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자의 아버지는 온진 그룹이 보낸 철거자들의 핍박에 못 이겨 차를 끌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구조되었는데 결국 뇌사 상태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제보자는 원래 피신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내 신변을 보호해 주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제보자의 제보 덕분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얻고 하나둘씩 인터넷에 폭로하기 시작했다.다른 피해자들은 비록 사망한 건 아니지만 철거를 토론하는 동안 외출하면 꼭 재수 없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다 혹시나 복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른 철거 동의서에 사인했다.이선 그룹은 이 프로젝트의 초기 공정에는 참여한 적이 없었고 그저 뒤에 이름만 걸어놓은 상태였다. 다 원지민이 뒤에서 몰래 저지른 일이었다.게다가 저번에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선포하며 대중을 향해 사건의 전말을 사실대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주주들은 큰 위기를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폭력 철거와 핍박 살인, 그중 어떤 키워드든 이선 그룹이 오랫동안 수립한 성실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번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다.순간 주주들은 이준혁의 과감함에 감탄했다. 주주들은 이제 더는 이천수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숨겨둔 자식을 대표 자리에 올리기 위해 그룹의 이익을 외부로 돌리고 사리사욕을 차리기 위해 그룹을 사경으로 내몰았다.이런 사람 밑에서 나온 이구운이 좋은 리더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준혁은 달랐다. 이준혁은 이태수가 직접 가르친 사람이었다. 뛰어난 장군 아래에 졸병은 없다는 말이 있다.이천수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이미 승리는 한물갔다는 걸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이준혁이 준비한 카드가 너무 완벽했다.먼저 이천수가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길 기다렸다가 그 죄를 하나씩 뒤엎으면서 반전의 반전을 선보였다.이천수가 갑자기 이구운의 손을 잡으며 울기 시작했다.“아들아, 아빠가 어리석었다. 네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는 착
녹색 비단옷을 입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주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이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노인은 바로 이태수의 집사 주진희였다.이태수가 죽고 주진희는 이태수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만보산을 지키러 갔다.몇 년이 지났기에 이천수는 주진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작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불효자식. 아저씨는 집에서 노후를 잘 보내고 계셨을 텐데 왜 번거롭게 여기까지 불러낸 거야?”이천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본인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주진희는 이태수의 옆을 지키던 집사라 권력이 꽤 컸다. 이태수가 있을 때도 주진희는 이천수의 체면을 챙겨준 적이 없었다.이준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진희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졌지만 아직 또렷하고 힘 있었다.“천수 도련님, 작은 도련님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먼저 오겠다고 했어요.”이천수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얼른 웃으며 말했다.“왜 먼 길 나오셨나요?”“요즘 이선 그룹에서 일어난 이변은 마침 들어서 압니다. 그러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했던 당부가 떠 올라서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천수가 성격이 온전치 못하니 옆에서 자주 귀띔해 주라고 하셨습니다.”옆에 있은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지 주진희의 표정은 이태수와 꽤 닮아 있었다.이천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망할 놈의 영감,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하게 억압하더니. 죽어서도 가만히 놔두질 않네.’이천수가 죽은 척하는데 이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이사님, 할아버지 자필 편지를 주진희 아저씨한테 좀 보여주는 게 어때요?”“...”이천수는 말문이 막혔다.주진희가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물었다.“그런 게 있어요? 어르신의 자필 편지라, 천수 도련님, 제게 한번 보여주세요.”이천수가 버벅거리며 말했다.“뭐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을까요? 아저씨도 내용을 갈고 있을 테
보디가드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이준혁이 찻잔을 들어 그쪽으로 뿌렸다.“풉.”차와 찻잎이 이천수의 얼굴에 흩뿌려져 꼴이 매우 우스워졌다.“짐승 같은 놈이.”이준혁이 이천수에게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이사님, 말 가려서 하시죠.”이천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준혁의 강압적인 아우라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이천수가 알던 남자아이도 소년도 아니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우뚝 설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오히려 이천수가 이준혁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이었고 압도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준혁에게 기세가 크게 꺾인 것 같았다.이준혁이 말했다.“현장에 아저씨 신분을 모르는 주주들이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아저씨는 할아버지에게 절대 집사 이상이었습니다.”이천수는 이준혁이 반박하는 게 싫었지만 그가 가까이 서 있었기에 그 위압감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이준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때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암해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저씨가 구해주셨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몸에 칼자국이 적지 않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어떤 장소에서든 아저씨를 생사를 같이한 형제라고 말씀하셨고 한 번도 아저씨를 도우미로 하대한 적이 없습니다.”이 사실은 현장에 있는 초대 주주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이태수는 주진희를 형제로 생각했는데 이천수가 이렇게 하대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대한다는 건 그의 인성이 바닥이라는 걸 설명했다.주주들이 수군거리자 이천수의 얼굴은 마치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이준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썼다는 그 편지 다시 꺼내보세요.”이천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꺼내지 않으면 의심받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꺼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편지를 입안에 욱여넣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짐승 같은 놈, 내가 편지를 꺼내 보여준다 해도 너는 나를 모함할 거야.”이천수는 일단 적반하장이라도 하고 볼 심산이었다. 그리
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너무 똑같아서 가짜라는 거예요.”이천수가 말했다.“한번 들어나 봅시다. 뭐라고 둘러댈 수 있는지 말이에요.”“이 서예 작품은 어르신이 조부의 작품을 모방해서 쓴 것입니다. 하여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어르신 본인의 글씨체로 모방 작품이라고 적어놓으셨죠.”“근데 의뢰한 업체가 너무 덜떨어진 업체라 서예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구를 보지 못하고 앞에 페이지에서 필요한 글자만 떼서 위조한 거죠.”주진희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어르신의 진짜 필적은 여기 있습니다.”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태수의 글씨체는 또렷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앞에 적힌 글씨체와는 아예 다른 경지였다.이천수는 넋을 잃었다.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위조했는데 원본마저 이태수의 필적이 아닌 모방작이었기 때문이다.이천수가 중얼거렸다.“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천수 도련님, 어르신 아들로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어르신의 필적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주진희의 얼굴은 이제 온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설산 정상에 자라난 소나무처럼 올곧았다.“정말 속상하고 실망스럽네요.”아들로서 이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태수가 후계자를 아들이 아닌 손주를 선택한 것도 모자라 아들을 외국으로 몰아내 사업하게 한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다.도덕이 없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다.이태수는 자신의 혜안으로 이미 아들은 큰일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아니야.”이천수가 이성을 잃고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인 틈을 타 주진희의 목을 조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영감탱이, 왜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거야.”이천수는 이미 완전히 미친 상태였다. 체면이 바닥난 이상 더 신경 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가까이 서 있던 이준혁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천수를 발로 걷어찼다.쾅.이천수가 바닥에 주저앉았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찍었어?”이천수가 제구실 못하는 보
한구운의 눈에 이준혁은 늘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따듯함과 아름다움도 이 점잖은 척하는 남자에게 뺏기고 말았다.한구운은 부드럽고 젠틀한 겉모습과는 달리 계략에 능한 편이었다.“왜 쇼라고 생각해요? 형을 형이라고 하는 게 틀린 건 아니잖아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 들어봤죠? 혈연관계는 쉽게 안 바뀌어요.”이준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예 한구운을 공기 취급했다.한구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원지민 씨도 임신했으니 이제 형님도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네요. 와이프만 둘이라니, 형만큼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근데 혜인이는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좀 가르쳐줘요. 그래야 나도 앞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잘 달래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한구운은 허심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군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내 와이프는 윤혜인 한 명뿐이야.”이준혁은 두터운 살기를 뿜어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리고 윤혜인은 내 아내야. 앞으로 한 번만 더 윤혜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서울에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줄게.”한구운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형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 아들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족보에 못 올라가면 어때요?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한구운은 한 번의 실패로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남아도는 게 인내심이라 다음 기회에 만전을 기하면 된다.“족보에 오르지 못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이준혁이 하찮다는 눈빛으로 한구운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이선 그룹의 모든 산업이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너를 끔찍이 아끼는 이천수 씨도 그 산업을 결국 내게 물려줘야 한다는 거야. 너한테 이전한 그 재산도 내가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어.”한구운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이 일로 그냥 체면이 조금 구겨질 거라 생각했기에 제일 신경 쓰지 않는 게 바
한구운은 따끔거리는 볼을 살펴볼 새도 없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천수를 바라봤다.이천수도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빈털터리로 남게 될 수도 있다. 전에 보유한 해외 자금도 지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이천수는 고개를 돌려 한구운을 외면하며 서글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얼른 가자.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아니면 나도 더는 너 같은 아들 필요 없어.”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한구운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이천수를 확 밀친 채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이천수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주진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천수 도련님,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이천수는 창백한 얼굴로 공손하게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아저씨, 구운은 제가 잘 단속할게요.”아까 보였던 태도와는 완전 딴판이었다.이준혁은 이천수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주진희에게 말했다.“아저씨, 서울에 며칠 더 계세요. 제가 서울 구경 시켜드릴게요.”주진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이제 어르신 보러 가야죠.”이준혁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주진희는 자식이 없었기에 이태수를 가족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산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 시끄러운 곳을 싫어했다.차에 오른 주진희는 밖에 공손하게 서 있는 이준혁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련님, 정말 제가 천수 도련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만약에 할아버지가 전하라고 한 말씀이 있다면 아저씨가 저한테 말씀하셨겠죠. 그게 아니라 해도 다 할아버지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그래, 그래.”주진희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역시 작은 도련님은 어르신이 직접 키운 후계자십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가지지도 않고 해결해야 할 일에 우유부단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차에 시동이 걸렸다.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저씨, 조심히 들어가세요.”주진희가
이천수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참담하게 말했다.“아빠가 너를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야.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야.”한구운의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자 이천수가 얼른 설명했다.“아빠 한 번만 믿어줘. 시간을 준다면 반드시 네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게.”한구운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그 늙은이가 뭐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축 늘어진 거예요?”이천수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한구운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한구운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이천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나도 방법이 없어서 일단 타협한 거야. 아니면 내가 고생해서 쌓아온 부를 다 잃게 되는데 무슨 수로 다시 일어나?”쾅.굉음에 이천수가 화들짝 놀랐다.한구운이 오른손으로 차창을 내리쳤다. 차창은 금세 금이 갔고 손에는 퍼런 멍이 들었다.“아들, 아들.”이천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요.”한구운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차에 올라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전속력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속의 화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왜. 도대체 왜...’한구운은 이천수와 조금은 통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천수는 한 번도 그의 편에 서준 적이 없었다....윤혜인이 활동 현장에 나와 있는데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왔다.“회사 일은 해결했어.”그는 그저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다.윤혜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쪽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던가요?”이준혁은 윤혜인이 물어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덤덤하게 말했다.“아니.”그렇게 잠깐 더 대화를 나누다가 윤혜인이 이렇게 말했다.“누가 부르네요. 먼저 일하러 가볼게요.”“그래. 저녁에 보자.”윤혜인히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오늘 빨리 못 들어갈 수도 있어요. 끝나고 본부장님이 하실 말씀이 있대요.”“많이 늦으면 데리러 갈게.”“준혁 씨도 늦을
윤혜인이 화들짝 놀라며 나가려 했지만 남자가 들어올 때 센서를 건드리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정상적으로 닫혔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야구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는 윤혜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윤혜인은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그 남자를 경계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윤혜인의 시선은 엘리베이터 화면을 향해 있었지만 곁눈질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전혀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윤혜인은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발견했다.회관의 엘리베이터는 CCTV 사각지대가 없었다. 남자가 CCTV를 힐끔 쳐다봤다.시간이 두 배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지하 1층에 도착했다.윤혜인은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남자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윤혜인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윤혜인은 딱딱하게 굳은 다리를 이끌고 밖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차까지 열 걸음 조금 넘게 남았고 기사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혜인은 걸음을 재촉하며 겨우 두 걸음 내디뎠는데 누군가 어깨를 꾹 눌렀다.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윤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꿈치를 뒤로 날렸다.뒤에 있던 사람이 몸을 살짝 비켰다. 윤혜인은 이 틈을 타서 차로 달려갔지만 뒤에 있던 사람이 낮은 소리로 불렀다.“혜인아...”윤혜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윤혜인은 이준혁의 품에 폭 안기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준혁 씨...”윤혜인의 떨림을 느꼈는지 이준혁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왜 그래?”윤혜인이 남자가 따라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었다.너무 신경질적인지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본 그 남자 몸에서 나던 진한 향기가 내국인과는 달랐고 외국인에게서 나는 향기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뒤에 없으니 아마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찾으러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이때 까만 세단 하나가 옆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