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더없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남자는 체격이 잘빠졌고 얼굴도 여전히 준수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은하수를 통째로 담은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윤혜인은 넋을 잃었다. 착각이 순간 현실이 된 것이다.시선이 닿은 순간 윤혜인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여기는 왜 온 거지...’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달랐다.‘다리는 다 나았나... 지팡이를 짚지 않은 걸 봐서는 많이 좋아졌다는 건데. 아직 다 낫기도 전인데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윤혜인은 걸음을 멈추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윤혜인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준... 이준혁 씨.”윤혜인이 입을 열었다.잠깐 고민해 봤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 찾아와도 다시 그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게다가 이준혁은 아직 채 낫기 전이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기는 싫었다.윤혜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저번에 알아듣게 잘 얘기한 것 같은데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렇게 찾아온 건 볼일이 있어서야.”윤혜인은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무슨 그렇게 큰 일이 있다고 병이 채 낫지 않기도 전에 엄동설한인 북안도까지 달려온 건지 궁금했다.출산과 엄마 일로 이미 충분히 속이 뒤숭숭한 상태였기에 걱정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기는 싫었다.너무 많은 일이 쌓여 있어 숨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속으로는 자기 몸 하나 아낄 줄 모르는 남자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윤혜인은 자기가 왜 화났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먼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러는 거 정말 짜증 나는 거 알아요? 이런 짓 하고 혼자 감동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이제 그런 짓 좀 그만해요.”이 말에 이준혁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그렇게 한참 침묵하던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더니 그런 자신이 우습다는 것처럼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윤혜인은 이준혁이 아직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하여 이선 그룹에서 이 프로젝트를 중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유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염치를 불문하고 준혁 오빠랑 같이 왔다고...’윤혜인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준혁을 오해한 것 같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위해 온 것이었고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윤혜인은 그것도 모르고 이준혁이 그녀를 위해서 달려온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난감한 순간은 없을 것 같았다.이때 이신우도 안에서 나왔다. 윤혜인을 보자마자 먼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혜인 씨, 준혁이는 프로젝트 토론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곽경천 씨 상황을 전해 듣고 같이 보러 왔어요.”이신우가 소개하기 시작했다.“강씨 가문 아가씨는 기억하고 있죠?”전에 캠핑하러 갔을 때 정유미도 함께였고 윤혜인도 있었으니 더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출산에 가까워진 초조함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얻은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사리 판단에 어두워졌다는 것이었다.아까 이준혁이 분명 여러 번이나 그녀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자꾸만 자기와 연관 지었다.윤혜인은 얼굴이 너무 뜨거워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정유미는 눈치를 살필 줄 잘 몰랐기에 아직도 열정적으로 말했다.“언니, 설마 방해한 거 아니죠? 준혁 오빠가 데려오지 않겠다는 거 내가 꼭 따라가고 싶다고 한 거예요...”“아니에요. 오빠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갛던 데로부터 하얗게 변하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미안해요. 좀 피곤해서 올라가서 쉬어야겠어요.”윤혜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곽경천을 보러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당황한 정유미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오빠, 내가 혹시 실수한 거 아니에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준혁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너
곽경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정일이 다가오니 잠을 잘 자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일단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아이나 생각해.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뱃속에 있는 아이니까.”곽경천이 말했다.윤혜인은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곧 예정일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일이 지체되고 있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불모래에 대처할 방법도 아직 찾고 있고 원진우도 최근에 두문불출이래. 게다가 저택 경비까지 더 강화했고. 들어가려고 해도 억지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야.”“응, 알았어.”윤혜인이 말했다.곽경천이 위로했다.“이제 와서 하루 이틀 급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원진우가 갑자기 미쳐서 엄마한테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냥 원진우가 무슨 낌새를 눈치챈 것 같으니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더 파헤쳐봐야지.’곽경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원진우는 윤아름과 감정으로 얽혀 있는 관계인 것 같았다. 그러니 윤아름을 쉽게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사람이 약간 미친 건 확실했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진입했다가는 원진우가 안으로 들어간 사람과 같이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윤아름도 포함되어 있었다.곽경천이 자연스럽게 물었다.“어제 이준혁 씨 만났어?”윤혜인은 쪽팔렸던 어제가 다시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윤혜인이 부담을 느낄까 봐 그러는지 곽경천이 특별히 설명했다.“하나로 프로젝트 토론하려고 왔대.”“알아.”윤혜인이 말했다.“남준이가 그러더라. 어제 너한테 고백했다고.”곽경천이 어제 있었던 일을 꺼냈다.윤혜인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배남준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다고 생각했다.“너는 어떻게 생각해?”곽경천이 물었다.윤혜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곽경천이 질문을 바꿨다.“고민해 본다고 한 말 진심이야?”“나... 사실 나도 잘 모
“너에게 잘해주고 아이에게 잘해주는 건 우리 같은 가족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늘 해줄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고민할 때 이 두 개는 제쳐두고 하나만 생각해. 그건 바로...”곽경천이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가 네가 원하는 남자인지만 생각하라는 거지.”윤혜인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윤혜인은 기여형 인격이었다. 제일 먼저 자기가 제일 아끼는 사람부터 챙겼다. 그다음이 가족이고 마지막이 윤혜인 자신이었다.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는 일을 고민할 때도 순전히 좋은 아빠의 표준만 고려했고 윤혜인은 자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곽경천이 말했다.“혜인아, 나도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너랑 남준이처럼 지내는 건 아닌 것 같아. 남준이가 너에게 잘해주는 건 맞지만 거기에 보답할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윤혜인은 어릴 적 겪었던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자기 기분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다른 사람이 잘해주면 윤혜인도 곱절로 잘해줬다. 그러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이 만족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자기 마음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게 싫었다.“내 말은 네가 원하지 않는 거를 우리의 의견을 듣는답시고 선택하지 말라는 소리야. 너의 인생이니까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윤혜인은 곽경천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순간 곽경천이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정말 똥멍청이나 다름없었다. 윤혜인도 곽경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그저 좋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기보다는 그녀와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를 바랐다.윤혜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전에는 뭔가 이상한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세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준다는 기준만 생각하고 상대를 가늠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아. 잘 고민해 볼게.”곽경천은 동생이 다른
윤혜인의 약점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의 감정을 매우 신경 쓴다는 점이다.배남준이 이렇게 말하니 거절하고 싶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거절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아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말에 동의한 셈인 것이다.임신한 몸이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공원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었고 윤혜인은 아이스크림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배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북안도는 춥지만 추운 날씨가 오래 지속되면 마음이 답답해져서 아이스크림이 꽤 인기가 있다. 이제 윤혜인은 임신 말기에 접어들어서 음식을 달리 가리지 않고 있었다.배남준이 물었다.“먹고 싶어?”이 말에 윤혜인의 눈빛이 반짝였다.그 아이스크림은 서울의 아이스크림과 달리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소스가 얹어져 있었다.북안도의 바닐라 소스는 특별히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는 터라 이미 맛을 본 적이 있었다.임신한 후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8개월 넘게 윤혜인은 그 맛이 그리웠다.그러나 윤혜인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먹어도 돼요?”입으로는 먹어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눈빛은 초롱초롱한 게 배남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이 표정에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배남준은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의사 말로는 이제 뭐 딱히 가리지 않아도 된대. 조금만 먹으면 돼. 출산 후엔 또 못 먹을 테니까.”북안도에서는 산후조리를 하는 관습이 없었지만 윤혜인은 서울의 방식으로 몸을 관리해야 했다.“내가 가서 작은 사이즈로 사 올게. 소스는 조금만 달라고 할게.”배남준의 말 덕분에 윤혜인은 죄책감이 한결 덜어졌다.곧 배남준은 그녀를 옆에 있는 긴 벤치로 데려가 손수건을 꺼내 깔아주고 웃으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기다려.”아이스크림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다.혹시나 사람들이 윤혜인과 부딪힐까 염려하여 배남준은 그녀를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특권 남용을 선호하지 않았던 배남준은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