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친한 사이도 아니다.“혹시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요?”생각에 잠겨있던 그녀의 귀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그제야 이미 주차장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따로 운전해서 왔다. 지금 두 사람에겐 여기서 헤어지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는 선택밖에 없었다.고민하던 와중에 남자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아직 떠오르는 곳이 없으면 제가 추천하는 곳으로 가볼래요?”강하랑은 눈썹을 튕겼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연유성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미 사랑 씨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라니.조수석에 앉은 강하랑은 그의 말에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뒤로 휙휙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서해는 비록 빠르게 발전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 원래의 모습을 잃은 건 아니었다.원래의 모습에서 나무와 꽃을 더 많이 심었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보면 마치 숲속에 높은 빌딩이 세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름다운 자연과 현시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고층 건물의 조합이라.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렸다.만약 정말로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운전하는 거라면, 어쩌
툭 내뱉은 그녀의 말은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연유성은 익숙한 호칭에 살짝 멈칫하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다.시선을 떨군 채 자신의 옷깃을 꼭 잡고 있는 강하랑을 보며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윽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미 신경이 온통 거리에 팔린 강하랑은 그 시선을 알 길이 없었다.“지난번 단 대표랑 같이 사랑 씨 찾으러 왔을 때 승우가 알려줬어요. 사랑 씨도 알다시피 이곳은 지씨 가문의 구역이거든요. 그래서 승우가 이곳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죠.”낡은 동네가 지씨 가문의 것이라는 것은 사실 과장된 말이다. 여하간에
낡은 동네의 거리는 아주 북적거렸다. 길가의 노점상들은 대부분 음식을 팔고 있었다.입구 쪽엔 옷과 신발을 팔고 있었다. 전부 싸게 처리하는 것들이었고 가격 흥정은 사절한다는 글이 상자에 쓰여 있었다. 사장은 의자에 앉아 확성기를 틀어놓고 있었다.만약 다른 곳에서 이런 확성기 소리를 들었다면 강하랑은 아주 시끄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이곳에서 들으니 더욱 뭔가 구경할 마음이 생기는 기분이었다.사람이 붐비는 곳엔 당연히 여러 가지 시끄러운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야 했다.옷 파는 곳을 지나치자 중간엔 또 다
가족끼리 온 사람도 있었고, 강하랑과 연유성처럼 젊은 커플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의자에 앉아서 고른 것이 아닌 인형을 꺼내는 사장님 곁에 다가가서 고르는 사람도 있었다.이 속도라면 두 사람이 밥을 먹고 나오기도 전에 원하는 인형이 다 팔리게 될 것이다.자리가 있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에 드는 인형을 손에 넣여야 했다. 마음에 드는 인형이 아니라면 색칠을 예쁘게 해도 속상할 것 같았다.연유성의 건의에 강하랑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어 사장님이 꺼내고 있는 인형을 짚으며 말했다.“
강하랑의 나직한 목소리가 인파를 뚫고 연유성의 귓가에 흘러 들어갔다.순간 주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멍하니 강하랑을 보고 있던 연유성의 가슴은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귓가에 심장 소리만 남았다.노을빛 아래 둘만 남은 것 같았다.주위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도,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쳐도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강하랑만 빤히 보았다.그때의 화재사건 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걱정했다.연성태는 그가 죽어 연씨 가문을 이을 사람이 없을까 봐, 온서애는 마지막으로
“사랑 씨, 다른 것도 먹어보지 않을래요?”강하랑은 눈썹을 살짝 튕겼다.“사랑 씨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요. 내가 얼른 가서 사 올게요.”사실 거절하려고 했다.하지만 옆 가게 사장이 내온 홍어회를 보니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겨왔고 하려던 말마저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정말로 다 말해도 돼요?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전부 말해도 되나요?”강하랑은 연유성이 아마도 홍어회 같은 음식을 먹어보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생활한 환경이 연바다와 다르긴 했지만 딱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강하랑은 진지하게 생각했다.사실 먹고 싶은 건 아주 많았지만 다 못 먹을 것이 뻔했기에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거면 돼요.”“알았어요.”그녀의 말에 대답한 연유성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사골곰탕 가게는 아주 인기가 많았다. 미리 급하게 먹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강하랑도 재촉하면서까지 먹을 생각은 없었기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연유성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유성이 사람들 무리 속에서 나왔다.덩치가 크고 외모가 출중한 탓에 오리들 속에 있는 백조 같았다.턱을 괸 채 그가 걸어오는 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보기
강하랑은 붓으로 그리는 그림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비록 현지에 있었지만 서양의 유화가 색감이 진하고 화려한 것이 더 잘 어울릴 수 있을 거 같다. 사진으로도 이미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 도전해 보고 싶었다.그래서 인터넷 영상을 따라 하나하나 연습하기 시작했다.첫눈이 내릴 때, 강하랑의 조금 만족스러운 첫 작품이 완성되었고 동시에 그녀의 다음 여행도 시작되었다.추위를 두려워하는 강하랑은 이번에는 남쪽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북쪽으로 향했다.그녀는 국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로 가서 전에
굳이 단점을 말하자면, 이 마을의 물가가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다.강하랑은 초등학교에 머무는 동안, 다 함께 아껴 쓰고 절약하며 지내느라 한 푼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이 여행에서도 같은 습관을 유지했다.그녀는 이 생활의 정취가 짙은 이 작은 마을이, 생활 리듬이 느리면서도 물가가 수도권 도시를 능가할 정도로 비쌀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정말 믿기 어려웠다.강하랑은 이곳에 한 달만 머물렀다.햇살이 따스한 날, 아파트의 작은 창가에 누워 맞은편 초등학교의 어린이날 예술 공연을 다 보고 나서야 집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 여행
강하랑은 설이 끝난 후 도망쳤다.그전에는 단이혁의 회사에서 잠시 일을 했다.솔직히 말해서, 연예인 지망생들의 외모는 정말로 훌륭했다.예쁜 여자들은 하얀 피부에 다리가 길쭉하고, 잘생긴 남자들은 몸매가 엄청 좋았다.정말로 선택해야 한다면, 강하랑은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것이다.자신의 플레이 본능을 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고 싶었다.몸매 좋은 남자들이 강하랑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정말 좋았지만 예쁜 여동생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인사하면서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는 정말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그녀는 돈도 많고
이것은 그녀가 예전에 행복했을 때와 다름없는 미소였다.예전 같았으면, 단유혁은 한숨을 돌리고는 강하랑을 따라 산책하고, 사진 찍고, 밥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하지만 최근에는, 그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오빠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 강하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머리를 기울이고, 차 문 앞에 기대어 말했다. "오빠, 나는 어떤 사람의 죽음 때문에 조금 슬펐던 건 인정하지만, 예쁘고 똑똑한 여동생이 쓰레기 같은 사람 때문에 죽고 살지 않을 거라는 걸 믿어줘, 알겠지?"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은 선행으
“하랑이는 추후 어떤 계획 있어?”단유혁은 질문을 피하며,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그는 강하랑의 시선을 따라 멀지 않은 해변을 바라보았다. 해변에서 햇볕을 받으며 배구를 치는 아이들과 얇은 옷을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청년들을 보면서, 이런 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인생은 곧 걸어가는 과정에서의 수행이기에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사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평화로운 햇살 아래에서 뛰어놀고 즐기는 것이다.이 외에 또 어떤 것이 있을까?그는 시선을 거두어 다시 강하랑에
“하지만 너 이 며칠 동안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안심할 수가 없었어.”단유혁은 정희월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차를 몰고 가며 강하랑을 한 번 흘겨본 후 농담처럼 말했다.별장에서의 어조에 비해 지금은 많이 가벼워졌다.“아이구.” 강하랑은 깊게 한숨을 쉬며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아무리 말해도 난 과다 출혈로 다친 환자야. 휴식을 취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이 말은 당연히 둘러대는 말이었다.연바다에게 끌려갔을 때, 그녀의 팔 부상은 완벽하게 처치되어 있었고 이후에도 상처가 부딪혀도 다시 열리지 않았다. 병원과 별장에서
정희월이 원래 긴장을 풀었던 마음이 다시 조여졌다.그녀는 강하랑을 달래며 말했다. “하랑아, 너 왜 그런 걸 묻니? 그 장면은 보기 좋지 않아. 만약 집에서 지루하다면 오빠에게 데리고 나가서 놀거나 나와 함께 정원에 가서 꽃을 심자.”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을까?정희월은 직접 산에 가본 적은 없지만 뉴스에서 온서애를 실어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연씨 가문의 온서애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산의 상황은 더 위험했을 것이다.비디오가 인터넷에 올라오지
강하랑은 단시혁이 돌아온 후 바로 퇴원을 했다.병원 창밖의 풍경이 좋기는 했지만 병원에 있는 것은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공기에서도 그녀가 싫어하는 냄새가 났다.그녀는 집에 가고 싶었다.단시혁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동생의 기분이 좋지 않고 잘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의사가 몸에 큰 이상이 없고 입원할 필요도 없다고 했으니 집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그는 강하랑을 데리고 서해시에 있는 단씨 가문의 별장으로 돌아갔다.이곳에는 사람이 많아 그녀를 돌보기가 편했다.게다가 곧 설날이 다가와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보내는
강하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었고, 귀에는 전자 기기의 소리가 들려왔다.공기 중에는 자극적인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고 그녀는 한참을 안정시키고 나서야 시선을 돌려 옆을 보았다.창밖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를 서서히 회전시켜 지금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그녀가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그가 케인에게 묻히는 것을 그녀는 지켜보았다.이후로는 더 이상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가고 강제로 감금시키고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