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이력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사무실로 불러달라고 청했다. 이력서의 주인 장하리는 올해 초에 입사한 21살의 예쁘장한 신입사원이었다.성혜인은 장하리를 훑어보며 단도직입으로 물었다.“장하리 씨, 제 개인 비서로 일할 생각 없어요?”장하리는 잠깐 멈칫하다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성혜인이 어떤 사장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것은 분명 승진할 좋은 기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면 인사부로 가서 수속을 밟고 오후에 다시 돌아와요. 제가 자리를 만들어 줄게요.”장하리는 또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말없이 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이 성혜인은 아주 만족스러웠다.같은 시각, 어제 크게 창피를 당한 윤단미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김경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만나러 갔다.김경자는 이미 반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법원에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자칫 기절할 뻔하기도 했다. 분노는 성혜인의 피부 껍질을 찢어내고 싶을 정도로 솟아올랐다.“요망한 년 같으니라고, 콜록콜록.”“할머니, 저 이제 어떡해요?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파티에 참석해요...”김경자는 잠깐 기침하다가 백연서에게 물었다.“성씨 집안에서는 무슨 사업을 하니?”성씨 집안에 관한 일은 백연서도 당연히 몰랐다. 그저 BH그룹에서 많은 투자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적자를 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이때 윤단미가 먼저 대답했다.“성씨 집안에서는 페인트 사업을 해요.”김경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너희 집안은 부동산 사업을 한다고 했지? 페인트 회사를 인수해서 도움이 되려나?”“도움은 당연히 되죠. 근데 SY그룹을 인수하면 할아버지께서 화내지 않을까요? 그리고 승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SY그룹도 나름 큰 회사라 인수가 쉽지는 않을 거예요.”만약 윤씨 집안이 재벌가의 문턱을 밟았다고 하면 성씨 집안은 재벌가의 ‘ㅈ’자도 본 적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인수는
성혜인의 사무실은 괴이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녀도 장하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후 성혜인이 몸을 일으키며 장하리에게 말했다.“수고했어요, 이만 퇴근해요.”장하리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성혜인도 이만 퇴근해서 성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윤단미에게 사과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 없었다. 아무리 이사회가 배신했다고 해도, 아무리 그녀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그녀는 윤단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다.성혜인은 성휘의 방문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들어 노크했다. 방 안에서는 성휘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회사를 잘 키우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이런 일로 찾아오게 되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들어와.”성휘는 짧게 대답하고 또다시 기침하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성혜인은 침대 곁에 앉으며 말했다.“아빠, 저 이만 지분을 팔아버리려고요.”성휘는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약 일 분간 침묵한 끝에 겨우 대답했다.“네 마음대로 해, 콜록콜록.”“죄송해요.”“사과할 것 없어. 내가 변호사한테 연락, 콜록콜록...”성휘는 이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분을 파는 일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이만 꿈을 좇으라는 그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래도 속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시작해 회사를 세우는 것이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성혜인도 속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영원히 팔아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일 뿐이에요. 제가 금방 되찾아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그냥 아빠가 놀라지 않게 미리 알려드리러 온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어떤 소식을 들어도 흥분하지 마세요.”성휘는 이제야 약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혜인이 너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 무조건 잘 해낼 거다.”성혜인은 성휘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이미 벌어진
신이한은 성혜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조금 전에 한 말은 그냥 장난이었어요. 그래도 돕겠다고 한 건 진심이에요.”성혜인은 스테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표정은 한결같이 차분하기만 했다.신이한은 그런 성혜인에게 경외심이 들 지경이었다. 반승제의 위압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지구를 통틀어도 몇 안 되기 때문이다.반승제의 곁에 서 있던 윤단미마저도 약간 겁먹은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승제야.”반승제는 이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역시 성혜인은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온시환의 말이 맞았다. 불륜도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진실게임을 할 때도 그녀는 그가 아닌 신이한에게 키스하려고 하지 않았는가?말없이 성혜인을 쏘아보던 반승제는 금세 생각 정리를 끝내고 멀어져갔다. 윤단미는 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성혜인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정말 더러워서 못 봐주겠네요. 남자가 그렇게도 고파요?”말을 마친 윤단미는 반승제를 쪼르르 따라갔다. 반대로 성혜인은 입맛이 뚝 떨어진 듯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신이한은 성혜인를 바라보며 와인잔을 들었다. 눈빛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페니 씨, 아까는 반 대표님이 오는 걸 보고 일부러 그랬죠?”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이한은 한쪽에 놓인 숟가락을 가리켰다. 마침 그녀의 뒤를 볼 수 있도록 배치된 숟가락을 말이다. 신이한은 그녀가 반승제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뽀뽀하려 했다고 생각했다.“만약 제가 막지 않았다면 진짜 뽀뽀하려고 했어요?”“아마도요?”신이한은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반승제 앞에서 대놓고 성혜인과 뽀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이미 날아갔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은 소용없었다.그는 원샷으로 와인잔을 비웠다. 그러자 성혜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죄송해요, 이한 씨.”신이한은 씁쓸
열이 오른 반승제는 성혜인을 확 끌어당겨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젯밤 나무에 부딪히며 다친 데다가 목까지 쉬었던 성혜인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눈을 찔끔 감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위로 올라타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반승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갑자기 왜 화를 내시는 거예요?”반승제는 성혜인의 표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혹시 내가 질투라도 한다고 생각하나?”성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승제도 두말없이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잡았다.“오늘로 여섯 번째겠군.”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푼 순간, 반승제는 얇은 셔츠 뒤에 가려져 있던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어두운 조명 하에 그 자국은 키스 마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반승제는 잠깐 멈칫하더니, 성혜인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내던졌다.“꺼져.”성혜인은 한참 휘청거리고 나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만약 중심을 잡지 못했다면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졌을 것이다.뒤따라 차에서 내린 반승제는 한결같이 고귀한 자태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성혜인을 바라봤다.“너 신 대표랑 잤어?”성혜인은 이제야 반승제가 무엇을 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남긴 흔적의 일부만 보고 키스 마크로 오해한 듯했다.그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피식 웃었다. 반승제가 이미 차에 올라타 멀어진 참이라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다리에 힘이 풀려 길가에 쪼그려 앉은 성혜인은 목을 만지작대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약간 기운이 생긴 다음에야 자신의 차에 돌아가 로즈가든으로 향했다.저녁, 성혜인은 장하리의 전화를 받았다.“사장님, 세한에서 지분을 10%까지 모았어요. 아마 내일이면 이사회에 가입할 수 있을 것 같아요.”10%의 지분은 이사회에 가입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조만간 SY그룹 전체를 삼켜버릴지도 몰랐다.“하지만 이상하게도 10%에서 멈춘 지 한참 됐어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
성혜인은 새벽 사이에 35%의 지분을 장하리에게 양도했다. 그녀가 주식을 팔았다는 사실을 세한그룹에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사실 장하리의 이름으로 파는 것도 너무 많은 양의 지분이기 때문에 리스크가 있었다. 그래도 음모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더구나 도움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장하리 밖에 없기도 했다.장하리가 지분을 받고 도망갈 걱정은 없었다. 신이한과 체결한 계약 덕분에 지분의 중심은 언제나 성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계약 내용은 그녀와 신이한만 알 뿐,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다.35%의 지분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먼 세한그룹 측 책임자는 곧바로 윤단미에게 소식을 알렸다.“이것만 얻으면 SY그룹 인수는 성공한 것과 다름없어요. 앞으로 단미 씨가 SY그룹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윤단미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반승제는 그녀에게 전문가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저 컨설팅을 할 만한 돈을 보내줬을 뿐이다.다행히 윤단미 스스로 찾은 컨설턴트가 유능한 덕분에 하루 사이에 16%의 지분을 모은 건 물론이고 오늘은 35%라는 대어까지 낚을 수 있었다.윤단미는 귀까지 찢어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성혜인에게 복수할 상상만 해도 도파민이 마구 솟아나왔다.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성공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심호흡과 함께 진정하며 물었다.“가격은요?”“가격은 시장 가격의 2배로 4000억 원을 원한다고 했어요.”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렸다. 4000억 원은 그녀에게도 높은 값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얼마 전 금방 가짜 그림에 1200억 원이나 썼으니 더욱 망설여졌다.가짜 그림 때문에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주영훈에게 선택받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평가를 받았던 일이 생각나니 윤단미는 또다시 분노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건 모두 성혜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성씨 일가는 죽어야 마땅하다.물론 페니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어젯밤 페니가 신이한과 뽀뽀하려고 했을 때 반승제의 반응은 누가 봐도 질투하는 것이었
오후 3시.장하리가 수표와 계약서를 준비한 다음 성혜인은 회사 사무실이 아닌 로즈가든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준비한 물건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을 때 겨울이는 한쪽에서 배를 까고 꼬리를 흔들어 대며 애교를 부렸다.“이건 4000억 원의 수표이고, 이건 계약서예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SY그룹의 사장이 아니게 된다. 윤단미는 51%의 지분과 함께 그 누구도 초월하지 못할 압도적인 대주주가 될 것이고, 회사 또한 윤단미에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주식 양도 절차가 끝난 다음 윤단미는 바로 SY그룹으로 출발했다. 동시에 세한그룹 측에서는 인수에 성공했다는 기사와 함께 주식 데이터를 공개했다.업계 사람들은 이번 인수 사건을 반승제를 사이 둔 성혜인과 윤단미의 전쟁이라고 여겼다. 원래는 꽤 피 튀기는 전쟁이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윤단미의 압승이었다.업계 사람들로 이루어진 단톡방에서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바로 문자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성혜인 씨도 별 볼 것 없네요. 이틀 만에 회사를 홀라당 빼앗기는 걸 보면요.」「반승제 씨가 윤단미 씨를 도와줘서 그런 게 아닐까요?」「그렇게 보면 성혜인 씨도 참 불쌍하네요. 남편이 첫사랑과 합세해서 집안 회사를 빼앗다니요.」오래간만에 나타난 역대급 가십거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보탰다.같은 시각, 윤단미는 김경자와 백연서에게 전화로 좋은 소식을 알리고 나서 당당하게 SY그룹을 둘러봤다.SY그룹의 직원들도 물론 사장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임원진을 제외한 직원들은 주어진 임무만 하면 되었기에 사장이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마치 임금이 누가됐든 백성의 생활은 똑같은 것처럼 말이다.윤단미는 SY그룹을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성혜인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책상과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생각보다 더욱 초라한 사무실의 모습에 윤단미는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대충 사진 한 장 찍어 성혜인에게 문자
“승제야, 나 SY그룹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어.”책상 앞에 앉은 반승제는 윤단미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세상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이렇게 빨리?”“응. 사실 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 SY그룹이 그만큼 볼품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성혜인 씨는 오늘 출근도 안 했던데 집안에서 물건이나 깨부수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윤단미는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반승제는 전혀 관심 없는 표정으로 노트북에 타자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단미야, 나는 너랑 다시 만날 생각 없어.”윤단미는 당연히 반승제의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너무나도 예상 밖의 말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고 귀를 의심하는 듯 조심스럽게 되물었다.“승제야,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렇지?”반승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들어 윤단미를 바라봤다. 이는 연애를 하는 내내 변함없이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표정이기도 했다.그는 단 한 번도 먼저 윤단미와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 적이 없었다. 윤단미도 팔짱을 끼는 것 외의 스킨십은 감히 하지 못했다. 어쩌다 용기를 내야만 우연인 척 품에 부딪혀 볼 수 있었다.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에 윤단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흑흑, 네가 나를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승우 오빠가 그랬단 말이야...”반승우가 언급되자 반승제는 손을 흠칫 떨었다.“미안해. 나도 한때는 너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 너도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윤단미의 입안에서는 피비린내가 돌기 시작했다. 긴 손톱으로 꽉 잡은 바지는 거의 찢길 지경이었다.“내가 아니면 누구랑 결혼할 생각인데?”윤단미의 표정은 마치 반승제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여자를 잘근잘근 씹어 죽일 것처럼 살벌했다.“난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반승제의 빠른 대답에 윤단미는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다면 왜 나한테 시간 낭비라고
윤단미는 BH그룹 밖으로 나와서도 미처 진정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반승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윤단미가 귀국한 이후로 반승제에게 다가간 적 있는 여자는 페니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결벽증이 있는 반승제가 신이한과 뽀뽀하려던 페니의 모습을 보고서도 계속 만날 것 같지는 않았다. 둘이 보는 눈이 없는 데서는 어디까지 갔을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그래도 윤단미는 페니를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 성혜인을 없애버리고 난 다음은 페니의 차례가 될 것이다.윤단미는 시계를 힐끗 봤다. 곧 있으면 저녁 9시가 된다. 지금 반씨 저택으로 출발하면 그녀를 좋아하는 집안 어른들과 함께 성혜인의 비굴한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후련했다.반씨 저택에 도착하자 이미 윤단미를 기다리고 있는 김경자와 백연서의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은 함께 차와 과일을 준비해 놓은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았다. 성혜인이 무조건 무릎 꿇고 사과하러 올 것이라고 단정 지은 듯한 모습이었다.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경자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윤단미가 SY그룹을 인수한 것은 기쁜 일이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야, 이번에는 진짜 잘했어.”김경자는 미소를 지으며 윤단미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윤단미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승제의 마음이 어찌 됐든 김경자는 그녀의 편을 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돌려 보니 백연서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인정받을 수 있을 듯했다.윤단미는 이제 와서 걱정되는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근데 이 일을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어떡해요?”김경자는 피식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느긋하게 대답했다.“네가 아직도 승제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구나. 승제는 처음부터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영감탱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했다.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넘어 증오까지 생겨났겠지. 영감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