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소원의 인생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서현재의 인생도 소원 때문에 똑같이 망가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그랬다간 정말 그대로 미쳐버릴 수도 있다.“육경한, 원하는 게 뭐야...”소원이 육경한의 옷깃을 덥석 잡더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말 좀 해봐.”“나를 신고할 때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나 보지?”육경한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소원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면 그건 피했어야지. 저 사람 속죄하려면 아직 멀었어.”육경한의 미소는 전혀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육경한이 내뱉은 그 어떤 말보다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다리에 힘이 풀린 소원이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육경한,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풀어줘... 이러지 마. 정말 저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정말이야...”소원은 누구한테 빌어야 제일 효과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지시한 사람이 서진태라고는 하나 서진태도 결국 육경한이 두려워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육경한의 마음이 풀려야만 서현재가 풀려날 수 있다.육경한은 바닥에 앉아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소원을 보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원인 모를 짜증만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소원을 턱을 들어 올리더니 가식적으로 웃었다.“네가 이렇게 비는데 당연히 기회를 줘야지.”소원은 순간 너무 기뻤다. 큰 충격을 받아 흐릿해진 대뇌는 육경한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 정말 고마워... 약속은 꼭 지킬게.”“에이,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두고.”육경한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리를 들어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주름진 부분을 툭툭 털어내고는 옆에 있는 소종에게 지시했다.“서현재에게 전해. 외국으로 간다면, 소원의 목숨을 걸고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서진태에게 말해서 풀어줄 수도 있다고.”소원은 그대로 바닥에 주
저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 벽이 진동하자 서현재가 그쪽을 바라봤다.서현재는 힘겹게 유리 벽을 향해 고개를 흔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누나, 나 괜찮아요. 버틸 만해요... 그러니까 절대 나를 위해서... 그 사람한테 빌지 마요...”이 말에 매질이 더 혹독해졌다.서현재가 육경한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서진태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래도 안 되면 아예 말을 못 하게 해도 된다고 했다.서씨 가문이 작은 점포에서 지금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다 서진태의 독기와 과감함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무리 숨겨둔 자식인 서현재를 예뻐했어도 일단 실망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풉.”서현재가 피를 왈칵 토해냈다.그는 고통에 몸을 웅크리려다 소원이 보고 걱정할까 봐 억지로 참았다.그러더니 웃음을 지으며 처참한 자기 모습만 비치는 유리 벽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누나, 나 진짜 괜찮아요...”준수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얼굴로 아무리 예쁘게 웃는다 해도 예쁠 수가 없었다.소원은 힘껏 유리 벽을 두드렸다. 어찌나 힘껏 내리쳤는지 손이 빨개지고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서현재. 너 바보야? 내가 뭐라고 이래... 정말 내가 뭐라고...”소원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육경한은 기분이 잡쳤다. 그가 원하던 장면이 아니었다.‘허. 내 앞에서 절절한 드라마라도 찍겠다는 건가?’두 사람의 확고한 감정은 육경한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육경한이 소종에게 말했다.“표정을 보니 서현재 도련님 뭔가 불만 있어 보이는데?”이내 이 소식은 안에 전해졌다.철썩. 서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 힘껏 쇠사슬을 서현재의 얼굴에 내리쳤다.육경한의 화를 잠재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해도 좋다는 서진태의 분부가 있었기에 내리칠 때 전혀 힘을 빼지 않았다. 쇠사슬을 거두는데 살점이 뜯겨 나가며 피가 터져 나왔다.한
아니, 절대 이대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소원이 다시 그쪽으로 달려가 육경한의 종아리를 꽉 끌어안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육경한, 이제부터 네 말 들을게. 다 들을게... 이제 너를 해치겠다는 생각 버릴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부탁이야... 화풀이는 나 한 사람에게만 해. 이러지 마. 제발. 부탁이야... 현재에게 더는 빚질 수 없어... 정말이야... 더는 안 된다고...”소원이 육경한 앞에 꿇어앉은 채 눈물을 쏟아내며 비굴하게 애원했다.육경한은 철저히 굴복한 소원을 보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는 원래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동정이라는 감정도 없었다.외국에서 몇 년간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다짐한 게 있다면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오히려 자기가 다칠 수도 있다.소원이 서현재와 합심하고 그를 해치려 들었으니 그 교훈은 어떻게든 줘야 했다.하지만 육경한도 서현재가 죽는 건 원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소원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들어가는 건 절대 싫었다.“소원아, 알텐데...”육경한이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말투가 드물게 매우 부드러웠다.“나는 너를 벌주고 싶은 게 아니야. 근데 네가 자꾸만 내 심기를 건드리잖아. 다음에도 그러면 정말 인내심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어.”“아니. 절대 그럴 일 없어...”소원이 육경한의 팔을 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절절하게 애원했다.늘 기세등등하던 소원이 지금은 힘을 쫙 뺀 채 약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소원의 아리따운 얼굴까지 더해지자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었다.소원은 그럴 자본이 있었다. 특히 유리구슬처럼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닥 차오르자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육경한이 지금 해야 하는 건 소원에게 교훈을 가르치면서 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육경한은 미친 듯이 소원이 갖고 싶었다.육경한은 절대 원하는 걸 참은 적이 없었다.5
소원의 예쁜 얼굴이 순간 눈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육경한은 급해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몸을 숙여 소원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아직도 망설이는 거야? 결정하면 그때 다시 얘기할까?”탈칵.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원은 자극을 받았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가지 마.”소원이 육경한을 잡았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육경한의 벨트를 풀었다.전에 육경한과 여러 번 해봤기에 어떻게 해야 그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소원의 손짓 하나하나에 육경한은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뇌에서는 도파민이 끝없이 분비되고 있었다.육경한은 이제 소원을 완전히 정복한 상태였다.그런 소원이 너무 매혹적이라 정말 뱃속에 꿀꺽 삼키고 싶었다.쿵.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육경한은 소원을 유리 벽에 바짝 몰아붙였다.소원은 맞은편에 있는 서현재를 보며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안 돼...”소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그를 불렀지만 결국 그 소리는 안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육경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악마 같은 입을 열었다.“소원아, 고집을 부린 결과를 봐. 돌고 돌아 결국 내 시중을 들고 있잖아.”육경한의 모욕적인 말과 행동은 마치 고속도로 돌아가는 믹서기처럼 소원의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을 먼지보다 잘게 갈아버렸다.소원은 이제 자신이 더는 사람 같지 않았다.욕구를 해소할 구멍이 된 듯한 느낌이었고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짐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아무 감정도 없는 갈취에 소원은 너무 아파 발가락까지 힘이 들어갔다.몸을 섞었지만 누구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고 아프기만 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해소하지 못한 분노를 안고 버티는 중이었다.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소원의 인생을 전부 돌아볼 만큼 말이다.육경한을 만나지 전에는 모든 게 꿀처럼 달콤했지만 육경한을 만난 뒤로 그녀의 인생에 남은 건 어둠밖에 없었다. 그런 인생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의식을 잃기 전 소원은
깨어나서 처음 한 일이 바로 울먹이며 다른 남자를 찾는 것이었다.소원은 육경한이 화나든 말든 그의 손가락을 꼭 잡고 말했다.“약속했잖아. 제발 좀 말한 대로 하면 안 돼?”육경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소원의 몸이 해충에 잠식당한 나무와 같다고 했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보여도 속은 이미 볼품없이 망가져 있으니 몸조리는 필수고 자극을 적게 받으면 몇 년 더 살 수도 있다고 했다.육경한은 씩씩거리며 원장을 찾아가 그 의사를 당장 자르라고 했다.돌팔이가 말을 함부로 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 더 살 수도 있다니, 참 어처구니없었다. 소원은 이제 고작 20대인데 몇 년을 더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 의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고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다른 의사를 찾지도 않았다.하지만 몰래 영양사를 찾아 소원의 식단을 전문적으로 관리했다. 보양 식단을 엄격히 짜고 거기에 맞춰 꼬박꼬박 먹게 했다.소원은 육경한의 눈치를 볼 겨를이 없이 다급하게 물었다.“육경한, 내가 묻잖아.”소원은 자기가 지금 육경한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이에 육경한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고 느긋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안 죽었어. 서진태가 치료할 수 있게 데려갔어.”소원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몸이 좋아지면 소원 자신도 조사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육경한도 그녀를 속일 필요는 없었다.“아참, 서진태가 너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래.”육경한이 비아냥댔다.“서현재를 놓아줘서 고맙다고.”소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서진태는 정말 고마운 게 아니라 서현재를 그만 놓아달라고,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에둘러서 경고하는 것이다.소원도 다시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육경한은 간병인 손에서 뜨끈뜨끈한 전복죽을 건네받더니 말했다.“이만 나가봐요.”간병인이 가고 침대맡에 앉은 육경한이 인내심 있게 한 숟가락
그때 육경한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핏덩어리가 자기 핏줄인지 아닌지 정식으로 조사하지 못했다.그런 상황에서 소원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다.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대 의학이 그렇게 발달했는데 소원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육경한의 아이로 둔갑할 리가 없었다. 하여 그의 아이를 잃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어제 의사가 한 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중절 수술을 책임진 의사를 알아냈다.조사한 결과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알아냈다.그때 갑자기 어지럼증이 도졌던 의사가 중절 수술은 작은 수술이라 생각해 간호사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그 의사가 집도한 게 아니었다.그러니 중간에 누가 수작을 부려도 알 길이 없었다.육경한은 그때 그 간호사를 찾아내려 했지만 이미 이민 가고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리고 그 간호사가 이민 하러 가기 전에 부유한 티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간호사는 누군가에게 매수된 게 틀림없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상했다.소원은 그때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제왕절개로 낳을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약물로 중절 수술을 했다면 의사가 지금 와서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던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시간을 따져보면 소원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질 시간이 없었다.그렇다면 진실은 단 하나, 바로 소원이 몰래 그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육경한은 소원의 멱살을 꽉 부여잡더니 그녀가 고민할 새도 없이 계속 캐물었다.“소원아, 내 아이 어디로 빼돌렸어.”육경한의 강압적인 말투에 소원은 잠깐 넋을 잃었다. 그러더니 이내 귀싸대기를 날렸다.철썩.귀싸대기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병실을 가득 메운 소리가 이를 증명했다.육경한의 얼굴은 그 따귀에 한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순간 잘생긴 육경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소원아, 죽고 싶어서 환장...”“육경한.”소원이 소리를 꽥 지르더니 육경한의 말을 잘라버렸다.“네가 그 아이 얘기를 꺼낼 자격이 있어? 그래
육경한은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래서 지금 뭘 증명하고 싶은 건데?”소원이 매정하게 비웃었다.“매정한 살인자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야? 자기 아이까지 살해한 그런 독한 사람이라고?”한참 침묵하던 육경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 나는...”사실 육경한은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와 같이하는 미래까지 상상했던 적이 있다.부모님이 처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육경한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에 매우 큰 거부감을 느꼈었다. 이번 생에 아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불행을 이어가는 게 싫었다. 육경한은 음침하고 잔혹한 그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만약 그 아이가 소원이 낳아준 아이라면 살짝 기대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내 소원의 차가운 웃음소리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육경한, 그 아이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넌 정말 이름 그대로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이야.”육경한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원은 육경한의 기분을 참 잘도 쥐고 흔들었다.같은 아픔을 안고 있는 원수라 서로를 매우 잘 알았다.그러다 육경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뭐 다시 낳으면 되지.”이 말에 소원은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다시금 손을 들어 육경한의 귀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손을 잡히는 바람에 실패했다.육경한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과 갈라 터진 입술을 보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아이는 너만 좋다면 다시 낳아도 돼.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몸조리를 잘하는 거야.”“육경한.”소원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듯 육경한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건 너랑 아무 상관이 없어. 그리고 나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이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사실 소원은 육경한처럼 양심을 악마에게 팔아먹은 사람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지금은 아이를 걱정하듯 아이의 근황을 물어보지만 상황이
떠나면서 육경한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반드시 육경한이 골머리를 앓을만한 일을 만들어야 한다. 육경한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자면 일단 그녀 자신이 망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육경한도 망가트려야 했다....일주일간 입원해 있던 소원은 퇴원할 것을 요구했다.육경한은 의사의 소견을 물어봤다. 저번에 어떤 의사가 말을 잘못했다가 육경한이 잘라버리는 바람에 이번에 온 의사는 말을 꽤 돌려서 했다.“환자는 집으로 돌아서도 푹 쉬면서 몸조리해야 합니다. 일단 기본부터 잘 다져야 해요.”이 의사의 말은 그래도 듣기가 꽤 편했다.육경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이 약 얼마나 더 먹어야 하나요?”의사가 말했다.“3개월에서 5개월은 드셔야 합니다. 매달 병원으로 오셔서 재검진받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종에게 약을 받아오라고 하고는 먼저 병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정리할 물건이 별로 없었다. 입원하러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전부 육경한이 와서 준비해 준 것이었다.육경한이 고개를 돌려 차분하게 물었다.“오아시스로 갈래 아니면 저번에 묵었던 별장으로 갈래?”소원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두 곳 다 소원에겐 감옥 같은 곳이었다.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던 소원이 입을 열었다.“내 집으로 가면 안 돼?”육경한이 가볍게 웃었다. 마치 그녀의 순진함을 비웃는 것 같았다.“몸도 안 좋은데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야 챙겨줄 사람도 마련해줄 거 아니야.”육경한이 최대한 돌려서 말했지만 소원은 모를 리가 없었다.육경한은 어떻게든 그녀를 옆에 묶어두려고 했고 그녀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소원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운명을 받아들인 듯 가볍게 말했다.“그러면 내일 넘어갈게. 집에 가서 정리할 물건이 있어.”“정리할 물건이 뭔데. 내가 사람 보낼게.”육경한은 사실 소원이 힘들까 봐 한 말이었다. 소원의 몸은 아직 낫자면 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소원이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