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종은 바로 인터컨티넨탈 대표에게 연락했다.하지만 웬일인지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무슨 말을 해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소종은 인터컨티넨탈 대표가 있는 곳으로 질주해 갔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소종은 바로 현재 판가의 두 배로 인터컨티넨탈을 인수하겠다고 말했다.하지만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텔은 가족 기업이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물려줬느니 이런 말만 늘어놓았다.이에 소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인터컨티넨탈 호텔은 프렌차이즈였고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었다. 근데 왜 서울의 인터컨티넨탈만 가족 기업이 된 걸까. 이것은 분명 아무렇게나 둘러대 소종을 돌려보내려는 심산이었다.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소종은 가격을 2배에서 3배로 올렸다.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거절했다.육경한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쌓아온 경험으로 보면 이 일은 어딘가 많이 수상했다.육경한도 서울 재벌 순위 10위 안에는 드는 사람이라 인터컨티넨탈 대표가 따라오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런 사람이 호텔을 인수하겠다는데 만나주지도 않을뿐더러 3배의 가격을 쳐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고 있다.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장사꾼이 눈앞에 횡재를 두고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터컨티넨탈 대표는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소종은 다시 육경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육경한은 고작 두 글자로 대답했다.“5배.”“…”소종은 할 말을 잃었다.5배라는 건 호텔을 인수하고도 50년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이건 아예 돈을 갖다 바치는 장사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소종은 알고 있었다. 만약 오늘 거래를 성사하지 못한다면 육경한은 가격을 10배로 올릴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소종은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터컨티넨탈 대표를 설득했다.드디어 거대한 이익 앞에 인터컨티넨탈 대표가 넘어왔다.더는 가족 기업 같은 소리는 지껄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밑지는 장사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
사실 서현재는 소원이 떠나는 꿈을 꿨다.너무 슬픈 꿈이라 소원을 안아야만 그 슬픔이 해소될 것 같았다.이내 서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일단 씻어요. 내가 아침 사다 줄게요.”소원이 멈칫하더니 말했다.“아니야. 나 원래 아침 안 먹어.”미각이 없는 사람에게 산해진미를 차려준다 한들 나무껍질을 씹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하지만 서현재는 아니었다.소원에게 그녀가 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미각이 없다 해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서현재는 소원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좌우로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누나. 가지 마요. 아줌마 곧 도착하니까 옆에 있는 스위트룸 가서 기다려요. 네?”서현재는 소원에게 안정적이고 믿음직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 보니 가끔 애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맑은 목소리에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 애교를 떨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서현재를 보며 소원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서현재는 가끔은 위험한 허스키 같다가도 가끔은 귀여운 푸들 같았다. 여자라면 그 누구도 서현재의 이런 매력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서현재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중요할 때만 한 번씩 매력 발산했다.너무 발산하면 효과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망설이자 서현재는 구체적인 시간까지 제시했다.“반 시간, 반 시간이면 꼭 돌아온다고 약속할게요.”아침을 사러 나가려면 거리가 좀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다녀올 생각이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의 성화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다릴게.”서현재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즐겁게 키를 들고 밖을 나섰다.아줌마가 도착하자 소원은 유진과 마주칠까봐 두려워 얼른 다른 스위트룸으로 향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샤워나 할 생각이었다. 그러고 마침 옷을 다 챙겨 입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소원은 서현재가 돌아온줄 알고 웃으며 문을 열었다.“이렇게 빨리…”하지만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육경한이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꺼져!”소원이 역겹다는 듯 말했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여 소원의 쇄골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더니 핏빛으로 물든 눈으로 소원을 노려봤다.“말해! 좋았냐고!”소원은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한쪽 팔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러자 육경한의 입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너랑 무슨 상관이냐고!”육경한의 입술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차가운 얼굴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그는 소원의 손을 꽉 움켜쥔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나 때리면 기분이 좋아지나?”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그럼 이쪽도 때려.”육경한이 다른 쪽 얼굴도 들이밀더니 소원의 손을 잡아 힘껏 자신의 따귀를 때렸다.찰싹.크고도 묵직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육경한의 볼이 순간 빨갛게 부어올랐다. 소원이 직접 날린 따귀보다 훨씬 강력했다.“만족해?”육경한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그가 얼마나 화나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아니면 계속해. 네가 만족스러울 때까지.”소원의 눈에 그제야 육경한의 얼굴이 제대로 들어왔다. 새로 난 상처와 전에 난 상처가 겹쳤지만 육경한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원의 손으로 자기 얼굴을 후려쳤다.정말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소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육경한. 미친 거라면 차라리 정신 병원에 가. 여기 와서 지랄하지 말고.”“그러면 그냥 미쳤다고 생각해. 내가 미우면 미운 만큼 화풀이해도 좋아. 하지만 다른 남자랑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어.”육경한의 눈은 여전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변함없이 음침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었다.“만나서 밥 먹고, 손잡고, 안고, 자는 거 다 안 돼!”소원이 다른 남자랑 좀 자면 어떠냐고 비꼬려는데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흑흑.그 소리가 너무 작아 육경한이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육경한은 소원의 표정에서 이상한
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찌푸린 채 소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미칠 거면 확실히 미쳤으면 해서. 어떻게 죽여버리든 나는 네 뜻에 따를 테니까.”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저돌적으로 키스했다.오랜만에 느껴보는 말캉함이 가뭄에 단비처럼 육경한의 메마른 곳에 고였다. 순간 모든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이 지금 그의 품에 안겨있고 그와 키스를 나누고 있다. 이보다 더 위안이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점점 빠져 들어갔다.소원은 의외로 반항하지 않았다. 육경한은 소원이 입을 벌린 틈을 놓치지 않고 깊숙이 파고들었다.육경한은 소원을 점점 더 갈구했다. 혀와 입술을 뜨겁게 부딪치는 와중에도 육경한은 소원의 다리를 허리춤에 올리며 몸을 바짝 붙였다.순간 엘리베이터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러자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육경한이 5배의 가격으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사들였다는 소식이 퍼지자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호텔로 몰려들었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렇게 화끈한 장면을 목격할 줄은 몰랐다.기자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경쟁하듯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다. 그러면서 기사까지 다 생각해 두었다.[육경한 대표, 그녀만을 위한 인터컨티넨탈.]육경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았다.호구처럼 5배의 가격으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사들였다는 기사가 나가게 되면 미우 그룹은 크게 요동칠 것이다.하지만 육경한은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른 소원을 품속에 끌어안은 채 다른 사람이 염탐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더니 얼른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갔다.육경한이 고개를 돌려 소원을 바라봤다.“돌아가기엔 무리인 거 같은데. 이 호텔 이제 내 소유니까 방은 네가 알아서 골라.”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정말 돌았구나.”그녀가 어느 방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분명 밑
육경한은 소원의 이마 라인을 따라 옆으로 슬쩍 움직이더니 뜨거운 숨결을 소원의 귓가에 불어넣었다.“나만 원한다면 못 할 건 없다는 거.”이렇게 말하면서도 육경한의 손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갑자기 들이닥친 육경한의 손짓에 소원은 온몸이 딱딱히게 굳었다. 화가 치밀어오른 소원은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그러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육경한의 턱을 꼬집었다.“내가 싫다고 했잖아. 육경한. 설마 억지로 밀어붙이려는 건 아니지?”육경한의 어두운 눈동자가 소원의 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녀의 눈동자에서 역겨움과 차가움을 읽어낸 육경한이 순간 동작을 멈췄다.소원은 육경한의 얼굴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손 하나 까딱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할 거야.”계속 밀어붙일 줄 알았던 육경한이 갑자기 꼬리를 내렸다.“지금 나 갖고 놀았네.”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소이현은 육경한을 올려다보며 비웃었다.“갖고 놀면 안 돼? 싫으면 관두든지.”“아니.”육경한이 소원의 팔목을 잡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얼마든지 상대해 줄게. 하지만 다른 남자랑 노는 건 절대 안 돼.”소원이 웃으며 비아냥댔다.“육경한. 내가 누구랑 놀든 어떻게 놀든 내 자유야.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말 하는데?”육경한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전에 한 짓만 봐도 그녀에게 이런 요구를 꺼낼 자격은 없었다.머리는 알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이 소원을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소원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나를 미워하면서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겠지. 근데 나도 한계라는 게 있어. 그 한계를 건들지는 마. 그것만 아니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게.”소원이 웃음을 터트렸다.“건드려봐야 알지. 네 한계가 어딘지, 날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죽었다 살아난 내가 과연 네 한계를 무서워할 거라 생각해?”오만방자한 소원을 보며 육경한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육
윤혜인은 이준혁의 병실 앞에서 빙빙 돌았다.보디가드가 많아 뭔가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디가드가 교대를 서는 틈을 타 윤혜인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다행히 간호사 유니폼을 입고 있어 눈속임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철저하게 이 병원의 간호사 명찰까지 만들어 달았다. 그러니 더 들키기 쉽지 않았다.윤혜인이 병실로 들어가 보니 이준혁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 채 내려가지 않은 멍 자국이 보였다.팔뚝에 난 작은 상처들은 붕대를 감지 않고 그저 물리 치료만 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깨에 난 상처는 옷에 가려져 있어도 불룩하게 올라온 게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어깨에 난 상처도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건데 그 뒤로 곽경천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하면서 상처를 한 번 더 입다 보니 이렇게 심각한 상태가 된 것이다.이준혁은 잠을 자면서도 잔뜩 긴장한 상태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준혁의 이마를 쓰다듬었다.손가락이 이준혁의 미간에 닿은 순간 이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번쩍 떴다.윤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비몽사몽인 상태라 이준혁은 아직 눈앞이 흐릿했다. 그는 까만 눈동자로 앞에 있는 섬섬옥수를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은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찰싹.윤혜인이 이준혁의 이마를 내리쳤다. 그러자 정신을 번쩍 차린 이준혁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윤혜인은 가슴이 벌렁거려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모, 모기 있어요.”“...”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기가 한 분장에 자신감이 넘쳤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알아챈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윤혜인이 메추리처럼 머리를 처박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푹 쉬세요. 저는 그만 나가볼게요.”생명의 위협이 없는 걸 확
윤혜인은 이준혁의 엄숙한 얼굴에 넋을 잃었다. 정말 온도 조절을 잘못했나 싶어 얼른 한입 마셔봤다.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온도가 맞춤한 게 딱 마시기 적절한 온도였다.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뜨거운데요.”“그래요?”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그럼 한 번 더 마셔볼게요.”윤혜인이 물잔을 건넸다.이준혁도 이번엔 먹여달라고 하지 않고 물잔을 받아 가 한 모금 마셨다.윤혜인은 그제야 그 컵을 같이 사용했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 이준혁이 입을 댄 쪽도 그녀가 마신 쪽이었다.민망해진 윤혜인이 얼른 컵을 뺏으려 했다.“죄송해요. 이 컵...”이준혁이 다시 컵을 돌려줬다. 하지만 컵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참 너그럽다고 생각했다.“괜찮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이 신경 쓰지 않자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컵을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이준혁이 다시 윤혜인의 팔목을 잡았다. 콕 움켜쥔 것이 마치 그녀가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이준혁이 입을 열었다.“상처가 아픈데 혹시 덧난 게 아닌지 확인해 줄래요?”윤혜인은 그저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나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하지만 이준혁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억지를 부렸다.“지금 바로 봐줘요.”“...”윤혜인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혹시나 아프게 하면 어떡해요?”이준혁이 딱 잘라서 말했다.“괜찮아요.”윤혜인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결심한 듯했다. 그녀 때문에 입은 상처이니 봐주는 것도 맞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힐끔 쳐다봤다. 이준혁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싸움했다.그러다 이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옷 벗는 거 좀 도와줘요.”“네?”윤혜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이준혁이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손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보다시피 내가 직접 벗기엔 불편해서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도 딱히 내키지는 않았다.그날 차에서는 긴급한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아 매끈한 근육 라인에 갖다 대더니 꾹 누르기까지 했다. 보들보들한 촉감에 뜨거운 온도까지 윤혜인의 손끝에 전해졌다.뜨거운 열기가 윤혜인의 얼굴까지 전해져 더 후끈 달아올랐다.이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치골을 따라 점점 아래로 향했다.윤혜인이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손을 확 뺐다.뽀얀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가 귀와 목 끝까지 번졌다.‘지금 어딜 만지라는 거야! 변태! 정말 너무 저질이야!’이렇게 생각한 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변... 이런 변태...”목소리를 변조하는 것도 잊은 채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아까 뚫어져라 보길래 만지고 싶은 줄 알았죠.”“누가 만지고 싶대요? 변태 아니야! 당신! 내가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야!”이준혁이 느긋하게 눈까풀을 올리더니 눈썹을 추켜세웠다.“그럼 나도 당신이 간호사로 위장했다고 신고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바락바락 성을 내던 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녀를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말투를 보아하니 들어올 때부터 알아챈 것 같았다.=알고 보니 아까 시킨 일들은 전부 고의였다. 물 먹여 달라더니 뜨겁다면서 마셔보라고 했고 그녀가 마신 쪽으로 마신 것도 모자라 상처까지 살펴달라 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마스크를 벗기더니 볼을 살짝 꼬집으며 올려다봤다.“네가 거부기 등딱지 달고 온대도 나는 한눈에 알아볼 것 같은데.”그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눈을 뜨자마자 그리운 그녀를 만났다는 생각에 큰 만족감을 얻었다.윤혜인은 역시나 그렇게 쿨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 같았다.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준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표정도 따라서 밝아졌고 빙산처럼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누가 거북이 등딱지 쓰고 온대요? 잘난 척은!”윤혜인이 이준혁의 손을 쳐냈다. 그의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게다가 원진우의 계획을 보니 해운성에서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아마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를 거쳐 이동하겠다는 의도였으니 그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그녀가 보낸 신호가 전송되었어도 곽경천 일행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나라 하나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금방 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차량에 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떠올리고 외국어로 시스템에 말을 걸어 보았다.“나 대신 신고 좀 해줘!”그러자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대답했다.“현재 해운성 해안경비대로 연결 중입니다.”돌아오는 답변에 윤혜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대다수의 차량 시스템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해도 긴급 신고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다.‘해안경비대에 연락만 닿는다면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원진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나라에 그 세력이 미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윤혜인은 차를 멈추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삐빅 하는 두 번의 신호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상담원이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윤혜인은 다급히 말했다.“저와 제 어머니가 납치되었습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이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담원은 침착하게 물었다.“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윤혜인은 대답했다.“저희를 납치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수배가 되어있습니다. 혐의도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주변에 바다밖에 없어요. 내비게이션에서는 블루섬이라고 나옵니다.”윤혜인은 상대가 국제 수배범이라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이번 원진우에 대한 폭로로 곽경천 일행이 그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므로 국제 수배범이라는 표현이 적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손에는 스마트 디스플레이 키가 들려있었는데 조금 전 원진우에게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그녀는 단 1초 만에 시동을 걸고 곧장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대로 부딪힐 각오인 듯 말이다.대문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차에 부딪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급히 원진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선생님, 저기... 대문을 어떻게 할까요...”원진우는 차의 기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그 모습에, 겉보기에는 얌전해 보이는 윤혜인이 자신의 열정과 영리함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는 짧게 고심한 후 단호히 말했다.“문 열어!”아무리 비싼 슈퍼카라 해도 이 속도로 대문을 들이받으면 운전자의 안전이 100%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슈퍼카가 대문에 닿기 직전, 대문이 위로 열렸다.순식간에 슈퍼카는 대문을 빠져나갔다.윤혜인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십 초를 기다린 끝에야 상황을 이해했다.“엄마, 우리 탈출했어요!”기쁨에 찬 외침이었다.윤아름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딸의 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탈출’이라는 말은 지하실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윤아름이 기뻐하며 창문을 두드리자 윤혜인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하지만 안전을 위해 반 정도만 내렸다.그 작은 틈으로도 윤아름은 크게 기뻐했다. 손가락을 밖으로 조금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냄새를 맡았다.자유로운 바람이 스치는 윤아름의 얼굴은 완전히 행복해 보였다.윤혜인은 엄마 윤아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다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긴장으로 땀이 찼던 손바닥도 이제는 차갑게 식었고 조금 전 그녀는 원진우에게 조금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