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태승은 룸 입구에 서 있었고, 그의 뒤로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물론 성혜인도 그 사이에 있었다. 구경꾼들이 너무 꽉 들어찬 탓에 도망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네 남자는 반태승의 말에도 전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무의식적으로 성혜인이 있는 방향을 힐끗 봤고, 서주혁도 따라서 시선을 보냈다.반태승은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다. 그래서 바로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가 성혜인을 발견했다. 그 자리에 있는 여자라고는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을 발견한 반태승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이 아이 때문에 싸움이 난 것이냐?”“...”반승제도 서주혁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 둘도 머리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아무리 강한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반태승은 존경할 만한 어른이자 선배이기 때문이다.반태승은 다시 머리를 돌려 네 남자를 바라봤다. 반승제는 싸웠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멀쩡한 반대로 설우현과 신이한은 얼굴이 약간 부어 있었다. 그리고 서주혁도 입꼬리가 찢어져 붉은 기가 돌았다.네 남자가 여전히 조용히 있는 것을 보고 반태승은 답답함에 결국 언성을 높였다.“주혁아, 네가 말해보거라! 오늘 무슨 이유로 싸운 것이냐?”“여자 때문이 맞습니다.”서주혁이 말을 마치자마자 반태승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반승제를 툭 쳤다.“네 놈이 여자 때문에 말썽부릴 날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당장 그 여자를 불러오거라. 난감하게 굴지 않을 테니 주저할 필요 없다.”반승제는 지팡이에 맞으면서도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자 반태승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네가 안 데려온다면 내 직접 조사해서 처리할 거다.”“...할아버지.”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이 반승제가 드디어 입을 열어 반태승을 불렀다. 하지만 그가 말을 계속하기도 전에 밖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리더니 반희월과 백연서가 들어왔다.반희월은 룸안의 참상과 구경꾼들의 수군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처음으로 지명한 두 남자가 반승제의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반태승은 인파 속에서 다른 두 남자를 찾아냈다.“둘도 가서 힘을 보태거라.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오늘 꼭 확인해야겠으니까!”반태승이 말을 마치자마자 설우현이 부랴부랴 나서서 성혜인을 막아줬다. 반승제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진작 넋이 나가고 말았다.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어 버려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반대로 구경꾼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여자를 두고 다투던 두 남자가 어느새 갑자기 같은 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가십거리로 말해도 쉽게 믿어주지 않을 상황이었다.반태승은 언짢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점점 더 궁금해졌다.“얼른 저 둘을 떼어놓지 못해?!”세 남자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반승제와 성혜인을 떼어놓으려고 힘썼다. 그리고 한 남자는 자꾸만 방해하는 설우현을 막고 있었다.이리저리 밀려다니면서 성혜인은 드디어 가출한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서 이만 고개를 들려고 했는데 반승제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얼굴을 공개하면 귀찮아 질 거야. 할아버지가 너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그만해요.”성혜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네 남자는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깨끗한 샘물처럼 맑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반승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민 끝에 짧은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냈다.“죄송해요.”반승제는 성혜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녀를 숨겨줄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반승제를 밀어내더니, 두 사람을 가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설우현을 툭툭 쳤다. 그러자 그는 별말 없이 곁으로 비켜섰다.찻잔을 든 채 의자에 앉아 있던 반태승은 처음 성혜인의 얼굴을 봤을 때 눈이 잘못된 줄 알고 눈살까지 찌푸렸다. 영원할 줄 알았던 거짓말이 곧 들통나게 생긴 것을 직
반승제는 정장 외투를 천천히 입기 시작했다. 마치 외투가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두운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을 보아낼 수 없었고 손가락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단추를 잠갔다.그렇게 외투를 다 입고 난 반승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성혜인이라고?”반승제의 목소리에 성혜인은 고개를 더욱 푹 숙이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신이한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또 설우현을 바라보자,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나만 몰랐던 거군... 하.’분노는 당장이라도 이성을 침식할 것처럼 가슴으로부터 솟구쳤다. 하지만 반승제는 금방 분노를 잠재우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자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성혜인과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되새겼다.반승제는 귀국한 다음 이성을 잃고 서류상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를 속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불륜 상대는 다름 아닌 ‘아내’였던 것이다.‘아니, 이제는 전처라고 해야겠네.’반승제가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친 다음에도 성혜인은 단호하게 이혼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페니라는 이름으로 그의 마음을 훔치고는 이성까지 빼앗아 가고 말았다.이는 반승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겪어본 일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질문하지도 떠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이 자리에서 반승제 못지않게 놀란 사람은 서주혁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혜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눈썹을 튕기기만 하고 바로 반승제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니까 승제가 이 여자한테 계속 속고 있었던 거야? 이혼도 페니 씨를 위해 한 거잖아?! 근데 둘이 같은 사람이었다니... 정말 미치겠네.’반승제는 한숨을 쉬더니 시선을 깔았다. 반태승은 아직도 성혜인의 곁에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혜인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니? 너희 둘...”“저는 반 대표님과 아무런 사이도
반태승이 예약한 룸에는 반씨 집안사람이 전부 모여 있었다.반승제와 마찬가지로 페니가 성혜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반희월은 한참이나 어리둥절해 있었다. 룸에 들어선 다음에는 그나마 상황이 파악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성혜인은 얌전히 반태승의 곁에 앉아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할아버지,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거예요?”성혜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더니 반승제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혜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반승제의 주변에는 싸늘한 냉기가 맴돌고 있었다. 말없이 분위기만으로도 성혜인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반태승이 입을 열어 반승혜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그가 먼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승혜 일은 페, 아니 혜인이랑 상관없어요.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시죠, 할아버지. 저 혜인이랑 따로 할 얘기가 있어요.”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의 주변에는 아직도 냉기가 맴돌고 있었고, 이대로 따라갔다가는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만 같았다.“할아버지, 저...”성혜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승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오늘 하루 피한다고 해서 평생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를 피하고 싶으면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해외로 가든지.”성혜인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반승제가 가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일으키더니 반태승에게 말했다.“그날은 저도 현장에 있었어요. 승혜는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정신과나 카운셀링을 예약해 보세요.”반승제의 말을 들은 반승혜는 바로 반박하려 들었다.“아니야, 오빠. 나 진짜 억울해!”“승혜야, 내가 굳이 CCTV 영상을 꺼내야 입을 다물겠어?”반승제가 CCTV 영상을 바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반승혜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시 CCTV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놀란 듯 몸을 파르르 떨더니 눈물을 흘
성혜인의 성격은 종종 반승제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번에도 그녀의 침묵 때문에 반승제의 이성은 완전히 가출해 버리고 말았다.반승제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성혜인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입술을 맞췄다. 그녀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목까지 조르면서 말이다.성혜인은 질식할 것만 같아서 반승제의 혀를 힘껏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속에는 금방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뱀파이어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흥분하면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성혜인이 질식할 직전이 되어서야 손을 놓아줬다.반승제의 시선에는 여전히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을 향한 부드러움이 더욱 컸다. 단지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입꼬리에 흐른 피를 닦았다. 그리고 세상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대표님, 저는 단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요. 그저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을 가진 적 없을 뿐이죠. 조사할 기회는 아주 많았어요, 하지만 대표님은 하지 않았죠. 제 가족에게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표님의 고백이 우스웠던 거예요.”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그가 이 감정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니 딱히 반박할 방법도 없었다.성혜인은 여전히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저희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대표님은 통화로 이혼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만약 그때 제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밝혔다면 대표님은 저를 죽여버리지 않았겠어요? 저한테 대표님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목숨 걸고 정체를 밝힐 수 없었어요.”“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지금까지 속여?!”“반승제 씨!”덩달아 짜증이 났던 성혜인은 언성을 높여 반승제의 이름을 불렀다.“저희는 삼 년이나 부부로 살았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윤단미 씨만 취급했었죠. 반승제 씨는 저를 쓰레기 보듯이 했어요. 근데 제가 어떻게 정체를 밝혀요? 반승제 씨가 성씨 가문과 성혜인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제가 가
성혜인은 몸을 뒤로 빼더니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반승제가 차 키를 들고 문을 잠가버렸다.“비켜요! 제발 내리게 해줘요!”성혜인의 안색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럴수록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내가 자리 비운 삼 년 동안, 누구랑 잤어?”“알아서 뭐 하게요?!”성혜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반승제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녀는 반승제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단추를 푸는 데만 집중했다.그 모습에 이를 꽉 악문 성혜인은 반승제의 뺨을 몇 번이나 더 때렸다. 그렇게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때렸는데도 그는 강철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이 인간은 고통도 못 느끼는 거야?’“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반승제는 이제야 단추를 풀던 동작을 멈추더니 새빨개진 눈으로 말했다.“성혜인, 난 너한테 도대체 뭐야?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인정해, 인정할게! 그렇다고 해서 넌 나한테 떳떳한 것 같아? 네가 먼저 말해줬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우리가 이혼도 하지 않았어!”성혜인은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반승제가 차 키로 잠근 문은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의미 없는 실랑이에요. 그러니 이만 풀어줘요.”“그럼 너한테 의미 있는 건 뭔데?”반승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눈은 점점 더 빨개지고 있었고, 시선을 돌리면 사라질까봐 죽어라 성혜인만 노려봤다.“나랑 말하는 게 의미 없는 거면,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다 의미 없겠네? 그 안에 우리 아이도 포함되는 건가?”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더니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약 일 분가량 가만히 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당신 입에 올려도 되는 아이가 아니에요.”“...미안.”반승제는 시선을 떨궜다. 손끝은 아직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가만히 누워 있던 성혜인은 문득 그날 병원에 누워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제가 대표님 아이를 낳을 자격이
“내가 다 보상해 줄게.”반승제는 눈초리를 파르르 떨면서 문을 열었다.“오늘 밤은 일단 돌아가서 편하게 쉬어.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고.”성혜인은 약간 어리벙벙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도 동이 틀 때까지 시달리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도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따듯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어깨에 반승제의 머리가 닿았다. 반승제는 애원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그 자식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제발 부탁이야.”“원래도 아무 사이 아니었어요.”반승제는 성혜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사이였다고 해도 상관없어. 앞으로만 가까이하지 않으면 되니까.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응?”마음 같아서 성혜인은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반승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얼마 후, 반승제가 그녀를 풀어주면서 말했다.“포레스트로 갈 거지? 앞에 타, 내가 데려다줄게.”반승제는 이제야 포레스트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곳은 두 사람의 신혼집이었다. 심지어 함께 산 적도 있는데, 그는 끝끝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하필이면 이혼한 다음에야 알았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포레스트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묵묵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금 괜히 다른 말을 했다가는 겨우 진정한 반승제를 건드리게 될까 봐서 말이다.운전하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포레스트 앞에 도착한 다음에도 성혜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 문이 잠겨서 내리지 못하는데도 말이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포레스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를 집에 바래다줄 때 포레스트가 어떤 곳인지 알려준 적도 없는데, 그녀가 이 앞에 세워달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때의 반승제는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나친 모든 순간이 지금은 한스러울 따름이었다.‘그때는 왜 발견하지 못했지? 힌트는 분명히
반승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연서는 그와 껄끄러운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나 남은 아들과 껄끄러워졌다가는 반기훈이 그녀를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땐 너희 둘이 아직 이혼하기 전이잖니? 근데 그년이 갑자기 임신했으니, 내가 당연히 신경 써야지. 너한테 물어봤을 때 네 아이도 아니라고 했잖니. 성혜인이 너한테 전화했을 때도 똑같이 말했고.”지나간 일을 다시 곱씹기 시작하고 나서야 반승제는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았다. 마음속의 고통도 무한대로 확장되어 그는 자칫 테이블을 엎으면서 분풀이할 뻔했다. 하지만 백연서의 말에 변명할 거리는 하나도 없었다.“그 일은 제가 잘못했다고 쳐요. 하지만 머리핀은요? 혜인이 머리핀을 저택에 떨어뜨린 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여자가,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머니는 잔인한 짓을 저지른 거예요?”“승제야, 그런 게 아니라...”“시끄러워요!”반승제는 귀국하자마자 성혜인에게 불만을 품은 백연서가 그녀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는 성혜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지만, 이제는 아니다.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이제는 그가 했던 수많은 무심한 행동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의 몸을 마구 쪼아댔다.백연서는 반승제의 반응에 겁먹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반승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앞으로 다시는 혜인이를 귀찮게 굴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혜인이와 어머니 사이에서 저는 언제나 혜인이를 선택할 거라는 걸 명심하세요.”말을 마친 반승제는 또 심드렁한 말투로 가장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물론 옳고 그름을 떠나서요.”전화를 끊은 반승제는 또다시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댔다. 곁에 서 있던 심인우도 성혜인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지라 놀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페니 씨가 성혜인 씨라는 건 대표님과 결혼하고 이혼했던 그 전처라는 말이잖아...?’“심 비서, 20분 안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