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꿈에도 그리던 입술에 마음껏 키스했다. 익숙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이준혁의 코끝을 가득 메웠다.“읍...”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소리를 내며 반항했지만 그 소리는 마치 신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더 간질거리게 했다.이준혁의 손은 마치 수갑처럼 그녀를 꽁꽁 묶고 있어 윤혜인은 도망은커녕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처음엔 이준혁도 그저 꼼수를 쓴 윤혜인을 응징하기 위해서 키스한 것이었다. 이준혁은 코가 영민한 편이었고 후추에 유난히 민감했다. 어지간히 넣은 게 아니라 한 통은 넣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에게 키스한 순간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이준혁은 그냥 이렇게 끝도 없이 그녀와 키스하고 싶었다.드르륵.문이 다시 열렸다. 탕을 마시고 목이 나가버린 주훈이 이준혁에게 탕을 마시지 말라고 귀띔하려고 들어온 것이었다. 주훈은 윤혜인이 아마 부주의로 후추를 너무 많이 뿌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게 한 모금 들이킨 주훈은 이게 후추를 많이 넣은 상태가 아니라 아예 한 통을 다 들이부은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할 줄은 몰랐다.주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입을 뻐끔거리던 주훈은 마치 말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침대맡에 놓아둔 외투를 집어들어 바깥으로 드러난 윤혜인의 어깨를 꽁꽁 감싸주었다.“거기 서서 뭐 해?”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오늘따라 어리바리한 주훈을 노려봤다.주훈은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나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대표님, 목이...”주훈이 소리 내 귀띔했다.그제야 윤혜인은 이준혁의 목이 이상하리만치 빨개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급성 알레르기로 인한 증상 같았다.윤혜인이 화들짝 놀라더니 다급하게 물었다.“혹시 후추 알레르기 있어요?”이준혁도 그제야 불편함을 느꼈다. 목이 점점 간지러웠다.주훈이 잽싸게 대답했다.“대표님은 후추 알레르기 외에 산초류 알레르기도 있습
윤혜인은 이준혁이 마음을 그렇게 곱게 먹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이 보상을 요구했다.윤혜인이 입을 삐쭉거리더니 어색하게 허리를 꿈틀거리며 물었다.“뭘 원하는데요?”이준혁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거 다 만족해 줄 거야?”“그런 일이라면...”수줍음이 많은 윤혜인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하여 콕 집어 말하지 못하고 흐릿하게 말했다.“절대 안 되죠.”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추더니 웃음을 터트렸다.“그런 일이 어떤 일인데?”“...”윤혜인은 귀까지 빨개졌다.“너무하네요. 정말.”이준혁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계속 묻고 있었다.그는 장난을 멈추고 윤혜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나 잘 챙겨줘야지.”이준혁은 일초라도 더 윤혜인과 함께 있고 싶었다.“그게 다예요?”윤혜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이 기회를 빌려 과분한 요구를 제시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의 일관적인 스타일과는 조금 다른 행보였다.“왜? 별로야?”이준혁은 최대한 윤혜인을 핍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윤혜인이 이를 불편해했다. 이준혁이 입을 앙다문 채 웃었다.“뭐 네가 몸으로 때우는 걸 좋아한다면 나도 기꺼이 받아들일게.”이준혁은 일부러 몸으로 때운다는 말에 힘을 주었다. 윤혜인은 얼굴이 하얘졌다가 빨개지기를 반복했다.“꿈도 꾸지 마요.”윤혜인이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준혁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는 얇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이렇게 가면 안 되지.”이준혁은 습관적으로 명령조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사실 이준혁은 그냥 윤혜인의 발이 걱정될 뿐이었다.겉보기엔 큰 문제 없어 보였지만 계속 신발을 신고 있으면 안 좋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여기서 하룻밤 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싫어요.”윤혜인이 이를 거부했다. 아까 두 사람이 엉겨 붙어 나눈 키스가 떠올라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이준혁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내가 이런 몰골로 설마 무슨 짓 하겠어? 응?”이준혁이 다친 것도 윤혜인은
윤혜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무력함과 수치심에 휩싸여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윤혜인은 참지 못하고 내뱉은 신음에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래도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아니요...”수줍어하는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이 가볍게 웃었다.“안 미덩.”이준혁은 윤혜인의 귀를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때? 만족해?”애정 행각을 수도 없이 해온 터라 이준혁은 윤혜인이 느낄 때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었다. 아까도 곧 절정에 다다를 만큼 느끼고 있었다.윤혜인은 이제 목까지 빨개졌지만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헛소리하지 마요.”“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다시 깨물어보면 알겠네.”“싫어요!”윤혜인이 목을 최대한 움츠리며 얼굴을 감추려 했다.하지만 침대는 전부 이준혁의 영역이었기에 도망갈 곳이 없었다.이준혁은 모든 면이 정상인 건강한 남자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5년 동안 금욕했다.전에는 이준혁도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했기에 다른 쪽으로 새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매번 윤혜인의 행방이 묘연해질 때마다 이준혁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그때 이준혁에게 남은 건 칠흑 같은 어둠과 인고의 시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윤혜인은 이토록 생기 넘치게 이준혁의 앞에 서 있다.욕망의 문은 한번 열리면 잘 닫히지 않았다.특히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그때를 회상하면 뼈까지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욕구가 밀려올 때마다 이준혁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지금 이 순간, 키스 한 번에 5년간 참아왔던 그의 욕구가 터져버린 것이다.윤혜인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 강렬했던 적은 업었다.이준혁이 바짝 다가와 낮은 소리로 유혹했다.“혜인아, 우리... 하면 안 될까... 하면 되게 편안해질 것 같아...”노골적인 멘트에 윤혜인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윤혜인이 이준혁을 밀어내며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준혁 씨, 나는, 음, 안 돼요...”“혜인아, 나 5년이나 참았는데... 정말 안 되겠어?”
특히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장면이 너무 예뻐 미칠 것 같았다.남자의 숨소리가 이렇게 섹시할 수 있다는 걸 윤혜인은 오늘 알았다.들숨 날숨을 쉴 때마다 아주 규칙적인 게 색기가 가득 묻어났다.윤혜인은 재미난 공연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발끝까지 빨개졌다.더더욱 어려웠던 건 이준혁을 부축해 욕실로 가서 씻어줘야 한다는 뜻이다.이렇게 생각한 윤혜인은 화가 치밀어올랐다.“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준혁 씨 도와준 거잖아요... 그러니 지난번 그 녹음은 제발 지워요.”이준혁이 섹시하게 휘파람을 불었다.“시간 선택이 참 탁월하다니까?”이준혁의 기분이 좋아졌으니 목숨을 내줘도 아깝지 않을 타이밍이었다.녹음을 지우고 나서야 윤혜인은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침대에 기댄 자세도 전보다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윤혜인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뽀얗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이 드러났다. 이준혁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윤혜인에게 바짝 다가가 누웠다. 이준혁이 가까워지는 걸 느낀 윤혜인이 순간 멈칫했다.“또 뭐 하려고 그래요...”윤혜인이 안으로 조금 비키더니 기세등등하게 경고했다.“자꾸 이러면 나 진짜 가요.”윤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준혁이 키스했다.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운 키스였다.윤혜인이 마침 이를 피하려는데 남자가 먼저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는 깊은 눈동자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준혁은 목소리가 세게 잠겨 있었다.“내가 도와줄까? 응?”이준혁은 윤혜인의 민감한 부분이 어딘지 알고 있다. 전에 이미 수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기에 윤혜인의 몸은 어느덧 탐색이 끝난 상태였다.길게 기다릴 필요 없이 몇분이면 바로 쾌감을 절정까지 치닫게 할 수 있었다.윤혜인은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싫어요. 안 할래요. 잘 거예요.”윤혜인이 이렇게 말하며 이불로 두 사람 사이에 38선을 만들었다.이준혁이 웃으며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옆에 잠들어 있는 튼실한 남자를 보자 윤혜인은 갑자기 잠이 오지 않았다. 이준혁의
육경한의 차가운 눈빛에서 강력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몇 초간 눈빛을 주고받다가 소원은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육경한의 보디가드가 그녀를 막아서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쪽은 탑승 불가입니다. 다른 엘리베이터 기다리세요.”소원이 이를 듣더니 파일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거의 닫히려는데 육경한이 기다란 손으로 문을 막으며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와.”육경한의 지인이라는 걸 알고 보디가드도 잽싸게 물러났다.소원은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말했다.“됐어. 고맙지만 사양할게.”육경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쪽 발로 엘리베이터가 닫히지 않게 버텼다.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도발 같았다.주위에는 이미 구경꾼이 모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소원의 동료도 보였다.결국 보고만 있기 민망했던 소원이 엘리베이터를 타며 차갑게 말했다.“고마워.”소원이 안으로 들어갔지만 육경한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엘리베이터 문을 발로 막은 채 서 있었다.하마터면 소원은 육경한의 가슴에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 그 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춰섰다.육경한과 눈이 마주친 소원은 그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다. 육경한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인 채 소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더니 몸을 옆으로 살짝 비켰다.원래도 크지 않은 엘리베이터에 육경한의 보디가드 네 명까지 더해지자 소원은 육경한의 뒤에 설 수밖에 없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육경한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순간 육경한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이에 소원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유지했다.중요한 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소원은 한쪽이 찢어진 정장 치마를 입고 있었다. 육경한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늘어트리고 거울로 그녀의 옷차림을 훑었다.소원의 몸매는 한결같이 쭉쭉빵빵했다.똑같이 하얀 셔츠를 입어도 다른 사람이 입으면 작업복, 그녀가 입으면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이 있었다.아무리 원래
소원은 육경한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라 잠시 멍해졌다.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보아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그러자 소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요즘 여자들은 일편단심인 남자를 좋아해요. 당신처럼 몇 번이나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진 남자는 무릎을 꿇고 빌어도...”그녀는 육경한의 넥타이를 가볍게 정리하며 조롱하듯 말했다.“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요.”육경한은 자신이 한 여자로부터 이런 모욕을 당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 서울에서 내쫓아 다시는 이곳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이었기에 육경한은 말문이 막혀 화를 억누르려고 애썼다.여자의 푸른 눈동자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그가 예전에 자신에게 주었던 모욕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었다.“소원, 네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가운 눈빛으로 육경한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복수하려면 다른 방법을 써. 이런 식으로는 날 화나게 할 수는 없어.”“대표님, 왜 그렇게 확신해요? 내가 복수하려는 거라고?”소원은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그 영상이 보고 싶다면 지금 보내드릴게요. 육 대표님도 예전에 찍었던 적 있으시잖아요? 친구들한테 보여줬던 거 아니예요?”그녀는 남자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보며 무심하게 물었다.“내 몸매가 좋다고 칭찬하던가요?”소원의 말 하나하나가 육경한의 마음을 할퀴며 상기시켰다.그가 예전에 했던 일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철저히 비열했는지 말이다.“띵-”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왔다.소원은 말을 더할 필요 없다는 듯이 남자의 손을 힘껏 밀어내고 나가려 했다.그러나 육경한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내가 보상할게.”그러자 소원은 마치 엄청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듯 크게 웃었다.“보상이라니... 어떻게 보상할 건데요?
소원의 머리가 지끈거리고 시야가 흐릿해졌다.조금 전, 육경한의 앞에서 분노와 원망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충동적인 성격이라 그녀는 때로 그 증오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몸 안에 언제든지 튀어나올 것 같은 원령이 살고 있는 듯, 그것은 소원을 조여오며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그 모든 고통의 근원은 바로 육경한 때문이었다. 5년, 무려 5년이었다.처음에는 절망감에 휩싸여 수없이 죽고 싶어 했지만 이후에는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와 일하고 생활했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고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달라 보였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은 결코 치유되지 않았고 이미 썩어 냄새가 나고 있다는 것을.살아있지만 마치 시체처럼 살아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대량의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자신을 치료하려 했으나 그 이유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 언젠가 후회 없이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코너를 도니 앞의 밝은 불빛이 눈부시게 비쳤다.소원은 쓸데없는 눈물을 삼키고 다시 무장하며 무너지지 않게 자신을 다잡았다.‘나만 이렇게 밤새 잠 못 이루고 고통받을 수는 없어...’회의가 끝난 후, 소원은 아인 그룹의 임원들과 함께 뷔페식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소원의 아인 그룹 상사는 권력 있는 반지음이라는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며 온화한 성격으로 소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사실 소원은 귀국하기 전 이미 사직했지만 반지음은 그녀가 귀국 후 회사 운영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인 그룹의 한 프로젝트에 협력자로 참여하도록 초대했다. 반지음은 소원을 배려하여 아인 그룹의 큰 나무 아래에서 인맥을 넓히는 것이 그녀가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원은 흔쾌히 받아들였다.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고 회사 운영을 계획했기에 이렇게 하면 육경한의 의심도 피하기 쉬워지니 말이다.게다가 그녀는
한편 육경한은 예상치 못하게 두 걸음도 채 가지 않아 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인에 의해 길이 막혀버렸다.그녀는 단정하고 아름다웠으며 어느 집안의 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는 가상했다.소원은 누군가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밖에는 바비큐가 준비된 뷔페식이 있었고 커다란 선풍기가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어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손에 있던 과일주가 거의 다 떨어져 소원은 뷔페 음료 구역으로 가서 다시 주문했다.이 과일주는 매실로 만든 것으로 새콤달콤하고 부담 없이 마시기 좋았다.그렇게 과일주를 다 받고 자리를 찾으려는 순간, 소원은 누군가와 부딪혔다.그 결과, 한 잔 가득 담긴 과일주가 소원의 치마에 절반 이상 쏟아졌고 일부는 상대방의 신발에도 튀었다.“네가 부딪힌 거야!”뱃살이 두툼한 기름진 중년 남자가 소원을 일반 직원으로 착각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남자가 먼저 자신과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보고 소원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그쪽이 저를 친 거잖아요.”“이런 하찮은 게... 너 눈멀었어?!”하지만 곧 느끼하게 생긴 중년 남자는 소원의 뛰어난 외모를 보고는 놀라 눈을 번쩍 뜨며 말문을 닫았다.“아니, 이렇게 예쁜 아가씨라니...”남자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소원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면 무슨 실수를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아가씨, 아가씨 때문에 내 허리가 너무 아파. 어떻게 보상할 생각이야?”느끼한 목소리와 드문드문 남아있는 머리카락은 정말 역겨웠다.사실 소원은 이 남자가 누군지 처음 보자마자 알아봤다. 그는 인심 그룹의 조 대표였다.그는 아인 그룹의 장기 협력 공급업체 대표였고 이번 아인 그룹의 입찰에서도 유력한 후보였다.소원의 이름을 건 회사도 이번 입찰에 참여했는데 인심 그룹의 아래 순위에 있었다.즉, 조 대표를 배제하면 소원에게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었다.게다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