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자의 아버지는 온진 그룹이 보낸 철거자들의 핍박에 못 이겨 차를 끌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구조되었는데 결국 뇌사 상태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제보자는 원래 피신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내 신변을 보호해 주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제보자의 제보 덕분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고 하나둘씩 인터넷에 폭로하기 시작했다.다른 피해자들은 비록 사망한 건 아니지만 철거를 토론하는 동안 외출하면 꼭 재수 없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다 혹시나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철거 동의서에 사인했다.이선 그룹은 이 프로젝트의 초기 공정에는 참여한 적이 없었고 그저 뒤에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였다. 다 원지민이 뒤에서 몰래 저지른 일이었다.게다가 저번에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선포하며 대중을 향해 사건의 전말을 사실대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주주들은 큰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폭력 철거와 핍박 살인, 그중 어떤 키워드든 이선 그룹이 오랫동안 수립한 성실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번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다.순간 주주들은 이준혁의 과감함에 감탄했다. 주주들은 이제 더는 이천수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숨겨둔 자식을 대표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그룹의 이익을 외부로 돌리고 사리사욕을 차리기 위해 그룹을 사경으로 내몰았다.이런 사람 밑에서 나온 이구운이 좋은 리더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준혁은 달랐다. 이준혁은 이태수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군 아래에 졸병은 없다는 말이 있다.이천수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이미 승리는 한물갔다는 걸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준비한 카드가 너무 완벽했다.먼저 이천수가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길 기다렸다가 그 죄를 하나씩 뒤엎으면서 반전의 반전을 선보였다.이천수가 갑자기 이구운의 손을 잡으며 울기 시작했다.“아들아, 아빠가 어리석었다. 네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착
녹색 비단옷을 입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주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이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노인은 바로 이태수의 집사 주진희였다.이태수가 죽고 주진희는 이태수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만보산을 지키러 갔다.몇 년이 지났기에 이천수는 주진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불효자식. 아저씨는 집에서 노후를 잘 보내고 계셨을 텐데 왜 번거롭게 여기까지 불러낸 거야?”이천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본인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주진희는 이태수의 옆을 지키던 집사라 권력이 꽤 컸다. 이태수가 있을 때도 주진희는 이천수의 체면을 챙겨준 적이 없었다.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진희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졌지만 아직 또렷하고 힘 있었다.“천수 도련님, 작은 도련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먼저 오겠다고 했어요.”이천수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얼른 웃으며 말했다.“왜 먼 길 나오셨나요?”“요즘 이선 그룹에서 일어난 이변은 마침 들어서 압니다. 그러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했던 당부가 떠 올라서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천수가 성격이 온전치 못하니 옆에서 자주 귀띔해 주라고 하셨습니다.”옆에 있은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지 주진희의 표정은 이태수와 꽤 닮아 있었다.이천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망할 놈의 영감,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하게 억압하더니. 죽어서도 가만히 놔두질 않네.’이천수가 죽은 척하는데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이사님, 할아버지 자필 편지를 주진희 아저씨한테 좀 보여주는 게 어때요?”“...”이천수는 말문이 막혔다.주진희가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그런 게 있어요? 어르신의 자필 편지라, 천수 도련님, 제게 한번 보여주세요.”이천수가 버벅거리며 말했다.“뭐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내용을 갈고 있을 테
보디가드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이준혁이 찻잔을 들어 그쪽으로 뿌렸다.“풉.”차와 찻잎이 이천수의 얼굴에 흩뿌려져 꼴이 매우 우스워졌다.“짐승 같은 놈이.”이준혁이 이천수에게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이사님, 말 가려서 하시죠.”이천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준혁의 강압적인 아우라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이천수가 알던 남자아이도 소년도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우뚝 설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오히려 이천수가 이준혁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이었고 압도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준혁에게 기세가 크게 꺾인 것 같았다.이준혁이 말했다.“현장에 아저씨 신분을 모르는 주주들이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 절대 집사 이상이었습니다.”이천수는 이준혁이 반박하는 게 싫었지만 그가 가까이 서 있었기에 그 위압감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이준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때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암해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저씨가 구해주셨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몸에 칼자국이 적지 않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어떤 장소에서든 아저씨를 생사를 같이한 형제라고 말씀하셨고 한 번도 아저씨를 도우미로 하대한 적이 없습니다.”이 사실은 현장에 있는 초대 주주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이태수는 주진희를 형제로 생각했는데 이천수가 이렇게 하대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대한다는 건 그의 인성이 바닥이라는 걸 설명했다.주주들이 수군거리자 이천수의 얼굴은 마치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이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썼다는 그 편지 다시 꺼내보세요.”이천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꺼내지 않으면 의심받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꺼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편지를 입안에 욱여넣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짐승 같은 놈, 내가 편지를 꺼내 보여준다 해도 너는 나를 모함할 거야.”이천수는 일단 적반하장이라도 하고 볼 심산이었다. 그리
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너무 똑같아서 가짜라는 거예요.”이천수가 말했다.“한번 들어나 봅시다. 뭐라고 둘러댈 수 있는지 말이에요.”“이 서예 작품은 어르신이 조부의 작품을 모방해서 쓴 것입니다. 하여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어르신 본인의 글씨체로 모방 작품이라고 적어놓으셨죠.”“근데 의뢰한 업체가 너무 덜떨어진 업체라 서예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구를 보지 못하고 앞에 페이지에서 필요한 글자만 떼서 위조한 거죠.”주진희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어르신의 진짜 필적은 여기 있습니다.”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태수의 글씨체는 또렷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앞에 적힌 글씨체와는 아예 다른 경지였다.이천수는 넋을 잃었다.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위조했는데 원본마저 이태수의 필적이 아닌 모방작이었기 때문이다.이천수가 중얼거렸다.“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천수 도련님, 어르신 아들로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어르신의 필적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주진희의 얼굴은 이제 온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설산 정상에 자라난 소나무처럼 올곧았다.“정말 속상하고 실망스럽네요.”아들로서 이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태수가 후계자를 아들이 아닌 손주를 선택한 것도 모자라 아들을 외국으로 몰아내 사업하게 한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다.도덕이 없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다.이태수는 자신의 혜안으로 이미 아들은 큰일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아니야.”이천수가 이성을 잃고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인 틈을 타 주진희의 목을 조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영감탱이, 왜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야.”이천수는 이미 완전히 미친 상태였다. 체면이 바닥난 이상 더 신경 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가까이 서 있던 이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천수를 발로 걷어찼다.쾅.이천수가 바닥에 주저앉았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찍었어?”이천수가 제구실 못하는 보
한구운의 눈에 이준혁은 늘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따듯함과 아름다움도 이 점잖은 척하는 남자에게 뺏기고 말았다.한구운은 부드럽고 젠틀한 겉모습과는 달리 계략에 능한 편이었다.“왜 쇼라고 생각해요? 형을 형이라고 하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들어봤죠? 혈연관계는 쉽게 안 바뀌어요.”이준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예 한구운을 공기 취급했다.한구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원지민 씨도 임신했으니 이제 형님도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네요. 와이프만 둘이라니, 형만큼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근데 혜인이는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좀 가르쳐줘요. 그래야 나도 앞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잘 달래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한구운은 허심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내 와이프는 윤혜인 한 명뿐이야.”이준혁은 두터운 살기를 뿜어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리고 윤혜인은 내 아내야. 앞으로 한 번만 더 윤혜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서울에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줄게.”한구운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형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 아들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족보에 못 올라가면 어때요?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한구운은 한 번의 실패로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아도는 게 인내심이라 다음 기회에 만전을 기하면 된다.“족보에 오르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이준혁이 하찮다는 눈빛으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선 그룹의 모든 산업이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너를 끔찍이 아끼는 이천수 씨도 그 산업을 결국 내게 물려줘야 한다는 거야. 너한테 이전한 그 재산도 내가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어.”한구운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이 일로 그냥 체면이 조금 구겨질 거라 생각했기에 제일 신경 쓰지 않는 게 바
한구운은 따끔거리는 볼을 살펴볼 새도 없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천수를 바라봤다.이천수도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빈털터리로 남게 될 수도 있다. 전에 보유한 해외 자금도 지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이천수는 고개를 돌려 한구운을 외면하며 서글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얼른 가자.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아니면 나도 더는 너 같은 아들 필요 없어.”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한구운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이천수를 확 밀친 채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이천수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주진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천수 도련님,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이천수는 창백한 얼굴로 공손하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아저씨, 구운은 제가 잘 단속할게요.”아까 보였던 태도와는 완전 딴판이었다.이준혁은 이천수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주진희에게 말했다.“아저씨, 서울에 며칠 더 계세요. 제가 서울 구경 시켜드릴게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이제 어르신 보러 가야죠.”이준혁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주진희는 자식이 없었기에 이태수를 가족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산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 시끄러운 곳을 싫어했다.차에 오른 주진희는 밖에 공손하게 서 있는 이준혁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련님, 정말 제가 천수 도련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만약에 할아버지가 전하라고 한 말씀이 있다면 아저씨가 저한테 말씀하셨겠죠. 그게 아니라 해도 다 할아버지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그래, 그래.”주진희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시 작은 도련님은 어르신이 직접 키운 후계자십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가지지도 않고 해결해야 할 일에 우유부단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차에 시동이 걸렸다.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저씨, 조심히 들어가세요.”주진희가
이천수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참담하게 말했다.“아빠가 너를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야.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야.”한구운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자 이천수가 얼른 설명했다.“아빠 한 번만 믿어줘. 시간을 준다면 반드시 네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게.”한구운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그 늙은이가 뭐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축 늘어진 거예요?”이천수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한구운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한구운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이천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도 방법이 없어서 일단 타협한 거야. 아니면 내가 고생해서 쌓아온 부를 다 잃게 되는데 무슨 수로 다시 일어나?”쾅.굉음에 이천수가 화들짝 놀랐다.한구운이 오른손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차창은 금세 금이 갔고 손에는 퍼런 멍이 들었다.“아들, 아들.”이천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요.”한구운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차에 올라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전속력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화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왜. 도대체 왜...’한구운은 이천수와 조금은 통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천수는 한 번도 그의 편에 서준 적이 없었다....윤혜인이 활동 현장에 나와 있는데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다.“회사 일은 해결했어.”그는 그저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다.윤혜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쪽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던가요?”이준혁은 윤혜인이 물어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덤덤하게 말했다.“아니.”그렇게 잠깐 더 대화를 나누다가 윤혜인이 이렇게 말했다.“누가 부르네요. 먼저 일하러 가볼게요.”“그래. 저녁에 보자.”윤혜인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오늘 빨리 못 들어갈 수도 있어요. 끝나고 본부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대요.”“많이 늦으면 데리러 갈게.”“준혁 씨도 늦을
윤혜인이 화들짝 놀라며 나가려 했지만 남자가 들어올 때 센서를 건드리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정상적으로 닫혔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야구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는 윤혜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윤혜인은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그 남자를 경계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윤혜인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화면을 향해 있었지만 곁눈질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전혀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윤혜인은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발견했다.회관의 엘리베이터는 CCTV 사각지대가 없었다. 남자가 CCTV를 힐끔 쳐다봤다.시간이 두 배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지하 1층에 도착했다.윤혜인은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남자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윤혜인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윤혜인은 딱딱하게 굳은 다리를 이끌고 밖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차까지 열 걸음 조금 넘게 남았고 기사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걸음을 재촉하며 겨우 두 걸음 내디뎠는데 누군가 어깨를 꾹 눌렀다.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윤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꿈치를 뒤로 날렸다.뒤에 있던 사람이 몸을 살짝 비켰다. 윤혜인은 이 틈을 타서 차로 달려갔지만 뒤에 있던 사람이 낮은 소리로 불렀다.“혜인아...”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폭 안기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준혁 씨...”윤혜인의 떨림을 느꼈는지 이준혁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왜 그래?”윤혜인이 남자가 따라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었다.너무 신경질적인지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본 그 남자 몸에서 나던 진한 향기가 내국인과는 달랐고 외국인에게서 나는 향기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뒤에 없으니 아마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찾으러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이때 까만 세단 하나가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