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이준혁의 엄숙한 얼굴에 넋을 잃었다. 정말 온도 조절을 잘못했나 싶어 얼른 한입 마셔봤다.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온도가 맞춤한 게 딱 마시기 적절한 온도였다.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뜨거운데요.”“그래요?”이준혁의 눈빛이 짙어졌다.“그럼 한 번 더 마셔볼게요.”윤혜인이 물잔을 건넸다.이준혁도 이번엔 먹여달라고 하지 않고 물잔을 받아 가 한 모금 마셨다.윤혜인은 그제야 그 컵을 같이 사용했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 이준혁이 입을 댄 쪽도 그녀가 마신 쪽이었다.민망해진 윤혜인이 얼른 컵을 뺏으려 했다.“죄송해요. 이 컵...”이준혁이 다시 컵을 돌려줬다. 하지만 컵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참 너그럽다고 생각했다.“괜찮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이 신경 쓰지 않자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컵을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이준혁이 다시 윤혜인의 팔목을 잡았다. 콕 움켜쥔 것이 마치 그녀가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이준혁이 입을 열었다.“상처가 아픈데 혹시 덧난 게 아닌지 확인해 줄래요?”윤혜인은 그저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나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하지만 이준혁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억지를 부렸다.“지금 바로 봐줘요.”“...”윤혜인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혹시나 아프게 하면 어떡해요?”이준혁이 딱 잘라서 말했다.“괜찮아요.”윤혜인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결심한 듯했다. 그녀 때문에 입은 상처이니 봐주는 것도 맞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힐끔 쳐다봤다. 이준혁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싸움했다.그러다 이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옷 벗는 거 좀 도와줘요.”“네?”윤혜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이준혁이 붕대를 칭칭 감은 오른손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보다시피 내가 직접 벗기엔 불편해서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에 감긴 붕대를 보고도 딱히 내키지는 않았다.그날 차에서는 긴급한
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아 매끈한 근육 라인에 갖다 대더니 꾹 누르기까지 했다. 보들보들한 촉감에 뜨거운 온도까지 윤혜인의 손끝에 전해졌다.뜨거운 열기가 윤혜인의 얼굴까지 전해져 더 후끈 달아올랐다.이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치골을 따라 점점 아래로 향했다.윤혜인이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손을 확 뺐다.뽀얀 얼굴에서 시작된 홍조가 귀와 목 끝까지 번졌다.‘지금 어딜 만지라는 거야! 변태! 정말 너무 저질이야!’이렇게 생각한 윤혜인은 당장이라도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변... 이런 변태...”목소리를 변조하는 것도 잊은 채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아까 뚫어져라 보길래 만지고 싶은 줄 알았죠.”“누가 만지고 싶대요? 변태 아니야! 당신! 내가 성추행으로 고소할 거야!”이준혁이 느긋하게 눈까풀을 올리더니 눈썹을 추켜세웠다.“그럼 나도 당신이 간호사로 위장했다고 신고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바락바락 성을 내던 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녀를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말투를 보아하니 들어올 때부터 알아챈 것 같았다.=알고 보니 아까 시킨 일들은 전부 고의였다. 물 먹여 달라더니 뜨겁다면서 마셔보라고 했고 그녀가 마신 쪽으로 마신 것도 모자라 상처까지 살펴달라 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마스크를 벗기더니 볼을 살짝 꼬집으며 올려다봤다.“네가 거부기 등딱지 달고 온대도 나는 한눈에 알아볼 것 같은데.”그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눈을 뜨자마자 그리운 그녀를 만났다는 생각에 큰 만족감을 얻었다.윤혜인은 역시나 그렇게 쿨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 같았다.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준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표정도 따라서 밝아졌고 빙산처럼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누가 거북이 등딱지 쓰고 온대요? 잘난 척은!”윤혜인이 이준혁의 손을 쳐냈다. 그의
윤혜인은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 물을 뜨러 가려는데 이준혁이 손목을 잡아당겼다.이준혁이 눈을 부릅뜨더니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이 간호사는 내 전용이야.”그 뜻인즉 원지민은 간호사에게 뭔가를 시킬 자격이 없다는 소리였다.잠깐 멈칫하던 원지민이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준혁아, 난 그냥 물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하지만 이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따라서 마셔.”“나는...”원지민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힘들었지만 더는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후 타협한 원지민이 입을 열었다.“됐어. 안 마실래.”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혜인은 원지민이 참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준혁은 그녀를 전혀 챙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윤혜인은 더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 이렇게 말했다.“저 먼저 나가볼게요.”이준혁은 윤혜인을 순순히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그는 주훈을 부르더니 데리고 나가라고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데리고 가서 내가 먹을 탕 좀 끓여와.”주훈이 멈칫하더니 물었다.“대표님, 무슨 탕 드시고 싶으세요?”탕을 먹고 싶으면 셰프에게 부탁하면 되지 간호사에게 부탁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난 저분이 끓인 탕만 마실 거야.”이준혁은 사실 탕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윤혜인을 옆에 남겨두고 싶은 것이었다.이준혁의 뜻을 바로 알아챈 주훈이 윤혜인을 데리고 탕을 끓이러 나갔다.윤혜인이 내키지 않아서 가버리려는데 주훈이 앞을 막았다. 아직 눈앞에 선 사람이 윤헤인인 줄 모르고 나지막한 소리로 부탁했다.“간호사님, 간호사님이 안 도와주시면 제가 난감해지니까 보내드리긴 힘들 것 같아요.”윤혜인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여기는 하나같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탕을 마시고 싶으면 원지민이 가져온 탕을 마시면 될 일인데 말이다.이제 갈 수 없게 된 윤혜인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주훈에게 물었다.“식자재는 다 있나요?
원지민은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애원했다.“나는... 그러기 싫어...”이준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아, 이 문제를 너랑 토론하려는 게 아니야.”원지민의 눈에 차오른 감정을 확인한 이준혁은 더는 역겨움을 숨기지 못하고 또박또박 말했다.“공지 내보내고 더는 이상한 소문 없었으면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원지민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더는 마음속의 그 감정을 숨길 데가 없었다.“준혁아...”원지민이 흥분하며 이준혁의 침대 앞에 반쯤 꿇은 채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나한테 이러면 안 돼. 그때 우리 집안에서 너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다 잊은 거야?”원지민이 처량한 모습으로 울먹이며 말했다.“준혁아, 설마 지금 토사구팽하려는 거야?”원지민이 기선제압을 위해 여론으로 그를 압박했다.이런 기사가 나기라도 하면 이준혁은 바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부두 비축 공사, 근교 중심에 있는 땅, 원더랜드, 클라우드 빌리지...”이준혁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원씨 집안에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가져갔는지 내가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해?”이준혁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원지민의 얼굴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그때 내가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원씨 가문이 정략결혼 한다는 소문, 아저씨랑 너, 그리고 우리 엄마랑 같이 토론해서 낸 아이디어지?”“처음부터 우리는 이익으로 뭉친 사이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력이었지. 근데 그거를 토사구팽이라고 한다고? 주훈한테 자료 한 장 더 만들어서 남청 원씨 가문이 어떻게 서울에서 자리 잡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줄까?”이준혁은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정도였다. 원씨 집안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되었는지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다 말해주었다.그 어떤 프로젝트를 꺼내보든 몇천억은 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토사구팽이라니 정말 우스울 따름이었다.도대체 누가 누구의 피를 빨아먹었는지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원지민은 유일하게
원지민의 말에 이준혁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이준혁도 3일을 더 못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원지민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면 제일 좋았다. 이준혁은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불화설이 도는 게 싫었다.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많았기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소식이 들리면 큰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그럼 휴식에 방해되지 않게 먼저 갈게.”원지민이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가방을 메고 병실을 나서려 했다.“잠깐만.”이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응?”원지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희망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이준혁이 침대맡에 놓인 도시락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가져가.”원지민의 표정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점점 삐져나오고 있었다.원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흐느꼈다.“준혁아, 너는 왜 항상 나한테만 그렇게 잔인해?”원지민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말했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분명 이준혁의 옆을 5년 동안 지킨 사람은 그녀였다. 옆에서 이준혁에게 힘껏 서포트하며 무조건 기여했다.하지만 결국 돌아온 대답은 도시락마저 가지고 나가라는 말뿐이었다.이 탕은 원지민이 꼬박 8시간을 공들여 푹 고아 온 것이었다.그런데 이준혁은 간호사가 만든 탕은 마시면서 그녀가 끓인 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원지민은 이게 다 죽다 살아난 그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은 과부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지민은 윤혜인이 예쁜 얼굴만 믿고 주제도 모르고 남자들만 꼬시고 다닌다고 생각했다.원지민은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은 그냥 그녀가 슬퍼한다는 것만 알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표정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는 건 보아내지 못했다.이준혁이 무표정으로 말했다.“사실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만약 네가 내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걸 내가 알았다면 내가 원씨 가문과 손잡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원지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 모든 게 다 원지민의 허황한 꿈이었다.기껏해야 비서 정도 되는 업무였지만 그녀는 이를 없어서는 안 되는 보살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점점 미쳐갔고 빠져 들어갔다.원지만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준혁에게 원지민은 특별했던 적이 없었다.이준혁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혹시나 윤혜인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더는 원지민과 입씨름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제 가.”원지민은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무언가가 짓밟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너무 슬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도시락을 꽉 움켜쥔 채 잽싸게 병실에서 달려 나와 이미지 관리는 포기한 채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 하마터면 탕을 들고 들어오는 윤혜인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윤혜인이 제때 피했지만 그래도 바닥에 조금 흘리게 되었고 덕분에 발까지 조금 데었다.원지민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윤혜인에게 화풀이했다.“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도망가려는데 윤혜인에게 잡히고 말았다.윤혜인은 원지민을 보고도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입을 열었다.“사과해요.”사람을 치고도 이렇게 당당하다니.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이준혁에게 푸대접을 받고 나온 것도 분한데 눈에 뵈는 게 없는 간호사가 지금 사과하라고 길을 막고 있다.원지민은 겉보기엔 온화했지만 성질을 부리면 말릴 자가 없었다.“당신이 뭔데요?”원지민이 이렇게 말하며 바로 손을 날렸다. 하지만 윤혜인에게 손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 무쇠 같은 팔로 원지민의 두 손을 단번에 낚아챘다.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그러다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원지민이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원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혁을 올려다봤다. 알지도 못하는 간호사를 위해 그녀를 이렇게 천대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런 원지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윤혜인의 빨개진 손가락을 보며 부드럽게
원지민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딘데요?”상대방이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금란 뒷골목이요.”원지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곳은 원지민도 들어본 적이 있다. 좋지 않은 골목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이준혁이 이 정도로 매정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때 이준혁의 첫사랑이었는데 말이다.상대가 물었다.“아가씨, 임세희 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 구할까요?”원지민이 웃으며 말했다.“구해요. 치료만 해주면 더는 상관할 필요 없어요.”“네, 아가씨.”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눈동자에 깃든 매섭고 음침한 기운이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그런 곳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딱히 원지민이 시키지 않아도 생각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나올 수도 있다....금란 뒷골목.규칙이란 통하지 않는 회색 지대.쓰레기통 옆에 까맣고 기다란 어떤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발이 그래도 하얘서 말이지 아니면 이게 사람이라는 걸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지저분했다. 여러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제일 기본인 속옷도 없어 보였다.임세희는 고열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의식도 흐릿한 상태였다. 최근 두 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암울하고 제일 긴 이틀이 될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끔찍한 이틀이었다.여기는 점잖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욕구를 충족시키러 온 짐승들이었다.이준혁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그녀를 금란 뒷골목에 던져 버렸을 뿐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임세희가 알아서 떠나면 된다.하지만 자체 제작 ‘음료수’를 마신 몸은 급히 해소할 구멍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처음에 만난 남자는 사실 임세희가 원해서 만난 것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공허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세희는 차에서 내리자
쾅!임세희는 남자에게 또 한 번 걷어차였다.“아악!”임세희가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행색이 지저분한 남자가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개처럼 달려들어서 마신 거잖아. 그래 놓고 나를 원망해?”그 남자가 일행에게 손짓하며 말했다.“너도 와서 물 좀 빼. 그래야 이 년이 실컷 마실 거 아니야.”일행이 얍삽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있지. 있지. 당연히 있지.”쪼르륵하는 물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이내 임세희의 때 묻은 얼굴을 씻어줬다.남자는 갑자기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헤헤 웃으며 말했다.“오? 이렇게 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임세희의 얼굴은 전에 수억을 들여서 관리를 받은 얼굴이었다.아무리 여기서 이틀간 수모를 당했다 해도 피부는 아직 탱글탱글 촉촉한 상태였다.남자는 음침한 눈빛으로 일행에게 말했다.“아직 물 덜 뺀 사람 있어? 거기도 씻어줘야지...”“물은 다 뺐는데...”일행이 손에든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임세희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임세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머리채를 단단히 잡히고 말았다.찰싹.남자가 사정없이 임세희의 싸대기를 후려쳤다.순간 볼이 얼얼해지면서 머리가 윙 했다.이내 두 손을 바꿔가며 수십 대를 더 때리고 나서야 남자들은 그만뒀다.그러더니 마치 짐짝을 내다 버리듯 임세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젠장, 더 지랄해 봐!”일행이 재촉했다.“할 거면 빨리 하자. 나 다른 애랑 약속 잡았단 말이야. 속전속결하자...”두 사람은 마치 말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임세희를 향해 다가갔다.“아아악!”뒷골목에 임세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남자는 그런 임세희가 성가셨는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임세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닥쳐! 빌어먹을 년! 여기까지 와서 원하는 게 이거 아니야? 청순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어!”“흑흑...”임세희의 처절하게 울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