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눈을 의심했다. 이준혁은 지금 국내에서 재활 중이라 여기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원래대로라면 재활 훈련을 한 달 동안 더 받아야 했다. 그래도 다 낳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달간 조심하면서 힘이 들어가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뭘 그렇게 봐?”배남준은 윤혜인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이렇게 물었다.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왜 다른 사람을 이준혁으로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요즘 엄마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를 떠올릴 새가 거의 없었다. 좋은 징조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누군가를 천천히 잊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 것이다. 아프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길을 거닐다가 비슷한 그림자를 보고 심장이 저릿해질 수는 있다.식당에 도착하니 윤혜인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배남준은 친절하게 손수건을 건네며 땀을 닦으라고 하더니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했다. 거의 해산물이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해산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북안도는 해산물 자원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임신한 관계로 혹시나 아이에게 영향 줄까 봐 늘 조금씩만 먹었다.하지만 오늘 주문한 해산물은 배남준이 다 계산해서 주문한 것이라 임산부도 적정량을 지켜서 먹으면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윤혜인은 배남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시름 놓고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껍질이 있는 해산물은 까기가 번거로웠다. 배남준이 윤혜인에게 새우 몇 개를 까주더니 다른 것들도 골라서 윤혜인에게 집어줬다. 이내 윤혜인의 앞접시는 먹기 좋게 까놓은 해산물로 가득했다.윤혜인은 약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오빠, 오빠도 먹어요. 난 이거면 됐어요.”배남준은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껍질을 까서는 윤혜인의 앞접시에 쌓아 올렸다.“오늘은 많이 먹어도 돼. 산후조리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먹는다.”윤혜인의 예정일은 아직 2주 정도 남아 있었다. 요즘 제일 큰 고민거리라면 바로 윤혜인이 예정일을 맞아 국내로 들어가는 게 걱정되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국내까지
솔로 기간만 30년인데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가정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다행히 벗어났어. 나쁜 습관은 없을 거야. 바람피우는 일도 없을 거고. 한평생 너만 바라보면서 살게. 만약 우리가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가정을 위한 삶을 살 거야. 아빠가 되는 게 처음이지만 어떻게 좋은 아빠가 될지 열심히 공부해 볼게. 아이는 네가 갖고 싶지 않다면 안 가져도 돼. 아름이, 초롱이, 그리고 파랑이까지, 그 아이를 유일한 내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게.”초롱과 파랑은 윤혜인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지은 태명이었다.이름보다는 진지한 감이 좀 떨어질 수 있지만 윤혜인은 어릴 적 그녀를 길러준 외할머니가 간단한 이름일수록 더 키우기 쉽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시골에서 가끔 남자아이 태명을 똥강아지라고 짓고 여자아이 태명을 꼬물이라고 짓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낳아서 잘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다.윤혜인도 이번에는 미신을 믿기로 하고 아주 일반적인 태명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사하고 건강한 삶만 산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솔직히 배남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윤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평생 자기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윤혜인의 세 아이를 그의 자식처럼 돌보면서 살겠다는 게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심은 아니었다.윤혜인은 전에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을 더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했다.윤혜인은 소원을 떠올렸다. 사랑을 좇다가 날개가 꺾이고 나락으로 빠져 허우적댔지만 지금은 사랑에서 벗어나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세 아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키울 자신은 있었지만 아버지라는 역할이 빠지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성격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윤혜인이 고민하자 배남준이 말했다.“혜인아, 지금 당자아 대답할 필요 없어.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하잖아. 일단 눈앞에 놓인 관문부터 해결하고
그러면 혼자 좋아할 자격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오빠가 한 말은 고민해 볼게요.”윤혜인이 말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넋을 잃은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윤혜인은 배남준에게 거부감이 없었다. 만약 가정을 다시 꾸린다면 배남준도 좋은 선택이긴 했다.그리고 윤혜인도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아이들을 정확히 인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과 함께라면 무슨 일을 하든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전에는 아이가 한 명뿐이라 이런 일은 고민하지 않아도 혼자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뱃속에 품은 아이까지 태어나면 고려해야 할 게 점점 늘어날 것이다.배남준은 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입에 발린 말에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낑낑대던 배남준이 겨우 고맙다는 말밖에 내뱉지 못했다.윤혜인은 그런 배남준의 반응이 재미있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고마워요. 남준 씨.”변화를 주고 싶다면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계속 배남준을 오빠라고 부르면 곽경천처럼 오빠로만 생각하지 좋은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배남준은 너무 기뻐서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하늘에서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북안도는 다른 건 다 좋았지만 너무 추운 게 문제였다. 윤혜인은 매번 곰처럼 겹겹이 껴입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에 보들보들한 장갑을 끼워주고 나서야 윤혜인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오늘은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손을 잡지 않으면 부딪히기 십상이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오늘 저녁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이준혁과 닮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익숙함이 전에 봤던 그림자보다 더 짙었다.어깨라인이 선명한 뒷모습에 윤혜인은 순간 그 사람이 이준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또 멍을 때리고 있자 윤혜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거실에 더없이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남자는 체격이 잘빠졌고 얼굴도 여전히 준수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은하수를 통째로 담은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윤혜인은 넋을 잃었다. 착각이 순간 현실이 된 것이다.시선이 닿은 순간 윤혜인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여기는 왜 온 거지...’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달랐다.‘다리는 다 나았나... 지팡이를 짚지 않은 걸 봐서는 많이 좋아졌다는 건데. 아직 다 낫기도 전인데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윤혜인은 걸음을 멈추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윤혜인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준... 이준혁 씨.”윤혜인이 입을 열었다.잠깐 고민해 봤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 찾아와도 다시 그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게다가 이준혁은 아직 채 낫기 전이었다.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기는 싫었다.윤혜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저번에 알아듣게 잘 얘기한 것 같은데요?”이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렇게 찾아온 건 볼일이 있어서야.”윤혜인은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무슨 그렇게 큰 일이 있다고 병이 채 낫지 않기도 전에 엄동설한인 북안도까지 달려온 건지 궁금했다.출산과 엄마 일로 이미 충분히 속이 뒤숭숭한 상태였기에 걱정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기는 싫었다.너무 많은 일이 쌓여 있어 숨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속으로는 자기 몸 하나 아낄 줄 모르는 남자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윤혜인은 자기가 왜 화났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먼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러는 거 정말 짜증 나는 거 알아요? 이런 짓 하고 혼자 감동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이제 그런 짓 좀 그만해요.”이 말에 이준혁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그렇게 한참 침묵하던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더니 그런 자신이 우습다는 것처럼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윤혜인은 이준혁이 아직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하여 이선 그룹에서 이 프로젝트를 중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유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염치를 불문하고 준혁 오빠랑 같이 왔다고...’윤혜인은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준혁을 오해한 것 같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위해 온 것이었고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윤혜인은 그것도 모르고 이준혁이 그녀를 위해서 달려온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난감한 순간은 없을 것 같았다.이때 이신우도 안에서 나왔다. 윤혜인을 보자마자 먼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혜인 씨, 준혁이는 프로젝트 토론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곽경천 씨 상황을 전해 듣고 같이 보러 왔어요.”이신우가 소개하기 시작했다.“강씨 가문 아가씨는 기억하고 있죠?”전에 캠핑하러 갔을 때 정유미도 함께였고 윤혜인도 있었으니 더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출산에 가까워진 초조함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얻은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사리 판단에 어두워졌다는 것이었다.아까 이준혁이 분명 여러 번이나 그녀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자꾸만 자기와 연관 지었다.윤혜인은 얼굴이 너무 뜨거워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정유미는 눈치를 살필 줄 잘 몰랐기에 아직도 열정적으로 말했다.“언니, 설마 방해한 거 아니죠? 준혁 오빠가 데려오지 않겠다는 거 내가 꼭 따라가고 싶다고 한 거예요...”“아니에요. 오빠 보러 와줘서 고마워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갛던 데로부터 하얗게 변하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미안해요. 좀 피곤해서 올라가서 쉬어야겠어요.”윤혜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하고는 곽경천을 보러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당황한 정유미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오빠, 내가 혹시 실수한 거 아니에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이준혁이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너
곽경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정일이 다가오니 잠을 잘 자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일단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아이나 생각해.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뱃속에 있는 아이니까.”곽경천이 말했다.윤혜인은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곧 예정일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일이 지체되고 있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불모래에 대처할 방법도 아직 찾고 있고 원진우도 최근에 두문불출이래. 게다가 저택 경비까지 더 강화했고. 들어가려고 해도 억지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야.”“응, 알았어.”윤혜인이 말했다.곽경천이 위로했다.“이제 와서 하루 이틀 급해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원진우가 갑자기 미쳐서 엄마한테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냥 원진우가 무슨 낌새를 눈치챈 것 같으니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더 파헤쳐봐야지.’곽경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원진우는 윤아름과 감정으로 얽혀 있는 관계인 것 같았다. 그러니 윤아름을 쉽게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하지만 사람이 약간 미친 건 확실했다. 계획 없이 무턱대고 진입했다가는 원진우가 안으로 들어간 사람과 같이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윤아름도 포함되어 있었다.곽경천이 자연스럽게 물었다.“어제 이준혁 씨 만났어?”윤혜인은 쪽팔렸던 어제가 다시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윤혜인이 부담을 느낄까 봐 그러는지 곽경천이 특별히 설명했다.“하나로 프로젝트 토론하려고 왔대.”“알아.”윤혜인이 말했다.“남준이가 그러더라. 어제 너한테 고백했다고.”곽경천이 어제 있었던 일을 꺼냈다.윤혜인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배남준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다고 생각했다.“너는 어떻게 생각해?”곽경천이 물었다.윤혜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곽경천이 질문을 바꿨다.“고민해 본다고 한 말 진심이야?”“나... 사실 나도 잘 모
“너에게 잘해주고 아이에게 잘해주는 건 우리 같은 가족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늘 해줄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고민할 때 이 두 개는 제쳐두고 하나만 생각해. 그건 바로...”곽경천이 말을 이어갔다.“그 남자가 네가 원하는 남자인지만 생각하라는 거지.”윤혜인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윤혜인은 기여형 인격이었다. 제일 먼저 자기가 제일 아끼는 사람부터 챙겼다. 그다음이 가족이고 마지막이 윤혜인 자신이었다.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주는 일을 고민할 때도 순전히 좋은 아빠의 표준만 고려했고 윤혜인은 자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곽경천이 말했다.“혜인아, 나도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너랑 남준이처럼 지내는 건 아닌 것 같아. 남준이가 너에게 잘해주는 건 맞지만 거기에 보답할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윤혜인은 어릴 적 겪었던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자기 기분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다른 사람이 잘해주면 윤혜인도 곱절로 잘해줬다. 그러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이 만족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자기 마음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게 싫었다.“내 말은 네가 원하지 않는 거를 우리의 의견을 듣는답시고 선택하지 말라는 소리야. 너의 인생이니까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윤혜인은 곽경천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순간 곽경천이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정말 똥멍청이나 다름없었다. 윤혜인도 곽경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곽경천은 윤혜인이 그저 좋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기보다는 그녀와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를 바랐다.윤혜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전에는 뭔가 이상한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세 아이에게 아빠를 찾아준다는 기준만 생각하고 상대를 가늠했기 때문이다.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아. 잘 고민해 볼게.”곽경천은 동생이 다른
윤혜인의 약점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의 감정을 매우 신경 쓴다는 점이다.배남준이 이렇게 말하니 거절하고 싶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거절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아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말에 동의한 셈인 것이다.임신한 몸이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공원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었고 윤혜인은 아이스크림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배남준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북안도는 춥지만 추운 날씨가 오래 지속되면 마음이 답답해져서 아이스크림이 꽤 인기가 있다. 이제 윤혜인은 임신 말기에 접어들어서 음식을 달리 가리지 않고 있었다.배남준이 물었다.“먹고 싶어?”이 말에 윤혜인의 눈빛이 반짝였다.그 아이스크림은 서울의 아이스크림과 달리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소스가 얹어져 있었다.북안도의 바닐라 소스는 특별히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는 터라 이미 맛을 본 적이 있었다.임신한 후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8개월 넘게 윤혜인은 그 맛이 그리웠다.그러나 윤혜인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먹어도 돼요?”입으로는 먹어도 되냐고 물으면서도 눈빛은 초롱초롱한 게 배남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이 표정에 흔들리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배남준은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했다.“의사 말로는 이제 뭐 딱히 가리지 않아도 된대. 조금만 먹으면 돼. 출산 후엔 또 못 먹을 테니까.”북안도에서는 산후조리를 하는 관습이 없었지만 윤혜인은 서울의 방식으로 몸을 관리해야 했다.“내가 가서 작은 사이즈로 사 올게. 소스는 조금만 달라고 할게.”배남준의 말 덕분에 윤혜인은 죄책감이 한결 덜어졌다.곧 배남준은 그녀를 옆에 있는 긴 벤치로 데려가 손수건을 꺼내 깔아주고 웃으며 말했다.“여기 앉아서 기다려.”아이스크림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다.혹시나 사람들이 윤혜인과 부딪힐까 염려하여 배남준은 그녀를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특권 남용을 선호하지 않았던 배남준은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