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참담하게 말했다.“아빠가 너를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야.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야.”한구운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자 이천수가 얼른 설명했다.“아빠 한 번만 믿어줘. 시간을 준다면 반드시 네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게.”한구운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그 늙은이가 뭐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축 늘어진 거예요?”이천수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한구운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한구운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이천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도 방법이 없어서 일단 타협한 거야. 아니면 내가 고생해서 쌓아온 부를 다 잃게 되는데 무슨 수로 다시 일어나?”쾅.굉음에 이천수가 화들짝 놀랐다.한구운이 오른손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차창은 금세 금이 갔고 손에는 퍼런 멍이 들었다.“아들, 아들.”이천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요.”한구운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차에 올라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전속력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화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왜. 도대체 왜...’한구운은 이천수와 조금은 통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천수는 한 번도 그의 편에 서준 적이 없었다....윤혜인이 활동 현장에 나와 있는데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다.“회사 일은 해결했어.”그는 그저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다.윤혜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쪽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던가요?”이준혁은 윤혜인이 물어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덤덤하게 말했다.“아니.”그렇게 잠깐 더 대화를 나누다가 윤혜인이 이렇게 말했다.“누가 부르네요. 먼저 일하러 가볼게요.”“그래. 저녁에 보자.”윤혜인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오늘 빨리 못 들어갈 수도 있어요. 끝나고 본부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대요.”“많이 늦으면 데리러 갈게.”“준혁 씨도 늦을
윤혜인이 화들짝 놀라며 나가려 했지만 남자가 들어올 때 센서를 건드리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정상적으로 닫혔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야구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는 윤혜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윤혜인은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그 남자를 경계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윤혜인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화면을 향해 있었지만 곁눈질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전혀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윤혜인은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발견했다.회관의 엘리베이터는 CCTV 사각지대가 없었다. 남자가 CCTV를 힐끔 쳐다봤다.시간이 두 배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지하 1층에 도착했다.윤혜인은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남자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윤혜인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윤혜인은 딱딱하게 굳은 다리를 이끌고 밖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차까지 열 걸음 조금 넘게 남았고 기사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걸음을 재촉하며 겨우 두 걸음 내디뎠는데 누군가 어깨를 꾹 눌렀다.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윤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꿈치를 뒤로 날렸다.뒤에 있던 사람이 몸을 살짝 비켰다. 윤혜인은 이 틈을 타서 차로 달려갔지만 뒤에 있던 사람이 낮은 소리로 불렀다.“혜인아...”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폭 안기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준혁 씨...”윤혜인의 떨림을 느꼈는지 이준혁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왜 그래?”윤혜인이 남자가 따라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었다.너무 신경질적인지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본 그 남자 몸에서 나던 진한 향기가 내국인과는 달랐고 외국인에게서 나는 향기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뒤에 없으니 아마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찾으러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이때 까만 세단 하나가 옆을 지나갔다
카메라가 탈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카메라가 부서진 기자는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얼굴을 굳히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달밤 작업실에서 사람을 쳤다.”이 말에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까만 구두를 신은 이준혁은 망가진 카메라를 살포시 지르밟으며 남자의 멱살을 부여잡고는 주훈의 품에 내팽개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짜 기자가 딸려 들어온 것 같은데 경찰에 넘겨.”멱살을 잡힌 남자가 멈칫하더니 억울하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나 기자에요. 진짜 기자예요. 당신이 가짜라고 하면 가짜에요?”주훈이 남자의 외투를 벗기자 팔뚝에 새긴 청룡 문신이 드러났다.남자가 다급하게 어깨를 감싸더니 난동을 부렸다.“왜 내 옷을 찢고 그래요? 사람 살려.”다른 사람들이 같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달밤 작업실에서 사람을 때린다. 사람 살려.”덕분에 주훈은 더 구별하기 쉬워졌다. 얼른 손을 내밀어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을 짚으며 보디가드에게 처리하라고 했다.옷을 벗겨보더니 기자는 무슨 죄다 청룡과 백호 문신을 한 날라리였다.남은 기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들도 업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채팅방에서 소식을 듣고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가짜 기자가 섞여 있을 줄은 몰랐다.무슨 목적으로 기자로 위장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이준혁은 매서운 눈빛으로 현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누가 보냈어요?”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진짜 기자들은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기자들이 얌전하게 대답했다.“대표님, 너그럽게 봐주세요. 저희도 채팅방에 올라온 글 때문에 홀려서 온 거예요.”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왔으니 취재하세요.”“아니요. 아무것도 취재하지 않겠습니다.”이준혁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가짜 뉴스는 취재하면서 진짜는 왜 취재할 생각을 안 해요?”기자들이 넋을 잃었다.“원지민 씨 배
이준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윤혜인이 그의 팔짱을 끼고 물었다.“아주머니셔요?” 지난번에 이준혁이 약에 대해 설명해줬을 때 문현미가 원지민에 의해 몰래 약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윤혜인은 소름이 돋았다.‘어쩐지 아주머니의 요즘 행동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긴 했어.’이준혁이 말했다.“응. 넘어지셨대. 좀 가봐야겠어.”“나도 같이 갈까요?”이준혁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같이 가자.”두 사람은 곧바로 이씨 집안 고택으로 향했다.이 집에 다시 들어서자 윤혜인은 가슴이 찡해졌다.예전에 윤혜인은 자주 와서 이태수를 만나곤 했었다. 이곳에 들어서니 어쩐지 그가 더욱 그리워졌다.대문을 막 들어서자마자 이준혁은 문 앞에 서 있는 원지민을 보았다.원지민은 창백하고 병약한 얼굴로 이준혁을 보자마자 눈가가 붉어졌다.“준혁아, 돌아...”하지만 이준혁이 뒤에 있는 윤혜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자 원지민은 말문이 막혔다.곧 그 눈빛에는 분노가 들끓었다.그녀는 일부러 배를 내밀었고 본래 크지 않은 배는 크게 부풀어 보였다.윤혜인은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이곳이 고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원지민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정말 잘 알고 있었고 그 효과는 탁월했다.“네가 여기 왜 있어?”이준혁의 얼굴에 있던 초조함은 그녀를 보자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그리고 온몸에서 소리 없는, 그러나 사람을 저절로 멀리하게 만드는 냉기가 흘러나왔다.원지민은 그 냉기에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난 계속 어머님 곁에 있었어...”“됐어. 이제 가도 돼.”이준혁은 이렇게 말하고 윤혜인의 손을 잡아 원지민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원지민을 마치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처럼 대하며 말이다.지난번 약 사건 이후, 이준혁은 계속 사람을 시켜 문현미를 몰래 지키게 하여 원지민이 그녀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문현미는 약을 원지민이 준 것이 아니
누구나 이준혁이 윤혜인을 위해 나선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못이 박히듯 원지민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그러자 조금 전 원지민이 내비친 그 자신감도 단번에 무너졌다.이준혁이 직접 입으로 그녀를 외부인이라고 인증한 셈이었으니 말이다.이윽고 문현미가 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려 했다.“아유, 준혁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지민이는 나를 친엄마처럼 생각해. 그러니 이 집도 지민이의 집이랑 같단다.”이 말에 원지민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준혁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하지만 원지민과 더 이상 얘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이준혁은 문현미에게 말했다.“말씀하실 거 있으면 하세요. 혜인이가 못 들을 이야기는 없으니까요.”그의 말에는 윤혜인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문현미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준혁이 네가 온진 그룹과의 모든 협력을 중단하는 바람에 온진 그룹은 주식이 정지되고 심하면 상장 폐지까지 갈 수 있어. 너무 지나치게 행동한 건 아닌지 싶구나... 지민이가 네 아이를 품고 있는 만큼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우리 사이에 체면을 살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그러자 이준혁은 냉담하게 말했다.“엄마, 이번 처벌은 그래도 제가 온진 그룹 회장님 체면을 봐줘서 이 정도인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원지민과 이선 그룹 회장님이 결탁해 이익을 챙긴 것에 대해 우리 이선 그룹 법무부가 원지민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었어요.”원지민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준혁아, 정말 오해야. 그건 내가 아니라 삼촌이 먼저 나를 찾아와 네 뜻이라고 말한 거야. 이 일은 제가 어머님께도 설명했잖아요.”문현미는 그녀를 옹호하며 말했다.“그래, 준혁아, 나도 증명할 수 있어. 지민이는 절대 너에게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아이요?”이준혁은 피식 냉소를 지었다.“제가 여러 번 말했죠. 원지민이 가진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에요. 아무리 손주를
원지민의 배를 응시하며 이준혁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원지민은 그의 시선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세 달 반?”이준혁은 냉랭한 얼굴로 조용히 되물었다.하지만 원지민의 귀에는 그것이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며 몇 초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이 순간 그녀는 문현미가 몹시 원망스러웠다.‘말하지 않기로 해놓고 이렇게 쉽게 말을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원지민이 대책을 생각하던 이준혁이 문현미에게 말했다.“엄마, 푹 쉬세요. 이 비서를 여기 두고 갈 테니 무슨 일 있으면 그 사람에게 시키시면 돼요.”이준혁은 아들로서 더 오래 머물러야 할 일이었지만 문현미가 원지민을 곁에 두겠다고 고집하는 이상, 그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게다가 이곳에는 도우미들도 많고 이준혁은 몰래 사람을 시켜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도 이 비서만을 남겨두어 원지민이 이곳에서 어떤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방지하려 했다.윤혜인은 공손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 편히 쉬세요.”그러자 문현미는 눈을 굴리며 대놓고 그녀를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윤혜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아랫사람으로서의 존중과 예의를 다했으니 문현미가 자신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어차피 그들 사이가 더 가까워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가자.”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한층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함과, 엄지손가락으로 그녀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작은 움직임은 마치 윤혜인을 위로하는 듯했다.윤혜인은 눈빛을 반짝이며 이준혁을 향해 미소 짓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자신이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이준혁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고 그의 차가운 얼굴에 생기가 돌며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그리고 이 장면은 원지민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주먹을 꽉 쥔 채로 원지민의 가슴은 질투로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준혁이 네가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머님은...”원지민은 눈이 빨개지며 문현미가 넘어졌는데도 이준혁을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내가 왜 가는
원지민은 할 말을 잃었다.“계속 내 아이라고 주장하는데 내일 당장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줄게.”“안 돼!”원지민은 소리 지르며 거부했다.“내 아이를 죽이려는 거지? 날 속이려는 거라고! 절대로 그렇게 못 해!”원지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나 이미 검사했어. 이 아이는 분명히 네 아이야.”하지만 이준혁은 차갑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원지민, 내가 네가 내놓은 걸 믿을 것 같아?”그 말에 원지민은 순간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눈이 빨개져 윤혜인을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다 너 때문이야! 너 이미 죽었잖아. 왜 다시 돌아와서 우리 관계를 망치려는 거야?!”그러나 윤혜인은 이미 이준혁의 보호를 받으며 그의 뒤에 숨어 있었다.옆에 있던 이 비서는 원지민의 손목을 단단히 잡으며 조금의 배려도 없이 그녀를 제지했다.원지민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이준혁, 우리 아이는 아들이야. 얘는 이씨 집안의 후계자라고! 넌 네 친아들은 인정 안 하면서 출신이 어떤지도 모르는 잡종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야?”이제 그녀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이준혁은 이미 원씨 가문을 철저히 망가뜨리기로 결심했고 원지민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그녀는 회사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피하려고 핸드폰을 꺼둔 상태였다.아마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원씨 가문은 파산 신청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꿈을 꾸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꿈에서 완전히 추락해 버린 것이다.이준혁은 원지민과 더 이상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정말이지 원지민이 히스테리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그녀는 항상 존재하지 않는 일들을 상상하는 것처럼 보였다.이준혁은 더 이상 원지민을 곁에 두고 증거를 찾으려는 계획을 포기했다.그리고 이런 사람을 문현미의 곁에 두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이 비서, 원지민 씨를 원씨 가문으로 돌려보내 줘. 거기서 잘 감시하라고 전달해 주고 또다시 미친 짓을 한다면 정신병원에
이준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문현미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아무 말 없이 윤혜인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원지민은 그들이 모두 떠난 것을 느끼고 나서야 떨리던 몸이 진정되었다.그녀는 문현미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어머님, 고마워요.”문현미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고맙긴 왜 그러니, 지민아.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물론이죠. 이제 슬슬 약 드실 시간이 되었네요. 제가 약 가져다드릴게요.”원지민은 웃으며 말했다.원지민이 나간 후, 문현미는 천장을 바라보며 아침의 일을 곰곰이 떠올렸다.그녀가 머리가 어지러웠던 건 원지민이 준 물을 마신 후였다.그리고 넘어졌던 이유는 잡고 있던 손잡이가 갑자기 풀려버렸기 때문이다.‘왜 손잡이가 풀렸을까...’문현미는 속으로 원지민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또한 원지민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그래서 문현미는 원지민을 곁에 두려고 애쓴 것이었다. 최소한 원지민은 지금 자신을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의심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원지민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문현미는 즉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민아, 너무 무리하지 마라.”“괜찮아요. 저 안 힘들어요.”원지민은 물과 약을 건네며 문현미가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편히 쉬세요. 어머님.”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현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이선 그룹 대표 사무실.이준혁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잠시 후, 그는 명령을 내렸다.“1월부터 5월까지 내가 밖에 있었던 모든 기록을 가져와. 원지민과 내가 겹쳤던 시간들을 확인하고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지 조사해봐.”주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이런 조사는 사실 모래 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특히 몇 달 전의 일을 다시 뒤집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잠깐!”주훈이 문 앞에 도달하자 이준혁이 그를 불러 세웠다.이준혁은 갑자기
영숙은 잰걸음으로 달려가 얼른 차 문을 열어줬다.“대표님, 빨리 오셨네요...”반짝거리는 구두로 땅을 밟은 남자는 긴 다리로 신속하게 차에서 내리더니 영숙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대답을 듣지 못한 영숙은 난처한 기색 없이 매우 덤덤했다.‘왔으면 된 거지...’오히려 육경한을 뒤따라온 소종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숙 매니저님, 직원을 이렇게 관심하는지 몰랐네요. 혹시 체리라는 직원과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건가요?”가시가 돋친 말에 영숙이 바짝 긴장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말했다.“소 비서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육씨 가문을 걱정한 것뿐이에요. 두 분 다 있는 집 아가씨라 특수한 존재인데 스캔들에 휘말려서야 되겠어요?”영숙이 소종에게로 다가가더니 온갖 신비로운 척은 다 하며 이렇게 속삭였다.“위에서 요즘 불시 검문하는 거 아시면서. 다른 손님이었으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데 대표님 손님은 저 따위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표님 뜻을 먼저 여쭤봐야죠.”영숙의 해명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소종은 믿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와 유흥가를 오간 소종은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유흥가에서 아가씨를 거닐고 다니는 마담이라면 눈에 뵈는 게 돈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마담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부품과도 같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아가씨를 위해 손님에게 밉보이는 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영숙이 몸담고 있는 이곳은 돈 많은 사람들의 천국이었다.소원이 이런 곳에서 몸을 사릴 수 있었던 건 소원이 운 좋아서가 아니라 영숙이 미리 손님을 선별해서 줬기 때문이었다. 업무를 성사하기 위해 오는 사장님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런 손님들은 이곳의 아가씨들을 건드리는 법이 거의 없었고 그저 업무 수요 때문에 형식적으로 아가씨를 불러 분위기를 띄울 뿐이었다.소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둘러대는 영숙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숙 매니저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
동영상을 찍으려면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데 영숙이 룸으로 들어오는 순간 일을 그르치게 될 것 같아 일단 영숙에게 이렇게 귀띔했다.“내가 술병을 깨면 그때 전화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절대 들어오면 안 돼요.”영숙이 말했다.“알았어. 네가 말한 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소원이 들어간 뒤로 영숙은 너무 불안했고 안에서 들려오는 매질 소리에 가슴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다.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소원이 했던 말이 떠올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영숙은 소원이 총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자고 다짐했다. 소진용의 딸이니 무조건 믿고 협조해 줘야겠다고 속으로 되뇌는데 안에서 드디어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영숙은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여러 번 울리자 영숙은 혹시나 육경한이 받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영숙의 능력으로 육경한의 개인 번호 하나 얻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기에 영숙은 바로 육경한의 개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개인 번호라 해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거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육경한이 영숙의 번호를 기억할 리는 없었다.연결음이 일고여덟 번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자 다급해진 영숙은 정말 당장이라도 차를 운전해 육경한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고 싶었다. 마지막 연결음이 끝나려던 찰나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시죠?”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적어도 소종의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붕 떠 있던 영숙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천만다행으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대표님, 저는 KB 클럽의 유영숙이라고 합니다.”샤워를 마친 육경한은 진한 갈색의 비단 잠옷을 입고 침대에 기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갑자기 전화드려 죄송하지만 일단 제 말씀 좀 들어주세요...”영숙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저녁에 육연주 씨와 방민아 씨가 클
한 시간 전.영숙이 몸을 돌리려는데 소원이 불러세웠다.“언니...”소원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왜 그래?”영숙이 다시 몸을 돌리더니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음... 이따가 복잡한 상황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소원의 말에 영숙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게 뭔데?”영숙은 고민에 잠겼다. 이 바닥에서 오래 있었으니 소원이 지금 출근하러 나온 게 이상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리 손님이 중요하다지만 밥벌이가 급하지도 않은 소원이 몸조리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희생정신을 보이는 게 수상했기 때문이다.순간 모든 걸 알아챈 영숙이 얼른 이렇게 물었다.“혹시 룸에 무슨 일 있어?”소원이 침묵으로 대답하자 영숙이 소원의 손을 꼭 잡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러면 가지 마. 아직 몸도 채 낫지 않았는데 들어가서 쉬어. 걱정하지 마.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내가 다 커버할 수 있어.”소원이 영숙의 손을 도로 잡으며 말했다.“한번은 피할 수 있어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요. 언니, 유진이도 그렇고 유진이를 돌보는 아줌마도 그렇고 다 내가 필요해요. 내가 일어서서 싸우지 않으면 곧 후회할지도 몰라요.”소원이 영숙을 보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내겐 언니가 필요해요. 언니만이 나를 도울 수 있어요.”소원은 이상하게 영숙이 믿음직스러웠다. 선의는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법이라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선의가 어디서 온 건지 모르지만 소원은 지금 그 선의가 너무 필요했다.“그래. 말해 봐.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소원이 답했다.“지금 저 방에 들어가면 얘기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술병을 깨트린다면 대신 전화 좀 해줘요...”소원이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육경한에게 전화 좀 해줘요.”깜짝 놀란 영숙이 되물었다.“육경한 대표에게 전화하라고?”“네.”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육경한에게 전화 좀 해줘요.”영숙은 두 사람 사
날카로운 손톱으로 마음을 할퀴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겪어보고 나니 왜 다들 물뽕을 그렇게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만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게 누군가에게 엉겨 붙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소원은 시야마저 흐릿해지자 얼른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고 이에 방민기가 소원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손사래를 쳤다.“소원아, 우리 배운 사람답게 행동하자. 말로 하면 되는 걸 왜 힘을 쓰려 그래? 너도 알잖아. 네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거. 술병을 들어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어? 지금 온몸이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간지럽고 힘들지? 그런 몸으로 나를 다치게 하겠다고? 힘 빼지 마.”쨍그랑.부서지는 소리에 방민기가 깜짝 놀라더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너... 너 정말...”소원은 들었던 술병을 그대로 자기 머리에 내리치더니 깨지면서 생긴 날카로운 부분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검붉은 피가 소원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와 눈과 속눈썹, 그리고 코가 뒤덮었고 따듯한 불빛 아래 너무 기괴해 보였다. 소원은 피로 물든 예쁜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당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진 몰라도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어요. 정 그렇게 나와 놀고 싶다면 내 시신을 갖고 노는 건 어때요?”방민기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더니 연신 뒷걸음질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X발. 이런 미친X을 봤나. 그 미친 X끼랑 다를 게 뭐야.”아무리 여자에 미쳤다 해도 시신을 가지고 노는 건 너무 섬뜩하고 미친 짓이었다.소원이 깨지고 남은 술병을 목에 찔러넣자 핏줄기가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너무 위험해 보였다.“놀고 싶다면서요?”소원의 빨간 입술이 움직였다.“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되겠어요? 방민기 씨...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는데.”“나도 안 무서워하는데 먼저 발 빼면 되겠어요?”소원의 목소리는 마치 뱀처럼 방민기의 귓가에 빙빙 맴돌았다. 방민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 뒤로 물러나다가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소원이 유리병을
방민기는 소원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 치 앞을 모른 채 발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따가 물뽕 효과가 올라와도 저렇게 바락바락 성질을 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소원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방민기도 딱히 급해하지 않고 헤벌쭉 웃으며 소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반응이 전혀 없다면 다른 자극을 찾아볼 생각이었다.“소원아, 여자들이 왜 육경한을 좋아하는지 말해줄 수 있어?”방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허심탄회하게 물어봤다.“나도 그렇게 뒤처지는 건 아닌데 왜 여자들은 하나같이 진심을 내어주지 않고 내 돈만 바라보는 걸까? 젠장. 육경한 그 새끼는 얼음장 같아서 여자한테 어떻게 잘해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여자가 많이 꼬이는 거지?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길래 그런 거야? 설마 그쪽 방면으로... 여자를 훙분하게 하는 건가... 응?”그 원인이 아니라면 육경한도 왜 여자들이 육경한에게 그렇게 매달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 육경한에게 크게 뒤처질 건 없었고 육경한보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못생기지는 않는데 말이다.남자에겐 신분과 지위가 제일 좋은 미용이라고 했는데 방민기도 이름있는 재벌 2세였지만 그가 알고 지내는 있는 집 아가씨나 노래방 도우미들은 육경한만 보면 하나같이 걸음을 떼지 못했다. 분명 육경한은 별다른 눈빛이나 암시를 준 적이 없는데 껌뻑 죽는 여자들만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두 사람 다 인간이 아니라서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소원이 차갑게 말했다.“후. 역시 너는 보는 눈이 다르단 말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니까 생각나는 게 여자들은 나쁜 남자 좋아하지 않아? 내가 최대한 나빠지면 너도 푹 빠져서 경한은 둘째치고 경로를 못 찾을 수도 있잖아.”마지막 한마디는 육경한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방민기는 지금 자연스럽게 소원을 육경한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번에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니 잊으려 해도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방민기는 손끝으로 소원의 옷자락을
“됐어. 민아 너는 얼른 가. 좋은 시간 방해하지 말고.”방민기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단추를 마구 풀어제끼기 시작했다.방민아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정신이 몽롱해서도 억지로 버티는 여자를 보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재밌게 놀아.”방민아는 이 말만 남기고 문을 닫고 나갔다. 옷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윗옷을 벗으니 가려졌던 뽀얀 속살과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 딱 봐도 운동한 적이 별로 없는, 향락에만 빠져있는 몸 같았다.방민기가 앞으로 다가가 소원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우리 예쁜이, 재밌는 놀이 좀 해볼까?”소원은 머리가 윙 했고 의식이 끊겼다 이어지는 게 너무 흐리멍덩해서 방민기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지 못한 채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뭐 하는 거예요?”소원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고 유진을 죽여버리겠다던 그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아니, 절대 안 되지. 누구든 유진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바닥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주어 손에 꽉 움켜쥔 소원은 피와 고통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했다. 방민기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방민기는 약을 탄 음료수를 소원의 턱을 잡고 억지로 먹이더니 이렇게 말했다.“마셔. 이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있다 재밌는 구경 좀 시켜줘.”방민기도 직접 즐기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 여자를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놀려고 해도 놀 수가 없었다.소원이 얌전하게 협조할 리가 없었기에 일단 얌전해지게 하려면 ‘뽕’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든 소원이 음료수를 엎지르려는데 이를 눈치챈 방민기가 소원의 손을 잡고 뒤로 꺾는 바람에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유리 조각마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방민기가 대수롭지 않
방민아는 가벼운 말투로 비웃었다.“어쨌든 오빠는 경한 씨의 매형인데 그 사람이 이런 하찮은 여자 때문에 오빠를 곤란하게 하겠어?”방민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내가 육 대표님의 매형이니 그분이 날 곤란하게 하면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겠지.”하지만 방민기는 방민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예전에도 소원 때문에 육경한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협박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로 인해 몸에 문제가 생겼던 방민기는 아무리 육경한 측에서 부정한다고 해도 분명히 그의 짓이라고 확신했다.다른 누가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었다.그저 소원을 두어 마디 농담 삼아 희롱했을 뿐인데 육경한이 미친 듯이 사람을 보내 협박한 것이다.만약 이번에 소원을 건드린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그 남자는 진짜 건드려선 안 돼. 이건 내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야.’방민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육경한 같은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돋보이는 사람이었다.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오랜 배고픔에 시달린 늑대처럼 사람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 같은 위협감을 주었다.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오빠, 겁쟁이라더니 진짜로 겁먹었네. 이 여자가 뭔데? 경한 씨가 놀다 버린 여자잖아. 오빠가 진지하게 볼 가치가 있어?”그녀의 말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육경한이 이 여자를 버렸다는 사실에 방민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그저 소원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싶을 뿐이었다.그녀는 계속해서 생각했다.‘다 이 여자 때문이야. 이 여자가 없었다면 경한 씨가 아이에 대한 혐오감을 갖지 않았을 거야. 아니면 왜 아이를 싫어해서 정관수술까지 받겠어?’점점 이런 생각에 방민아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곧 방민기가 천천히 말했다.“민아야, 오늘 네가 한 말 기억해둘 거야.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께 네 계획이라고 보고할 거야. 내 비서가 다 듣고 있으니까 발뺌하지 마.”방민아는 방민기의 지나친 신중함에 화가 치밀었다.“오빠, 왜 그
소원은 비록 초췌하고 기진맥진했지만 강한 의지로 벽에 기대며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방민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겁먹은 모양이구나? 아니, 겁먹었을 뿐 아니라 내가 네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믿고 있는 것 같아.”소원의 평온한 말투는 방민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금씩 무너지던 심리적 방어벽을 드러내게 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방민아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소원은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자신을 겁주려는 것뿐이라고.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경한 씨가 저런 여자를 받아들일 리 없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린 여자를 원한다고? 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그런 수치를 감수할 리 없잖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방민아는 마음을 다잡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속이려고 하지 마. 너 같은 게 그럴 힘이 어디 있겠어.”그러자 소원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가 허세를 부리는지 아닌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내게 그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네가 더 잘 알 거야.”방민아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그녀의 눈에 육경한은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소원 같은 여자에게 계속해서 모욕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곧 방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의 손을 힐 신은 발로 짓밟으며 꾹 눌렀다.소원은 손끝에 힘을 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소원, 내가 너를 위해 선물 하나 준비했는데, 알아?”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소원이 자신을 쳐다보자 방민아는 비웃으며 말했다.“내 오빠가 널 좀 갖고 놀고 싶다더라. 잘 해줘 봐. 오빠 기분만 잘 맞춰주면 네 아들 죽기 전에 한 번쯤 볼 수 있게 해줄게. 어때?”소원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방민아의 이복오빠, 방민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방민기는 몇 년 전 일이 터진 뒤로 몸이 망가져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그럴수록 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쪽으로 빠져
방민아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 오래 억눌린 감정이, 희망이 무너지고 절망으로 변하면서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방민아는 소리쳤다.“그런 사생아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됐어! 가장 큰 잘못은 네 뱃속에서 태어난 거야!”이어 소원의 귀에 대고 하나하나 똑똑히 말했다.“소원, 모든 건 네 잘못이야!”이 순간 육연주는 이미 술에 취해 방민아의 또 다른 면모를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다.그녀의 눈엔 오직 소원만 보였고 그저 소원을 미친 듯이 괴롭히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방민아!”갑자기 소원이 머리에 씌워진 쓰레기봉투를 확 벗어던졌는데 눈은 피로 물든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네가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유진이 건들 생각도 하지 마!”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그 말을 듣고 놀란 방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술병을 집어 들어 소원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그 순간 소원의 이마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얼굴 위에 핏빛 꽃처럼 퍼졌다.핏자국과 함께 소원의 초췌한 모습은 더욱 처절하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방민아는 손에 든 술병을 천천히 소원의 얼굴에 대고 내렸다. 병 끝이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찌르며 고통을 가했다.소원은 얼굴이 분명 엉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지쳐 있던 소원은 더는 저항할 힘이 없었고 바닥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이 모습을 본 방민아는 기고만장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소원, 네가 날 벌하겠다고? 대체 어떻게? 부모도 죽었고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잖아. 돈이 좀 있겠지. 하지만 네 돈이 우리 방씨, 육씨 가문의 재산보다 많을 것 같아? 네가 날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네.”소원은 천천히 말했다.“궁금해?”방민아는 코웃음을 쳤다.“흥미 없어. 너 같은 건 내 눈에 그냥 개미야. 잡아 죽이거나 살려두거나 그건 내 마음이지. 네가 감히 뭘 어쩌겠어?”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덧붙였다.“내가 경한 씨랑 결혼한 후엔 더 봐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