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딘데요?”상대방이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금란 뒷골목이요.”원지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곳은 원지민도 들어본 적이 있다. 좋지 않은 골목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이준혁이 이 정도로 매정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때 이준혁의 첫사랑이었는데 말이다.상대가 물었다.“아가씨, 임세희 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 구할까요?”원지민이 웃으며 말했다.“구해요. 치료만 해주면 더는 상관할 필요 없어요.”“네, 아가씨.”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눈동자에 깃든 매섭고 음침한 기운이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그런 곳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딱히 원지민이 시키지 않아도 생각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나올 수도 있다....금란 뒷골목.규칙이란 통하지 않는 회색 지대.쓰레기통 옆에 까맣고 기다란 어떤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발이 그래도 하얘서 말이지 아니면 이게 사람이라는 걸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지저분했다. 여러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제일 기본인 속옷도 없어 보였다.임세희는 고열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의식도 흐릿한 상태였다. 최근 두 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암울하고 제일 긴 이틀이 될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끔찍한 이틀이었다.여기는 점잖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욕구를 충족시키러 온 짐승들이었다.이준혁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그녀를 금란 뒷골목에 던져 버렸을 뿐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임세희가 알아서 떠나면 된다.하지만 자체 제작 ‘음료수’를 마신 몸은 급히 해소할 구멍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처음에 만난 남자는 사실 임세희가 원해서 만난 것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공허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세희는 차에서 내리자
쾅!임세희는 남자에게 또 한 번 걷어차였다.“아악!”임세희가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행색이 지저분한 남자가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개처럼 달려들어서 마신 거잖아. 그래 놓고 나를 원망해?”그 남자가 일행에게 손짓하며 말했다.“너도 와서 물 좀 빼. 그래야 이 년이 실컷 마실 거 아니야.”일행이 얍삽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있지. 있지. 당연히 있지.”쪼르륵하는 물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이내 임세희의 때 묻은 얼굴을 씻어줬다.남자는 갑자기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헤헤 웃으며 말했다.“오? 이렇게 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임세희의 얼굴은 전에 수억을 들여서 관리를 받은 얼굴이었다.아무리 여기서 이틀간 수모를 당했다 해도 피부는 아직 탱글탱글 촉촉한 상태였다.남자는 음침한 눈빛으로 일행에게 말했다.“아직 물 덜 뺀 사람 있어? 거기도 씻어줘야지...”“물은 다 뺐는데...”일행이 손에든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임세희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임세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머리채를 단단히 잡히고 말았다.찰싹.남자가 사정없이 임세희의 싸대기를 후려쳤다.순간 볼이 얼얼해지면서 머리가 윙 했다.이내 두 손을 바꿔가며 수십 대를 더 때리고 나서야 남자들은 그만뒀다.그러더니 마치 짐짝을 내다 버리듯 임세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젠장, 더 지랄해 봐!”일행이 재촉했다.“할 거면 빨리 하자. 나 다른 애랑 약속 잡았단 말이야. 속전속결하자...”두 사람은 마치 말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임세희를 향해 다가갔다.“아아악!”뒷골목에 임세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남자는 그런 임세희가 성가셨는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임세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닥쳐! 빌어먹을 년! 여기까지 와서 원하는 게 이거 아니야? 청순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어!”“흑흑...”임세희의 처절하게 울
원지민은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병문안하러 온 문현미와 마주쳤다.원래 이준혁이 다친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원지민이 병원에서 주훈을 마주쳤고 주훈도 더는 둘러대기가 힘들어 양아치한테 당한 거라고 했다.원지민은 이 사실을 문현미에게 알려주었고 문현미는 이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문현미의 손에도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원지민을 본 문현미가 잽싸게 물었다.“지민아, 우리 준혁이 어때?”원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문현미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다독였다.“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준혁이 괜찮아요.”문현미가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나도 준혁이 보러 왔어.”문현미는 원지민의 의견을 물어보고 있었다.5년 전 이준혁이 하마터면 강에 빠져서 죽을 뻔한 뒤로 문현미는 이준혁에 대한 걱정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이준혁과 같이 있는 시간 외에는 부처님께 불경을 드리면서 아들의 건장과 안전을 빌었다. 그러면서 성격도 점점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시작했다.몇 년간 문현미가 이렇게 불안해할 때마다 원지민이 옆에서 그녀를 위로해 주곤 했다.같이 경전을 옮겨적기도 하고 여러 스님을 만나러 가보기도 했다.문현미가 제일 믿는 사람이 원지민이었고 원지민의 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윤혜인이 죽고 문현미가 이준혁에게 내려놓으라고 타이르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바람에 모자지간이 많이 멀어지고 말았다. 그럴수록 문현미는 원지민을 통해 아들을 관심하는 수밖에 없었다.원지민이 웃으며 도시락을 받더니 이렇게 말했다.“준혁이 이미 제가 가져온 도시락 먹었어요. 그래서 이 도시락은 못 먹을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파요. 이 도시락은 저 주세요.”문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난감한 상황을 잘 풀어준 원지민에게 감격했다. 아니면 가져갔다가 이준혁이 먹지 않으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원지민이 덧붙였다.“아주머니, 내일은 도시락 가져다 저에게 주시면 돼요. 제가 준혁이한테
“미쳤어요?”아직 상처가 낫기 전이라 이렇게 막 움직이면 안 되는데 말이다.다행히 침대랑 가까워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을 침대에 내려줄 수 있었다.윤혜인은 가슴을 움켜쥔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준혁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윤혜인의 신발을 벗겼다.쪼그리는 자세는 아직 무리라 침대에 앉은 채 윤혜인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윤혜인은 그대로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잘못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화들짝 놀란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발길질을 날리려 했다.“이렇게 나오면 사람 부르는 수밖에 없...”“움직이지 마.”이준혁의 윤혜인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어...”윤혜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퉁퉁 부어올라 따갑기까지 하던 발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이에 억양이 살짝 올라갔다.이준혁은 어디서 얼음을 가져왔는지 윤혜인의 발에 올려놓고 살살 마사지했다.윤혜인의 발은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하얗고 보들보들한 게 달빛 아래 은은히 빛나는 백옥 같았다.발가락 부분이 탕에 데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이준혁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얼음찜질해 주었다. 이준혁에게 발을 잡힌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윤혜인은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화젯거리를 찾았다.“어떻게 알았어요?”“내가 그렇게 무심한 줄 알았어?”이준혁은 사실 아까부터 발견했다. 그래서 원지민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마침 병실에 연고와 얼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사지하던 이준혁은 연고를 발라주기 전 화풀이로 윤혜인의 발을 꾹 누르기까지 했다.“이렇게 심하게 뎄는데 아프다는 말도 안 하고. 아직 덜 아파봤어.”사실 윤혜인은 아까 양말을 신은 상태로 데었다. 하지만 발등의 살이 너무 연해 상처가 심각해 보일 뿐이었다. 이준혁이 얼음찜질을 해주고 나니 훨씬 편해졌다.하지만 이준혁이 누른 곳은 마침 제일 민감한 곳이었다. 윤혜인의
“...”윤혜인은 넋을 잃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태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이준혁밖에 없을 것이다.이준혁의 표정은 마치 ‘나는 변태여서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윤혜인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별로요. 점 떨어져서 앉아요!”“진짜 별로야?”이준혁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전에는 엄청나게 좋아했는데...”윤혜인은 이러다 정말 발끝까지 빨개질 것 같았다.이 남자, 정말 이상한 남자다.“떨어지라니까요.”윤혜인이 그런 이준혁을 째려보며 말했다.“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 이렇게 경솔해서야.”이준혁이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잡아당겼다.“무슨 헛소리야. 몇 번을 말해. 약혼녀 없다고. 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야.”이준혁이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하늘에 맹세해.”이준혁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원지민이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준혁에게 약혼녀가 없다 해도 그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생각에 잠긴 윤혜인의 모습에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내 첫날밤은 네가 가져갔잖아. 먹튀할 생각하지 마.”순간 윤혜인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너무 파렴치한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고 그저 덤덤하게 웃었다.그는 와이프를 쫓아다니는데 체면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체면을 차린다고 와이프를 한 번 더 안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설마 준혁 씨 만날 때 나는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윤혜인은 자신이 매우 보수적인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준혁과 결혼했을 때 나이도 어린 편이라 다른 남자가 있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처음 맞아.”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뭐 똑같네요. 먹튀는 무슨 먹튀.”이준혁이 머릿속에 첫날밤을 떠
윤혜인은 이준혁의 진지한 태도에 놀랐다.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고 해서 온전히 이준혁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이준혁이 덧붙였다.“근데 내가 뒤에 해명했잖아. 그때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어?”만약 원지민의 마음을 하루라도 빨리 알았다면 진작에 원지민을 치워버렸을 텐데 말이다.굳이 탓하려면 이준혁이 만나본 여자가 적어 원지민의 위선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을 탓해야 했다.그도 그럴 것이 원지민의 연기는 10년 동안 흠잡을 데 없었고 선을 넘은 적도 없었다.그리고 이준혁이 선을 넘는 여자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룰을 잘 지켰다.윤혜인이 해명했다.“오빠가 나한테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과 기사를 많이 보여줬거든요.”이준혁은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었다. 하필 밉보여도 처남에게 밉보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지나간 기사를 전부 모아 윤혜인에게 보여줄 만큼 말이다.“그건 다 네가 떠나고 나서 내가 회사 일은 뒷전일 때 엄마랑 다른 사람들이 한 짓이야. 내가 회사로 나온 후로 다 취소했는데?”이준혁이 윤혜인의 입술을 꼬집더니 말했다.“기다려. 3일 후면 법무팀에 공지 올리라고 할 거야.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은 파트너일 뿐 다른 오해할 만한 관계는 없다고.”윤혜인은 이준혁이 진지하게 설명하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하지만 이내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쉽게 빠져들어서도, 쉽게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윤혜인은 얼굴을 굳히더니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왜 기다려요? 이건 원지민 씨와 준혁 씨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이준혁은 윤혜인이 자기와 거리를 두는 게 내키지 않아 얼른 그녀를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왜 상관이 없어?”그렇게 윤혜인과 몸을 바짝 붙인 이준혁이 덧붙였다.“너는 내 와이프잖아. 우린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이준혁의 중저음은 매우 듣기 좋았다. 뭔가 사람을 점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윤혜인은
들어온 사람은 주훈이었다.들어오자마자 이준혁이 세컨드로 있어도 좋다는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몰래 웃었다.아까 탕을 끓일 때부터 주훈은 간호사로 위장한 사람이 윤혜인이라는 걸 발견했기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순간 이준혁은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동안 유지해 왔던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버렸다.이준혁이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왜?”주훈이 얼른 대답했다.“탕. 제가 탕을 들고 왔습니다.”조금 전 윤혜인이 탕을 가지고 오다가 흘린 걸 보고 남은 탕을 보온병에 담아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준혁이 탕을 마시겠다고 졸랐는데 아직 많이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재미있는 대화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주훈은 묵묵히 탕을 담아 이준혁 앞으로 가져가더니 잘 놓아두었다.고개를 돌리자 양말을 신지 않은 윤혜인의 발이 보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의 발은 처음이었다. 발가락은 마치 조개 안의 진주처럼 뽀얗고 동그란 게 참으로 귀여웠다. 주훈은 넋을 잃고 몇 번 더 힐끔거렸다.에헴.불쾌함이 섞인 기침 소리에 주훈이 정신을 차렸다.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마치 주훈의 눈알을 빼버리겠다는 듯이 노려봤다.주훈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더니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이준혁이 사발을 들었다 다시 놓더니 주훈에게 말했다.“남은 거 너 다 마셔.”“...”주훈은 이준혁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옆에서 윤혜인이 탕을 만드는 걸 지켜볼 때부터 주훈은 마셔보고 싶었다.전에 윤혜인의 솜씨를 맛본 적이 있는데 요리 실력이 일품이었다.윤혜인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주훈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보온병을 들고 물러갔다.윤혜인은 마음속으로 주훈이 그 탕을 마시지 말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이준혁이 뽀얗게 우러난 탕을 보며 물었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네.”윤혜인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고생해서 만든 거예요. 손가락도 하마터면 델 뻔했다고요.”이준혁이 웃음을 터
이준혁은 꿈에도 그리던 입술에 마음껏 키스했다. 익숙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이준혁의 코끝을 가득 메웠다.“읍...”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소리를 내며 반항했지만 그 소리는 마치 신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 간질거리게 했다.이준혁의 손은 마치 수갑처럼 그녀를 꽁꽁 묶고 있어 윤혜인은 도망은커녕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처음엔 이준혁도 그저 꼼수를 쓴 윤혜인을 응징하기 위해서 키스한 것이었다. 이준혁은 코가 영민한 편이었고 후추에 유난히 민감했다. 어지간히 넣은 게 아니라 한 통은 넣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에게 키스한 순간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준혁은 그냥 이렇게 끝도 없이 그녀와 키스하고 싶었다.드르륵.문이 다시 열렸다. 탕을 마시고 목이 나가버린 주훈이 이준혁에게 탕을 마시지 말라고 귀띔하려고 들어온 것이었다. 주훈은 윤혜인이 아마 부주의로 후추를 너무 많이 뿌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게 한 모금 들이킨 주훈은 이게 후추를 많이 넣은 상태가 아니라 아예 한 통을 다 들이부은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할 줄은 몰랐다.주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입을 뻐끔거리던 주훈은 마치 말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침대맡에 놓아둔 외투를 집어들어 바깥으로 드러난 윤혜인의 어깨를 꽁꽁 감싸주었다.“거기 서서 뭐 해?”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오늘따라 어리바리한 주훈을 노려봤다.주훈은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나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대표님, 목이...”주훈이 소리 내 귀띔했다.그제야 윤혜인은 이준혁의 목이 이상하리만치 빨개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급성 알레르기로 인한 증상 같았다.윤혜인이 화들짝 놀라더니 다급하게 물었다.“혹시 후추 알레르기 있어요?”이준혁도 그제야 불편함을 느꼈다. 목이 점점 간지러웠다.주훈이 잽싸게 대답했다.“대표님은 후추 알레르기 외에 산초류 알레르기도 있습
원진우가 점점 다가오자 윤혜인은 마지막 기회를 잡고 숨겨둔 막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원진우가 맨손으로 막대를 가볍게 붙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은 막대를 빼앗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그 순간, 원진우는 다른 손으로 윤혜인의 목을 단숨에 움켜쥐고 그녀를 다락방 유일한 창틀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목이 졸려 말을 할 수 없었던 윤혜인은 두 손으로 창틀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이 다락방은 지상에서 족히 10미터는 넘게 높았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이 순간, 원진우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그의 눈에 더 이상 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처음에는 딸에게 보상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난 것은 원진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누구든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는 심지어 친자식이라도 용서받지 못한다.윤혜인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진우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아직도 말 안 할 거냐?”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이 말과 함께 윤혜인의 몸 반쯤이 창밖으로 나갔다.“멈춰!”갑자기 아래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윤혜인은 몸이 거꾸로 매달려 있어 피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경천이 그곳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빠가... 오빠가 드디어 왔어...’원진우가 서둘러 나왔던 탓에 데려온 네 명의 경호원은 이미 곽경천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 원진우도 곽경천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무슨 날인가? 죽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군.”“이 미친놈! 내 여동생 당장 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곽경천이 외쳤다.원진우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곽경천을 겨누며 말했다.“뭐? 날 죽
‘그래서 나한테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거였어.’윤혜인은 창밖을 바라보며 푸른 섬에 눈길을 빼앗긴 윤아름을 돌아봤다.윤아름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된 듯, 맑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이윽고 윤혜인은 마음을 굳히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윤아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바라봤다.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게임 하나 해요...”원진우는 차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운전하는 경호원은 고속으로 차를 몰며 윤혜인이 타고 도주한 검은 차량을 추적했다.그러던 와중 차량이 눈에 보이자 경호원은 차를 세우며 보고했다.“대표님, 저 앞에 있습니다.”원진우는 차에서 천천히 내려 차량 앞으로 다가갔다.차 안을 들여다봤지만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말 들을 애가 아니지.”딱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 관절을 꺾더니 원진우는 생각에 잠겼다.‘찾으면 어떤 벌을 줘야 할까. 다리 힘줄과 손 힘줄을 끊을까, 아니면 독을 써서 목소리를 없앨까... 아니면 둘 다 한꺼번에 해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그는 특히 윤혜인이 윤아름을 데리고 도망치려 한 점에 분노했다.‘제 엄마를 유혹해 나를 떠나려 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곧 원진우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주변을 샅샅이 수색해.”차량의 전력 시스템을 끊은 뒤부터 지금까지 겨우 15분이 지났다.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앞쪽에 사람이 없는 교회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주변에 흔적이 없는 걸 보니 교회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원진우는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가슴과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그 후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수색해.”건장한 경호원 네 명이 흩어져 교회 곳곳을 뒤졌다.그렇게 모든 곳을 수색한 후,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못한 곳
게다가 원진우의 계획을 보니 해운성에서 그녀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아마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를 거쳐 이동하겠다는 의도였으니 그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윤혜인은 그제야 이해했다.그녀가 보낸 신호가 전송되었어도 곽경천 일행이 빠르게 도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나라 하나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서 아무리 빨리 와도 금방 닿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그녀는 차량에 내장된 스마트 시스템을 떠올리고 외국어로 시스템에 말을 걸어 보았다.“나 대신 신고 좀 해줘!”그러자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대답했다.“현재 해운성 해안경비대로 연결 중입니다.”돌아오는 답변에 윤혜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대다수의 차량 시스템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해도 긴급 신고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다.‘해안경비대에 연락만 닿는다면 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기다릴 수 있어. 아무리 원진우가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나라에 그 세력이 미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윤혜인은 차를 멈추고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 연결을 기다렸다.삐빅 하는 두 번의 신호음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상담원이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윤혜인은 다급히 말했다.“저와 제 어머니가 납치되었습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이 저희를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담원은 침착하게 물었다.“상대방이 누구인지,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윤혜인은 대답했다.“저희를 납치한 사람은 국제적으로 수배가 되어있습니다. 혐의도 한두 개가 아닐 겁니다.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고 주변에 바다밖에 없어요. 내비게이션에서는 블루섬이라고 나옵니다.”윤혜인은 상대가 국제 수배범이라는 말을 일부러 꺼냈다.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이번 원진우에 대한 폭로로 곽경천 일행이 그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므로 국제 수배범이라는 표현이 적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손에는 스마트 디스플레이 키가 들려있었는데 조금 전 원진우에게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그녀는 단 1초 만에 시동을 걸고 곧장 대문을 향해 내달렸다.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대로 부딪힐 각오인 듯 말이다.대문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차에 부딪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급히 원진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선생님, 저기... 대문을 어떻게 할까요...”원진우는 차의 기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그 모습에, 겉보기에는 얌전해 보이는 윤혜인이 자신의 열정과 영리함을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그는 짧게 고심한 후 단호히 말했다.“문 열어!”아무리 비싼 슈퍼카라 해도 이 속도로 대문을 들이받으면 운전자의 안전이 100%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슈퍼카가 대문에 닿기 직전, 대문이 위로 열렸다.순식간에 슈퍼카는 대문을 빠져나갔다.윤혜인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몇십 초를 기다린 끝에야 상황을 이해했다.“엄마, 우리 탈출했어요!”기쁨에 찬 외침이었다.윤아름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딸의 말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탈출’이라는 말은 지하실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있던 그녀에게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윤아름이 기뻐하며 창문을 두드리자 윤혜인은 곧바로 창문을 내렸다.하지만 안전을 위해 반 정도만 내렸다.그 작은 틈으로도 윤아름은 크게 기뻐했다. 손가락을 밖으로 조금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냄새를 맡았다.자유로운 바람이 스치는 윤아름의 얼굴은 완전히 행복해 보였다.윤혜인은 엄마 윤아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다 가치 있다고 느껴졌다.긴장으로 땀이 찼던 손바닥도 이제는 차갑게 식었고 조금 전 그녀는 원진우에게 조금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