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했는데 받질 않아요.”이하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몰라요. 이제 출발할래요. 저 혜인 선생님 결혼식 놓치고 싶지 않다고요.”“그래. 이만 가봐. 도착하면 연락하고.”이신우는 전화를 끊었다.이하진은 입으로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이준혁을 기다렸다.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그는 화가 나서 승무원에게 말했다.“됐어요. 더 이상 안 기다릴게요. 문 닫으세요”.”기내 문이 닫히고 비행기가 이륙했다.한편, 먼 북안도의 개인 전용 착륙장에서 막 도착한 한 대의 한국의 개인 전용기가 있었다.기체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세련된 정장을 입고 연한 색 변색 렌즈의 선글라스를 쓴 한 잘생긴 남자가 내렸다.북안도의 날씨는 추웠고 남자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그의 비서는 남자에게 진한 남색 양모 코트를 걸쳐 주었다.이로 인해 키가 크고 날씬한 체격에 더해 고급스럽고 냉철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비행기에서 무릎을 굽히고 내려오는 그의 걸음이 약간 불편하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었다.손에 들고 있는 금색 장식이 있는 지팡이는 장식품인 줄 알았는데 사실 걸음을 돕기 위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공항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걸음이 불편하다니...’그러나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지팡이를 짚고 몇 걸음 만에 차 앞으로 걸어갔다.그를 위해 누군가 차 문을 열어주자 남자는 몸을 숙여 차에 탔다.자리에 앉자 앞 좌석에 있던 비서는 핸드폰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대표님,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있습니다.”이준혁은 전화를 받아 확인했다.부재중 통화 목록에서 가장 많은 것은 이하진의 전화였고 그 외에도 업무 관련 전화 몇 통이 있었다. 그리고 이신우가 보낸 문자 한 통이 있었다.[도착했니?][네. 도착했어요.]이신우는 역시 이준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반면 이하진은 아직도 이준혁이 오지 않은 줄 알고 비행기에서 투덜거리고 있을 것이다.
“신랑이 보고 깜짝 놀라실 거예요.”“감사합니다.”윤혜인이 인사했다.“여기 잠깐만 앉아 있어요. 비서가 밖에 있던데 불러드릴게요.”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나가고 윤혜인은 거울 앞에 앉아 멍을 때렸다.‘드레스를 입으면 이런 모습이구나.’처음 이준혁과 결혼할 때 비밀 결혼이라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고 그저 등기하고 둘이 상반신 샷을 찍은 게 전부였다. 사진은 모두 8부가 나왔고 쓰고 남은 6장은 집에 가져가 고이 간직했다.그녀의 마음속에 그 사진은 마치 웨딩사진과 같은 의미였다. 좋아하는 남자와 웨딩사진을 찍는 게 로망이었지만 이혼할 때까지 그 로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러다 이준혁과 재결합했지만 오해가 있었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없었기에 오해도 풀지 못하고 윤혜인에게 일이 터졌다. 두 번째도 여전히 아쉬움이 많은 엔딩이었다. 뒤에 원지민이 이준혁을 위해 드레스를 입었다. 결혼식은 가짜였지만 드레스는 진짜였고 그 옆에 선 남자도 진짜였다.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그리고 지금 윤혜인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옆에 선 남자는 이준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신성한 의미가 담긴 옷을 입을 때 옆에 선 사람이 다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늘은 진작에 두 사람의 만남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줬지만 윤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부딪혔다. 그렇게 얻은 교훈이라면 가끔은 무작정 앞으로 가는 것보다는 뒤로 물러서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대기실 문이 열렸다.거울에 비친 윤혜인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여은이 아니라 곽경천이었다.윤혜인을 본 순간 곽경천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윤혜인이 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너무 윤아름과 닮아 있었다.윤아름은 늘 곽경천을 따듯하게 감싸주고 이해해 줬다. 곽경천은 그때가 되어서야 엄마의 사랑이 이렇게 따듯할 수가 있다는 걸 알았다.윤혜인은 곽경천이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점점 마음이 근질근질했다.“오빠, 혹시 이상해?”곽경천이 정신을 차리더
“괜찮아. 원래도 서로 원하는 게 있어서 하는 결혼인데. 남준은 배씨 가문 호적에서 나와 따로 호적을 파는 건데 그러려면 첫 번째 조건이 결혼하는 거잖아. 아니면 배씨 가문 수장이 절대 동의할 리 없어.”곽경천이 위로했다.“너도 남준이 성격 알잖아. 좋아하는 여자도 없는데 피해주기는 싫어서 이 기회를 잡은 거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잖아.”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남준 오빠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이 과거를 신경 쓴다면 내가 꼭 대신 설명해 줄 거야.”곽경천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윤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오빠, 우리 이번에 정말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곽경천이 시선을 축 늘어트린 채 말했다.“걱정하지 마. 꼭 찾을 수 있을 거야.”윤혜인이 배남준과 가짜 결혼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곽경천의 조사에 따르면 저번에 파티장에서 윤혜인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북안도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대는 찰스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 몸에 찰스 가문의 휘장이 없었다.윤혜인은 귀국한 지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윤혜인을 쫓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쫓아와 여러 번의 암살을 시도했다.윤혜인이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곽경천이 여러모로 알아봤지만 찰스 가문과는 상관이 없다고 나왔다. 그리고 윤혜인은 이제 더는 그들의 추격 대상이 아니었다.누가 윤혜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건지 궁금했다.곽경천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배남준이 소식을 전해왔다. 곽경천이 전에 유의하라고 했던 한약재를 누군가 사 갔다고 말이다.상대는 아무 정보도 남기지 않았고 한약재를 사간 뒤로 서울에서 자취를 감춰 더는 찾을 수가 없었다.곽경천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다. 그 약재는 엄마가 떠나기 전 남겨준 약속이었다. 누구든 위험에 부딪히면 약방에서 ‘환혼’이라는 약재를 사서 살아있다는 걸 알리는 의미로 정하자고 했다.그런데 지금 누군가 그 약재를 사 갔다. 그것도 전에 약속했던 여섯 잎이었다.
한 번에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일이었고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기도 했다.곽경천도 배남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윤혜인의 안전도 보장하면서 윤아름의 행방도 찾을 수 있었다.곽경천은 이 방법을 윤혜인에게 알렸고 윤혜인도 동의했다. 윤혜인도 곽경천이 바쁜 와중에 그녀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싫었다.게다가 지금 윤아름의 소식도 있으니 곧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너무 잘된 일 같았다.일은 계획대로 잘 흘러갔다. 배남준은 아일란보 신부가 보는 앞에서 부부로 되었고 북안도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집안에 거짓말했다.배남준의 아버지 배영석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아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사실 배남준의 아버지도 아는 게 많은 아들과 친해지고 싶었다.가문이 계속 발전하려면 다방면으로 뛰어난 후계자가 필요했다. 배남준은 머리가 비상해 배씨 가문의 대부분 경영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하지만 배남준은 배영석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배영석은 여자가 많았고 배남준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아마 배영석은 배남준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을 것이다.배남준이 결혼한다는 말에 배영석도 돈을 아끼지는 않았고 첫 결혼을 아주 성대하게 치러주려 했다. 배씨 가문에 경사가 났다는 사실을 북안도 전체에 알리려는 것처럼 말이다.윤혜인이 원하는 것도 이것이었다. 결혼 소식이 널리 알려져야만 윤아름도 그들이 북안도로 왔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을 만나러 올 방법을 생각하거나 더욱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 할 것이다.하지만 배씨 가문이 안전한 건 윤혜인이 배남준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신분에 빈틈이 보이면 후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곽경천이 당부했다.“혜인아, 평소 밖에 있을 때는 그래도 부부인 척해야 해. 절대 들키면 안 돼. 예정일까지 배씨 가문 정원에만 있으면 안전할 거야.”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안전 조심해야 해.”윤혜인이 걱정스레 말했다.“걱정하지 마. 지금
윤혜인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시야에 누군가의 눈동자가 보였다.까만 눈동자가 은하수에 퐁당 빠진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깊고도 매혹적인 눈동자가 참 치명적이었다.예쁜 눈망울과 잘생긴 얼굴, 윤혜인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사람이었다.순간 윤혜인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혹시나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머나먼 타국에 있는 남자가 어떻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건지 의문이었다. 눈길이 닿자 윤혜인은 뭐라도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대치하면서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윤혜인은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꿈은 너무 현실 같았다. 눈앞에 버젓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정말 진짜와 다를 바 없었다.“당신이 왜 여기에...”있냐는 말을 입에서 꺼내기도 전에 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에 이끌려 창가로 갔다. 진실한 촉감에 윤혜인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준혁이 정말 결혼식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순간 윤혜인의 머리에 긴 코트가 씌워졌다.쨍그랑.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를 번쩍 어깨에 둘러메더니 다시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머리가 코트가 씌워져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윤혜인은 허둥지둥 팔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읍... 이준혁 씨... 뭐... 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이 불안해하는데 이준혁이 윤혜인을 살포시 내려줬다. 등 뒤로 폭신한 매트가 느껴졌다.이준혁이 옷을 걷어내자 윤혜인이 눈을 떴다. 눈 깜짝할 새에 차로 옮겨져 있었다.이준혁은 팔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아까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긁힌 것 같았다.주변을 돌아보고 나서야 윤혜인은 아까 있던 그 대기실 창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객 주차장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앞에 잠겨 있는 작은 문으로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작은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아마도 이준혁이 연 것 같았다.윤혜인이 다급하게 말했다.“뭐 하려고 그래요?”이준혁이 짧고
자칫하면 북안도가 방위 수준이 떨어진다고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처지를 매우 걱정했다. 초대를 받지 않았으니 무단으로 침입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잡히면 매우 번거로워지게 된다.이준혁의 팔에 난 상처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던 윤혜인이 팔에 한 레이스를 풀어 건네며 물었다.“팔에 피나는데 처리 좀 할래요?”이준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윤혜인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관심한 바에 그냥 상처도 치료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냥 내가 처치해 줄게요. 처치 끝나면 돌아가요. 네?”윤혜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혁이 대꾸하지 않자 윤혜인은 그가 이 말에 동의했다고 생각해 그의 소매를 살살 걷었다. 그리고는 휴지를 한 장 빼서 팔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레이스를 감기 시작했다.차가 자리가 좁기도 했고 윤혜인의 드레스가 펑퍼짐했기에 드레스 옷깃이 이준혁 몸에 찰싹 붙어 있었다.윤혜인은 상처를 처치하는 데 집중했고 레이스를 감고 예쁘게 리본까지 묶어줬다.처치하고 나서야 이준혁의 팔뚝이 예전에 비하면 너무 말라 있다는 걸 발견했다. 도대체 몸조리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자꾸만 말라가는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윤혜인은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신부가 사라졌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기 전에 얼른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아무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윤혜인이 이준혁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이준혁이 잡고 있던 윤혜인의 손을 확 잡아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윤혜인은 심장이 벌렁거렸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준혁의 품속은 여전히 따듯하고 포근했다.코끝에 차가우면서도 향긋한 남자의 향기가 맴돌았다. 그 향기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순간 윤혜인은 두 사람이 다시 제일 뜨거웠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때는 임세희도 원지민도 한구운도 없었고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윤혜인은 질질 끄는 걸 싫어했다. 결정했으면 흔들리지 말고 그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호수처럼 깊은 이준혁의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너무 슬퍼 보였다.그런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혜인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내 결혼식에 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북안도 상황이 좋지 못해서 결혼식에 초대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사실 윤혜인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신성한 결혼식 복장을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윤혜인은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 서 있는 걸 관중석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그 느낌도 별로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여 그 기분을 느끼지 않게 미연에 방지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이기적이라 생각해도 좋고 도망간다고 생각해도 좋지만 어쨌든 잘라낼 바에는 깨끗하게 자르는 게 좋다고 여겼다.“난 이만 돌아갈게요. 준혁 씨도 배씨 가문에 대해 잘 알잖아요. 위험한 일은 하지 마요.”이준혁은 윤혜인의 충고를 못 들은 척하더니 윤혜인의 발그스름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아니야. 혜인아. 넌 아직 날 속이고 있어...”윤혜인은 빠져들어 갈 것 이준혁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정말 당장이라도 빠져들어 갈 것 같았지만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티 나지 않게 견뎌냈다.더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두 사람 다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윤혜인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준혁 씨. 내가 준혁 씨를 왜 속여요. 준혁 씨도 봤잖아요. 나 결혼하려는 거...”“진심이 아니잖아.”이준혁이 윤혜인의 턱을 살짝 들더니 말캉한 그녀의 입술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돌적으로 키스했다.“읍... 이준혁 씨...”이준혁은 윤혜인의 목소리까지 함께 삼켜버렸다. 그는 윤혜인의 턱을 꽉 잡더니 몸을 더 바짝 붙이고는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더 깊게 공략했다.윤혜인은 본능적으로 손을
윤혜인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기력을 살짝 회복한 윤혜인은 바로 손을 내밀어 이준혁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준혁이 손을 덥석 잡았다.이준혁의 눈동자는 아까 나눈 키스로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아이까지 데리고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야?”아이라는 말에 키스로 살짝 흐트러졌던 정신이 순간 말짱해졌다.‘그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 남자가 다치면 안 되는데.’윤혜인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아이가 내 뱃속에 있으면 내 아이예요. 당신과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내 마음이죠.”덤덤하던 이준혁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맛보았는데 순간 거리가 확 벌어진 느낌이 들었다.이준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또박또박 서늘하게 말했다.“나는 허락 못 해.”윤혜인이 차갑게 웃었다.“준혁 씨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내 결혼은 진짜예요.”이 말은 마치 이준혁이 올렸던 그 가짜 결혼식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그 일을 신경 쓰는 티가 많이 났다.이준혁이 그윽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 결혼은 가짜야. 왜인지 알아? 너는...”“이준혁 씨.”윤혜인이 이준혁의 말을 차갑게 잘라버렸다.“나를 위해서 그런다는 말로 나 사랑한다고 하지 마요. 나는 그런 사랑 필요 없어. 알아들어요?”이준혁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윤혜인은 멈추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그런 선택을 한 순간 우리 사이는 끝났어요.”“아니. 혜인아. 우린 아직 안 끝났어...”이준혁이 윤혜인의 손을 꼭 잡더니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이 빨개졌다.“아니야. 안 돼.”“이준혁 씨.”윤혜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나를 위해서, 나를 지키려고 세운 계획이었지만 내가 받은 상처도 다 진짜예요.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당신을 다시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