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가 씩씩거리며 손에 든 서류철을 이준혁에게 힘껏 던졌다.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이준혁은 머리만 살짝 갸우뚱하는 것으로 피했다.주훈이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이천수의 팔을 뒤로 꺾더니 그의 얼굴을 테이블에 꽉 눌렀다.이천수는 처량한 모습으로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야 이 자식아. 지금 존속 살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너 같은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주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천수가 아들을 욕하는 게 너무 듣기 거북했기 때문이다. 켕기는 게 있어서 이렇게 발악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한구운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더니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아빠, 진정해요.”이천수는 그제야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정신을 차렸다. 인정하지만 않으면 이준혁도 어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한구운은 이천수가 차분해지자 주훈에게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사님한테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요?”주훈은 한구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이천수의 목덜미를 꽉 잡은 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한구운의 안색이 순간 너무 어두워졌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지만 이내 다시 풀었다.한구운은 일단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바라봤다.“형,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아빠잖아요. 이러면 주주들도 실망할 거라고요.”그는 일부러 ‘우리 아빠’라고 하면서 이준혁을 자극하려 했다.게다가 진실을 흐리려고 했다. 주훈은 그저 이천수가 이준혁에게 상해를 가하지 못하게 막았을 뿐인데 한구운은 이를 아버지에 대한 불경이라고 과장했다.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을 빙빙 둘러서 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입꼬리를 당기며 경멸에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주 비서, 이사님이 꿈꾸는 큰 그림을 주주들께 보여드려.”주훈은 그제야 이천수를 풀어주더니 미리 준비한 프로젝터로 스크린에 재생하기 시작했다.이내 이천수의 목소리가 스크린에서 들려왔다.“주 대표님, 이 대표님, 황 대표님, 저희 둘째를 지지해 주세요. 둘째가
제보자의 아버지는 온진 그룹이 보낸 철거자들의 핍박에 못 이겨 차를 끌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구조되었는데 결국 뇌사 상태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제보자는 원래 피신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내 신변을 보호해 주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제보자의 제보 덕분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고 하나둘씩 인터넷에 폭로하기 시작했다.다른 피해자들은 비록 사망한 건 아니지만 철거를 토론하는 동안 외출하면 꼭 재수 없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다 혹시나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철거 동의서에 사인했다.이선 그룹은 이 프로젝트의 초기 공정에는 참여한 적이 없었고 그저 뒤에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였다. 다 원지민이 뒤에서 몰래 저지른 일이었다.게다가 저번에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선포하며 대중을 향해 사건의 전말을 사실대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주주들은 큰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폭력 철거와 핍박 살인, 그중 어떤 키워드든 이선 그룹이 오랫동안 수립한 성실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번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다.순간 주주들은 이준혁의 과감함에 감탄했다. 주주들은 이제 더는 이천수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숨겨둔 자식을 대표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그룹의 이익을 외부로 돌리고 사리사욕을 차리기 위해 그룹을 사경으로 내몰았다.이런 사람 밑에서 나온 이구운이 좋은 리더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준혁은 달랐다. 이준혁은 이태수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군 아래에 졸병은 없다는 말이 있다.이천수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이미 승리는 한물갔다는 걸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준비한 카드가 너무 완벽했다.먼저 이천수가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길 기다렸다가 그 죄를 하나씩 뒤엎으면서 반전의 반전을 선보였다.이천수가 갑자기 이구운의 손을 잡으며 울기 시작했다.“아들아, 아빠가 어리석었다. 네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착
녹색 비단옷을 입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주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이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노인은 바로 이태수의 집사 주진희였다.이태수가 죽고 주진희는 이태수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만보산을 지키러 갔다.몇 년이 지났기에 이천수는 주진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불효자식. 아저씨는 집에서 노후를 잘 보내고 계셨을 텐데 왜 번거롭게 여기까지 불러낸 거야?”이천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본인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주진희는 이태수의 옆을 지키던 집사라 권력이 꽤 컸다. 이태수가 있을 때도 주진희는 이천수의 체면을 챙겨준 적이 없었다.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진희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졌지만 아직 또렷하고 힘 있었다.“천수 도련님, 작은 도련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먼저 오겠다고 했어요.”이천수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얼른 웃으며 말했다.“왜 먼 길 나오셨나요?”“요즘 이선 그룹에서 일어난 이변은 마침 들어서 압니다. 그러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했던 당부가 떠 올라서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천수가 성격이 온전치 못하니 옆에서 자주 귀띔해 주라고 하셨습니다.”옆에 있은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지 주진희의 표정은 이태수와 꽤 닮아 있었다.이천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망할 놈의 영감,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하게 억압하더니. 죽어서도 가만히 놔두질 않네.’이천수가 죽은 척하는데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이사님, 할아버지 자필 편지를 주진희 아저씨한테 좀 보여주는 게 어때요?”“...”이천수는 말문이 막혔다.주진희가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그런 게 있어요? 어르신의 자필 편지라, 천수 도련님, 제게 한번 보여주세요.”이천수가 버벅거리며 말했다.“뭐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내용을 갈고 있을 테
보디가드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이준혁이 찻잔을 들어 그쪽으로 뿌렸다.“풉.”차와 찻잎이 이천수의 얼굴에 흩뿌려져 꼴이 매우 우스워졌다.“짐승 같은 놈이.”이준혁이 이천수에게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이사님, 말 가려서 하시죠.”이천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준혁의 강압적인 아우라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이천수가 알던 남자아이도 소년도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우뚝 설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오히려 이천수가 이준혁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이었고 압도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준혁에게 기세가 크게 꺾인 것 같았다.이준혁이 말했다.“현장에 아저씨 신분을 모르는 주주들이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 절대 집사 이상이었습니다.”이천수는 이준혁이 반박하는 게 싫었지만 그가 가까이 서 있었기에 그 위압감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이준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때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암해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저씨가 구해주셨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몸에 칼자국이 적지 않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어떤 장소에서든 아저씨를 생사를 같이한 형제라고 말씀하셨고 한 번도 아저씨를 도우미로 하대한 적이 없습니다.”이 사실은 현장에 있는 초대 주주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이태수는 주진희를 형제로 생각했는데 이천수가 이렇게 하대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대한다는 건 그의 인성이 바닥이라는 걸 설명했다.주주들이 수군거리자 이천수의 얼굴은 마치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이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썼다는 그 편지 다시 꺼내보세요.”이천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꺼내지 않으면 의심받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꺼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편지를 입안에 욱여넣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짐승 같은 놈, 내가 편지를 꺼내 보여준다 해도 너는 나를 모함할 거야.”이천수는 일단 적반하장이라도 하고 볼 심산이었다. 그리
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너무 똑같아서 가짜라는 거예요.”이천수가 말했다.“한번 들어나 봅시다. 뭐라고 둘러댈 수 있는지 말이에요.”“이 서예 작품은 어르신이 조부의 작품을 모방해서 쓴 것입니다. 하여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어르신 본인의 글씨체로 모방 작품이라고 적어놓으셨죠.”“근데 의뢰한 업체가 너무 덜떨어진 업체라 서예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구를 보지 못하고 앞에 페이지에서 필요한 글자만 떼서 위조한 거죠.”주진희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어르신의 진짜 필적은 여기 있습니다.”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태수의 글씨체는 또렷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앞에 적힌 글씨체와는 아예 다른 경지였다.이천수는 넋을 잃었다.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위조했는데 원본마저 이태수의 필적이 아닌 모방작이었기 때문이다.이천수가 중얼거렸다.“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천수 도련님, 어르신 아들로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어르신의 필적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주진희의 얼굴은 이제 온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설산 정상에 자라난 소나무처럼 올곧았다.“정말 속상하고 실망스럽네요.”아들로서 이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태수가 후계자를 아들이 아닌 손주를 선택한 것도 모자라 아들을 외국으로 몰아내 사업하게 한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다.도덕이 없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다.이태수는 자신의 혜안으로 이미 아들은 큰일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아니야.”이천수가 이성을 잃고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인 틈을 타 주진희의 목을 조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영감탱이, 왜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야.”이천수는 이미 완전히 미친 상태였다. 체면이 바닥난 이상 더 신경 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가까이 서 있던 이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천수를 발로 걷어찼다.쾅.이천수가 바닥에 주저앉았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찍었어?”이천수가 제구실 못하는 보
한구운의 눈에 이준혁은 늘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따듯함과 아름다움도 이 점잖은 척하는 남자에게 뺏기고 말았다.한구운은 부드럽고 젠틀한 겉모습과는 달리 계략에 능한 편이었다.“왜 쇼라고 생각해요? 형을 형이라고 하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들어봤죠? 혈연관계는 쉽게 안 바뀌어요.”이준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예 한구운을 공기 취급했다.한구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원지민 씨도 임신했으니 이제 형님도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네요. 와이프만 둘이라니, 형만큼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근데 혜인이는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좀 가르쳐줘요. 그래야 나도 앞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잘 달래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한구운은 허심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내 와이프는 윤혜인 한 명뿐이야.”이준혁은 두터운 살기를 뿜어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리고 윤혜인은 내 아내야. 앞으로 한 번만 더 윤혜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서울에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줄게.”한구운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형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 아들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족보에 못 올라가면 어때요?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한구운은 한 번의 실패로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아도는 게 인내심이라 다음 기회에 만전을 기하면 된다.“족보에 오르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이준혁이 하찮다는 눈빛으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선 그룹의 모든 산업이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너를 끔찍이 아끼는 이천수 씨도 그 산업을 결국 내게 물려줘야 한다는 거야. 너한테 이전한 그 재산도 내가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어.”한구운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이 일로 그냥 체면이 조금 구겨질 거라 생각했기에 제일 신경 쓰지 않는 게 바
한구운은 따끔거리는 볼을 살펴볼 새도 없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천수를 바라봤다.이천수도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빈털터리로 남게 될 수도 있다. 전에 보유한 해외 자금도 지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이천수는 고개를 돌려 한구운을 외면하며 서글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얼른 가자.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아니면 나도 더는 너 같은 아들 필요 없어.”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한구운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이천수를 확 밀친 채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이천수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주진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천수 도련님,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이천수는 창백한 얼굴로 공손하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아저씨, 구운은 제가 잘 단속할게요.”아까 보였던 태도와는 완전 딴판이었다.이준혁은 이천수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주진희에게 말했다.“아저씨, 서울에 며칠 더 계세요. 제가 서울 구경 시켜드릴게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이제 어르신 보러 가야죠.”이준혁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주진희는 자식이 없었기에 이태수를 가족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산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 시끄러운 곳을 싫어했다.차에 오른 주진희는 밖에 공손하게 서 있는 이준혁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련님, 정말 제가 천수 도련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만약에 할아버지가 전하라고 한 말씀이 있다면 아저씨가 저한테 말씀하셨겠죠. 그게 아니라 해도 다 할아버지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그래, 그래.”주진희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시 작은 도련님은 어르신이 직접 키운 후계자십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가지지도 않고 해결해야 할 일에 우유부단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차에 시동이 걸렸다.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저씨, 조심히 들어가세요.”주진희가
이천수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참담하게 말했다.“아빠가 너를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야.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야.”한구운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자 이천수가 얼른 설명했다.“아빠 한 번만 믿어줘. 시간을 준다면 반드시 네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게.”한구운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그 늙은이가 뭐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축 늘어진 거예요?”이천수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한구운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한구운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이천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도 방법이 없어서 일단 타협한 거야. 아니면 내가 고생해서 쌓아온 부를 다 잃게 되는데 무슨 수로 다시 일어나?”쾅.굉음에 이천수가 화들짝 놀랐다.한구운이 오른손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차창은 금세 금이 갔고 손에는 퍼런 멍이 들었다.“아들, 아들.”이천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요.”한구운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차에 올라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전속력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화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왜. 도대체 왜...’한구운은 이천수와 조금은 통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천수는 한 번도 그의 편에 서준 적이 없었다....윤혜인이 활동 현장에 나와 있는데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다.“회사 일은 해결했어.”그는 그저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다.윤혜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쪽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던가요?”이준혁은 윤혜인이 물어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덤덤하게 말했다.“아니.”그렇게 잠깐 더 대화를 나누다가 윤혜인이 이렇게 말했다.“누가 부르네요. 먼저 일하러 가볼게요.”“그래. 저녁에 보자.”윤혜인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오늘 빨리 못 들어갈 수도 있어요. 끝나고 본부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대요.”“많이 늦으면 데리러 갈게.”“준혁 씨도 늦을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