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정장 외투를 천천히 입기 시작했다. 마치 외투가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두운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을 보아낼 수 없었고 손가락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단추를 잠갔다.그렇게 외투를 다 입고 난 반승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성혜인이라고?”반승제의 목소리에 성혜인은 고개를 더욱 푹 숙이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신이한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또 설우현을 바라보자,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나만 몰랐던 거군... 하.’분노는 당장이라도 이성을 침식할 것처럼 가슴으로부터 솟구쳤다. 하지만 반승제는 금방 분노를 잠재우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자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성혜인과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되새겼다.반승제는 귀국한 다음 이성을 잃고 서류상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그를 속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불륜 상대는 다름 아닌 ‘아내’였던 것이다.‘아니, 이제는 전처라고 해야겠네.’반승제가 좋아하는 마음을 내비친 다음에도 성혜인은 단호하게 이혼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페니라는 이름으로 그의 마음을 훔치고는 이성까지 빼앗아 가고 말았다.이는 반승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겪어본 일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질문하지도 떠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이 자리에서 반승제 못지않게 놀란 사람은 서주혁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혜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눈썹을 튕기기만 하고 바로 반승제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니까 승제가 이 여자한테 계속 속고 있었던 거야? 이혼도 페니 씨를 위해 한 거잖아?! 근데 둘이 같은 사람이었다니... 정말 미치겠네.’반승제는 한숨을 쉬더니 시선을 깔았다. 반태승은 아직도 성혜인의 곁에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혜인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니? 너희 둘...”“저는 반 대표님과 아무런 사이도
반태승이 예약한 룸에는 반씨 집안사람이 전부 모여 있었다.반승제와 마찬가지로 페니가 성혜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반희월은 한참이나 어리둥절해 있었다. 룸에 들어선 다음에는 그나마 상황이 파악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성혜인은 얌전히 반태승의 곁에 앉아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할아버지,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거예요?”성혜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더니 반승제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혜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반승제의 주변에는 싸늘한 냉기가 맴돌고 있었다. 말없이 분위기만으로도 성혜인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반태승이 입을 열어 반승혜에 관해 물으려고 할 때, 그가 먼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승혜 일은 페, 아니 혜인이랑 상관없어요.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시죠, 할아버지. 저 혜인이랑 따로 할 얘기가 있어요.”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의 주변에는 아직도 냉기가 맴돌고 있었고, 이대로 따라갔다가는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만 같았다.“할아버지, 저...”성혜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승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오늘 하루 피한다고 해서 평생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를 피하고 싶으면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해외로 가든지.”성혜인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반승제가 가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일으키더니 반태승에게 말했다.“그날은 저도 현장에 있었어요. 승혜는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정신과나 카운셀링을 예약해 보세요.”반승제의 말을 들은 반승혜는 바로 반박하려 들었다.“아니야, 오빠. 나 진짜 억울해!”“승혜야, 내가 굳이 CCTV 영상을 꺼내야 입을 다물겠어?”반승제가 CCTV 영상을 바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반승혜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시 CCTV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놀란 듯 몸을 파르르 떨더니 눈물을 흘
성혜인의 성격은 종종 반승제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번에도 그녀의 침묵 때문에 반승제의 이성은 완전히 가출해 버리고 말았다.반승제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성혜인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입술을 맞췄다. 그녀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목까지 조르면서 말이다.성혜인은 질식할 것만 같아서 반승제의 혀를 힘껏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속에는 금방 피비린내가 퍼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뱀파이어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흥분하면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성혜인이 질식할 직전이 되어서야 손을 놓아줬다.반승제의 시선에는 여전히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을 향한 부드러움이 더욱 컸다. 단지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입꼬리에 흐른 피를 닦았다. 그리고 세상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대표님, 저는 단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요. 그저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을 가진 적 없을 뿐이죠. 조사할 기회는 아주 많았어요, 하지만 대표님은 하지 않았죠. 제 가족에게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표님의 고백이 우스웠던 거예요.”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그가 이 감정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니 딱히 반박할 방법도 없었다.성혜인은 여전히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저희가 같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대표님은 통화로 이혼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만약 그때 제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밝혔다면 대표님은 저를 죽여버리지 않았겠어요? 저한테 대표님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목숨 걸고 정체를 밝힐 수 없었어요.”“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지금까지 속여?!”“반승제 씨!”덩달아 짜증이 났던 성혜인은 언성을 높여 반승제의 이름을 불렀다.“저희는 삼 년이나 부부로 살았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윤단미 씨만 취급했었죠. 반승제 씨는 저를 쓰레기 보듯이 했어요. 근데 제가 어떻게 정체를 밝혀요? 반승제 씨가 성씨 가문과 성혜인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제가 가
성혜인은 몸을 뒤로 빼더니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반승제가 차 키를 들고 문을 잠가버렸다.“비켜요! 제발 내리게 해줘요!”성혜인의 안색은 분노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럴수록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내가 자리 비운 삼 년 동안, 누구랑 잤어?”“알아서 뭐 하게요?!”성혜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반승제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녀는 반승제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단추를 푸는 데만 집중했다.그 모습에 이를 꽉 악문 성혜인은 반승제의 뺨을 몇 번이나 더 때렸다. 그렇게 손바닥이 얼얼할 때까지 때렸는데도 그는 강철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이 인간은 고통도 못 느끼는 거야?’“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반승제는 이제야 단추를 풀던 동작을 멈추더니 새빨개진 눈으로 말했다.“성혜인, 난 너한테 도대체 뭐야?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인정해, 인정할게! 그렇다고 해서 넌 나한테 떳떳한 것 같아? 네가 먼저 말해줬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우리가 이혼도 하지 않았어!”성혜인은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반승제가 차 키로 잠근 문은 어떻게 해도 열리지 않았다.“의미 없는 실랑이에요. 그러니 이만 풀어줘요.”“그럼 너한테 의미 있는 건 뭔데?”반승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눈은 점점 더 빨개지고 있었고, 시선을 돌리면 사라질까봐 죽어라 성혜인만 노려봤다.“나랑 말하는 게 의미 없는 거면,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다 의미 없겠네? 그 안에 우리 아이도 포함되는 건가?”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더니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약 일 분가량 가만히 있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당신 입에 올려도 되는 아이가 아니에요.”“...미안.”반승제는 시선을 떨궜다. 손끝은 아직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가만히 누워 있던 성혜인은 문득 그날 병원에 누워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제가 대표님 아이를 낳을 자격이
“내가 다 보상해 줄게.”반승제는 눈초리를 파르르 떨면서 문을 열었다.“오늘 밤은 일단 돌아가서 편하게 쉬어.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고.”성혜인은 약간 어리벙벙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도 동이 틀 때까지 시달리게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도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따듯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어깨에 반승제의 머리가 닿았다. 반승제는 애원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그 자식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제발 부탁이야.”“원래도 아무 사이 아니었어요.”반승제는 성혜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사이였다고 해도 상관없어. 앞으로만 가까이하지 않으면 되니까.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응?”마음 같아서 성혜인은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반승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얼마 후, 반승제가 그녀를 풀어주면서 말했다.“포레스트로 갈 거지? 앞에 타, 내가 데려다줄게.”반승제는 이제야 포레스트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곳은 두 사람의 신혼집이었다. 심지어 함께 산 적도 있는데, 그는 끝끝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하필이면 이혼한 다음에야 알았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포레스트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묵묵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금 괜히 다른 말을 했다가는 겨우 진정한 반승제를 건드리게 될까 봐서 말이다.운전하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포레스트 앞에 도착한 다음에도 성혜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 문이 잠겨서 내리지 못하는데도 말이다.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포레스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를 집에 바래다줄 때 포레스트가 어떤 곳인지 알려준 적도 없는데, 그녀가 이 앞에 세워달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때의 반승제는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나친 모든 순간이 지금은 한스러울 따름이었다.‘그때는 왜 발견하지 못했지? 힌트는 분명히
반승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연서는 그와 껄끄러운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나 남은 아들과 껄끄러워졌다가는 반기훈이 그녀를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땐 너희 둘이 아직 이혼하기 전이잖니? 근데 그년이 갑자기 임신했으니, 내가 당연히 신경 써야지. 너한테 물어봤을 때 네 아이도 아니라고 했잖니. 성혜인이 너한테 전화했을 때도 똑같이 말했고.”지나간 일을 다시 곱씹기 시작하고 나서야 반승제는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았다. 마음속의 고통도 무한대로 확장되어 그는 자칫 테이블을 엎으면서 분풀이할 뻔했다. 하지만 백연서의 말에 변명할 거리는 하나도 없었다.“그 일은 제가 잘못했다고 쳐요. 하지만 머리핀은요? 혜인이 머리핀을 저택에 떨어뜨린 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여자가,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머니는 잔인한 짓을 저지른 거예요?”“승제야, 그런 게 아니라...”“시끄러워요!”반승제는 귀국하자마자 성혜인에게 불만을 품은 백연서가 그녀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는 성혜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지만, 이제는 아니다.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이제는 그가 했던 수많은 무심한 행동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의 몸을 마구 쪼아댔다.백연서는 반승제의 반응에 겁먹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반승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앞으로 다시는 혜인이를 귀찮게 굴지 마세요. 안 그러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혜인이와 어머니 사이에서 저는 언제나 혜인이를 선택할 거라는 걸 명심하세요.”말을 마친 반승제는 또 심드렁한 말투로 가장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물론 옳고 그름을 떠나서요.”전화를 끊은 반승제는 또다시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댔다. 곁에 서 있던 심인우도 성혜인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지라 놀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페니 씨가 성혜인 씨라는 건 대표님과 결혼하고 이혼했던 그 전처라는 말이잖아...?’“심 비서, 20분 안
“승제야, 너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야?”반승제는 페니가 성혜인이라는 것을 모를 때부터 이미 마음이 흔들릴 대로 흔들렸다. 심지어 그녀가 결혼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불륜남까지 한 적 있는 몸이었다.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반승제는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성혜인은 아마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다면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반승제는 다시 성혜인의 자료가 가득 펼쳐진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여전히 쉰 목소리로 말했다.“몰라.”상상도 한 적 없는 일에 반승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당연히 만나고 싶지.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 문제지.”반승제는 자신이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성혜인의 앞에서 그녀를 깎아내린 건 물론이고, 성휘가 아프기 시작한 것도 그와 연관 있었으니 말이다.이 모든 일을 합하면 용서라는 말이 감히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더구나 성혜인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잠자리를 여러 번 가진 후에도 이혼을 결심한 걸 보면 그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만약 반승제가 귀찮게 굴지 않았다면 성혜인은 그와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데가 없었다.‘나 때문에 혜인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난 사업을 방해할 생각만 했는데, 그런 나를 다시 만나줄 리는 없겠지... 머리가 달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온시환은 아직도 안절부절못하면서 곁에 서 있었다. 이때 반승제가 고개를 들더니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시환아, 나 이제 어떡하지?”온시환은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상업계에서 반승제는 못 하는 것이 없는 절대적인 포식자였다. 하지만 연애에서는 이렇듯 불안한 모습으로 그의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온시환은 한참이나 입을 벙긋거렸지만 함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한 일 분 정
“민지야, 내일 혹시 시간 있어? 우리 밥이라도 같이 먹지 않을래?”성혜인의 질문에 강민지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내일은 안 될 것 같아. 내가 요즘 좀 바빠서...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하자!”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지난번부터 예준 씨 사촌 동생이 수술받는다고 하더니, 아직도 못 끝낸 건가?’성혜인이 물어보려는 순간 강민지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래서 그녀도 신경을 껐다.“왈왈!”이때 겨울이가 성혜인이 기분 좋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마당을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성혜인도 그를 말리지는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기만 했다.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S.M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반승제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너무나도 낯선 환경과 인물의 조합에 그녀는 순간 환각을 보는 줄 알았다. 그리고 뒤늦게 반승제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아마 여기에 오기까지 만반의 조사를 했을 것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자리에 앉아서 회사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온 것도 발견하지도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기가 평소 출근하는 사무실이었어? SY그룹의 발전 루트는 영화계로 틀어버렸네. 시환의 영화에 이어서 다음 작품도 대박을 터트렸고.’“대표님, 여기에서 뭐 하세요?”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반승제가 들고 있는 계약서와 같은 것을 바라봤다. 이제야 성혜인이 들어온 것을 발견한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이는 다름 아닌 그가 회수하려던 부동산의 양도 계약서였다.“받아, 선물이야.”반승제는 덤덤한 말투와 반대되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힐끗 봤다.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계약서를 밀어내면서 말했다.“됐어요. 원래 가격대로 임대만 해주세요. 앞으로 더는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마시고요.”반승제는 고개를 숙였다. 선물 하나 주는 것도 이토록 비굴할 수 있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그는 손을 뻗어 성혜인을 붙잡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