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시야에 누군가의 눈동자가 보였다.까만 눈동자가 은하수에 퐁당 빠진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깊고도 매혹적인 눈동자가 참 치명적이었다.예쁜 눈망울과 잘생긴 얼굴, 윤혜인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사람이었다.순간 윤혜인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혹시나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머나먼 타국에 있는 남자가 어떻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건지 의문이었다. 눈길이 닿자 윤혜인은 뭐라도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대치하면서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윤혜인은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꿈은 너무 현실 같았다. 눈앞에 버젓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정말 진짜와 다를 바 없었다.“당신이 왜 여기에...”있냐는 말을 입에서 꺼내기도 전에 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에 이끌려 창가로 갔다. 진실한 촉감에 윤혜인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준혁이 정말 결혼식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순간 윤혜인의 머리에 긴 코트가 씌워졌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를 번쩍 어깨에 둘러메더니 다시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머리가 코트가 씌워져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윤혜인은 허둥지둥 팔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읍... 이준혁 씨... 뭐... 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이 불안해하는데 이준혁이 윤혜인을 살포시 내려줬다. 등 뒤로 폭신한 매트가 느껴졌다.이준혁이 옷을 걷어내자 윤혜인이 눈을 떴다. 눈 깜짝할 새에 차로 옮겨져 있었다.이준혁은 팔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아까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긁힌 것 같았다.주변을 돌아보고 나서야 윤혜인은 아까 있던 그 대기실 창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객 주차장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앞에 잠겨 있는 작은 문으로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작은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아마도 이준혁이 연 것 같았다.윤혜인이 다급하게 말했다.“뭐 하려고 그래요?”이준혁이 짧고
자칫하면 북안도가 방위 수준이 떨어진다고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처지를 매우 걱정했다. 초대를 받지 않았으니 무단으로 침입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잡히면 매우 번거로워지게 된다.이준혁의 팔에 난 상처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던 윤혜인이 팔에 한 레이스를 풀어 건네며 물었다.“팔에 피나는데 처리 좀 할래요?”이준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윤혜인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관심한 바에 그냥 상처도 치료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냥 내가 처치해 줄게요. 처치 끝나면 돌아가요. 네?”윤혜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혁이 대꾸하지 않자 윤혜인은 그가 이 말에 동의했다고 생각해 그의 소매를 살살 걷었다. 그리고는 휴지를 한 장 빼서 팔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레이스를 감기 시작했다.차가 자리가 좁기도 했고 윤혜인의 드레스가 펑퍼짐했기에 드레스 옷깃이 이준혁 몸에 찰싹 붙어 있었다.윤혜인은 상처를 처치하는 데 집중했고 레이스를 감고 예쁘게 리본까지 묶어줬다.처치하고 나서야 이준혁의 팔뚝이 예전에 비하면 너무 말라 있다는 걸 발견했다. 도대체 몸조리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자꾸만 말라가는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윤혜인은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신부가 사라졌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기 전에 얼른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아무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이준혁이 잡고 있던 윤혜인의 손을 확 잡아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윤혜인은 심장이 벌렁거렸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준혁의 품속은 여전히 따듯하고 포근했다.코끝에 차가우면서도 향긋한 남자의 향기가 맴돌았다. 그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순간 윤혜인은 두 사람이 다시 제일 뜨거웠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때는 임세희도 원지민도 한구운도 없었고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윤혜인은 질질 끄는 걸 싫어했다. 결정했으면 흔들리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호수처럼 깊은 이준혁의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너무 슬퍼 보였다.그런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내 결혼식에 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북안도 상황이 좋지 못해서 결혼식에 초대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사실 윤혜인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신성한 결혼식 복장을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윤혜인은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 서 있는 걸 관중석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그 느낌도 별로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여 그 기분을 느끼지 않게 미연에 방지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이기적이라 생각해도 좋고 도망간다고 생각해도 좋지만 어쨌든 잘라낼 바에는 깨끗하게 자르는 게 좋다고 여겼다.“난 이만 돌아갈게요. 준혁 씨도 배씨 가문에 대해 잘 알잖아요. 위험한 일은 하지 마요.”이준혁은 윤혜인의 충고를 못 들은 척하더니 윤혜인의 발그스름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아니야. 혜인아. 넌 아직 날 속이고 있어...”윤혜인은 빠져들어 갈 것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정말 당장이라도 빠져들어 갈 것 같았지만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티 나지 않게 견뎌냈다.더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두 사람 다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윤혜인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준혁 씨. 내가 준혁 씨를 왜 속여요. 준혁 씨도 봤잖아요. 나 결혼하려는 거...”“진심이 아니잖아.”이준혁이 윤혜인의 턱을 살짝 들더니 말캉한 그녀의 입술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돌적으로 키스했다.“읍... 이준혁 씨...”이준혁은 윤혜인의 목소리까지 함께 삼켜버렸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꽉 잡더니 몸을 더 바짝 붙이고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더 깊게 공략했다.윤혜인은 본능적으로 손을
윤혜인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기력을 살짝 회복한 윤혜인은 바로 손을 내밀어 이준혁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준혁이 손을 덥석 잡았다.이준혁의 눈동자는 아까 나눈 키스로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아이까지 데리고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야?”아이라는 말에 키스로 살짝 흐트러졌던 정신이 순간 말짱해졌다.‘그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 남자가 다치면 안 되는데.’윤혜인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아이가 내 뱃속에 있으면 내 아이예요. 당신과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죠.”덤덤하던 이준혁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맛보았는데 순간 거리가 확 벌어진 느낌이 들었다.이준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또박또박 서늘하게 말했다.“나는 허락 못 해.”윤혜인이 차갑게 웃었다.“준혁 씨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내 결혼은 진짜예요.”이 말은 마치 이준혁이 올렸던 그 가짜 결혼식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그 일을 신경 쓰는 티가 많이 났다.이준혁이 그윽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 결혼은 가짜야. 왜인지 알아? 너는...”“이준혁 씨.”윤혜인이 이준혁의 말을 차갑게 잘라버렸다.“나를 위해서 그런다는 말로 나 사랑한다고 하지 마요. 나는 그런 사랑 필요 없어. 알아들어요?”이준혁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윤혜인은 멈추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그런 선택을 한 순간 우리 사이는 끝났어요.”“아니. 혜인아. 우린 아직 안 끝났어...”이준혁이 윤혜인의 손을 꼭 잡더니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이 빨개졌다.“아니야. 안 돼.”“이준혁 씨.”윤혜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나를 위해서, 나를 지키려고 세운 계획이었지만 내가 받은 상처도 다 진짜예요.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당신을 다시
윤혜인이 겪었던 고통을 이준혁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런저런 상황에 발이 묶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게 윤혜인에게 이렇게 큰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그러니 이준혁 씨가 동의하든 말든 나는 상관없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막지는 못할 거예요.”윤혜인은 이준혁에게서 시선을 떼고 억지로 제일 매정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차 문을 열고 드레스 자락을 든 채 차에서 내렸다.웨딩드레스에 피가 묻으면 좋지 않다는 걸 윤혜인도 알고 있었기에 가짜 결혼식이라 해도 절대 그대로 입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면 배남준의 체면을 구길뿐더러 배남준이 배영석에게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었다.윤혜인은 얼른 대기실로 돌아가 다른 사람이 발견하기 전에 비상용으로 남겨둔 드레스를 바꿔 입기로 했다.이준혁이 윤혜인의 뒤를 쫓으려고 차에서 내리다가 무릎을 다쳤다는 걸 잊고 털썩 바닥에 꿇어앉았다.바닥은 조약돌이 복잡하게 어질러 있었다. 채 낫지 않은 이준혁의 무릎이 조약돌과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단이 부셨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아픔이었다.이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방울만 한 땀이 이마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혜인아...”이준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피가 어린 절규였다.“내가 어떻게 해야 나를 용서할래?”“혜인아. 나는 너한테 뭐가 제일 좋은지 몰랐어.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제발 가르쳐줘. 나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고. 응?”“...”윤혜인은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부릅뜨고 깜빡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잘못 깜빡였다가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지금 고개를 돌리면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윤혜인은 전에 곽경천이 가끔 전해주는 말로 이준혁의 상황을 확인했다.곽경천은 이준혁 얘기를 꺼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지식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이 이준혁을 끊어내겠다고
전에도 단서가 잠깐 나타난 적이 있는데 베일에 싸인 그 사람이 또 윤아름을 데리고 사라졌다.베일에 싸인 그 사람은 누구보다 머리가 총명했다. 일단 사라지면 십몇 년간 아무 소식이 없었다.제일 중요한 건 북안도에 아직 윤혜인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결혼식이 가짜라는 걸 알면 바로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하여 이 시점에 절대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윤혜인도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오빠, 나도 알아... 난 그냥...”윤혜인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잘라내기로 했으면 더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윤혜인이 곽경천의 옷깃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상태 봐주고 데리고 나가줘.”“...”곽경천이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 먼저 대기실로 돌아가. 배남준도 너 찾고 있어. 다시 준비할 수 있게 내가 배남준에게 연락할게.”“응.”윤혜인은 드레스 자락을 들고 대기실로 향했다.여은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답례품 준비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러 간 틈을 노린 것이다.여은은 윤혜인을 바짝 따라붙었고 한 시도 곁을 내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곽경천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기에 몇 걸음 만에 조약돌 위에 꿇어있는 이준혁을 발견했다. 곽경천은 이준혁 앞에 멈춰서더니 이준혁이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었다.이번에 윤혜인이 위험해진 것도 이준혁 때문이었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이준혁도 아마 윤혜인이 호텔에 나타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하지만 그 뒤에 이준혁이 목숨 걸고 윤혜인을 구했기에 곽경천도 이준혁의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준혁을 용서한 건 아니었다.직접 겪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고충을 이해하기 어렵다.사랑하니까 밀어낼 수밖에 없다는 걸 곽경천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에 미쳤다 해도 자기 목숨까지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이준혁이 잘못하긴 했지만 생사가 갈리는 문제 앞에서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도
이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말했다.“형님, 저 상관 마세요.”“...”곽경천은 할 말을 잃었다. 혹시나 이준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매섭게 쏘아붙일 수밖에 없었다.“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혜인이를 사랑해서라면 혜인이 선택을 존중해줘야죠. 배남준과 결혼하든 아니면 이준혁 씨 당신과 결혼하든 이 선택에 우리가 관여한 적은 없어요. 다 혜인이 직접 선택한 거지. 나는 이준혁 씨가 혜인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고, 재결합하고 싶으면 재결합하고. 혜인이 생각은 해봤어요?”곽경천이 핸드폰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아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잘 봐요. 이준혁 씨가 깨어나고 혜인이를 그렇게 대할 동안 혜인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윤혜인의 심리 상담 결과지였다. HAMD 점수가 26에 육박한다는 건 심한 우울증에 가까운 수치였다.여은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못하는 윤혜인이 너무 걱정되었다.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몸이 망가져 뱃속의 아이에게 영향 줄까 봐 곽경천에게 윤혜인의 상황을 알렸다.곽경천이 윤혜인의 검사기록을 뒤져서야 윤혜인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윤혜인은 우울증에 걸린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걱정할까 봐 숨겼던 것이다.약을 먹을 수 없었기에 윤혜인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주의력을 분산시키며 최대한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게 했다.=다행히 너무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심리 상담과 윤헤인의 노력을 거쳐 수치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그런 모습에 곽경천도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싫어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함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엄마였기에 강해져야 했다.이준혁은 그 사진을 보며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한 순간에 윤혜인도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었다.곽경천은 이준혁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걸 보고 얘기가 잘 전달
오는 길에 도우미를 마주치자 여은은 외투를 벗어 윤혜인의 얼굴에 덮어줬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보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낼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여은도 이렇게 하는 게 눈 가리고 야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는 가릴 수가 없었기에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오늘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망가진 드레스와 조금의 핏자국, 신부가 결혼식에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으면 다른 사람은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람들이 소문에 한 숟가락씩 얹다 보면 버전은 수도 없이 많아질 것이다.두 사람의 결혼이 가짜라고는 하나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신부가 결혼식에서 체면을 잃는다면 배남준의 체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가짜긴 하지만 윤혜인은 죄책감이 들었고 미안했다.남자들은 대개 체면을 중시했다. 게다가 북안도처럼 남자가 우위인 사회라면 더더욱 그랬다.“오빠, 아까 오는 길에 도우미 두 명과 마주쳤어요. 미안해요. 처리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윤혜인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미안한 나머지 울먹이며 말했다.배남준은 이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윤혜인의 치마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어디 다쳤어?”윤혜인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흘린 피는 아니에요...”윤헤인은 배남준이 더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지만 그는 오히려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너만 무사하면 됐어.”“그 도우미는...”“도우미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잘 처리할게.”배남준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윤헤인은 배남준이 묻지 않아도 설명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협력의 전제는 믿음이다. 게다가 곽경천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꼭 제때 그와 배남준에게 알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오히려 더 큰 틈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오빠, 아까 나를 데려간 사람... 이준혁 씨에요...”윤혜인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