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 물을 뜨러 가려는데 이준혁이 손목을 잡아당겼다.이준혁이 눈을 부릅뜨더니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이 간호사는 내 전용이야.”그 뜻인즉 원지민은 간호사에게 뭔가를 시킬 자격이 없다는 소리였다.잠깐 멈칫하던 원지민이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준혁아, 난 그냥 물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하지만 이준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따라서 마셔.”“나는...”원지민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힘들었지만 더는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한참 후 타협한 원지민이 입을 열었다.“됐어. 안 마실래.”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혜인은 원지민이 참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준혁은 그녀를 전혀 챙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윤혜인은 더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 이렇게 말했다.“저 먼저 나가볼게요.”이준혁은 윤혜인을 순순히 돌려보낼 리가 없었다. 그는 주훈을 부르더니 데리고 나가라고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데리고 가서 내가 먹을 탕 좀 끓여와.”주훈이 멈칫하더니 물었다.“대표님, 무슨 탕 드시고 싶으세요?”탕을 먹고 싶으면 셰프에게 부탁하면 되지 간호사에게 부탁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이준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난 저분이 끓인 탕만 마실 거야.”이준혁은 사실 탕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윤혜인을 옆에 남겨두고 싶은 것이었다.이준혁의 뜻을 바로 알아챈 주훈이 윤혜인을 데리고 탕을 끓이러 나갔다.윤혜인이 내키지 않아서 가버리려는데 주훈이 앞을 막았다. 아직 눈앞에 선 사람이 윤헤인인 줄 모르고 나지막한 소리로 부탁했다.“간호사님, 간호사님이 안 도와주시면 제가 난감해지니까 보내드리긴 힘들 것 같아요.”윤혜인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여기는 하나같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탕을 마시고 싶으면 원지민이 가져온 탕을 마시면 될 일인데 말이다.이제 갈 수 없게 된 윤혜인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주훈에게 물었다.“식자재는 다 있나요?
원지민은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애원했다.“나는... 그러기 싫어...”이준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아, 이 문제를 너랑 토론하려는 게 아니야.”원지민의 눈에 차오른 감정을 확인한 이준혁은 더는 역겨움을 숨기지 못하고 또박또박 말했다.“공지 내보내고 더는 이상한 소문 없었으면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원지민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더는 마음속의 그 감정을 숨길 데가 없었다.“준혁아...”원지민이 흥분하며 이준혁의 침대 앞에 반쯤 꿇은 채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나한테 이러면 안 돼. 그때 우리 집안에서 너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다 잊은 거야?”원지민이 처량한 모습으로 울먹이며 말했다.“준혁아, 설마 지금 토사구팽하려는 거야?”원지민이 기선제압을 위해 여론으로 그를 압박했다.이런 기사가 나기라도 하면 이준혁은 바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부두 비축 공사, 근교 중심에 있는 땅, 원더랜드, 클라우드 빌리지...”이준혁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원씨 집안에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가져갔는지 내가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해?”이준혁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원지민의 얼굴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그때 내가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원씨 가문이 정략결혼 한다는 소문, 아저씨랑 너, 그리고 우리 엄마랑 같이 토론해서 낸 아이디어지?”“처음부터 우리는 이익으로 뭉친 사이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력이었지. 근데 그거를 토사구팽이라고 한다고? 주훈한테 자료 한 장 더 만들어서 남청 원씨 가문이 어떻게 서울에서 자리 잡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줄까?”이준혁은 냉정하다 못해 잔인한 정도였다. 원씨 집안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되었는지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다 말해주었다.그 어떤 프로젝트를 꺼내보든 몇천억은 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토사구팽이라니 정말 우스울 따름이었다.도대체 누가 누구의 피를 빨아먹었는지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원지민은 유일하게
원지민의 말에 이준혁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이준혁도 3일을 더 못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원지민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면 제일 좋았다. 이준혁은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불화설이 도는 게 싫었다.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많았기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소식이 들리면 큰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그럼 휴식에 방해되지 않게 먼저 갈게.”원지민이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가방을 메고 병실을 나서려 했다.“잠깐만.”이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응?”원지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희망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이준혁이 침대맡에 놓인 도시락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가져가.”원지민의 표정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점점 삐져나오고 있었다.원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흐느꼈다.“준혁아, 너는 왜 항상 나한테만 그렇게 잔인해?”원지민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말했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분명 이준혁의 옆을 5년 동안 지킨 사람은 그녀였다. 옆에서 이준혁에게 힘껏 서포트하며 무조건 기여했다.하지만 결국 돌아온 대답은 도시락마저 가지고 나가라는 말뿐이었다.이 탕은 원지민이 꼬박 8시간을 공들여 푹 고아 온 것이었다.그런데 이준혁은 간호사가 만든 탕은 마시면서 그녀가 끓인 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원지민은 이게 다 죽다 살아난 그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다른 남자와 아이까지 낳은 과부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지민은 윤혜인이 예쁜 얼굴만 믿고 주제도 모르고 남자들만 꼬시고 다닌다고 생각했다.원지민은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은 그냥 그녀가 슬퍼한다는 것만 알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표정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는 건 보아내지 못했다.이준혁이 무표정으로 말했다.“사실 너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만약 네가 내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걸 내가 알았다면 내가 원씨 가문과 손잡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원지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더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이 모든 게 다 원지민의 허황한 꿈이었다.기껏해야 비서 정도 되는 업무였지만 그녀는 이를 없어서는 안 되는 보살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점점 미쳐갔고 빠져 들어갔다.원지만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준혁에게 원지민은 특별했던 적이 없었다.이준혁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혹시나 윤혜인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더는 원지민과 입씨름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제 가.”원지민은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무언가가 짓밟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너무 슬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도시락을 꽉 움켜쥔 채 잽싸게 병실에서 달려 나와 이미지 관리는 포기한 채 정신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다 하마터면 탕을 들고 들어오는 윤혜인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윤혜인이 제때 피했지만 그래도 바닥에 조금 흘리게 되었고 덕분에 발까지 조금 데었다.원지민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윤혜인에게 화풀이했다.“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도망가려는데 윤혜인에게 잡히고 말았다.윤혜인은 원지민을 보고도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입을 열었다.“사과해요.”사람을 치고도 이렇게 당당하다니. 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이준혁에게 푸대접을 받고 나온 것도 분한데 눈에 뵈는 게 없는 간호사가 지금 사과하라고 길을 막고 있다.원지민은 겉보기엔 온화했지만 성질을 부리면 말릴 자가 없었다.“당신이 뭔데요?”원지민이 이렇게 말하며 바로 손을 날렸다. 하지만 윤혜인에게 손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 무쇠 같은 팔로 원지민의 두 손을 단번에 낚아챘다.고개를 돌려보니 이준혁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그러다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원지민이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원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혁을 올려다봤다. 알지도 못하는 간호사를 위해 그녀를 이렇게 천대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런 원지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윤혜인의 빨개진 손가락을 보며 부드럽게
원지민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딘데요?”상대방이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금란 뒷골목이요.”원지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곳은 원지민도 들어본 적이 있다. 좋지 않은 골목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이준혁이 이 정도로 매정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한때 이준혁의 첫사랑이었는데 말이다.상대가 물었다.“아가씨, 임세희 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 구할까요?”원지민이 웃으며 말했다.“구해요. 치료만 해주면 더는 상관할 필요 없어요.”“네, 아가씨.”원지민이 전화를 끊더니 손톱이 살을 뚫고 들어갈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눈동자에 깃든 매섭고 음침한 기운이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그런 곳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딱히 원지민이 시키지 않아도 생각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나올 수도 있다....금란 뒷골목.규칙이란 통하지 않는 회색 지대.쓰레기통 옆에 까맣고 기다란 어떤 물체가 웅크리고 있었다.발이 그래도 하얘서 말이지 아니면 이게 사람이라는 걸 누구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지저분했다. 여러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제일 기본인 속옷도 없어 보였다.임세희는 고열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의식도 흐릿한 상태였다. 최근 두 날은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암울하고 제일 긴 이틀이 될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을 때보다 더 끔찍한 이틀이었다.여기는 점잖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욕구를 충족시키러 온 짐승들이었다.이준혁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그녀를 금란 뒷골목에 던져 버렸을 뿐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임세희가 알아서 떠나면 된다.하지만 자체 제작 ‘음료수’를 마신 몸은 급히 해소할 구멍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처음에 만난 남자는 사실 임세희가 원해서 만난 것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공허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임세희는 차에서 내리자
쾅!임세희는 남자에게 또 한 번 걷어차였다.“아악!”임세희가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행색이 지저분한 남자가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개처럼 달려들어서 마신 거잖아. 그래 놓고 나를 원망해?”그 남자가 일행에게 손짓하며 말했다.“너도 와서 물 좀 빼. 그래야 이 년이 실컷 마실 거 아니야.”일행이 얍삽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있지. 있지. 당연히 있지.”쪼르륵하는 물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이내 임세희의 때 묻은 얼굴을 씻어줬다.남자는 갑자기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헤헤 웃으며 말했다.“오? 이렇게 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임세희의 얼굴은 전에 수억을 들여서 관리를 받은 얼굴이었다.아무리 여기서 이틀간 수모를 당했다 해도 피부는 아직 탱글탱글 촉촉한 상태였다.남자는 음침한 눈빛으로 일행에게 말했다.“아직 물 덜 뺀 사람 있어? 거기도 씻어줘야지...”“물은 다 뺐는데...”일행이 손에든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임세희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임세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려 했지만 머리채를 단단히 잡히고 말았다.찰싹.남자가 사정없이 임세희의 싸대기를 후려쳤다.순간 볼이 얼얼해지면서 머리가 윙 했다.이내 두 손을 바꿔가며 수십 대를 더 때리고 나서야 남자들은 그만뒀다.그러더니 마치 짐짝을 내다 버리듯 임세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젠장, 더 지랄해 봐!”일행이 재촉했다.“할 거면 빨리 하자. 나 다른 애랑 약속 잡았단 말이야. 속전속결하자...”두 사람은 마치 말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임세희를 향해 다가갔다.“아아악!”뒷골목에 임세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남자는 그런 임세희가 성가셨는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임세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닥쳐! 빌어먹을 년! 여기까지 와서 원하는 게 이거 아니야? 청순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어!”“흑흑...”임세희의 처절하게 울
원지민은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병문안하러 온 문현미와 마주쳤다.원래 이준혁이 다친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원지민이 병원에서 주훈을 마주쳤고 주훈도 더는 둘러대기가 힘들어 양아치한테 당한 거라고 했다.원지민은 이 사실을 문현미에게 알려주었고 문현미는 이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문현미의 손에도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원지민을 본 문현미가 잽싸게 물었다.“지민아, 우리 준혁이 어때?”원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문현미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다독였다.“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준혁이 괜찮아요.”문현미가 손에 든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나도 준혁이 보러 왔어.”문현미는 원지민의 의견을 물어보고 있었다.5년 전 이준혁이 하마터면 강에 빠져서 죽을 뻔한 뒤로 문현미는 이준혁에 대한 걱정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이준혁과 같이 있는 시간 외에는 부처님께 불경을 드리면서 아들의 건장과 안전을 빌었다. 그러면서 성격도 점점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기 시작했다.몇 년간 문현미가 이렇게 불안해할 때마다 원지민이 옆에서 그녀를 위로해 주곤 했다.같이 경전을 옮겨적기도 하고 여러 스님을 만나러 가보기도 했다.문현미가 제일 믿는 사람이 원지민이었고 원지민의 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윤혜인이 죽고 문현미가 이준혁에게 내려놓으라고 타이르며 듣기 싫은 말을 하는 바람에 모자지간이 많이 멀어지고 말았다. 그럴수록 문현미는 원지민을 통해 아들을 관심하는 수밖에 없었다.원지민이 웃으며 도시락을 받더니 이렇게 말했다.“준혁이 이미 제가 가져온 도시락 먹었어요. 그래서 이 도시락은 못 먹을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파요. 이 도시락은 저 주세요.”문현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난감한 상황을 잘 풀어준 원지민에게 감격했다. 아니면 가져갔다가 이준혁이 먹지 않으면 상처받을 것 같았다.원지민이 덧붙였다.“아주머니, 내일은 도시락 가져다 저에게 주시면 돼요. 제가 준혁이한테
“미쳤어요?”아직 상처가 낫기 전이라 이렇게 막 움직이면 안 되는데 말이다.다행히 침대랑 가까워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을 침대에 내려줄 수 있었다.윤혜인은 가슴을 움켜쥔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준혁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윤혜인의 신발을 벗겼다.쪼그리는 자세는 아직 무리라 침대에 앉은 채 윤혜인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윤혜인은 그대로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잘못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화들짝 놀란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발길질을 날리려 했다.“이렇게 나오면 사람 부르는 수밖에 없...”“움직이지 마.”이준혁의 윤혜인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어...”윤혜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퉁퉁 부어올라 따갑기까지 하던 발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이에 억양이 살짝 올라갔다.이준혁은 어디서 얼음을 가져왔는지 윤혜인의 발에 올려놓고 살살 마사지했다.윤혜인의 발은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하얗고 보들보들한 게 달빛 아래 은은히 빛나는 백옥 같았다.발가락 부분이 탕에 데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이준혁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얼음찜질해 주었다. 이준혁에게 발을 잡힌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윤혜인은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화젯거리를 찾았다.“어떻게 알았어요?”“내가 그렇게 무심한 줄 알았어?”이준혁은 사실 아까부터 발견했다. 그래서 원지민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마침 병실에 연고와 얼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사지하던 이준혁은 연고를 발라주기 전 화풀이로 윤혜인의 발을 꾹 누르기까지 했다.“이렇게 심하게 뎄는데 아프다는 말도 안 하고. 아직 덜 아파봤어.”사실 윤혜인은 아까 양말을 신은 상태로 데었다. 하지만 발등의 살이 너무 연해 상처가 심각해 보일 뿐이었다. 이준혁이 얼음찜질을 해주고 나니 훨씬 편해졌다.하지만 이준혁이 누른 곳은 마침 제일 민감한 곳이었다. 윤혜인의
아줌마가 보낸 건 유진의 근황 사진이었다. 옷도 계절에 맞춰 입었고 얼굴도 발그스름한 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소원은 약간 게걸스럽게 사진 속 유진을 바라봤다. 전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때 유진을 보면 육경한이 떠올라 유진을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유진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육경한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감정이 섞여 있으니 소원은 정서가 안정적인 엄마가 될 수 없었다.심리상담 주치의는 소원에게 유진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소원이 테스트를 통과해 아이 앞에서 정서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소원은 그 말에 따랐다.떨어져 지낼 때면 소원은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매번 새로운 사진을 보내올 때마다 그 어떤 디테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보고 또 봤다.소원은 아줌마가 보내온 사진을 부드럽고 따듯한 표정으로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육경한이 아이를 잘 돌볼 수만 있다면 양육권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그저 이렇게 뒤에서 유진의 성장을 지켜보며 유진이 보고 싶다고 하면 가끔 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지금 이런 상태도 좋은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유진은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런지 소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에 소원은 유진이 새로운 가정을 더 좋아해 정서가 불안정한 엄마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닌지 걱정하며 마음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이제 멀리서 유진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만약 유진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별수 없이 손을 놔야 할 것이다.소원은 유진을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한 개체로 보며 유진을 존중하고 유진의 모든 생각을 존중했다. 사진을 조금 더 보고싶어 유진의 귀여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 의도치 않게 사진의 아랫부분이 확대되었다. 소원의 얼굴을 보고싶어 다시 위로 올리려던 소원이 눈을 무언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
엄마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유진의 얼굴도 부드러워지고 밝아졌다. 방민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사진을 찍더니 아이를 육씨 저택으로 보내주고는 시터가 아이를 씻기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육경한에게 답장했다.“경한 씨, 미안해요. 유진이랑 놀아주느라 핸드폰 확인을 못 했네요. 씻기고 침대에 눕히니 이제 조금 확인할 시간이 나네요. 내게 가정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방민아는 유진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을 육경한에게 보내주더니 시터에게 눈치를 주자 시터가 방민아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방민아는 CCTV가 없는 사각지대로 가서 이렇게 물었다.“그 아줌마 요 며칠 좀 어때요?”방민아가 물은 아줌마는 전에 소원이 유진을 보살펴달라고 위탁한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유진에게 진심이었기에 절대 유진을 해치지 않았고 돈으로 매수될 사람도 아니었다.하여 방민아는 그 아줌마가 먹는 식수와 음식에 다른 사람은 쉽게 발견하지 못할 미량의 독을 탔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쓰러진 것이었다. 그러다 더는 유진을 보살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방민아가 제일 좋은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도 여전히 무슨 질병인지 알지 못했고 그저 위장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했다.아줌마는 소원의 위탁을 받았는지라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진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옆에 꼭 붙어있으려 했다. 유진은 이제 아줌마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소원 못지않게 유진을 챙기고 보호했다.방민아는 아줌마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자 유진에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별장 뒤에 있는 창고에서 지내게 했고 사람과 의사를 보내 아줌마를 보살폈기에 다른 사람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소종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보고할 때면 늘 방민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시터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아마 다음 달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방민아의 눈빛이 살짝 빛나더니 웃으며
유진이 처음 왔을 땐 정말 말 그대로 고슴도치 같았고 평소 그를 보살펴주던 시터와 아줌마 외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모두를 쏘아봤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변화라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육경한의 눈동자가 깊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종은 최근 방민아가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유진을 보살피던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도지는 바람에 계속 휴가를 내고 쉬는 중이라 방민아가 매일 육씨 저택으로 가서 유진과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덕분에 유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육씨 저택은 유진이 올 때부터 데려온 아줌마 외에 전문적인 시터 두 명을 따로 들였기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칠 걱정도 없었다.“방민아 씨 아이를 꽤 잘 다루는 것 같아요. 가정 심리 주치의도 작은 도련님 진료를 보고는 진보가 크다며 매우 만족해하셨거든요.”소종의 말에 육경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방민아가 요 며칠 보낸 안부 문자를 확인했다. 많이 보낸 건 아니었고 하루에 한두 개 정도, 그것도 다 육경한의 몸을 걱정하는 문자지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유진의 사진도 틈틈이 보내왔다. 유진이 진흙을 가지고 노는 사진, 책을 보는 사진,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사진, 그리고 밥 먹는 사진까지... 진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긴 했다.육경한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장을 보냈다....한편, 차 안에 있는 유진은 얌전하고 부드럽던 아까와는 달리 방민아를 살짝 무서워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모, 나랑 약속했잖아요. 말도 잘하고 행동도 예쁘게 하면 엄마 보여주겠다고.”방민아도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표정으로 훈계했다.“조금 더 노력해야지. 아빠가 진짜 만족해야만 엄마 볼 수 있어.”유진은 금세 김이 빠졌다. 원래도 내향적인 성격이었기에 아까 그 연기가 살짝 버거웠지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했다.왜냐하면 방민아가 육경한을 아빠라고 부르고 아빠와 몇 마디 대화해 아빠를 기쁘게 해주면
육경한은 방민아의 유도가 유진의 반감을 살까 봐 입을 열려는데 유진이 한발 빨랐다.“몸은 좀 나아졌어요?”나지막한 목소리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유진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빠.”이 말에 병실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방금... 뭐라고?”육경한은 믿을 수가 없어 큰소리로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 최대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이 착하지... 다시 한번 말해봐.”육경한이 흥분하자 유진이 살짝 놀랐는지 머리를 방민아 뒤로 숨기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방민아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유진과 눈을 맞추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유진아, 우리 아까 한 말 다시 아빠한테 들려주는 게 어떨까?”유진이 방민아와 육경한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오므린 채 이렇게 말했다.“많이 좋아졌요? 아빠.”이 목소리는 전보다 컸고 전보다 뚜렷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상처가 찢어져 너무 아팠지만 육경한은 꾹 참으며 유진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유진아... 아빠 괜찮아.”육경한에겐 머리를 만져주는 게 그가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 어릴 때 육경한의 아버지가 육경한을 격려할 때도 머리를 쓰다듬어줬기에 육경한에겐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일종의 인정이자 칭찬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육경한은 자기 자신을 꼭꼭 싸맨 상태였고 괴물로 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원한에 사로잡힌 육경한은 가족 간의 사랑이나 윤리 도덕은 안중에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유진이 아빠라고 부르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소리는 그동안 육경한이 저지른 수많은 죄를 씻어내리는 천사의 목소리와 같아 육경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작게 기침했다.“민아 씨, 여기 아이가 있기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에요. 일단 유진이 데리고 돌아가요.”“그래요. 경한 씨. 몸조리 잘해요. 국 좀 가져왔는데 이따 챙겨 먹어요.”방민아가 테이블에 놓인
육경한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튿날이었다. 침대에 누운 육경한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아직 창백했고 입술 색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안으로 들어온 소종은 육경한이 문 쪽을 보며 멍때리는 걸 발견했다. 육경한이 멍때리는 건 아주 드문 장면이었기에 소종은 순간 그런 육경한이 마음이 아팠지만 육경한이 실망할까 봐 어색하게 부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어제 병원에 같이 왔다가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 갔어요. 많이 피곤해 보였는데 집에 가서 쉬는 게 맞을 것 같더라고요.”소종의 말은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흐릿한 게 맥이 없었다. 그래도 소종은 음울해 보이는 육경한이 걱정되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대표님, 소원 씨 그래도 많이 감사해하더라고요. 그때 그 산길에서도 목숨 걸고 대표님을 끌어올린 걸 보면...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됐어. 너 나가.”육경한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소원이 어떤 태도인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10번, 100번을 더 구해도 소원은 전혀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소원이 육경한에 대한 원한은 육경한을 깊숙한 지옥에 빠트려도 모자랄 정도의 그런 원한이었다.게다가 산길에서 만약 소원이 육경한을 알아봤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소원이 육경한을 해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살려야 하는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아마 망설였을 것이다.소원은 늘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육경한을 죽일 듯이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한 육경한을 나 몰라라 하지는 못했을 테고 육경한을 살리면 그런 자신이 밉겠지만 살리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에 어떤 선택을 하든 소원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육경한은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소원이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일로 엮일 때마다 서로 힘들어했지만 육경한은 소원을 아직 놓아주기
그렇다는 건 서현재가 더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으면 행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일단은 다시 계획을 짜보기로 다짐하고는 소종과 함께 차에 올랐다.차에는 함께 따라온 의사가 육경한에게 간단한 구급 조치를 하고 있었다.육경한은 의사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소종까지 그럴 수는 없었기에 가정 주치의를 불러 같이 왔다. 의사는 육경한의 상처를 처치해 주며 지혈했지만 빨갛게 물든 셔츠가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소종이 나지막한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소원을 노려봤다. 가는 길에 적어도 백번은 소원을 째려보더니 뭔가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하자 응급 의사가 허둥지둥 달려와 육경한을 데리고 들어가며 상처를 확인했다. 새로운 상처가 새로 난 상처와 겹쳐 너무 흉측해 의사가 놀란 나머지 신고할 뻔했지만 소종이 제때 해석하며 산에서 입원했던 증명과 사건 기사를 의사에게 보여준 덕분에 의사는 비로소 신고할 생각을 버리고 육경한을 응급실로 데려갔다.소종은 마음이 답답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른 의사에게 소원도 검사해달라고 했지만 소원이 거절했다.“나는 됐어요. 지금 바로 돌아가 봐야 해요.”소원이 말했다.“어딜 돌아간다는 거예요?”소종이 경계하며 말했다.“서씨 가문에 제 발로 죽으로 들어가려고요?”소종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젠장, 애초에 당신을 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대표님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당신이 다시 서진태에게 잡히면 정말 서진태 손에 죽을지도 몰라요.”소원이 그런 소종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하지만 내가 죽으러 가든 아니든 소종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소종은 도무지 소원이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그때 소원이 한마디 덧붙였다.“육경한 깨어나면 고마워하지는 않을 거라고 얘기해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전에 저지른 일들이 잊히는 것도 아니고 원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니니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라고요.
서진태는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소 비서, 소원 씨가 우리 집 액세서리를 훔친 건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이렇게 데려가면 안 되죠.”“어르신, 후과는 생각해 보셨어요?”소종은 육경한을 꽤 오래 따라다녔기에 표정을 굳히면 육경한의 모습이 살짝 보였고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진태는 살짝 겁이 났지만 소종은 하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만약 육경한의 비서가 아니면 이렇게 눈길을 줄 일도 없이 바로 혼내주고 내쫓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침착한 척했다.“어르신, 저는 일개 서민일 뿐이라 어르신이 무슨 꿍꿍이를 펼치려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 대표님은 아니에요. 우리 대표님 앞에서 그런 얕은수를 썼다고 생각해 보세요,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으세요?”소종이 차갑게 웃으며 말하자 서진태가 화들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육경한은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 누구보다 총명할뿐더러 수단도 좋았다.오늘은 소원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서진태는 얼른 기회를 잡았다.“소 비서, 오해에요. 우리가 소원 씨를 남긴 건 다 좋은 뜻이 있어서 그래요.”서진태가 억지로 웃자 얼굴에 잡힌 주름은 파리를 잡아도 될 만큼 깊었다.“그저 이 일을 확실하게 조사해서 소원 씨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거예요. 얼마나 큰일인데 소원 씨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할 수는 없잖아요.”짬밥은 무시하지 못한다고 서진태가 한 말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참 잘했다.소종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서진태가 뭔가를 꾸민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정확히 뭘 꾸미는지 몰라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건 기억하고 차갑게 웃었다.“어르신, 그 말은 대표님이 깨어나시면 직접 하세요.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 사람이 결혼했다 해도 하고 싶은 대로 막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직 우리 대표님을 몰라도 한참 모르네.”소종의 말에 서진태의 얼굴이 잿빛이 되더니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눈알이 뒤집힐 뻔했다. 비서
분풀이를 마친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눈이 멀어나. 감히 우리 대표님을 때려? 짐승 같은 것들, 내가 오늘 너희들 혼내주지 않으면 소종이 아니라 잡종이다.”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소종이었다.그때 소원의 옆으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보니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대표님.”소종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육경한을 부축했다. 육경한은 지금 꼴이 많이 처참했는데 하얀 셔츠는 피로 물들었고 전에 차 사고로 다친 상처가 지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덧난 데다가 소원 대신에 몽둥이까지 맞아 다 터지고 말았다.차 사고를 겪으면서 피를 많이 잃었는데 여기서 또 피를 흘리는 바람에 얇은 입술은 무서울 만큼 창백했고 극도로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육경한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몰라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보디가드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그대로 쓰러질 줄 알았는데 육경한이 갑자기 튀어나와 대신 막아준 것이다.소종이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소원 씨 때문에 또 이렇게 다쳤네요. 대표님은 정말 소원 씨와 엮어서 좋은 일이 없어요.”소종이 이렇게 말하더니 허리를 숙여 육경한을 업으려 했지만 정신을 잃은 육경한은 소종에게 잘 업히지도 못했다. 이에 소종이 소원을 힐끔 째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좀 도와주면 안 돼요? 대표님이 소원 씨를 몇 번이나 구했는데, 피도 눈물도 없어요?”소원이 멈칫하더니 허둥지둥 육경한을 소종의 등에 업혔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서진태가 소종의 등에 업힌 육경한을 보더니 놀란 듯 연기하며 말했다.“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어르신, 제 앞에서는 연기하지 않아도 돼요.”소종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소 비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통 못 알아듣겠는데.”서진태가 얼굴을 굳히자 위엄은 여전했다.“허허.”소종이 콧방귀를 뀌었다.“제 기억으로는 대표님이 절대 이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죠? 이 정도로 굵은 몽둥이를 가져왔다는
집사가 대답했다.“소원 씨는 지금 대기실에 갇혀 있습니다.”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톡톡히 손봐주고 던져버려.”서진태는 독벌레가 진귀하지만 않으면 존재 자체가 화근인 소원에게도 한 마리 넣어 뇌를 남김없이 모조리 잠식당하길 바랐다. 엮이면 재수 없는 여자라 이가 바득바득 갈렸지만 다행히 몸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번 기회에 쌍으로 지옥에나 보내버릴 생각이었다.상황이 종료되자 서진태가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대기실.소원은 여기 갇힌 후로 도무지 나갈 방법이 없었고 서현재가 한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영혼을 뺏긴 사람 같았고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고민하는데 대기실 문이 다시 열렸고 까무잡잡한 보디가드 두 명이 들어오더니 몽둥이를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원이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뭐 하긴 뭐해? 위쪽 지시를 받고 너 혼내주러 온 거지.”“이거 불법인 거 알아, 몰라.”소원이 매섭게 쏘아붙였다.몽둥이를 잡은 기세를 봐서는 소원을 때려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서진태는 보면 볼수록 음침하고 교활한 노인네였다.“우린 그냥 명령을 받고 결혼식에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을 혼내줬을 뿐이야.”보디가드가 한마디 덧붙였다.“결혼식에서 20억짜리 액세서리가 사라졌는데 그 범인이 너야. 지금은 잡힌 거고.”보디가드가 이렇게 말하며 액세서리 몇 개를 바닥에 던졌다.서진태는 소원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것 같았다. 소원은 바닥에 떨어진 액세서리를 보며 넋을 잃었다.“나 아니야. 나는 훔친 적 없어. 이건 모함이야.”보디가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말했다.“인증도 있고 물증도 있는데 네가 아니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보디가드는 그저 서진태가 시키는 대로 죄명을 소원에게 덮어씌우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앞으로 그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