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딘데요?”상대방이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금란 뒷골목이요.”원지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곳은 원지민도 들어본 적이 있다. 좋지 않은 골목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이준혁이 이 정도로 매정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때 이준혁의 첫사랑이었는데 말이다.상대가 물었다.“아가씨, 임세희 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 구할까요?”원지민이 웃으며 말했다.“구해요. 치료만 해주면 더는 상관할 필요 없어요.”“네, 아가씨.”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눈동자에 깃든 매섭고 음침한 기운이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그런 곳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딱히 원지민이 시키지 않아도 생각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나올 수도 있다....금란 뒷골목.규칙이란 통하지 않는 회색 지대.쓰레기통 옆에 까맣고 기다란 어떤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발이 그래도 하얘서 말이지 아니면 이게 사람이라는 걸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지저분했다. 여러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제일 기본인 속옷도 없어 보였다.임세희는 고열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의식도 흐릿한 상태였다. 최근 두 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암울하고 제일 긴 이틀이 될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끔찍한 이틀이었다.여기는 점잖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욕구를 충족시키러 온 짐승들이었다.이준혁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그녀를 금란 뒷골목에 던져 버렸을 뿐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임세희가 알아서 떠나면 된다.하지만 자체 제작 ‘음료수’를 마신 몸은 급히 해소할 구멍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처음에 만난 남자는 사실 임세희가 원해서 만난 것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공허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세희는 차에서 내리자
쾅!임세희는 남자에게 또 한 번 걷어차였다.“아악!”임세희가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행색이 지저분한 남자가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개처럼 달려들어서 마신 거잖아. 그래 놓고 나를 원망해?”그 남자가 일행에게 손짓하며 말했다.“너도 와서 물 좀 빼. 그래야 이 년이 실컷 마실 거 아니야.”일행이 얍삽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있지. 있지. 당연히 있지.”쪼르륵하는 물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이내 임세희의 때 묻은 얼굴을 씻어줬다.남자는 갑자기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헤헤 웃으며 말했다.“오? 이렇게 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임세희의 얼굴은 전에 수억을 들여서 관리를 받은 얼굴이었다.아무리 여기서 이틀간 수모를 당했다 해도 피부는 아직 탱글탱글 촉촉한 상태였다.남자는 음침한 눈빛으로 일행에게 말했다.“아직 물 덜 뺀 사람 있어? 거기도 씻어줘야지...”“물은 다 뺐는데...”일행이 손에든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임세희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임세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머리채를 단단히 잡히고 말았다.찰싹.남자가 사정없이 임세희의 싸대기를 후려쳤다.순간 볼이 얼얼해지면서 머리가 윙 했다.이내 두 손을 바꿔가며 수십 대를 더 때리고 나서야 남자들은 그만뒀다.그러더니 마치 짐짝을 내다 버리듯 임세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젠장, 더 지랄해 봐!”일행이 재촉했다.“할 거면 빨리 하자. 나 다른 애랑 약속 잡았단 말이야. 속전속결하자...”두 사람은 마치 말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임세희를 향해 다가갔다.“아아악!”뒷골목에 임세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남자는 그런 임세희가 성가셨는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임세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닥쳐! 빌어먹을 년! 여기까지 와서 원하는 게 이거 아니야? 청순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어!”“흑흑...”임세희의 처절하게 울
원지민은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병문안하러 온 문현미와 마주쳤다.원래 이준혁이 다친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원지민이 병원에서 주훈을 마주쳤고 주훈도 더는 둘러대기가 힘들어 양아치한테 당한 거라고 했다.원지민은 이 사실을 문현미에게 알려주었고 문현미는 이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문현미의 손에도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원지민을 본 문현미가 잽싸게 물었다.“지민아, 우리 준혁이 어때?”원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문현미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다독였다.“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준혁이 괜찮아요.”문현미가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나도 준혁이 보러 왔어.”문현미는 원지민의 의견을 물어보고 있었다.5년 전 이준혁이 하마터면 강에 빠져서 죽을 뻔한 뒤로 문현미는 이준혁에 대한 걱정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이준혁과 같이 있는 시간 외에는 부처님께 불경을 드리면서 아들의 건장과 안전을 빌었다. 그러면서 성격도 점점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시작했다.몇 년간 문현미가 이렇게 불안해할 때마다 원지민이 옆에서 그녀를 위로해 주곤 했다.같이 경전을 옮겨적기도 하고 여러 스님을 만나러 가보기도 했다.문현미가 제일 믿는 사람이 원지민이었고 원지민의 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윤혜인이 죽고 문현미가 이준혁에게 내려놓으라고 타이르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바람에 모자지간이 많이 멀어지고 말았다. 그럴수록 문현미는 원지민을 통해 아들을 관심하는 수밖에 없었다.원지민이 웃으며 도시락을 받더니 이렇게 말했다.“준혁이 이미 제가 가져온 도시락 먹었어요. 그래서 이 도시락은 못 먹을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파요. 이 도시락은 저 주세요.”문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난감한 상황을 잘 풀어준 원지민에게 감격했다. 아니면 가져갔다가 이준혁이 먹지 않으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원지민이 덧붙였다.“아주머니, 내일은 도시락 가져다 저에게 주시면 돼요. 제가 준혁이한테
“미쳤어요?”아직 상처가 낫기 전이라 이렇게 막 움직이면 안 되는데 말이다.다행히 침대랑 가까워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을 침대에 내려줄 수 있었다.윤혜인은 가슴을 움켜쥔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준혁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윤혜인의 신발을 벗겼다.쪼그리는 자세는 아직 무리라 침대에 앉은 채 윤혜인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윤혜인은 그대로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잘못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화들짝 놀란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발길질을 날리려 했다.“이렇게 나오면 사람 부르는 수밖에 없...”“움직이지 마.”이준혁의 윤혜인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어...”윤혜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퉁퉁 부어올라 따갑기까지 하던 발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이에 억양이 살짝 올라갔다.이준혁은 어디서 얼음을 가져왔는지 윤혜인의 발에 올려놓고 살살 마사지했다.윤혜인의 발은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하얗고 보들보들한 게 달빛 아래 은은히 빛나는 백옥 같았다.발가락 부분이 탕에 데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이준혁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얼음찜질해 주었다. 이준혁에게 발을 잡힌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윤혜인은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화젯거리를 찾았다.“어떻게 알았어요?”“내가 그렇게 무심한 줄 알았어?”이준혁은 사실 아까부터 발견했다. 그래서 원지민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마침 병실에 연고와 얼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사지하던 이준혁은 연고를 발라주기 전 화풀이로 윤혜인의 발을 꾹 누르기까지 했다.“이렇게 심하게 뎄는데 아프다는 말도 안 하고. 아직 덜 아파봤어.”사실 윤혜인은 아까 양말을 신은 상태로 데었다. 하지만 발등의 살이 너무 연해 상처가 심각해 보일 뿐이었다. 이준혁이 얼음찜질을 해주고 나니 훨씬 편해졌다.하지만 이준혁이 누른 곳은 마침 제일 민감한 곳이었다. 윤혜인의
“...”윤혜인은 넋을 잃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태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자랑스러워할 사람은 이준혁밖에 없을 것이다.이준혁의 표정은 마치 ‘나는 변태여서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윤혜인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별로요. 점 떨어져서 앉아요!”“진짜 별로야?”이준혁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전에는 엄청나게 좋아했는데...”윤혜인은 이러다 정말 발끝까지 빨개질 것 같았다.이 남자, 정말 이상한 남자다.“떨어지라니까요.”윤혜인이 그런 이준혁을 째려보며 말했다.“약혼녀까지 있는 사람이 이렇게 경솔해서야.”이준혁이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잡아당겼다.“무슨 헛소리야. 몇 번을 말해. 약혼녀 없다고. 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야.”이준혁이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하늘에 맹세해.”이준혁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원지민이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준혁에게 약혼녀가 없다 해도 그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생각에 잠긴 윤혜인의 모습에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내 첫날밤은 네가 가져갔잖아. 먹튀할 생각하지 마.”순간 윤혜인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너무 파렴치한 거 아니에요?”이준혁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고 그저 덤덤하게 웃었다.그는 와이프를 쫓아다니는데 체면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체면을 차린다고 와이프를 한 번 더 안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설마 준혁 씨 만날 때 나는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윤혜인은 자신이 매우 보수적인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준혁과 결혼했을 때 나이도 어린 편이라 다른 남자가 있을 리가 없다고 말이다.“처음 맞아.”이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뭐 똑같네요. 먹튀는 무슨 먹튀.”이준혁이 머릿속에 첫날밤을 떠
윤혜인은 이준혁의 진지한 태도에 놀랐다.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고 해서 온전히 이준혁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이준혁이 덧붙였다.“근데 내가 뒤에 해명했잖아. 그때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어?”만약 원지민의 마음을 하루라도 빨리 알았다면 진작에 원지민을 치워버렸을 텐데 말이다.굳이 탓하려면 이준혁이 만나본 여자가 적어 원지민의 위선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을 탓해야 했다.그도 그럴 것이 원지민의 연기는 10년 동안 흠잡을 데 없었고 선을 넘은 적도 없었다.그리고 이준혁이 선을 넘는 여자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룰을 잘 지켰다.윤혜인이 해명했다.“오빠가 나한테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과 기사를 많이 보여줬거든요.”이준혁은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었다. 하필 밉보여도 처남에게 밉보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지나간 기사를 전부 모아 윤혜인에게 보여줄 만큼 말이다.“그건 다 네가 떠나고 나서 내가 회사 일은 뒷전일 때 엄마랑 다른 사람들이 한 짓이야. 내가 회사로 나온 후로 다 취소했는데?”이준혁이 윤혜인의 입술을 꼬집더니 말했다.“기다려. 3일 후면 법무팀에 공지 올리라고 할 거야.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은 파트너일 뿐 다른 오해할 만한 관계는 없다고.”윤혜인은 이준혁이 진지하게 설명하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하지만 이내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쉽게 빠져들어서도, 쉽게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윤혜인은 얼굴을 굳히더니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왜 기다려요? 이건 원지민 씨와 준혁 씨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이준혁은 윤혜인이 자기와 거리를 두는 게 내키지 않아 얼른 그녀를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왜 상관이 없어?”그렇게 윤혜인과 몸을 바짝 붙인 이준혁이 덧붙였다.“너는 내 와이프잖아. 우린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이준혁의 중저음은 매우 듣기 좋았다. 뭔가 사람을 점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윤혜인은
들어온 사람은 주훈이었다.들어오자마자 이준혁이 세컨드로 있어도 좋다는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몰래 웃었다.아까 탕을 끓일 때부터 주훈은 간호사로 위장한 사람이 윤혜인이라는 걸 발견했기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순간 이준혁은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동안 유지해 왔던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버렸다.이준혁이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왜?”주훈이 얼른 대답했다.“탕. 제가 탕을 들고 왔습니다.”조금 전 윤혜인이 탕을 가지고 오다가 흘린 걸 보고 남은 탕을 보온병에 담아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준혁이 탕을 마시겠다고 졸랐는데 아직 많이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재미있는 대화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주훈은 묵묵히 탕을 담아 이준혁 앞으로 가져가더니 잘 놓아두었다.고개를 돌리자 양말을 신지 않은 윤혜인의 발이 보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의 발은 처음이었다. 발가락은 마치 조개 안의 진주처럼 뽀얗고 동그란 게 참으로 귀여웠다. 주훈은 넋을 잃고 몇 번 더 힐끔거렸다.에헴.불쾌함이 섞인 기침 소리에 주훈이 정신을 차렸다.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마치 주훈의 눈알을 빼버리겠다는 듯이 노려봤다.주훈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더니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이준혁이 사발을 들었다 다시 놓더니 주훈에게 말했다.“남은 거 너 다 마셔.”“...”주훈은 이준혁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옆에서 윤혜인이 탕을 만드는 걸 지켜볼 때부터 주훈은 마셔보고 싶었다.전에 윤혜인의 솜씨를 맛본 적이 있는데 요리 실력이 일품이었다.윤혜인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주훈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보온병을 들고 물러갔다.윤혜인은 마음속으로 주훈이 그 탕을 마시지 말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이준혁이 뽀얗게 우러난 탕을 보며 물었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네.”윤혜인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고생해서 만든 거예요. 손가락도 하마터면 델 뻔했다고요.”이준혁이 웃음을 터
이준혁은 꿈에도 그리던 입술에 마음껏 키스했다. 익숙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이준혁의 코끝을 가득 메웠다.“읍...”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소리를 내며 반항했지만 그 소리는 마치 신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 간질거리게 했다.이준혁의 손은 마치 수갑처럼 그녀를 꽁꽁 묶고 있어 윤혜인은 도망은커녕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처음엔 이준혁도 그저 꼼수를 쓴 윤혜인을 응징하기 위해서 키스한 것이었다. 이준혁은 코가 영민한 편이었고 후추에 유난히 민감했다. 어지간히 넣은 게 아니라 한 통은 넣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에게 키스한 순간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준혁은 그냥 이렇게 끝도 없이 그녀와 키스하고 싶었다.드르륵.문이 다시 열렸다. 탕을 마시고 목이 나가버린 주훈이 이준혁에게 탕을 마시지 말라고 귀띔하려고 들어온 것이었다. 주훈은 윤혜인이 아마 부주의로 후추를 너무 많이 뿌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게 한 모금 들이킨 주훈은 이게 후추를 많이 넣은 상태가 아니라 아예 한 통을 다 들이부은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할 줄은 몰랐다.주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입을 뻐끔거리던 주훈은 마치 말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침대맡에 놓아둔 외투를 집어들어 바깥으로 드러난 윤혜인의 어깨를 꽁꽁 감싸주었다.“거기 서서 뭐 해?”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오늘따라 어리바리한 주훈을 노려봤다.주훈은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나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대표님, 목이...”주훈이 소리 내 귀띔했다.그제야 윤혜인은 이준혁의 목이 이상하리만치 빨개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급성 알레르기로 인한 증상 같았다.윤혜인이 화들짝 놀라더니 다급하게 물었다.“혹시 후추 알레르기 있어요?”이준혁도 그제야 불편함을 느꼈다. 목이 점점 간지러웠다.주훈이 잽싸게 대답했다.“대표님은 후추 알레르기 외에 산초류 알레르기도 있습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