이 여자 때문에 말썽부릴 날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당장 그 여자를 불러오거라. 난감하게 굴지 않을 테니 주저할 필요 없다.”반승제는 지팡이에 맞으면서도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자 반태승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네가 안 데려온다면 내 직접 조사해서 처리할 거다.”“...할아버지.”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이 반승제가 드디어 입을 열어 반태승을 불렀다. 하지만 그가 말을 계속하기도 전에 밖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리더니 반희월과 백연서가 들어왔다.반희월은 룸안의 참상과 구경꾼들의 수군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처음으로 지명한 두 남자가 반승제의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반태승은 인파 속에서 다른 두 남자를 찾아냈다.“둘도 가서 힘을 보태거라.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오늘 꼭 확인해야겠으니까!”반태승이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이 부랴부랴 나서서 성혜인을 막아줬다. 반승제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진작 넋이 나가고 말았다.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어 버려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반대로 구경꾼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여자를 두고 다투던 두 남자가 어느새 갑자기 같은 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가십거리로 말해도 쉽게 믿어주지 않을 상황이었다.반태승은 언짢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점점 더 궁금해졌다.“얼른 저 둘을 떼어놓지 못해?!”세 남자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반승제와 성혜인을 떼어놓으려고 힘썼다. 그리고 한 남자는 자꾸만 방해하는 설우현을 막고 있었다.이리저리 밀려다니면서 성혜인은 드디어 가출한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서 이만 고개를 들려고 했는데 반승제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얼굴을 공개하면 귀찮아 질 거야. 할아버지가 너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그만해요.”성혜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네 남자는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깨끗한 샘물처럼 맑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반승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민 끝에 짧은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냈다.“죄송해요.”반승제는 성혜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녀를 숨겨줄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반승제를 밀어내더니, 두 사람을 가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설우현을 툭툭 쳤다. 그러자 그는 별말 없이 곁으로 비켜섰다.찻잔을 든 채 의자에 앉아 있던 반태승은 처음 성혜인의 얼굴을 봤을 때 눈이 잘못된 줄 알고 눈살까지 찌푸렸다. 영원할 줄 알았던 거짓말이 곧 들통나게 생긴 것을 직
반승제는 정장 외투를 천천히 입기 시작했다. 마치 외투가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두운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을 보아낼 수 없었고 손가락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단추를 잠갔다.그렇게 외투를 다 입고 난 반승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성혜인이라고?”반승제의 목소리에 성혜인은 고개를 더욱 푹 숙이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신이한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또 설우현을 바라보자,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나만 몰랐던 거군... 하.’분노는 당장이라도 이성을 침식할 것처럼 가슴으로부터 솟구쳤다. 하지만 반승제는 금방 분노를 잠재우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자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성혜인과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되새겼다.반승제는 귀국한 다음 이성을 잃고 서류상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를 속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불륜 상대는 다름 아닌 ‘아내’였던 것이다.‘아니, 이제는 전처라고 해야겠네.’반승제가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친 다음에도 성혜인은 단호하게 이혼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페니라는 이름으로 그의 마음을 훔치고는 이성까지 빼앗아 가고 말았다.이는 반승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겪어본 일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질문하지도 떠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이 자리에서 반승제 못지않게 놀란 사람은 서주혁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혜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눈썹을 튕기기만 하고 바로 반승제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니까 승제가 이 여자한테 계속 속고 있었던 거야? 이혼도 페니 씨를 위해 한 거잖아?! 근데 둘이 같은 사람이었다니... 정말 미치겠네.’반승제는 한숨을 쉬더니 시선을 깔았다. 반태승은 아직도 성혜인의 곁에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혜인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니? 너희 둘...”“저는 반 대표님과 아무런 사이도
반태승이 예약한 룸에는 반씨 집안사람이 전부 모여 있었다.반승제와 마찬가지로 페니가 성혜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반희월은 한참이나 어리둥절해 있었다. 룸에 들어선 다음에는 그나마 상황이 파악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성혜인은 얌전히 반태승의 곁에 앉아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할아버지,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거예요?”성혜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더니 반승제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혜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반승제의 주변에는 싸늘한 냉기가 맴돌고 있었다. 말없이 분위기만으로도 성혜인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반태승이 입을 열어 반승혜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그가 먼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승혜 일은 페, 아니 혜인이랑 상관없어요.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시죠, 할아버지. 저 혜인이랑 따로 할 얘기가 있어요.”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의 주변에는 아직도 냉기가 맴돌고 있었고, 이대로 따라갔다가는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만 같았다.“할아버지, 저...”성혜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승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오늘 하루 피한다고 해서 평생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를 피하고 싶으면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해외로 가든지.”성혜인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반승제가 가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일으키더니 반태승에게 말했다.“그날은 저도 현장에 있었어요. 승혜는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정신과나 카운셀링을 예약해 보세요.”반승제의 말을 들은 반승혜는 바로 반박하려 들었다.“아니야, 오빠. 나 진짜 억울해!”“승혜야, 내가 굳이 CCTV 영상을 꺼내야 입을 다물겠어?”반승제가 CCTV 영상을 바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반승혜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시 CCTV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놀란 듯 몸을 파르르 떨더니 눈물을 흘
성혜인의 성격은 종종 반승제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번에도 그녀의 침묵 때문에 반승제의 이성은 완전히 가출해 버리고 말았다.반승제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성혜인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입술을 맞췄다. 그녀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목까지 조르면서 말이다.성혜인은 질식할 것만 같아서 반승제의 혀를 힘껏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속에는 금방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뱀파이어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흥분하면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성혜인이 질식할 직전이 되어서야 손을 놓아줬다.반승제의 시선에는 여전히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을 향한 부드러움이 더욱 컸다. 단지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입꼬리에 흐른 피를 닦았다. 그리고 세상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대표님, 저는 단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요. 그저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을 가진 적 없을 뿐이죠. 조사할 기회는 아주 많았어요, 하지만 대표님은 하지 않았죠. 제 가족에게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표님의 고백이 우스웠던 거예요.”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그가 이 감정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니 딱히 반박할 방법도 없었다.성혜인은 여전히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저희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대표님은 통화로 이혼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만약 그때 제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밝혔다면 대표님은 저를 죽여버리지 않았겠어요? 저한테 대표님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목숨 걸고 정체를 밝힐 수 없었어요.”“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지금까지 속여?!”“반승제 씨!”덩달아 짜증이 났던 성혜인은 언성을 높여 반승제의 이름을 불렀다.“저희는 삼 년이나 부부로 살았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윤단미 씨만 취급했었죠. 반승제 씨는 저를 쓰레기 보듯이 했어요. 근데 제가 어떻게 정체를 밝혀요? 반승제 씨가 성씨 가문과 성혜인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제가 가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