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이나 침묵에 잠긴 서채은은 결국 직접 이 꿈을 끝내기로 했다.“만약 사직이 곤란하다면 한동안 쉬게 해주세요. 3년 전 집안일로 잠깐 쉰 다음 한 번도 못 쉬었잖아요. 저 요즘 진짜 피곤했어요. 그래서 이 시간에 대표님께 사직서를 보냈던 거예요. 홧김에 한 일이라 생각이 부족했던 건 사과할게요.”“내 말이 장난 같아?”단원혁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서채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산책로의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그림자는 마침 그녀를 감쌌다.서채은은 고개를 숙여 한데 어우러진 두 그림자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림자만 보면
서채은은 고개를 들고 단원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진지한 말투로 다시 한번 말했다.“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요.”단원혁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원래 하려고 했던 모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침묵에 이어 지금껏 거두고 있던 기운은 강바람보다 더욱 차갑게 흩어졌다.“...진심이야?”한참 지난 다음에야 단원혁은 겨우 이 네 글자를 뱉어냈다. 그러자 서채은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서채은도 단원혁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억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제가 대표님한테
하지만 지금의 단원혁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알고 싶은 것만 물었다. 그의 변화에 서채은은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그래도 다른 감정보다는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감정이 가장 컸다. 되도록 영원히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몇 번 더 본다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미 약해진 마음은 결국 거짓말할 용기까지 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서채은은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그런 게 아니에요. 사직은 제가 오래전부터 고민했던 거예요. 평생 원혁 씨와 함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마치 물고기의 가시처럼 걸려버렸다. 삼키려면 아프고, 그렇다고 해서 뱉어낼 수도 없었다.‘지금 다른 여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나한테 고백하러 온 거야? 대표님 마음도 이 정도밖에 안 됐던 거네.’서채은은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더 이상 단원혁과 함께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차갑게 시선을 돌리더니 애써 서러움을 참아내면서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세요. 그리고 사직서도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렸다. 단원혁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내가 눈이 삐
“크... 크, 큰오빠요?”서채은은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끝냈다. 그리고 한참이나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대표님을 오해한 건가? 친한 동생도 아닌 친동생이라고?’서채은은 얼빠진 표정으로 보라색 치마를 입은 강하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하랑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그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정신을 다시 끌어왔다.“언니, 일단 세수부터 하고 나와요. 그리고 우리 아침 먹으러 가요. 오늘 시간 있으면 나랑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요
강하랑도 마찬가지다. 어젯밤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녀는 단홍우를 데리러 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정희월과 함께 본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마침 오늘이 토요일이라 단홍우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미래 새언니’와 친해지기에 완벽한 기회라는 말이다. 아쉽게도 단원혁은 할 일이 산더미라 함께 할 수 없었다.‘주말에 출근이 웬 말이야! 이러니까 아직도 여친이 없지.’강하랑은 한숨을 쉬면서 서채은에게 입힐 옷을 꺼냈다. 그리고 아침 식사도 차리기 시작했다.단유혁은 점심 전에 절대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식사를 준비
단원혁의 전담 비서로 일하면서 서채은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그래서 속으로는 놀랐으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척 미소를 지었다.세 사람에게 꾸벅 묵례하고 난 그녀는 강하랑이 그릇을 내려놓은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 중 처음 보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성세혁과 인상이 비슷한 걸 봐서는 아무래도 단씨 집안사람인 것 같았다.그래도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참기름의 냄새와 함께 새우살이 씹혔다. 뒤이어 새우와 함께 갈아 넣
“세혁 오빠, 내가 끓인 만둣국 좀 먹어볼래? 어제 금방 빚은 만두가 아직도 엄청 남았어.”단세혁도 내심 사랑 표 만둣국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단이혁처럼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향긋한 냄새에 샌드위치는 뒷전인지 오래였고, 배가 부른 데도 군침이 돌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그럼 부탁할게. 맛만 보면 되니까 너무 많이 할 필요는 없어.”“알았어, 후딱 만들어줄게.”강하랑은 부지런히 주방에 들어가서 금방 만둣국 한 그릇을 들고나왔다. 한 그릇, 진짜 딱 한 그릇을 말이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둣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