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이준혁의 병실 앞에서 빙빙 돌았다.보디가드가 많아 뭔가 들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디가드가 교대를 서는 틈을 타 윤혜인이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다행히 간호사 유니폼을 입고 있어 눈속임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철저하게 이 병원의 간호사 명찰까지 만들어 달았다. 그러니 더 들키기 쉽지 않았다.윤혜인이 병실로 들어가 보니 이준혁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 채 내려가지 않은 멍 자국이 보였다.팔뚝에 난 작은 상처들은 붕대를 감지 않고 그저 물리 치료만 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깨에 난 상처는 옷에 가려져 있어도 불룩하게 올라온 게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어깨에 난 상처도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건데 그 뒤로 곽경천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하면서 상처를 한 번 더 입다 보니 이렇게 심각한 상태가 된 것이다.이준혁은 잠을 자면서도 잔뜩 긴장한 상태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준혁의 이마를 쓰다듬었다.손가락이 이준혁의 미간에 닿은 순간 이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번쩍 떴다.윤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비몽사몽인 상태라 이준혁은 아직 눈앞이 흐릿했다. 그는 까만 눈동자로 앞에 있는 섬섬옥수를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은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찰싹.윤혜인이 이준혁의 이마를 내리쳤다. 그러자 정신을 번쩍 차린 이준혁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윤혜인은 가슴이 벌렁거려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모, 모기 있어요.”“...”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기가 한 분장에 자신감이 넘쳤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알아챈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윤혜인이 메추리처럼 머리를 처박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푹 쉬세요. 저는 그만 나가볼게요.”생명의 위협이 없는 걸 확
윤혜인은 이준혁의 엄숙한 얼굴에 넋을 잃었다. 정말 온도 조절을 잘못했나 싶어 얼른 한입 마셔봤다.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온도가 맞춤한 게 딱 마시기 적절한 온도였다.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뜨거운데요.”“그래요?”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그럼 한 번 더 마셔볼게요.”윤혜인이 물잔을 건넸다.이준혁도 이번엔 먹여달라고 하지 않고 물잔을 받아 가 한 모금 마셨다.윤혜인은 그제야 그 컵을 같이 사용했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 이준혁이 입을 댄 쪽도 그녀가 마신 쪽이었다.민망해진 윤혜인이 얼른 컵을 뺏으려 했다.“죄송해요. 이 컵...”이준혁이 다시 컵을 돌려줬다. 하지만 컵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참 너그럽다고 생각했다.“괜찮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이 신경 쓰지 않자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컵을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이준혁이 다시 윤혜인의 팔목을 잡았다. 콕 움켜쥔 것이 마치 그녀가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이준혁이 입을 열었다.“상처가 아픈데 혹시 덧난 게 아닌지 확인해 줄래요?”윤혜인은 그저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나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하지만 이준혁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억지를 부렸다.“지금 바로 봐줘요.”“...”윤혜인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혹시나 아프게 하면 어떡해요?”이준혁이 딱 잘라서 말했다.“괜찮아요.”윤혜인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결심한 듯했다. 그녀 때문에 입은 상처이니 봐주는 것도 맞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힐끔 쳐다봤다. 이준혁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싸움했다.그러다 이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옷 벗는 거 좀 도와줘요.”“네?”윤혜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이준혁이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손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보다시피 내가 직접 벗기엔 불편해서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도 딱히 내키지는 않았다.그날 차에서는 긴급한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아 매끈한 근육 라인에 갖다 대더니 꾹 누르기까지 했다. 보들보들한 촉감에 뜨거운 온도까지 윤혜인의 손끝에 전해졌다.뜨거운 열기가 윤혜인의 얼굴까지 전해져 더 후끈 달아올랐다.이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치골을 따라 점점 아래로 향했다.윤혜인이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손을 확 뺐다.뽀얀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가 귀와 목 끝까지 번졌다.‘지금 어딜 만지라는 거야! 변태! 정말 너무 저질이야!’이렇게 생각한 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변... 이런 변태...”목소리를 변조하는 것도 잊은 채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아까 뚫어져라 보길래 만지고 싶은 줄 알았죠.”“누가 만지고 싶대요? 변태 아니야! 당신! 내가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야!”이준혁이 느긋하게 눈까풀을 올리더니 눈썹을 추켜세웠다.“그럼 나도 당신이 간호사로 위장했다고 신고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바락바락 성을 내던 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녀를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말투를 보아하니 들어올 때부터 알아챈 것 같았다.=알고 보니 아까 시킨 일들은 전부 고의였다. 물 먹여 달라더니 뜨겁다면서 마셔보라고 했고 그녀가 마신 쪽으로 마신 것도 모자라 상처까지 살펴달라 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마스크를 벗기더니 볼을 살짝 꼬집으며 올려다봤다.“네가 거부기 등딱지 달고 온대도 나는 한눈에 알아볼 것 같은데.”그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눈을 뜨자마자 그리운 그녀를 만났다는 생각에 큰 만족감을 얻었다.윤혜인은 역시나 그렇게 쿨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 같았다.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준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표정도 따라서 밝아졌고 빙산처럼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누가 거북이 등딱지 쓰고 온대요? 잘난 척은!”윤혜인이 이준혁의 손을 쳐냈다. 그의
윤혜인은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 물을 뜨러 가려는데 이준혁이 손목을 잡아당겼다.이준혁이 눈을 부릅뜨더니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이 간호사는 내 전용이야.”그 뜻인즉 원지민은 간호사에게 뭔가를 시킬 자격이 없다는 소리였다.잠깐 멈칫하던 원지민이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준혁아, 난 그냥 물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하지만 이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따라서 마셔.”“나는...”원지민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힘들었지만 더는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후 타협한 원지민이 입을 열었다.“됐어. 안 마실래.”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혜인은 원지민이 참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준혁은 그녀를 전혀 챙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윤혜인은 더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 이렇게 말했다.“저 먼저 나가볼게요.”이준혁은 윤혜인을 순순히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그는 주훈을 부르더니 데리고 나가라고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데리고 가서 내가 먹을 탕 좀 끓여와.”주훈이 멈칫하더니 물었다.“대표님, 무슨 탕 드시고 싶으세요?”탕을 먹고 싶으면 셰프에게 부탁하면 되지 간호사에게 부탁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난 저분이 끓인 탕만 마실 거야.”이준혁은 사실 탕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윤혜인을 옆에 남겨두고 싶은 것이었다.이준혁의 뜻을 바로 알아챈 주훈이 윤혜인을 데리고 탕을 끓이러 나갔다.윤혜인이 내키지 않아서 가버리려는데 주훈이 앞을 막았다. 아직 눈앞에 선 사람이 윤헤인인 줄 모르고 나지막한 소리로 부탁했다.“간호사님, 간호사님이 안 도와주시면 제가 난감해지니까 보내드리긴 힘들 것 같아요.”윤혜인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여기는 하나같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탕을 마시고 싶으면 원지민이 가져온 탕을 마시면 될 일인데 말이다.이제 갈 수 없게 된 윤혜인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주훈에게 물었다.“식자재는 다 있나요?
원지민은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애원했다.“나는... 그러기 싫어...”이준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아, 이 문제를 너랑 토론하려는 게 아니야.”원지민의 눈에 차오른 감정을 확인한 이준혁은 더는 역겨움을 숨기지 못하고 또박또박 말했다.“공지 내보내고 더는 이상한 소문 없었으면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원지민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더는 마음속의 그 감정을 숨길 데가 없었다.“준혁아...”원지민이 흥분하며 이준혁의 침대 앞에 반쯤 꿇은 채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나한테 이러면 안 돼. 그때 우리 집안에서 너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다 잊은 거야?”원지민이 처량한 모습으로 울먹이며 말했다.“준혁아, 설마 지금 토사구팽하려는 거야?”원지민이 기선제압을 위해 여론으로 그를 압박했다.이런 기사가 나기라도 하면 이준혁은 바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부두 비축 공사, 근교 중심에 있는 땅, 원더랜드, 클라우드 빌리지...”이준혁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원씨 집안에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가져갔는지 내가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해?”이준혁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원지민의 얼굴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그때 내가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원씨 가문이 정략결혼 한다는 소문, 아저씨랑 너, 그리고 우리 엄마랑 같이 토론해서 낸 아이디어지?”“처음부터 우리는 이익으로 뭉친 사이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력이었지. 근데 그거를 토사구팽이라고 한다고? 주훈한테 자료 한 장 더 만들어서 남청 원씨 가문이 어떻게 서울에서 자리 잡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줄까?”이준혁은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정도였다. 원씨 집안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되었는지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다 말해주었다.그 어떤 프로젝트를 꺼내보든 몇천억은 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토사구팽이라니 정말 우스울 따름이었다.도대체 누가 누구의 피를 빨아먹었는지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원지민은 유일하게
원지민의 말에 이준혁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이준혁도 3일을 더 못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원지민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면 제일 좋았다. 이준혁은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불화설이 도는 게 싫었다.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많았기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소식이 들리면 큰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그럼 휴식에 방해되지 않게 먼저 갈게.”원지민이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가방을 메고 병실을 나서려 했다.“잠깐만.”이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응?”원지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희망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이준혁이 침대맡에 놓인 도시락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가져가.”원지민의 표정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점점 삐져나오고 있었다.원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흐느꼈다.“준혁아, 너는 왜 항상 나한테만 그렇게 잔인해?”원지민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말했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분명 이준혁의 옆을 5년 동안 지킨 사람은 그녀였다. 옆에서 이준혁에게 힘껏 서포트하며 무조건 기여했다.하지만 결국 돌아온 대답은 도시락마저 가지고 나가라는 말뿐이었다.이 탕은 원지민이 꼬박 8시간을 공들여 푹 고아 온 것이었다.그런데 이준혁은 간호사가 만든 탕은 마시면서 그녀가 끓인 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원지민은 이게 다 죽다 살아난 그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은 과부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지민은 윤혜인이 예쁜 얼굴만 믿고 주제도 모르고 남자들만 꼬시고 다닌다고 생각했다.원지민은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은 그냥 그녀가 슬퍼한다는 것만 알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표정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는 건 보아내지 못했다.이준혁이 무표정으로 말했다.“사실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만약 네가 내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걸 내가 알았다면 내가 원씨 가문과 손잡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원지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 모든 게 다 원지민의 허황한 꿈이었다.기껏해야 비서 정도 되는 업무였지만 그녀는 이를 없어서는 안 되는 보살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점점 미쳐갔고 빠져 들어갔다.원지만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준혁에게 원지민은 특별했던 적이 없었다.이준혁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혹시나 윤혜인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더는 원지민과 입씨름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제 가.”원지민은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무언가가 짓밟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너무 슬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도시락을 꽉 움켜쥔 채 잽싸게 병실에서 달려 나와 이미지 관리는 포기한 채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 하마터면 탕을 들고 들어오는 윤혜인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윤혜인이 제때 피했지만 그래도 바닥에 조금 흘리게 되었고 덕분에 발까지 조금 데었다.원지민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윤혜인에게 화풀이했다.“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도망가려는데 윤혜인에게 잡히고 말았다.윤혜인은 원지민을 보고도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입을 열었다.“사과해요.”사람을 치고도 이렇게 당당하다니.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이준혁에게 푸대접을 받고 나온 것도 분한데 눈에 뵈는 게 없는 간호사가 지금 사과하라고 길을 막고 있다.원지민은 겉보기엔 온화했지만 성질을 부리면 말릴 자가 없었다.“당신이 뭔데요?”원지민이 이렇게 말하며 바로 손을 날렸다. 하지만 윤혜인에게 손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 무쇠 같은 팔로 원지민의 두 손을 단번에 낚아챘다.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그러다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원지민이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원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혁을 올려다봤다. 알지도 못하는 간호사를 위해 그녀를 이렇게 천대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런 원지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윤혜인의 빨개진 손가락을 보며 부드럽게
원지민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딘데요?”상대방이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금란 뒷골목이요.”원지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곳은 원지민도 들어본 적이 있다. 좋지 않은 골목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이준혁이 이 정도로 매정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때 이준혁의 첫사랑이었는데 말이다.상대가 물었다.“아가씨, 임세희 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 구할까요?”원지민이 웃으며 말했다.“구해요. 치료만 해주면 더는 상관할 필요 없어요.”“네, 아가씨.”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눈동자에 깃든 매섭고 음침한 기운이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그런 곳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딱히 원지민이 시키지 않아도 생각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나올 수도 있다....금란 뒷골목.규칙이란 통하지 않는 회색 지대.쓰레기통 옆에 까맣고 기다란 어떤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발이 그래도 하얘서 말이지 아니면 이게 사람이라는 걸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지저분했다. 여러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제일 기본인 속옷도 없어 보였다.임세희는 고열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의식도 흐릿한 상태였다. 최근 두 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암울하고 제일 긴 이틀이 될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끔찍한 이틀이었다.여기는 점잖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욕구를 충족시키러 온 짐승들이었다.이준혁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그녀를 금란 뒷골목에 던져 버렸을 뿐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임세희가 알아서 떠나면 된다.하지만 자체 제작 ‘음료수’를 마신 몸은 급히 해소할 구멍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처음에 만난 남자는 사실 임세희가 원해서 만난 것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공허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세희는 차에서 내리자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게다가 원진우의 계획을 보니 해운성에서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아마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를 거쳐 이동하겠다는 의도였으니 그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그녀가 보낸 신호가 전송되었어도 곽경천 일행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나라 하나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금방 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차량에 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떠올리고 외국어로 시스템에 말을 걸어 보았다.“나 대신 신고 좀 해줘!”그러자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대답했다.“현재 해운성 해안경비대로 연결 중입니다.”돌아오는 답변에 윤혜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대다수의 차량 시스템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해도 긴급 신고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다.‘해안경비대에 연락만 닿는다면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원진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나라에 그 세력이 미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윤혜인은 차를 멈추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삐빅 하는 두 번의 신호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상담원이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윤혜인은 다급히 말했다.“저와 제 어머니가 납치되었습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이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담원은 침착하게 물었다.“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윤혜인은 대답했다.“저희를 납치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수배가 되어있습니다. 혐의도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주변에 바다밖에 없어요. 내비게이션에서는 블루섬이라고 나옵니다.”윤혜인은 상대가 국제 수배범이라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이번 원진우에 대한 폭로로 곽경천 일행이 그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므로 국제 수배범이라는 표현이 적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손에는 스마트 디스플레이 키가 들려있었는데 조금 전 원진우에게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그녀는 단 1초 만에 시동을 걸고 곧장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대로 부딪힐 각오인 듯 말이다.대문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차에 부딪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급히 원진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선생님, 저기... 대문을 어떻게 할까요...”원진우는 차의 기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그 모습에, 겉보기에는 얌전해 보이는 윤혜인이 자신의 열정과 영리함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는 짧게 고심한 후 단호히 말했다.“문 열어!”아무리 비싼 슈퍼카라 해도 이 속도로 대문을 들이받으면 운전자의 안전이 100%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슈퍼카가 대문에 닿기 직전, 대문이 위로 열렸다.순식간에 슈퍼카는 대문을 빠져나갔다.윤혜인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십 초를 기다린 끝에야 상황을 이해했다.“엄마, 우리 탈출했어요!”기쁨에 찬 외침이었다.윤아름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딸의 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탈출’이라는 말은 지하실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윤아름이 기뻐하며 창문을 두드리자 윤혜인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하지만 안전을 위해 반 정도만 내렸다.그 작은 틈으로도 윤아름은 크게 기뻐했다. 손가락을 밖으로 조금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냄새를 맡았다.자유로운 바람이 스치는 윤아름의 얼굴은 완전히 행복해 보였다.윤혜인은 엄마 윤아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다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긴장으로 땀이 찼던 손바닥도 이제는 차갑게 식었고 조금 전 그녀는 원진우에게 조금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