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말했다.“형님, 저 상관 마세요.”“...”곽경천은 할 말을 잃었다. 혹시나 이준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매섭게 쏘아붙일 수밖에 없었다.“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혜인이를 사랑해서라면 혜인이 선택을 존중해줘야죠. 배남준과 결혼하든 아니면 이준혁 씨 당신과 결혼하든 이 선택에 우리가 관여한 적은 없어요. 다 혜인이 직접 선택한 거지. 나는 이준혁 씨가 혜인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지고, 재결합하고 싶으면 재결합하고. 혜인이 생각은 해봤어요?”곽경천이 핸드폰에서 사진 한 장을 찾아내더니 이렇게 말했다.“잘 봐요. 이준혁 씨가 깨어나고 혜인이를 그렇게 대할 동안 혜인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윤혜인의 심리 상담 결과지였다. HAMD 점수가 26에 육박한다는 건 심한 우울증에 가까운 수치였다.여은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못하는 윤혜인이 너무 걱정되었다.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몸이 망가져 뱃속의 아이에게 영향 줄까 봐 곽경천에게 윤혜인의 상황을 알렸다.곽경천이 윤혜인의 검사기록을 뒤져서야 윤혜인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윤혜인은 우울증에 걸린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걱정할까 봐 숨겼던 것이다.약을 먹을 수 없었기에 윤혜인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주의력을 분산시키며 최대한 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게 했다.=다행히 너무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심리 상담과 윤헤인의 노력을 거쳐 수치를 정상으로 돌려놓았다.그런 모습에 곽경천도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싫어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함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엄마였기에 강해져야 했다.이준혁은 그 사진을 보며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한 순간에 윤혜인도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었다.곽경천은 이준혁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 걸 보고 얘기가 잘 전달
오는 길에 도우미를 마주치자 여은은 외투를 벗어 윤혜인의 얼굴에 덮어줬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보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낼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여은도 이렇게 하는 게 눈 가리고 야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는 가릴 수가 없었기에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오늘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망가진 드레스와 조금의 핏자국, 신부가 결혼식에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으면 다른 사람은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사람들이 소문에 한 숟가락씩 얹다 보면 버전은 수도 없이 많아질 것이다.두 사람의 결혼이 가짜라고는 하나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신부가 결혼식에서 체면을 잃는다면 배남준의 체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가짜긴 하지만 윤혜인은 죄책감이 들었고 미안했다.남자들은 대개 체면을 중시했다. 게다가 북안도처럼 남자가 우위인 사회라면 더더욱 그랬다.“오빠, 아까 오는 길에 도우미 두 명과 마주쳤어요. 미안해요. 처리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윤혜인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미안한 나머지 울먹이며 말했다.배남준은 이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윤혜인의 치마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어디 다쳤어?”윤혜인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흘린 피는 아니에요...”윤헤인은 배남준이 더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지만 그는 오히려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너만 무사하면 됐어.”“그 도우미는...”“도우미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잘 처리할게.”배남준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윤헤인은 배남준이 묻지 않아도 설명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협력의 전제는 믿음이다. 게다가 곽경천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꼭 제때 그와 배남준에게 알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오히려 더 큰 틈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오빠, 아까 나를 데려간 사람... 이준혁 씨에요...”윤혜인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배남준은 늘 그랬듯 따듯하고 이해심이 깊을뿐더러 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챙겨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남준 쪽 사람이 윤혜인이 입은 것과 똑같은 드레스를 들고 왔다.윤혜인이 깜짝 놀랐다.“오빠, 이거 어디서 난 거예요? 마술이라도 해요?”배남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돌발 상황에 대비해 모든 옷과 액세서리는 2개씩 준비했어.”윤헤인이 민망해하며 말했다.“오빠, 정말 너무 성가시게 구는 것 같네요.”배남준이 농담했다.“정말 고마우면 오늘 더 그럴듯하게 연기해줘.”“...”윤혜인이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정리하고 나오자 곽경천은 백스테이지에서 다시 한번 검사했다. 그렇게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윤혜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아일란보에서 혼인 등기를 마쳤기에 북안도에서 다시 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윤혜인이 임신한 관계로 복잡한 과정은 전부 생략했다.바로 나가서 한 바퀴 돌며 배씨 가문 수장 즉 배영석에게 술을 한 잔 따르고는 끝내기로 했다.게다가 진짜 결혼식도 아니었기에 곽경천은 윤혜인이 고생하는 게 싫었다. 가짜 결혼이라면 불필요한 의식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연회장에 도착해 곽경천은 윤혜인의 손을 배남준에게 건네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동생 잘 부탁해.”“당연하지.”배남준이 말했다.옆에서 보고 있는 윤혜인은 닭살이 돋을 것 같아 얼른 이렇게 중얼거렸다.“뭘 그렇게 정색하고 있어요. 나까지 슬슬 긴장되네.”윤혜인이 이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가자.”배남준이 윤혜인의 손을 꼭 잡고 하객들에게로 향했다.윤혜인이 주변을 빙 둘러봤다. 참석하러 온 사람이 많았지만 주요하게는 북안도 사람이었다. 가짜 결혼식이었기에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북안도 외의 사람은 초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신우는 전에 외국에서 배씨 가문과 협력한 적이 있었기에 그도 이 결혼식의 하객 명단에 있었다.윤혜인이 긴장하자 배남준
남자의 날카로운 두 눈은 차가웠고 위협적이었다.윤혜인은 심장이 벌렁댔고 남자의 매서운 눈빛에 점점 멘탈이 무너져 갔다.배남준이 제때 입을 열었다.“삼촌, 혜인이는 아저씨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추위를 타서 그래요. 한국의 날씨는 북안도보다 살기 좋잖아요. 아직 북안도의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아요.”“그래?”원진우는 배남준의 말을 믿지 않는 듯 의미심장하게 되묻더니 더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네. 혜인아. 인사해. 아빠의 친한 친구 원진우 삼촌이야.”배남준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바닥에 힘을 주고 윤혜인이 더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게 윤혜인을 꼭 잡아줬다.지나간 1분 동안 윤혜인은 배남준의 손바닥에 기대서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파르르 떨리는 몸은 웨딩드레스에 가려져 있어 배남준만이 알았다.‘무서워하고 있네...’배남준이 의문을 품었다.‘혜인이가 왜 삼촌을 무서워하는 거지? 전에 본 적도 없을 텐데?’윤혜인은 배남준의 뜻을 알아챘다. 누군가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조금은 가신 것 같았다.윤혜인이 정신을 가다듬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삼촌, 안녕하세요.”윤혜인 특유의 말캉한 목소리에 원진우의 마음도 살짝 약해졌다.‘그때 그 아이를 잃지 않았다면 아마 윤혜인과 같은 나이일 텐데. 누구를 닮았든 유전자라는 게 있으니 아주 예뻤을 거야.’“삼촌, 그러면 먼저 혜인이 데리고 쉬러 가볼게요.”배남준이 이 말을 남기고 몸을 돌리려 했다.잠깐 생각에 잠겼던 원진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윤혜인의 웨딩드레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모든 걸 꿰뚫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혜인 씨 임신했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몸조리 잘해요. 감기 걸리면 아이한테 안 좋으니까.”이 말에 윤혜인이 다시 한번 속으로 크게 놀랐다.윤혜인은 아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원진우의 표정이 위험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였다.배남준은 티 나지 않게 윤혜인을 뒤로 감추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연하죠. 제가 혜인이 잘 챙길 거예요.”원진우가 웃음
그런 짙은 익숙함은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원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 이렇게 감정을 내비친 건 드물었다.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니 참새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더라는 말이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는 딱이었다. 슈트로 갈아입은 이준혁은 까만 지팡이를 짚은 채 연회장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석에 서서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시야에 윤혜인과 배남준이 손을 잡고 웃으며 하객들과 술을 마시는 게 보였다.윤혜인은 전에 그에게 기댔던 것처럼 배남준에게 기대 있었다.이준혁은 배남준과 배씨 가문이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배남준이 점점 부러워지기 시작했다.윤혜인이 가자 이준혁이 시선을 거두려는데 앞에 레드 벨벳 슈트를 입은 원진우가 보였다. 원진우가 윤혜인과 이하진을 보며 넋을 잃은 것이다.이준혁은 원진우를 잘 몰랐다. 원씨 가문 사람이긴 했지만 남청 원씨 가문과는 관계가 그렇게 두텁지 않았다.하지만 원지민의 셋째 삼촌이라는 게 떠올라 이준혁의 시선이 원진우에게 멈췄다.윤혜인은 이하진과 잠깐 얘기를 나눴다. 이하진은 윤혜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자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우며 윤혜인에게 쉬라고 말했다.윤혜인은 컨디션만 좋았다면 이하진을 조금 더 남겼을 것이다.이하진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선생님 먼저 쉬세요. 여기 며칠 더 있을 생각이에요. 형부가 지낼 곳도 마련해줘서 선생님 좀 나아지면 그때 밖에서 만나는 걸로 해요.”이하진은 비록 윤혜인을 아직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배남준은 형부라고 불렀다.배남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부담 없이 지내요.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하고.”“다행이다. 좀 좋아지면 바로 연락할게.”윤혜인이 말했다.이하진이 가고 방에 두 사람만 남자 윤혜인도 더는 덤덤한 척하지 않았다. 손이 조금 차가워진 것 같았다.“혜인아, 아까는 무슨 일이야?”배남준이 걱정스레 물었다.“그게...”윤혜인은 손을 파르르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배남준이 담요 하나를 가져다 윤혜인에게 덮어주며 부드럽
곽경천은 윤혜인이 잘 쉬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윤혜인의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너의 임무는 뱃속의 아이를 잘 보살피는 거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면 돼.”“답례품은 다 나눠줬나요?”윤혜인이 물었다.“다 나눠줬어. 혜인아, 걱정하지 마. 곧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야.”여은이 윤혜인을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곽경천은 윤혜인의 말이 신경 쓰여 현장 CCTV를 찾아오라고 시켰다. 각도 문제로 남자의 표정이 잘 찍히지는 않았지만 원진우가 떠나가는 윤혜인을 유심히 지켜보는 건 찍혀 있었다.곽경천은 생각에 잠겼다.원진우는 이제 더는 원씨 가문과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원지민의 셋째 삼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원지민 편일 수밖에 없다.원지민이 죽은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고 법의관이 내린 감정 결과를 보면 원지민의 치명상은 에단 차얼스에게 입을 베이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피가 기도로 역류해 들어가 사망한 것으로 나왔다.하지만 원지민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검사 측은 원지민의 거처에서 원지민이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를 일부 찾아냈지만 원지민이 죽는 바람에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하지만 저지른 일은 그대로 넘어갈 수 없으니 무조건 사건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검사 기록에 검사 측은 윤혜인과 이준혁의 신분을 기밀 처리하는 것으로 두 사람을 보호해 줬다.중요한 사건 자료를 입수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에단 차얼스를 죽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절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니 원진우도 원지민이 죽을 때 윤혜인이 현장에 있었다는 걸 모를 것이다. 하지만 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원진우도 중점 마킹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호텔.이준혁은 컴퓨터 앞에 앉아 갓 받은 원진우의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원진우는 경계심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외부로 유출된 정보가 별로 없었다.자료에는 그가 계속 외국에서 장사를 했다고 나와 있었다. 인맥이 넓어 귀족과 황실에도 손이 닿아 있었다.이런 관계를
원진우가 사업을 이렇게 크게 키우고 두 대가문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의 비범함은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데 있다.이준혁은 한참 동안 문서를 뒤적이다가 마침내 한 가지 사항에 주목했다.그것은 원진우가 여러 나라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사실 부유한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 부동산을 투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의아한 점은 그가 소유한 부동산들이 모두 인적이 드문 외딴 지역에 있다는 것이었다.주변 백 리 안에 집 한 채조차 없는 곳에 대저택을 세워두고 마치 성처럼 개조해놓은 것이다.사업가의 눈으로 보자면 이 지역의 부동산은 투자 가치가 전혀 없었다.위치가 너무 외진 데다가 보통 부자들이 선호하는 경치 좋은 동쪽 교외나 산기슭의 부동산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이런 곳의 부동산은 절반의 투자금도 회수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이 없었다.그러나 원진우는 떠난 뒤에도 그 부동산을 처분하지 않고 집사와 최정예 경호원을 고용해 빈집을 지키게 하고 있었다.이준혁은 화면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도대체 어떤 빈집이 이런 가치가 있는 걸까?’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이 집들에 대해 조사해봐.”...교외, 원씨 가문.진우희가 대저택의 문을 두드렸다.오늘은 원래 진료일이 아니었지만 윤아름이 갑자기 두통을 호소했고 원진우도 자리에 없었기에 집사는 부랴부랴 진우희에게 연락을 취했다.원진우가 왜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집사는 윤아름의 상태를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진우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진우희는 예전처럼 집사의 안내를 받아 지하실로 향했다.지하실은 위층과 달리 홍채 인식과 비밀번호 입력이라는 이중 보안 장치를 통해서만 열 수 있는 비밀 문으로 차단되어 있었다.그때, 저택의 전화가 울렸다.집사는 원진우가 건 전화일지 모른다며 진우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전화를 받으러 갔
윤아름은 침대에 누워 기운이 없어 보였고 그 모습이 매우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진우희는 손에 들고 있던 의료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윤아름의 긴장을 풀어주는 마사지를 시작했다.“우희 씨, 요즘 밖에 새로운 소식 있나요?”윤아름은 매번 외부 소식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고 진우희가 올 때마다 외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진우희는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사모님, 요즘 배씨 가문에서 새 며느리를 들였대요. 한국 분이라던데 서울에서 온 아가씨라고 해요. 사람들이 엄청 예쁘다고들 하더라고요.”진우희는 윤아름도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나이가 마흔을 넘었음에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피부는 여전히 희고 고와서 소녀 같은 느낌을 줬으니 말이다.외국인들이 빨리 늙는다는 말이 그녀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그녀의 나이를 많아야 서른 초반으로 볼 정도였다.“사모님, 혹시 서울에서 온 아가씨들이 다 이렇게 예쁜 건가요? 사모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러자 기운 없던 윤아름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한 손으로 진우희의 팔을 붙잡으며 격하게 물었다.“이름이 뭐라고 했죠?”진우희는 순간 당황했지만 윤아름은 자신의 행동을 잊은 듯 다시 한번 재촉했다.“우희 씨, 그 새 며느리 말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아세요?”곧 진우희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죄송해요.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윤아름이 아직 포기하지 않고 더 물어보려던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는 다시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척했다.들어온 사람은 급하게 돌아온 원진우였다.그는 윤아름에게 진료 중인 진우희를 보고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조용히 지켜봤다.그러나 진우희는 긴장으로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 누구든 원진우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윤아름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