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이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현미가 타일렀다.“지민아,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 믿어. 근데 준혁이 그 아이를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있잖아. 너랑 절대 관계를 가진 적 없다고 하니까 나도 좀 그러네. 도대체 너희 둘 중 누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어머님, 저는 절대 어머님 속인 적 없어요.”원지민이 큰 소리로 말했다.“이 아이 준혁이 아이 맞아요.”“하... 너희가 서로 딴소리하고 있으니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힘이 달리네. 임신 몇 개월인지도 모르잖아.”“3개월이에요.”원지민은 얼떨결에 이렇게 말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다행히 문현미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지민아, 나는 네가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너는 내가 믿을 수 있거든. 나는 너 무조건 응원한다.”불안했던 원지민의 마음도 살짝 풀렸다. 원지민은 억울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어머님, 몇 개월인지는 일단 비밀로 해주세요. 준혁이 알면 배가 불러오기 전에 애 떼라고 할 거예요.”“걱정하지 마. 내가 비밀로 할게.”문현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우리 이씨 집안 첫 손주인데 손대면 내가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지민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어머님.”그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어머님, 요즘도 머리 아파요? 약 거의 다 먹었죠? 선생님께 더 부탁해 볼까요?”“그래, 거의 다 먹긴 했어. 잘됐네. 마침 말하려고 했는데.”“네, 내일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문현미만 잘 구슬리면 이준혁이 넘어오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준혁에게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이선 그룹, 회의실.회사 내부 감사팀에서 나오자마자 히든카드를 내밀었다. 이선 그룹과 온진 그룹 간의 부정당 거래에 관한 자료였고 거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준혁의 사인이 보였다.이준혁은 자리에 앉아 아무 표정 없이 상대가 질책하는
하지만 이태수의 자필 편지가 공개되자 주주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중에는 한구운도 있었다.이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받은 그날을 평생 기다려왔다.이제 남은 건 천천히 잠식해 이선 그룹을 완전히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준혁이라는 사람이 이선 그룹의 미래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이천수도 기분이 좋았다.주주들이 이 소식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준혁도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계획을 한번 쭉 돌이켜본 이천수는 좋은 사람인 척 쇼를 이어갔다.“오늘 제가 할 말은 이상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저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더 부연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3일 뒤에 다시 의논할 예정이니 여러분 의견에 따라서 결론을 내시면 됩니다.”이천수는 예정대로 3일이라는 시간을 남겨두고 이준혁을 핍박하는 데 쓰려고 했다.거기에 원지민과 문현미까지 합세하면 이준혁이 타협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은 입을 꼭 앙다물었다. 여전히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회의실 분위기가 매우 딱딱했다.이천수와 이준혁은 전에는 그저 암투였지만 지금은 대놓고 서로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니 주주들도 더는 어물쩍 넘기지 못하고 라인을 잘 타야 했다.이제 파벌이 명확하게 나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천수의 마지막 히든카드는 늙은 보수파를 흔드는 데 쓰였다. 보수파들이 전처럼 표정이 어둡지 않자 기분이 좋아진 이천수는 서류를 정리하더니 수장이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이제 다들 나가보셔도 됩니다.”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준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잠깐만요.”지배자와도 같은 아우라에 일어났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미 이준혁의 명령에 습관된 것 같았다.이천수가 코웃음 치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준혁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봤다.이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끝났어요?”이천수가 대답했다.“네.”“그러면 제가 보충하는 걸로 하죠.”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며 중지로 테이블
이천수가 씩씩거리며 손에 든 서류철을 이준혁에게 힘껏 던졌다.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이준혁은 머리만 살짝 갸우뚱하는 것으로 피했다.주훈이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이천수의 팔을 뒤로 꺾더니 그의 얼굴을 테이블에 꽉 눌렀다.이천수는 처량한 모습으로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야 이 자식아. 지금 존속 살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너 같은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주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천수가 아들을 욕하는 게 너무 듣기 거북했기 때문이다. 켕기는 게 있어서 이렇게 발악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한구운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더니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아빠, 진정해요.”이천수는 그제야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인정하지만 않으면 이준혁도 어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한구운은 이천수가 차분해지자 주훈에게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사님한테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요?”주훈은 한구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천수의 목덜미를 꽉 잡은 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한구운의 안색이 순간 너무 어두워졌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이내 다시 풀었다.한구운은 일단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바라봤다.“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잖아요. 이러면 주주들도 실망할 거라고요.”그는 일부러 ‘우리 아빠’라고 하면서 이준혁을 자극하려 했다.게다가 진실을 흐리려고 했다. 주훈은 그저 이천수가 이준혁에게 상해를 가하지 못하게 막았을 뿐인데 한구운은 이를 아버지에 대한 불경이라고 과장했다.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을 빙빙 둘러서 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입꼬리를 당기며 경멸에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주 비서, 이사님이 꿈꾸는 큰 그림을 주주들께 보여드려.”주훈은 그제야 이천수를 풀어주더니 미리 준비한 프로젝터로 스크린에 재생하기 시작했다.이내 이천수의 목소리가 스크린에서 들려왔다.“주 대표님, 이 대표님, 황 대표님, 저희 둘째를 지지해 주세요. 둘째가
제보자의 아버지는 온진 그룹이 보낸 철거자들의 핍박에 못 이겨 차를 끌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구조되었는데 결국 뇌사 상태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제보자는 원래 피신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내 신변을 보호해 주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제보자의 제보 덕분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고 하나둘씩 인터넷에 폭로하기 시작했다.다른 피해자들은 비록 사망한 건 아니지만 철거를 토론하는 동안 외출하면 꼭 재수 없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다 혹시나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철거 동의서에 사인했다.이선 그룹은 이 프로젝트의 초기 공정에는 참여한 적이 없었고 그저 뒤에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였다. 다 원지민이 뒤에서 몰래 저지른 일이었다.게다가 저번에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선포하며 대중을 향해 사건의 전말을 사실대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주주들은 큰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폭력 철거와 핍박 살인, 그중 어떤 키워드든 이선 그룹이 오랫동안 수립한 성실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번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다.순간 주주들은 이준혁의 과감함에 감탄했다. 주주들은 이제 더는 이천수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숨겨둔 자식을 대표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그룹의 이익을 외부로 돌리고 사리사욕을 차리기 위해 그룹을 사경으로 내몰았다.이런 사람 밑에서 나온 이구운이 좋은 리더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준혁은 달랐다. 이준혁은 이태수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군 아래에 졸병은 없다는 말이 있다.이천수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이미 승리는 한물갔다는 걸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준비한 카드가 너무 완벽했다.먼저 이천수가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길 기다렸다가 그 죄를 하나씩 뒤엎으면서 반전의 반전을 선보였다.이천수가 갑자기 이구운의 손을 잡으며 울기 시작했다.“아들아, 아빠가 어리석었다. 네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착
녹색 비단옷을 입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주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이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노인은 바로 이태수의 집사 주진희였다.이태수가 죽고 주진희는 이태수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만보산을 지키러 갔다.몇 년이 지났기에 이천수는 주진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불효자식. 아저씨는 집에서 노후를 잘 보내고 계셨을 텐데 왜 번거롭게 여기까지 불러낸 거야?”이천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본인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주진희는 이태수의 옆을 지키던 집사라 권력이 꽤 컸다. 이태수가 있을 때도 주진희는 이천수의 체면을 챙겨준 적이 없었다.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진희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졌지만 아직 또렷하고 힘 있었다.“천수 도련님, 작은 도련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먼저 오겠다고 했어요.”이천수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얼른 웃으며 말했다.“왜 먼 길 나오셨나요?”“요즘 이선 그룹에서 일어난 이변은 마침 들어서 압니다. 그러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했던 당부가 떠 올라서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천수가 성격이 온전치 못하니 옆에서 자주 귀띔해 주라고 하셨습니다.”옆에 있은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지 주진희의 표정은 이태수와 꽤 닮아 있었다.이천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망할 놈의 영감,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하게 억압하더니. 죽어서도 가만히 놔두질 않네.’이천수가 죽은 척하는데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이사님, 할아버지 자필 편지를 주진희 아저씨한테 좀 보여주는 게 어때요?”“...”이천수는 말문이 막혔다.주진희가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그런 게 있어요? 어르신의 자필 편지라, 천수 도련님, 제게 한번 보여주세요.”이천수가 버벅거리며 말했다.“뭐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내용을 갈고 있을 테
보디가드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이준혁이 찻잔을 들어 그쪽으로 뿌렸다.“풉.”차와 찻잎이 이천수의 얼굴에 흩뿌려져 꼴이 매우 우스워졌다.“짐승 같은 놈이.”이준혁이 이천수에게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이사님, 말 가려서 하시죠.”이천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준혁의 강압적인 아우라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이천수가 알던 남자아이도 소년도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우뚝 설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오히려 이천수가 이준혁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이었고 압도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준혁에게 기세가 크게 꺾인 것 같았다.이준혁이 말했다.“현장에 아저씨 신분을 모르는 주주들이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 절대 집사 이상이었습니다.”이천수는 이준혁이 반박하는 게 싫었지만 그가 가까이 서 있었기에 그 위압감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이준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때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암해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저씨가 구해주셨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몸에 칼자국이 적지 않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어떤 장소에서든 아저씨를 생사를 같이한 형제라고 말씀하셨고 한 번도 아저씨를 도우미로 하대한 적이 없습니다.”이 사실은 현장에 있는 초대 주주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이태수는 주진희를 형제로 생각했는데 이천수가 이렇게 하대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대한다는 건 그의 인성이 바닥이라는 걸 설명했다.주주들이 수군거리자 이천수의 얼굴은 마치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이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썼다는 그 편지 다시 꺼내보세요.”이천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꺼내지 않으면 의심받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꺼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편지를 입안에 욱여넣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짐승 같은 놈, 내가 편지를 꺼내 보여준다 해도 너는 나를 모함할 거야.”이천수는 일단 적반하장이라도 하고 볼 심산이었다. 그리
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너무 똑같아서 가짜라는 거예요.”이천수가 말했다.“한번 들어나 봅시다. 뭐라고 둘러댈 수 있는지 말이에요.”“이 서예 작품은 어르신이 조부의 작품을 모방해서 쓴 것입니다. 하여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어르신 본인의 글씨체로 모방 작품이라고 적어놓으셨죠.”“근데 의뢰한 업체가 너무 덜떨어진 업체라 서예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구를 보지 못하고 앞에 페이지에서 필요한 글자만 떼서 위조한 거죠.”주진희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어르신의 진짜 필적은 여기 있습니다.”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태수의 글씨체는 또렷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앞에 적힌 글씨체와는 아예 다른 경지였다.이천수는 넋을 잃었다.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위조했는데 원본마저 이태수의 필적이 아닌 모방작이었기 때문이다.이천수가 중얼거렸다.“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천수 도련님, 어르신 아들로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어르신의 필적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주진희의 얼굴은 이제 온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설산 정상에 자라난 소나무처럼 올곧았다.“정말 속상하고 실망스럽네요.”아들로서 이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태수가 후계자를 아들이 아닌 손주를 선택한 것도 모자라 아들을 외국으로 몰아내 사업하게 한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다.도덕이 없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다.이태수는 자신의 혜안으로 이미 아들은 큰일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아니야.”이천수가 이성을 잃고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인 틈을 타 주진희의 목을 조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영감탱이, 왜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야.”이천수는 이미 완전히 미친 상태였다. 체면이 바닥난 이상 더 신경 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가까이 서 있던 이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천수를 발로 걷어찼다.쾅.이천수가 바닥에 주저앉았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찍었어?”이천수가 제구실 못하는 보
한구운의 눈에 이준혁은 늘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따듯함과 아름다움도 이 점잖은 척하는 남자에게 뺏기고 말았다.한구운은 부드럽고 젠틀한 겉모습과는 달리 계략에 능한 편이었다.“왜 쇼라고 생각해요? 형을 형이라고 하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들어봤죠? 혈연관계는 쉽게 안 바뀌어요.”이준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예 한구운을 공기 취급했다.한구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원지민 씨도 임신했으니 이제 형님도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네요. 와이프만 둘이라니, 형만큼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근데 혜인이는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좀 가르쳐줘요. 그래야 나도 앞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잘 달래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한구운은 허심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내 와이프는 윤혜인 한 명뿐이야.”이준혁은 두터운 살기를 뿜어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리고 윤혜인은 내 아내야. 앞으로 한 번만 더 윤혜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서울에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줄게.”한구운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형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 아들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족보에 못 올라가면 어때요?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한구운은 한 번의 실패로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아도는 게 인내심이라 다음 기회에 만전을 기하면 된다.“족보에 오르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이준혁이 하찮다는 눈빛으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선 그룹의 모든 산업이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너를 끔찍이 아끼는 이천수 씨도 그 산업을 결국 내게 물려줘야 한다는 거야. 너한테 이전한 그 재산도 내가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어.”한구운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이 일로 그냥 체면이 조금 구겨질 거라 생각했기에 제일 신경 쓰지 않는 게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