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기간만 30년인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가정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다행히 벗어났어. 나쁜 습관은 없을 거야. 바람피우는 일도 없을 거고. 한평생 너만 바라보면서 살게. 만약 우리가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가정을 위한 삶을 살 거야.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지만 어떻게 좋은 아빠가 될지 열심히 공부해 볼게. 아이는 네가 갖고 싶지 않다면 안 가져도 돼. 아름이, 초롱이, 그리고 파랑이까지, 그 아이를 유일한 내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게.”초롱과 파랑은 윤혜인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지은 태명이었다.이름보다는 진지한 감이 좀 떨어질 수 있지만 윤혜인은 어릴 적 그녀를 길러준 외할머니가 간단한 이름일수록 더 키우기 쉽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시골에서 가끔 남자아이 태명을 똥강아지라고 짓고 여자아이 태명을 꼬물이라고 짓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낳아서 잘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다.윤혜인도 이번에는 미신을 믿기로 하고 아주 일반적인 태명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사하고 건강한 삶만 산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솔직히 배남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윤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평생 자기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윤혜인의 세 아이를 그의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겠다는 게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심은 아니었다.윤혜인은 전에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을 더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윤혜인은 소원을 떠올렸다. 사랑을 좇다가 날개가 꺾이고 나락으로 빠져 허우적댔지만 지금은 사랑에서 벗어나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세 아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키울 자신은 있었지만 아버지라는 역할이 빠지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성격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윤혜인이 고민하자 배남준이 말했다.“혜인아, 지금 당자아 대답할 필요 없어.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하잖아. 일단 눈앞에 놓인 관문부터 해결하고
그러면 혼자 좋아할 자격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오빠가 한 말은 고민해 볼게요.”윤혜인이 말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넋을 잃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윤혜인은 배남준에게 거부감이 없었다. 만약 가정을 다시 꾸린다면 배남준도 좋은 선택이긴 했다.그리고 윤혜인도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아이들을 정확히 인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함께라면 무슨 일을 하든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전에는 아이가 한 명뿐이라 이런 일은 고민하지 않아도 혼자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뱃속에 품은 아이까지 태어나면 고려해야 할 게 점점 늘어날 것이다.배남준은 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입에 발린 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낑낑대던 배남준이 겨우 고맙다는 말밖에 내뱉지 못했다.윤혜인은 그런 배남준의 반응이 재미있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고마워요. 남준 씨.”변화를 주고 싶다면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계속 배남준을 오빠라고 부르면 곽경천처럼 오빠로만 생각하지 좋은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배남준은 너무 기뻐서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하늘에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북안도는 다른 건 다 좋았지만 너무 추운 게 문제였다. 윤혜인은 매번 곰처럼 겹겹이 껴입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에 보들보들한 장갑을 끼워주고 나서야 윤혜인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오늘은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손을 잡지 않으면 부딪히기 십상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오늘 저녁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이준혁과 닮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익숙함이 전에 봤던 그림자보다 더 짙었다.어깨라인이 선명한 뒷모습에 윤혜인은 순간 그 사람이 이준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또 멍을 때리고 있자 윤혜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거실에 더없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남자는 체격이 잘빠졌고 얼굴도 여전히 준수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은하수를 통째로 담은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윤혜인은 넋을 잃었다. 착각이 순간 현실이 된 것이다.시선이 닿은 순간 윤혜인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여기는 왜 온 거지...’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달랐다.‘다리는 다 나았나... 지팡이를 짚지 않은 걸 봐서는 많이 좋아졌다는 건데. 아직 다 낫기도 전인데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윤혜인은 걸음을 멈추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윤혜인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준... 이준혁 씨.”윤혜인이 입을 열었다.잠깐 고민해 봤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 찾아와도 다시 그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게다가 이준혁은 아직 채 낫기 전이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기는 싫었다.윤혜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저번에 알아듣게 잘 얘기한 것 같은데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렇게 찾아온 건 볼일이 있어서야.”윤혜인은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무슨 그렇게 큰 일이 있다고 병이 채 낫지 않기도 전에 엄동설한인 북안도까지 달려온 건지 궁금했다.출산과 엄마 일로 이미 충분히 속이 뒤숭숭한 상태였기에 걱정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기는 싫었다.너무 많은 일이 쌓여 있어 숨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속으로는 자기 몸 하나 아낄 줄 모르는 남자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윤혜인은 자기가 왜 화났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먼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러는 거 정말 짜증 나는 거 알아요? 이런 짓 하고 혼자 감동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이제 그런 짓 좀 그만해요.”이 말에 이준혁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그렇게 한참 침묵하던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더니 그런 자신이 우습다는 것처럼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윤혜인은 이준혁이 아직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하여 이선 그룹에서 이 프로젝트를 중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유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염치를 불문하고 준혁 오빠랑 같이 왔다고...’윤혜인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준혁을 오해한 것 같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위해 온 것이었고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윤혜인은 그것도 모르고 이준혁이 그녀를 위해서 달려온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난감한 순간은 없을 것 같았다.이때 이신우도 안에서 나왔다. 윤혜인을 보자마자 먼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혜인 씨, 준혁이는 프로젝트 토론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곽경천 씨 상황을 전해 듣고 같이 보러 왔어요.”이신우가 소개하기 시작했다.“강씨 가문 아가씨는 기억하고 있죠?”전에 캠핑하러 갔을 때 정유미도 함께였고 윤혜인도 있었으니 더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출산에 가까워진 초조함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얻은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사리 판단에 어두워졌다는 것이었다.아까 이준혁이 분명 여러 번이나 그녀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자꾸만 자기와 연관 지었다.윤혜인은 얼굴이 너무 뜨거워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정유미는 눈치를 살필 줄 잘 몰랐기에 아직도 열정적으로 말했다.“언니, 설마 방해한 거 아니죠? 준혁 오빠가 데려오지 않겠다는 거 내가 꼭 따라가고 싶다고 한 거예요...”“아니에요. 오빠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갛던 데로부터 하얗게 변하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미안해요. 좀 피곤해서 올라가서 쉬어야겠어요.”윤혜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곽경천을 보러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당황한 정유미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오빠, 내가 혹시 실수한 거 아니에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준혁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너
곽경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정일이 다가오니 잠을 잘 자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일단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아이나 생각해.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뱃속에 있는 아이니까.”곽경천이 말했다.윤혜인은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곧 예정일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일이 지체되고 있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불모래에 대처할 방법도 아직 찾고 있고 원진우도 최근에 두문불출이래. 게다가 저택 경비까지 더 강화했고. 들어가려고 해도 억지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야.”“응, 알았어.”윤혜인이 말했다.곽경천이 위로했다.“이제 와서 하루 이틀 급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원진우가 갑자기 미쳐서 엄마한테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냥 원진우가 무슨 낌새를 눈치챈 것 같으니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더 파헤쳐봐야지.’곽경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원진우는 윤아름과 감정으로 얽혀 있는 관계인 것 같았다. 그러니 윤아름을 쉽게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사람이 약간 미친 건 확실했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진입했다가는 원진우가 안으로 들어간 사람과 같이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윤아름도 포함되어 있었다.곽경천이 자연스럽게 물었다.“어제 이준혁 씨 만났어?”윤혜인은 쪽팔렸던 어제가 다시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윤혜인이 부담을 느낄까 봐 그러는지 곽경천이 특별히 설명했다.“하나로 프로젝트 토론하려고 왔대.”“알아.”윤혜인이 말했다.“남준이가 그러더라. 어제 너한테 고백했다고.”곽경천이 어제 있었던 일을 꺼냈다.윤혜인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배남준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다고 생각했다.“너는 어떻게 생각해?”곽경천이 물었다.윤혜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곽경천이 질문을 바꿨다.“고민해 본다고 한 말 진심이야?”“나... 사실 나도 잘 모
“너에게 잘해주고 아이에게 잘해주는 건 우리 같은 가족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늘 해줄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고민할 때 이 두 개는 제쳐두고 하나만 생각해. 그건 바로...”곽경천이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가 네가 원하는 남자인지만 생각하라는 거지.”윤혜인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윤혜인은 기여형 인격이었다. 제일 먼저 자기가 제일 아끼는 사람부터 챙겼다. 그다음이 가족이고 마지막이 윤혜인 자신이었다.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는 일을 고민할 때도 순전히 좋은 아빠의 표준만 고려했고 윤혜인은 자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곽경천이 말했다.“혜인아, 나도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너랑 남준이처럼 지내는 건 아닌 것 같아. 남준이가 너에게 잘해주는 건 맞지만 거기에 보답할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윤혜인은 어릴 적 겪었던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자기 기분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다른 사람이 잘해주면 윤혜인도 곱절로 잘해줬다. 그러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이 만족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자기 마음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게 싫었다.“내 말은 네가 원하지 않는 거를 우리의 의견을 듣는답시고 선택하지 말라는 소리야. 너의 인생이니까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윤혜인은 곽경천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순간 곽경천이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정말 똥멍청이나 다름없었다. 윤혜인도 곽경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그저 좋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기보다는 그녀와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를 바랐다.윤혜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전에는 뭔가 이상한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세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준다는 기준만 생각하고 상대를 가늠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아. 잘 고민해 볼게.”곽경천은 동생이 다른
윤혜인의 약점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의 감정을 매우 신경 쓴다는 점이다.배남준이 이렇게 말하니 거절하고 싶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거절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아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말에 동의한 셈인 것이다.임신한 몸이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공원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었고 윤혜인은 아이스크림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배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북안도는 춥지만 추운 날씨가 오래 지속되면 마음이 답답해져서 아이스크림이 꽤 인기가 있다. 이제 윤혜인은 임신 말기에 접어들어서 음식을 달리 가리지 않고 있었다.배남준이 물었다.“먹고 싶어?”이 말에 윤혜인의 눈빛이 반짝였다.그 아이스크림은 서울의 아이스크림과 달리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소스가 얹어져 있었다.북안도의 바닐라 소스는 특별히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는 터라 이미 맛을 본 적이 있었다.임신한 후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8개월 넘게 윤혜인은 그 맛이 그리웠다.그러나 윤혜인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먹어도 돼요?”입으로는 먹어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눈빛은 초롱초롱한 게 배남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이 표정에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배남준은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의사 말로는 이제 뭐 딱히 가리지 않아도 된대. 조금만 먹으면 돼. 출산 후엔 또 못 먹을 테니까.”북안도에서는 산후조리를 하는 관습이 없었지만 윤혜인은 서울의 방식으로 몸을 관리해야 했다.“내가 가서 작은 사이즈로 사 올게. 소스는 조금만 달라고 할게.”배남준의 말 덕분에 윤혜인은 죄책감이 한결 덜어졌다.곧 배남준은 그녀를 옆에 있는 긴 벤치로 데려가 손수건을 꺼내 깔아주고 웃으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기다려.”아이스크림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다.혹시나 사람들이 윤혜인과 부딪힐까 염려하여 배남준은 그녀를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특권 남용을 선호하지 않았던 배남준은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지 않기 위해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입을 열었다. “그날은... 제가 잘 알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사과할게요.”“괜찮아.”이준혁은 이렇게 말을 하며 몸을 약간 움직여 햇빛 한 줄기를 내주었다.그제야 윤혜인은 그가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도 일하러 나온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양국 간의 협력이라 이준혁의 위치에서 직접 나서야 할 일이긴 했다.뒤쪽에 여러 명의 경호원과 북안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걸 보고 이 공원이 그가 지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윤혜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여자친구도 있는 만큼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아 거리를 두었다.그러나 이준혁은 떠날 생각 없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이곳 음식에 익숙해졌어?”“네, 괜찮아요.”짧게 대답하고 윤혜인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이준혁에게 말했다.“대표님, 뒤에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이준혁은 그녀가 자신을 떠밀고 있다는 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정유미 씨는...”“대표님...”곧 윤혜인이 단호하게 이준혁의 말을 끊었다.“대표님 일은 저와 상관없으니까 얘기하실 필요 없습니다.”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사실 윤혜인은 그것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현재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자신의 말을 듣기 싫어하자 이준혁은 약간 무안해졌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그러던 중 배남준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가왔고 윤혜인의 눈빛은 즉시 반짝였다. 이준혁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오래 기다렸던 아이스크림이 오자 윤혜인은 이준혁이 옆에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받으려 했다.그렇게 배남준이 아이스크림을 윤혜인에게 건네주려는데 다음 순간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이스크림이 손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쳐서 떨어뜨린 것이
“소원, 우리 혼인신고 했어.”육경한이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소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미친 거 아니야? 혼인신고를 했다고?’한참 후, 소종은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말 속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형님,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 여자가 형님을 해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두시겠다고요?”소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됐다.육경한의 머리를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서 뇌 CT라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그저 황당하고 답답할 뿐이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나마 소종은 평생을 함께하며 고난을 헤쳐온 동료였기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자체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형님...”소종은 어렵게 입을 뗐다.그가 육경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솔직한 진심을 말할 때뿐이었다.그 호칭은 그들이 한때 얼마나 험난한 늪에서 기어 나왔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이름이었다.지금의 안정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그런데 왜 굳이 육경한이 스스로 곁에 시한폭탄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그것도 머리맡에까지 두는지 소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만.”육경한이 그의 말을 끊었다.“이제부터 소원은 내 아내야. 미우 그룹의 모든 자원은 소원을 위해 조건 없이 제공될 거다. 그리고 누구든 내 아내를 괴롭히는 걸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소종은 말문이 막혔다.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차갑고 무정한 여자가 대체 뭐가 좋아서 대표님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이 한 말은 지켜야 했다.지켜야 하는 동시에 그의 안전도 보장해야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알겠습니다.”소종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육경한이 말했다.사무실에서 나간 뒤에도 소종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그는 바로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들을 닭 잡듯이 몰아
“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얼굴이 정말 밝아 보이네요.”“대표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아마 방민아 씨와 관련된 일이겠죠.”“방민아 씨랑 늘 사이가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꼭 방민아 씨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그럼 누구 때문인데요?”직원들이 소곤소곤 수군거리는 소리에 갑자기 낮고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다들 그렇게 한가해요?”직원들이 고개를 돌리자 소종이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소 비서님...”소종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일 안 하고 대표님 뒷얘기나 하다니. 다음번에 근무 시간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월간 개근 수당 전부 삭감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요.”직원들은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흩어졌지만 모퉁이를 돌아가면서도 계속 속삭였다.“소 비서님, 왜 이렇게 분노하신 거예요? 뭔가 이상한 냄새 나는데.”“대표님 기분은 좋아 보이던데 소 비서님은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죠?”“그만해요. 또 걸리면 진짜 큰일 나요. 빨리 일이나 하자고요...”소종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는 방금 홍보 부서에서 나온 직후였기 때문이다.30분 전, 육경한은 그에게 방씨 가문과의 결혼 취소에 대한 공식 발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 발표는 회사 안팎으로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단순히 대표의 개인사가 아니라 방씨 가문과 여전히 협력 관계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터진 폭탄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만약 방민아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추락할 수밖에 없겠지.’소종은 속으로 기도했다.‘제발 방민아가 입 다물고 조용히 넘어가 줬으면.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그러나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그는 방민아를 조금은 비웃고 있었다.‘사모님 자리를 꿰찰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패배하다니. 쓸모없네.’그렇게 소종은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육경한은 책상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프로젝트 제안서를 수정하고 있었
소원은 밤새 이어진 피곤함에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보니 침대에 남아 있어야 할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몸 아래 깔린 침대 시트도 전날의 짙은 색에서 은은한 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소원은 희미하게 기억났다.‘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던 건... 너무 젖어서 못 잘 지경이었으니까.’이런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남자의 지나친 무절제함에 화가 치밀었다.‘도대체 이 거래는 누구한테 유리한 거야? 완전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처럼 굴었잖아.’처음의 분위기조차 그저 식전 음식 같은 것에 불과했다니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소원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방 문이 살며시 두드려졌다.“사모님, 깨어나셨습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소원은 곧 대답했다.“네, 깼어요.”“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침묵했다.‘우리가 어제 얼마나 늦게까지 했는지 다들 아는 걸까...’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굳이 내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10분 뒤에 가져와 주세요.”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녀는 한쪽 다리가 휘청이며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속으로 육경한을 욕한 뒤 이를 악물며 욕실로 가 재빠르게 씻었다.방으로 올라온 아침 식사를 보니 준비된 음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정갈했다.죽, 깔끔한 반찬, 그리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보양식 위주의 메뉴였다.소원은 생각보다 배가 고팠는지라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그녀의 속이 가벼워진 건 단순히 음식을 먹어서만이 아니었다.유진이와 아주머니의 상황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음속 큰 짐이 내려간 덕이었다.‘아주머니는 그동안 유진이를 위해 거의 모든 걸 바치셨어. 내가 아주머니를 포기할 순 없어. 반드시 좋은 치료를 받게 해야 해.’그녀는 어제 전문가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아주머니의 몸 상태가 70% 정도는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특히 소원
게다가 남자는 온갖 수를 다 써서 소원을 자극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외쳤다.‘대체 이런 것들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그의 과감한 행동과 적재적소에서의 신경 자극은 소원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이건 육경한의 평소 이미지와 너무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아.’그는 그녀의 입술 대신 다른 곳에 입맞춤을 했다.그 덕분에 상황이 더 격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육경한은 손목을 고정하던 손을 천천히 놓고는 소원의 목을 지그시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다른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수건 아래로 들어갔다.소원이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는 소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에는 그녀가 불편하게 여기는 생생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라 눈을 질끈 감았다.‘이 모든 게 거짓이야. 단지 각자 필요한 걸 얻기 위해 몸을 거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소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지만 육경한은 결코 그녀에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행동했다.그는 그녀의 방어선과 수치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듯 무릎을 굽히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혼란 속에서 수건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소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유리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곧게 펴졌다.‘이 사람이 미쳤나? 어떻게 이런 일을...’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욕실 벽면의 반사된 모습을 향했고 흐릿한 증기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실루엣이 뚜렷하게 보였다.그는 마치 새로운 경험을 주는 듯 그녀의 모든 감각을 흔들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분노를 터뜨렸다.“육경한, 진짜 정신 나갔어?”하지만 그는 소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그리고 소원의 입술을 강하게 붙잡고 깊은
소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몸 앞의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그 행동에 육경한은 비웃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뭘 감추는 거야? 내가 못 본 데라도 있나?”그의 말투는 낮게 깔리면서도 약간 장난스러워 듣는 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수건을 꽉 붙들며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당신더러 들어오라 했어?”육경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섞어 말했다.“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그의 말이 얄밉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소원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나가줘. 옷 입어야 하니까.”그러자 육경한은 침대 위에 놓인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고는 대충 소원에게 던졌다.“그냥 이거 입어. 어차피 내가 못 본 것도 없잖아.”“...”더 이상 말다툼을 할 기운도 없었는지라 소원은 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욕실에서 옷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그가 던진 것은 옷이 아니라 얇고 거의 투명한 속옷 같은 옷이었다. 꼭 가릴 곳만 어렴풋이 가려진 도저히 입고 나갈 수 없는 옷이었다.과거에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이 인간이 정말...!’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은 소리쳤다.“육경한! 이게 뭐야!”그 순간, 욕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육경한이 문턱에 느긋하게 기댔다.“나 불렀어?”소원은 수건을 꼭 붙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부른 거 아니야, 나가!”육경한은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분명 내 이름을 불렀잖아?”소원은 그의 태도에 답답함과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그건 당신더러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야!”그러나 육경한의 깊은 눈빛이 소원을 강하게 응시하자 그녀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그와 결혼을 결정했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그렇다고 완전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선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