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은 소원을 끌고 유리 벽 앞으로 다가가 뒤에서 꼭 끌어안더니 억지로 안을 쳐다보게 했다.“어제 네 애인을 붙잡아간 사람이 누군지 알아?”소원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육경한이 말을 이어갔다.“서진태야.”소원의 눈동자가 커졌다.‘그럴 수가. 어르신이 왜...’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통해 내가 무사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나 봐. 그래서 숨겨둔 자식인 서현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외국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죽어도 안 가겠다고 여기 남겠다고 했대.”“왜 안가겠다고 했을까?”육경한이 유리에 비친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소원은 서현재가 왜 안 가겠다고 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다 그녀를 위해서였다.서현재는 무슨 일이 있든 절대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버틴 것이다.육경한은 바로 이유를 알아챈 소원이 미웠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케미가 생겼다는 것에 질투 나 미칠 지경이었다.육경한이 음침하게 웃더니 말했다.“사실 바로 도망갔으면 나도 서씨 가문을 용서했을지 모르지. 근데 어리석게도 너의 천사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 그만한 능력도 없으면서.”육경한은 소원의 턱을 움켜잡더니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똑똑히 보라고 말했다.“저 사람 서씨 가문 사람이야?”육경한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서진태도 눈치가 참 빨라. 그냥 사업체 하나를 가져갔을 뿐인데 바로 서재현을 묶어서 업소로 찾아왔더라고. 혼쭐을 내주겠다면서.”소원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은 빨갛게 충혈됐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서진태가 직접 명령을 내려 서현재를 매질할 줄은 몰랐다.서씨 가문 산업을 지키기 위해 서현재의 목숨 따윈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서현재가 요즘 서씨 가문을 위해 낸 아웃풋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육경한은 마치 소원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차갑게 귀띔했다.“서씨 가문의 산업 앞에서 숨겨둔 자식은 아무것도 아니지.”“어떻게 이렇게 모질게 대해요. 현재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소원의 인생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서현재의 인생도 소원 때문에 똑같이 망가지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그랬다간 정말 그대로 미쳐버릴 수도 있다.“육경한, 원하는 게 뭐야...”소원이 육경한의 옷깃을 덥석 잡더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말 좀 해봐.”“나를 신고할 때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나 보지?”육경한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소원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면 그건 피했어야지. 저 사람 속죄하려면 아직 멀었어.”육경한의 미소는 전혀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육경한이 내뱉은 그 어떤 말보다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다리에 힘이 풀린 소원이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육경한,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풀어줘... 이러지 마. 정말 저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정말이야...”소원은 누구한테 빌어야 제일 효과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지시한 사람이 서진태라고는 하나 서진태도 결국 육경한이 두려워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육경한의 마음이 풀려야만 서현재가 풀려날 수 있다.육경한은 바닥에 앉아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소원을 보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원인 모를 짜증만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소원을 턱을 들어 올리더니 가식적으로 웃었다.“네가 이렇게 비는데 당연히 기회를 줘야지.”소원은 순간 너무 기뻤다. 큰 충격을 받아 흐릿해진 대뇌는 육경한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 정말 고마워... 약속은 꼭 지킬게.”“에이,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두고.”육경한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리를 들어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주름진 부분을 툭툭 털어내고는 옆에 있는 소종에게 지시했다.“서현재에게 전해. 외국으로 간다면, 소원의 목숨을 걸고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서진태에게 말해서 풀어줄 수도 있다고.”소원은 그대로 바닥에 주
저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 벽이 진동하자 서현재가 그쪽을 바라봤다.서현재는 힘겹게 유리 벽을 향해 고개를 흔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누나, 나 괜찮아요. 버틸 만해요... 그러니까 절대 나를 위해서... 그 사람한테 빌지 마요...”이 말에 매질이 더 혹독해졌다.서현재가 육경한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서진태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래도 안 되면 아예 말을 못 하게 해도 된다고 했다.서씨 가문이 작은 점포에서 지금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다 서진태의 독기와 과감함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무리 숨겨둔 자식인 서현재를 예뻐했어도 일단 실망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풉.”서현재가 피를 왈칵 토해냈다.그는 고통에 몸을 웅크리려다 소원이 보고 걱정할까 봐 억지로 참았다.그러더니 웃음을 지으며 처참한 자기 모습만 비치는 유리 벽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누나, 나 진짜 괜찮아요...”준수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얼굴로 아무리 예쁘게 웃는다 해도 예쁠 수가 없었다.소원은 힘껏 유리 벽을 두드렸다. 어찌나 힘껏 내리쳤는지 손이 빨개지고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서현재. 너 바보야? 내가 뭐라고 이래... 정말 내가 뭐라고...”소원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육경한은 기분이 잡쳤다. 그가 원하던 장면이 아니었다.‘허. 내 앞에서 절절한 드라마라도 찍겠다는 건가?’두 사람의 확고한 감정은 육경한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육경한이 소종에게 말했다.“표정을 보니 서현재 도련님 뭔가 불만 있어 보이는데?”이내 이 소식은 안에 전해졌다.철썩. 서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 힘껏 쇠사슬을 서현재의 얼굴에 내리쳤다.육경한의 화를 잠재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해도 좋다는 서진태의 분부가 있었기에 내리칠 때 전혀 힘을 빼지 않았다. 쇠사슬을 거두는데 살점이 뜯겨 나가며 피가 터져 나왔다.한
아니, 절대 이대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소원이 다시 그쪽으로 달려가 육경한의 종아리를 꽉 끌어안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육경한, 이제부터 네 말 들을게. 다 들을게... 이제 너를 해치겠다는 생각 버릴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부탁이야... 화풀이는 나 한 사람에게만 해. 이러지 마. 제발. 부탁이야... 현재에게 더는 빚질 수 없어... 정말이야... 더는 안 된다고...”소원이 육경한 앞에 꿇어앉은 채 눈물을 쏟아내며 비굴하게 애원했다.육경한은 철저히 굴복한 소원을 보고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는 원래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동정이라는 감정도 없었다.외국에서 몇 년간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다짐한 게 있다면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절대 마음 약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오히려 자기가 다칠 수도 있다.소원이 서현재와 합심하고 그를 해치려 들었으니 그 교훈은 어떻게든 줘야 했다.하지만 육경한도 서현재가 죽는 건 원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소원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들어가는 건 절대 싫었다.“소원아, 알텐데...”육경한이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말투가 드물게 매우 부드러웠다.“나는 너를 벌주고 싶은 게 아니야. 근데 네가 자꾸만 내 심기를 건드리잖아. 다음에도 그러면 정말 인내심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어.”“아니. 절대 그럴 일 없어...”소원이 육경한의 팔을 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절절하게 애원했다.늘 기세등등하던 소원이 지금은 힘을 쫙 뺀 채 약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소원의 아리따운 얼굴까지 더해지자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었다.소원은 그럴 자본이 있었다. 특히 유리구슬처럼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닥 차오르자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육경한이 지금 해야 하는 건 소원에게 교훈을 가르치면서 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육경한은 미친 듯이 소원이 갖고 싶었다.육경한은 절대 원하는 걸 참은 적이 없었다.5
소원의 예쁜 얼굴이 순간 눈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육경한은 급해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몸을 숙여 소원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아직도 망설이는 거야? 결정하면 그때 다시 얘기할까?”탈칵.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원은 자극을 받았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가지 마.”소원이 육경한을 잡았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육경한의 벨트를 풀었다.전에 육경한과 여러 번 해봤기에 어떻게 해야 그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소원의 손짓 하나하나에 육경한은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뇌에서는 도파민이 끝없이 분비되고 있었다.육경한은 이제 소원을 완전히 정복한 상태였다.그런 소원이 너무 매혹적이라 정말 뱃속에 꿀꺽 삼키고 싶었다.쿵.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육경한은 소원을 유리 벽에 바짝 몰아붙였다.소원은 맞은편에 있는 서현재를 보며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안 돼...”소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그를 불렀지만 결국 그 소리는 안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육경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악마 같은 입을 열었다.“소원아, 고집을 부린 결과를 봐. 돌고 돌아 결국 내 시중을 들고 있잖아.”육경한의 모욕적인 말과 행동은 마치 고속도로 돌아가는 믹서기처럼 소원의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을 먼지보다 잘게 갈아버렸다.소원은 이제 자신이 더는 사람 같지 않았다.욕구를 해소할 구멍이 된 듯한 느낌이었고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짐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아무 감정도 없는 갈취에 소원은 너무 아파 발가락까지 힘이 들어갔다.몸을 섞었지만 누구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고 아프기만 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해소하지 못한 분노를 안고 버티는 중이었다.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소원의 인생을 전부 돌아볼 만큼 말이다.육경한을 만나지 전에는 모든 게 꿀처럼 달콤했지만 육경한을 만난 뒤로 그녀의 인생에 남은 건 어둠밖에 없었다. 그런 인생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의식을 잃기 전 소원은
깨어나서 처음 한 일이 바로 울먹이며 다른 남자를 찾는 것이었다.소원은 육경한이 화나든 말든 그의 손가락을 꼭 잡고 말했다.“약속했잖아. 제발 좀 말한 대로 하면 안 돼?”육경한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소원의 몸이 해충에 잠식당한 나무와 같다고 했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보여도 속은 이미 볼품없이 망가져 있으니 몸조리는 필수고 자극을 적게 받으면 몇 년 더 살 수도 있다고 했다.육경한은 씩씩거리며 원장을 찾아가 그 의사를 당장 자르라고 했다.돌팔이가 말을 함부로 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 더 살 수도 있다니, 참 어처구니없었다. 소원은 이제 고작 20대인데 몇 년을 더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 의사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고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다른 의사를 찾지도 않았다.하지만 몰래 영양사를 찾아 소원의 식단을 전문적으로 관리했다. 보양 식단을 엄격히 짜고 거기에 맞춰 꼬박꼬박 먹게 했다.소원은 육경한의 눈치를 볼 겨를이 없이 다급하게 물었다.“육경한, 내가 묻잖아.”소원은 자기가 지금 육경한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이에 육경한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고 느긋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안 죽었어. 서진태가 치료할 수 있게 데려갔어.”소원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몸이 좋아지면 소원 자신도 조사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육경한도 그녀를 속일 필요는 없었다.“아참, 서진태가 너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래.”육경한이 비아냥댔다.“서현재를 놓아줘서 고맙다고.”소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서진태는 정말 고마운 게 아니라 서현재를 그만 놓아달라고,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에둘러서 경고하는 것이다.소원도 다시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육경한은 간병인 손에서 뜨끈뜨끈한 전복죽을 건네받더니 말했다.“이만 나가봐요.”간병인이 가고 침대맡에 앉은 육경한이 인내심 있게 한 숟가락
그때 육경한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핏덩어리가 자기 핏줄인지 아닌지 정식으로 조사하지 못했다.그런 상황에서 소원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다.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대 의학이 그렇게 발달했는데 소원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육경한의 아이로 둔갑할 리가 없었다. 하여 그의 아이를 잃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어제 의사가 한 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중절 수술을 책임진 의사를 알아냈다.조사한 결과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알아냈다.그때 갑자기 어지럼증이 도졌던 의사가 중절 수술은 작은 수술이라 생각해 간호사에게 일임한 것이었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그 의사가 집도한 게 아니었다.그러니 중간에 누가 수작을 부려도 알 길이 없었다.육경한은 그때 그 간호사를 찾아내려 했지만 이미 이민 가고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리고 그 간호사가 이민 하러 가기 전에 부유한 티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간호사는 누군가에게 매수된 게 틀림없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상했다.소원은 그때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제왕절개로 낳을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약물로 중절 수술을 했다면 의사가 지금 와서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던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시간을 따져보면 소원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질 시간이 없었다.그렇다면 진실은 단 하나, 바로 소원이 몰래 그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육경한은 소원의 멱살을 꽉 부여잡더니 그녀가 고민할 새도 없이 계속 캐물었다.“소원아, 내 아이 어디로 빼돌렸어.”육경한의 강압적인 말투에 소원은 잠깐 넋을 잃었다. 그러더니 이내 귀싸대기를 날렸다.철썩.귀싸대기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병실을 가득 메운 소리가 이를 증명했다.육경한의 얼굴은 그 따귀에 한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순간 잘생긴 육경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소원아, 죽고 싶어서 환장...”“육경한.”소원이 소리를 꽥 지르더니 육경한의 말을 잘라버렸다.“네가 그 아이 얘기를 꺼낼 자격이 있어? 그래
육경한은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래서 지금 뭘 증명하고 싶은 건데?”소원이 매정하게 비웃었다.“매정한 살인자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야? 자기 아이까지 살해한 그런 독한 사람이라고?”한참 침묵하던 육경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 나는...”사실 육경한은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와 같이하는 미래까지 상상했던 적이 있다.부모님이 처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육경한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에 매우 큰 거부감을 느꼈었다. 이번 생에 아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불행을 이어가는 게 싫었다. 육경한은 음침하고 잔혹한 그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만약 그 아이가 소원이 낳아준 아이라면 살짝 기대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내 소원의 차가운 웃음소리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육경한, 그 아이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넌 정말 이름 그대로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이야.”육경한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원은 육경한의 기분을 참 잘도 쥐고 흔들었다.같은 아픔을 안고 있는 원수라 서로를 매우 잘 알았다.그러다 육경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뭐 다시 낳으면 되지.”이 말에 소원은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다시금 손을 들어 육경한의 귀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손을 잡히는 바람에 실패했다.육경한은 소원의 창백한 얼굴과 갈라 터진 입술을 보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아이는 너만 좋다면 다시 낳아도 돼.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몸조리를 잘하는 거야.”“육경한.”소원이 마치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듯 육경한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건 너랑 아무 상관이 없어. 그리고 나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이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사실 소원은 육경한처럼 양심을 악마에게 팔아먹은 사람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지금은 아이를 걱정하듯 아이의 근황을 물어보지만 상황이
그 노인은 안지영의 할머니인 박혜순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 “너야? 우리 손녀를 유괴해 간 사람이?” 안지영은 깜짝 놀라 급히 박혜순의 지팡이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언니는 절 구해준 사람이라고요!” 박혜순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나. 그날 우리 집에 찾아왔던 여자 아니야? 우리 아들을 찾더니... 해치려고 그러는 거지? 우리 아들을 못 찾아내니까 이젠 손녀까지 노리는 거야? 이 나쁜 년 같으니라고... 도대체 왜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거야?’ 소원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고집이 세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 같았다. 안지영은 박혜순이 화를 내면 무섭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원을 떠밀면서 말했다. “언니, 먼저 가요. 우리 할머니는 진짜 화나면 때릴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소원은 뒤를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그녀도 더 이상 박혜순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돌나 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더 이상 안지영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기억 속에 있던 착하고 순수한 소녀라면 반드시 도와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안지영에게도 가장 소중한 가족이 있었고 오직 안상철만이 그녀를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이기적이었기에 자기를 위한 선택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진실이 밝혀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반드시 안상철을 찾아야 했다. 소원이 떠나자 박혜순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안지영의 어깨를 붙잡고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지영아,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할머니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나간 지 오래됐는데도 안 돌아오니까 상철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너한테 위험이 닥쳤다고 하더라고... 또 네가 돌아오면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어.
안지영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는데 그 안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많이 아팠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어머니도 없었기에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안 좋은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행인 건 안상철이 최선을 다해 안지영에게 행복한 삶을 주려 했던 것이다. 어느덧 그들은 의식주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녀의 병도 거의 재발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강민혜가 그를 찾아오자 안상철은 처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거라고 털어놓았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안지영은 알고 있었다. 안상철의 행방을 아무한테도 알려선 안 된다는 걸 말이다. 잡히지 않기만 하면 계속 가족을 돌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소원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영 씨, 제가 왜 안 비서님을 찾고 있는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안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소원이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안 비서님이거든요. 저는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을 분이에요.” 안지영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게 저희 아빠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실은 저도 아무런 관계없길 바라고 있어요.” 소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증거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지영은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빠가 살인 사건이랑 연관이 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디?’ 안지영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빠는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라니까요? 언니,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소원의 팔을 붙잡았다.“언니도 우리 아빠 잘 알잖아요. 아빠가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 사람을 죽였을 리 없어요. 언니도 그렇게
차를 세우고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원은 마음 한구석이 불안 해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그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강민혜였다. 그녀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주변에 동료들도 같이 있었다. 아마 안상철을 잡으러 온 것 같았다. 소원은 안지영이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은 걸 보고 말을 걸었다. “다 왔어요. 아버지 찾으러 온 거 아니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강민혜와 그녀의 동료들에 의해 제압을 당한 것이다. 소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안상철을 잡은 걸까?’ 그녀는 급히 안지영을 말렸다. “내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요. 앞에 아무도 없어요.” 소원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아버지가 체포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안상철이 정말 소진용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안지영을 사랑하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안지영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처음 안지영의 어머니는 아이가 병약하다는 걸 알고 결국 지쳐서 집을 나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안상철은 끝까지 홀로 아픈 딸과 부모님을 돌봤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딸의 치료를 포기한 적 없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딸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원은 그 장면을 본 것으로 안상철의 사랑이 물거품으로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안지영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소원은 앞쪽 상황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강민혜가 그 남자에게 뭐라 말하다니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뒤를 돌려는 순간, 안지영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언니, 왜 다들 우리 아빠를 잡으려고 하는 거죠?” 소원이 깜짝 놀라 안지영을 돌아보자 그녀는 담담한 말투로 한 마디 덧붙였다.“소원 언니, 저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지나가던 언니라고?” 안지영은 안상철이 언니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둘 줄은 몰랐지만 소원의 옆모습을 흘깃 보고는 대답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언니인데 신고도 도와줬어요.” 안상철은 나이가 있는 만큼 안지영처럼 경계심 없이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소원을 경계하며 말했다. “지영아, 너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요. 이 언니가 제때 와줘서 다행이에요.” 안지영은 이렇게 말하며 소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 눈에 소원은 지금 영웅 같은 존재였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와.” 안상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한편 소원은 그를 곧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린 듯했다. 안지영도 이제야 안정을 찾고 소원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언니, 근데 언니는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엄청 외진 곳이잖아요. 너무 용감하신 것 같아요.” 그녀의 물음에 소원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고만 대답할 뿐, 다른 건 밝히지 않았다. 너무나도 순진한 안지영을 마주하니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릴 때, 안지영은 소원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녀만 보면 천사 언니라고 부르며 항상 곁에 붙어 있었고 소원도 시간만 나면 안지영을 보러 가곤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두 사람은 점점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지영이 소원을 전혀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놀란 상태인 데다가 차 안의 조명도 밝지 않아서 못 알아본 듯했다. 소원은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덕분에 쉽게 알아보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안지영에게 살짝 미안해하면서도 후회하지는 않았다.지금 소원에게 놓고 말해서 소진용의 죽음에 깃든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진용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안상철을 만나서 뭘 했는지, 그러고 나서
말을 마친 소원은 안지영을 끌고 본인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도 힘이 세지 않았고 안지영은 지금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였다. 만약 이 운전기사에게 동료라도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안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소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원래도 몸이 약해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던 데다가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지라 겁에 질려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뗐다. “저, 저... 저도 모르겠어요. 흑...” 안지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업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안지영을 막 업으려는 순간,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 핸드폰... 운전석 아래에 있어요.” 그래서 소원은 또 하는 수 없이 안지영을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가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운전기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눈이 따가워서 앞을 제대로 못 보면서도 소원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 하지만 소원은 이미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을 한 번 휙 비틀더니 운전기사를 그대로 차에서 끌어내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쿵!” 운전기사는 바닥에 처박히며 큰소리로 욕을 지껄였다. “이 썩을 년아! 너 미쳤어?” 하지만 소원은 그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핸드폰을 찾았고 차 키까지 빼앗아버렸다. 운전기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채 눈을 비비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 같은 년, 두고 봐... 넌 반드시 내가 죽일 거야!” 그 말을 들은 소원은 운전기사를 실컷 노려보더니 앞으로 성큼 다가가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커헉!” 그는 배를 감싸고 바닥에서 몸부림을 쳤다. 몰려오는 통증 때문에 당분간 제대로 걷지도 못할 듯했다. 소원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그쪽 사정은 제 알바 아니에요. 알아서 경찰한테 가서 해명하세요.”그렇
그 운전기사는 상습범이었다. 전부터 항상 차에 약을 숨겨두고 지냈는데 적당한 대상을 찾으면 범행을 저지르곤 했다. 게다가 그는 실제로 택시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는데 퇴근 후면 중고로 산 낡은 택시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른 듯한 손님이 보이면 그는 재빨리 다가가서 예약 택시인 것처럼 행세하며 승객을 태웠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바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해 범행을 저질렀다. 물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안지영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떨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울면서 애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가진 사람이 그녀의 눈물과 애원에 마음이 흔들릴 리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차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눈부신 불빛이 차를 비췄다. 운전기사는 깜짝 놀라서 당황하고 말았다. 이 정도로 한적한 시골길에 차가 올 리 없었으니 말이다. ‘충분히 지나갈 공간이 있는데 왜 불을 비추는 거지?’ 그는 짜증이 치밀어 욕을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그 검은색 차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젠장!” 그러자 운전기사는 기겁하며 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차는 택시 바로 앞에 멈춰 서는 것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차에서 한 여자가 내리더니 황급히 앞차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운전기사는 많이 당황했는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소원이 차 문을 열었을 때, 안지영은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소원은 재빨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일단 절 따라오세요.” ... 사실 소원은 조금 전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차 안에 있는 사람이 안지영의 아버지인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두 사람이 만나는 중
안지영이 앞으로 갔다. 운전기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안지영을 지켜보았다.안지영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조금 옆으로 비켜주시겠어요?”“비켜달라고?”운전기사가 웃으면서 말했다.“어디로 비켜달라는 건지. 나 때문에 핸드폰을 못 줍는 것도 아니고.”운전기사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있었다. 안지영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운전기사는 이런 연약한 여자가 좋았다. 목소리도 얇고 부드러우니 신음도 듣기 좋을 것이다.안지영은 운전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좌석 밑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음이 급해진 안상철이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안지영도 두려워서 얼른 안상철더러 본인을 데리러 오라고 하고 싶었다.하는 수 없이 안지영은 쪼그려 앉아서 손을 좌석 밑으로 뻗었다.하지만 그 자세로는 핸드폰에 닿을 수 없었다.안지영이 난감해할 때 운전기사가 물었다.“더 가까이 오지 그래요?”안지영은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더 가까이 간다면 이 운전기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저... 됐어요. 아까 가로등이 있는 곳에서 아버지를 기다릴래요.”말을 마친 안지영이 바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뒤에서 운전기사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홱 당겼다.“이 년이 좋은 말로 할 때 안 듣고!”안지영은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그녀는 엉엉 울면서 빌었다.“이러지 말아요. 아빠가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요...”“네 아빠는 널 만나지 못할 거야. 여기는 다른 길이거든. 이 길에는 네 아빠가 없어!”운전기사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나를 아빠라고 불러봐. 잘 부르면 해치지는 않을게.”안지영은 놀라서 눈물을 터뜨렸다.“엉엉... 싫어요. 이건 범죄예요. 이러시면 안 돼요. 제발요. 제발 저를 놔주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 네?”안지영이 운전기사 앞에 무릎 꿇고 빌고 있었다.“범죄?”기사는 피식 웃고 대답했다.“너 같은 여자가 이런 야심한 저녁에 나오는 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잖아.
“기사님, 제발 세워줘요...”안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이 아가씨 정말 귀찮게 구네.”운전기사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여기서 멈추면 벌금이 얼만지는 알아요? 조금 있다가 주워요.”안지영은 마음이 불안했다. 핸드폰이 있어야 안전할 것만 같았다.안상철을 불러내 데리러 오라고 하고 싶었다.안지영은 결국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벌금은 제가 내드릴게요. 아버지가 전화할까 봐 그래요. 제가 전화를 안 받으면 아버지가 걱정하실 거예요.”안지영의 요구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구겨진 표정으로 대답했다.“벌점은 얼마인지 알아요? 결국 내가 벌점을 받는 건데 그게 얼마나 시끄러운 일인데.”“저...”안지영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운전기사가 말을 끊었다.“여기서 벌점이 더 생기면 면허 정지예요. 그러면 벌금부터 시작해서 면허 정지 때문에 벌지 못한 돈까지 500백만 원은 될 텐데 아가씨가 책임질 거야?”“...”안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돈은 없었으니까 말이다.결국 안지영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면 편한 곳에 세워주세요.”안지영의 핸드폰은 여전히 조수석 밑에 있었다. 그러다가 전화가 한 번 걸려 왔지만 안지영은 받지 못했다.그래도 안지영은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운전기사도 알았으니 안지영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던 중 안지영은 운전기사가 내비게이션을 끄는 것을 보고 약간 걱정되었다.“기사님, 이 길이 맞아요?”안지영이 물었다.“당연하죠.”기사가 대답했다.“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안지영이 핸드폰으로 길을 확인했을 때는 이렇게 으슥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으슥하기도 하고 다른 차도 없어서 더욱 걱정되었다.안지영이 다급히 얘기했다.“내비게이션 한 번 켜보세요. 길 확인하게요.”“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운전기사는 안지영을 향해 화를 냈다.“난 눈 감고도 운전하는 사람이야. 내 집이 바로 이 근처에 있어서 이쪽 길은 훤히 잘 알고 있다고.”
안상철의 딸은 올해 20대 초반이어서 어린 티가 났다. 그녀는 검은색 후드티로 본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계단을 내려온 후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흰 차로 걸어갔다.흰 차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물었다.“콜택시 부르셨죠?”안상철의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타세요.”남자가 얘기했다.소원은 얼른 차에 시동을 걸었다. 소원의 차는 검은색인 데다가 불빛도 어두워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안상철의 딸이 탄 차는 점점 으슥한 곳으로 향해갔다.소원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헤드라이트를 꺼버렸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소원은 한 갈림길에서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발각될까 봐 거리를 두면서 따라왔는데, 여기에서 놓쳐버린 것이다.소원은 차를 길옆에 대고 차에서 내린 후 바퀴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이런 으슥한 곳에는 다니는 차가 많지 않기에 흔적이 많지 않았다. 소원은 금방 난 흔적을 발견하고는 빠르고 방향을 확정했다. 이윽고 다시 차에 올라타 그들을 따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본 흰 차가 나타났다. 다행히 소원의 차는 전기자동차여서 엔진 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아 눈에 띄지 않았다.조심스레 차를 세운 소원은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차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흰 차에서, 운전기사가 예쁘장하게 생긴 안상철의 딸을 보면서 장난스레 물었다.“이렇게 늦은데, 어디를 가는 거예요?”안상철의 딸, 안지영이 대답했다.“아버지를 찾으러 가요.”“아버지를 찾으러 간다고요?”운전기사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이렇게 늦었는데 아빠를 찾으러 간다니. 밖에서 놀려고 그러는 거죠?”안지영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운전기사의 미소가 이상하게 소름 돋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어서 억지로 대답했다.“아버지는 일하는 중이에요.”“아이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예쁜 딸이 직접 찾아오게 하다니. 너무 하네.”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