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불편해진 것이 그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까지 낮아지지는 않았다.오랜 시간 사업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황을 겪으며 병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도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람도 봐왔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다리 부상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뒤로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이신우도 이준혁의 고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잠시 생각을 하다 그는 입을 열었다.“내가 이미 비서한테 북안도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알아보라 했다. 최근 훈련 문제로 교통 통제가 실시돼서 소식은 기다려야 하지만 말이다.”그는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혜인 씨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가서 물어봐. 병원에 누워서 죽어가는 것처럼 있지 말고! 이게 우리 이씨 집안 남자의 태도냐?”이신우는 한 번에 말을 쏟아냈다. 그는 이준혁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정하는 건 빠르게 하고 통보만 할 뿐이었다.“최대 석 달까지는 너를 도울 수 있어. 석 달 후에 혜인 씨의 아이가 태어나면 너도 마음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 그동안 재활에 신경 쓰고 답을 찾든 아이의 출생을 지키든 네가 알아서 해. 어쨌든 석 달 후에는 나도 손 뗄 거야. 나도 내 일이 있으니까. 그때 가서 이선 그룹 대표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다 해도 나 찾지 말고!”그가 긴 이야기를 마치자 밖에서 비서가 들어와 회의 참석을 요청했다.그렇게 이신우는 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던졌다.“가끔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혜인 씨가 정말 결혼했다 해도 아이는 네 아이야.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넌 책임을 지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해.”이신우는 이준혁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았다.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말이다.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하진이라는 아이 하나만 키워왔지만 친자식이 아니었다.이신우도 아버지로서 부족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아버지란 역할은 마음에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어떤 방식으로
만약 그가 윤혜인을 찾고 싶었다면 막 깨어났을 때 비록 들것에 누워 있어야 했더라도 방법을 찾아 그녀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이준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이는 그 또한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다.윤혜인은 더 이상 이준혁과 얽히고 싶지 않아 자신의 삶을 선택했고 그는 그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총상을 입던 날 이준혁은 고열에 시달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윤혜인과 함께한 마지막 순간조차 흐릿하게 기억났다.다만 마지막에 그가 윤혜인을 대신해 총을 막아냈다는 것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윤혜인이 이준혁의 수술 당일에 떠난 것은 그녀의 결정을 간접적으로 알려준 셈이었다.김성훈과 이신우는 아마도 이준혁이 다리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져 윤혜인을 찾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사랑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나도 쉽게 이준혁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의 내면은 감정적으로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이준혁이 윤혜인을 찾지 않기로 한 것은 자신의 집착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보지 않고도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운 이준혁이 만약 윤혜인을 직접 마주한다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다음 날 점심 즈음에 남자 간호사가 다시 돌아와 이준혁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간호사는 나가면서 이준혁의 과일 접시에 놓인 전날 과일을 보고 그가 전날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그렇게 간호사는 양해를 구하고 그 과일을 청소 아줌마에게 건네주었다. 이 일은 이미 몇 날 며칠째 반복되는 일이었다.하루가 지난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이준혁은 원래 그저 그 과일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그리고 과일을 상해 버리기 전에 신선할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게 더 나았고 말이다.병실에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캐묻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 아니다.남자 간호사는 계속해서 아줌마에게 눈짓을 보내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런 적이 없다뇨?”하지만 아줌마는 남자 간호사의 눈짓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전에 아주 예쁜 아가씨가 있었어요. 얼굴이 하얗고 작고 눈이 크고 아주 온화했죠. 그 아가씨를 자주 봤어요.”아줌마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손자의 수술 때문에 휴가를 냈다가 오늘 처음으로 복귀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윤혜인이 떠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남자 간호사는 아줌마가 잘못 기억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아줌마께서 분명 잘못 기억하신 거예요. 그만하고 나가시죠.”그러나 아줌마는 고집스러웠다.“아니에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닙니다. 전 이분께 감사 인사를 할 겸 그 아가씨에게 돈을 돌려드리려고 온 거예요.”남자 간호사는 이준혁이 화낼까 봐 아줌마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이쯤 하시고 가시죠, 아줌마.”아줌마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평소에 남자 간호사가 자신과 손자를 잘 돌봐주었기에 그의 말을 잘 따랐다.곧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혁에게 말했다.“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빨리 회복하시길 바라요.”그렇게 남자 간호사가 아줌마와 함께 나가려 하자 이준혁이 그들을 불렀다.“잠깐만요.”그는 아줌마를 바라보며 물었다.“아줌마, 돈을 돌려준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아줌마는 이준혁이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랐다.그는 겉모습만 보아도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남자 간호사처럼 자신을 ‘아줌마’라고 불러주며 존댓말을 해주니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저한테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러자 이준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습니다. 아줌마,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전에 제가 근무하던 때였어요. 선생님께서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을 때였죠. 제가 이 구역을 청소하고 있었어요. 돈을 더 벌려고 그달에는 계속 야간 근무를 했거
이준혁은 그 카드를 받아든 채로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아줌마는 말했다.“선생님, 그 아가씨 참 착한 사람이에요. 제가 보기엔 정말 선생님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매번 여기서 나올 때면 눈이 항상 빨갛게 부어 있었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아가씨는 정말 선생님을 걱정하고 있던 거예요...”남자 간호사가 아줌마를 데리고 병실을 나간 후에도 이준혁은 그 카드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윤혜인이 그를 그렇게 많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바로 그때 주훈이 들어왔고 이준혁은 입을 열었다.“내가 혼수상태였던 한 달 동안의 복도 CCTV 영상을 모두 가져와.”주훈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비서로서 대표님의 안전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당연히 확실히 알아봐야 했다.“아니. 그냥 지금 당장 가져와.”“알겠습니다.”주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잠깐만.”그때 이준혁이 그를 불렀다.“가면서 남자 간호사한테 그 아줌마 집 사정 좀 알아봐달라고 해. 그 집 손자를 위해 필요한 지원도 좀 준비하고.”주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얼마 후 주훈은 복사한 USB를 들고 와 이준혁에게 건넸다.“대표님, 어떤 화면이 필요하신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까요?”이준혁이 컴퓨터 화면을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피곤해질까 걱정이 돼서였다.“아니. 내가 직접 볼 거야.”주훈이 나간 후 이준혁은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시간을 밤으로 돌리자 마침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윤혜인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그녀는 매일 오지는 않았지만 간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병실에서 항상 한 시간 이상 머물렀다.다른 화면을 통해 확인해보니 그녀는 병실에 들어가진 않았고 창문 앞에 서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그것이 윤혜인이 매일 오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렇게 오래 서 있으면 몸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그녀는 유리창 너머로 잔뜩 집중한 채 이준혁을
“전화했는데 받질 않아요.”이하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몰라요. 이제 출발할래요. 저 혜인 선생님 결혼식 놓치고 싶지 않다고요.”“그래. 이만 가봐. 도착하면 연락하고.”이신우는 전화를 끊었다.이하진은 입으로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이준혁을 기다렸다.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그는 화가 나서 승무원에게 말했다.“됐어요. 더 이상 안 기다릴게요. 문 닫으세요”.”기내 문이 닫히고 비행기가 이륙했다.한편, 먼 북안도의 개인 전용 착륙장에서 막 도착한 한 대의 한국의 개인 전용기가 있었다.기체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세련된 정장을 입고 연한 색 변색 렌즈의 선글라스를 쓴 한 잘생긴 남자가 내렸다.북안도의 날씨는 추웠고 남자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그의 비서는 남자에게 진한 남색 양모 코트를 걸쳐 주었다.이로 인해 키가 크고 날씬한 체격에 더해 고급스럽고 냉철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비행기에서 무릎을 굽히고 내려오는 그의 걸음이 약간 불편하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었다.손에 들고 있는 금색 장식이 있는 지팡이는 장식품인 줄 알았는데 사실 걸음을 돕기 위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공항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걸음이 불편하다니...’그러나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 만에 차 앞으로 걸어갔다.그를 위해 누군가 차 문을 열어주자 남자는 몸을 숙여 차에 탔다.자리에 앉자 앞 좌석에 있던 비서는 핸드폰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대표님,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있습니다.”이준혁은 전화를 받아 확인했다.부재중 통화 목록에서 가장 많은 것은 이하진의 전화였고 그 외에도 업무 관련 전화 몇 통이 있었다. 그리고 이신우가 보낸 문자 한 통이 있었다.[도착했니?][네. 도착했어요.]이신우는 역시 이준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반면 이하진은 아직도 이준혁이 오지 않은 줄 알고 비행기에서 투덜거리고 있을 것이다.
“신랑이 보고 깜짝 놀라실 거예요.”“감사합니다.”윤혜인이 인사했다.“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비서가 밖에 있던데 불러드릴게요.”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나가고 윤혜인은 거울 앞에 앉아 멍을 때렸다.‘드레스를 입으면 이런 모습이구나.’처음 이준혁과 결혼할 때 비밀 결혼이라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고 그저 등기하고 둘이 상반신 샷을 찍은 게 전부였다. 사진은 모두 8부가 나왔고 쓰고 남은 6장은 집에 가져가 고이 간직했다.그녀의 마음속에 그 사진은 마치 웨딩사진과 같은 의미였다. 좋아하는 남자와 웨딩사진을 찍는 게 로망이었지만 이혼할 때까지 그 로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이준혁과 재결합했지만 오해가 있었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없었기에 오해도 풀지 못하고 윤혜인에게 일이 터졌다. 두 번째도 여전히 아쉬움이 많은 엔딩이었다. 뒤에 원지민이 이준혁을 위해 드레스를 입었다. 결혼식은 가짜였지만 드레스는 진짜였고 그 옆에 선 남자도 진짜였다.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그리고 지금 윤혜인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옆에 선 남자는 이준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신성한 의미가 담긴 옷을 입을 때 옆에 선 사람이 다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늘은 진작에 두 사람의 만남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줬지만 윤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부딪혔다. 그렇게 얻은 교훈이라면 가끔은 무작정 앞으로 가는 것보다는 뒤로 물러서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대기실 문이 열렸다.거울에 비친 윤혜인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여은이 아니라 곽경천이었다.윤혜인을 본 순간 곽경천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윤혜인이 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너무 윤아름과 닮아 있었다.윤아름은 늘 곽경천을 따듯하게 감싸주고 이해해 줬다. 곽경천은 그때가 되어서야 엄마의 사랑이 이렇게 따듯할 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윤혜인은 곽경천이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점점 마음이 근질근질했다.“오빠, 혹시 이상해?”곽경천이 정신을 차리더
“괜찮아. 원래도 서로 원하는 게 있어서 하는 결혼인데. 남준은 배씨 가문 호적에서 나와 따로 호적을 파는 건데 그러려면 첫 번째 조건이 결혼하는 거잖아. 아니면 배씨 가문 수장이 절대 동의할 리 없어.”곽경천이 위로했다.“너도 남준이 성격 알잖아. 좋아하는 여자도 없는데 피해주기는 싫어서 이 기회를 잡은 거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잖아.”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남준 오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이 과거를 신경 쓴다면 내가 꼭 대신 설명해 줄 거야.”곽경천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윤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오빠, 우리 이번에 정말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곽경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말했다.“걱정하지 마. 꼭 찾을 수 있을 거야.”윤혜인이 배남준과 가짜 결혼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곽경천의 조사에 따르면 저번에 파티장에서 윤혜인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북안도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대는 찰스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몸에 찰스 가문의 휘장이 없었다.윤혜인은 귀국한 지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윤혜인을 쫓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쫓아와 여러 번의 암살을 시도했다.윤혜인이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곽경천이 여러모로 알아봤지만 찰스 가문과는 상관이 없다고 나왔다. 그리고 윤혜인은 이제 더는 그들의 추격 대상이 아니었다.누가 윤혜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건지 궁금했다.곽경천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배남준이 소식을 전해왔다. 곽경천이 전에 유의하라고 했던 한약재를 누군가 사 갔다고 말이다.상대는 아무 정보도 남기지 않았고 한약재를 사간 뒤로 서울에서 자취를 감춰 더는 찾을 수가 없었다.곽경천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다. 그 약재는 엄마가 떠나기 전 남겨준 약속이었다. 누구든 위험에 부딪히면 약방에서 ‘환혼’이라는 약재를 사서 살아있다는 걸 알리는 의미로 정하자고 했다.그런데 지금 누군가 그 약재를 사 갔다. 그것도 전에 약속했던 여섯 잎이었다.
한 번에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일이었고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기도 했다.곽경천도 배남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윤혜인의 안전도 보장하면서 윤아름의 행방도 찾을 수 있었다.곽경천은 이 방법을 윤혜인에게 알렸고 윤혜인도 동의했다. 윤혜인도 곽경천이 바쁜 와중에 그녀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싫었다.게다가 지금 윤아름의 소식도 있으니 곧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너무 잘된 일 같았다.일은 계획대로 잘 흘러갔다. 배남준은 아일란보 신부가 보는 앞에서 부부로 되었고 북안도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집안에 거짓말했다.배남준의 아버지 배영석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사실 배남준의 아버지도 아는 게 많은 아들과 친해지고 싶었다.가문이 계속 발전하려면 다방면으로 뛰어난 후계자가 필요했다. 배남준은 머리가 비상해 배씨 가문의 대부분 경영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하지만 배남준은 배영석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배영석은 여자가 많았고 배남준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아마 배영석은 배남준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배남준이 결혼한다는 말에 배영석도 돈을 아끼지는 않았고 첫 결혼을 아주 성대하게 치러주려 했다. 배씨 가문에 경사가 났다는 사실을 북안도 전체에 알리려는 것처럼 말이다.윤혜인이 원하는 것도 이것이었다. 결혼 소식이 널리 알려져야만 윤아름도 그들이 북안도로 왔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을 만나러 올 방법을 생각하거나 더욱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 할 것이다.하지만 배씨 가문이 안전한 건 윤혜인이 배남준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신분에 빈틈이 보이면 후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곽경천이 당부했다.“혜인아, 평소 밖에 있을 때는 그래도 부부인 척해야 해. 절대 들키면 안 돼. 예정일까지 배씨 가문 정원에만 있으면 안전할 거야.”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안전 조심해야 해.”윤혜인이 걱정스레 말했다.“걱정하지 마. 지금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