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면서 육경한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반드시 육경한이 골머리를 앓을만한 일을 만들어야 한다. 육경한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자면 일단 그녀 자신이 망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육경한도 망가트려야 했다....일주일간 입원해 있던 소원은 퇴원할 것을 요구했다.육경한은 의사의 소견을 물어봤다. 저번에 어떤 의사가 말을 잘못했다가 육경한이 잘라버리는 바람에 이번에 온 의사는 말을 꽤 돌려서 했다.“환자는 집으로 돌아서도 푹 쉬면서 몸조리해야 합니다. 일단 기본부터 잘 다져야 해요.”이 의사의 말은 그래도 듣기가 꽤 편했다.육경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이 약 얼마나 더 먹어야 하나요?”의사가 말했다.“3개월에서 5개월은 드셔야 합니다. 매달 병원으로 오셔서 재검진받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종에게 약을 받아오라고 하고는 먼저 병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정리할 물건이 별로 없었다. 입원하러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전부 육경한이 와서 준비해 준 것이었다.육경한이 고개를 돌려 차분하게 물었다.“오아시스로 갈래 아니면 저번에 묵었던 별장으로 갈래?”소원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두 곳 다 소원에겐 감옥 같은 곳이었다.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던 소원이 입을 열었다.“내 집으로 가면 안 돼?”육경한이 가볍게 웃었다. 마치 그녀의 순진함을 비웃는 것 같았다.“몸도 안 좋은데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야 챙겨줄 사람도 마련해줄 거 아니야.”육경한이 최대한 돌려서 말했지만 소원은 모를 리가 없었다.육경한은 어떻게든 그녀를 옆에 묶어두려고 했고 그녀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소원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운명을 받아들인 듯 가볍게 말했다.“그러면 내일 넘어갈게. 집에 가서 정리할 물건이 있어.”“정리할 물건이 뭔데. 내가 사람 보낼게.”육경한은 사실 소원이 힘들까 봐 한 말이었다. 소원의 몸은 아직 낫자면 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소원이
마치 그 눈빛을 느끼기라도 한 듯 서현재가 고개를 돌려 소원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하지만 서현재의 눈에 들어온 건 육경한이 아니라 육경한의 품에 안긴 여자였다.육경한이 고개를 숙여보니 소원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한 두 사람의 시선에 육경한의 심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뭘 그렇게 봐?”육경한이 음침하게 물었다.“별거 아니에요.”소원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 때문에 결국 육경한에게 들키고 말았다.언젠가 소원의 눈에 온통 육경한으로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과 오해가 두 사람 사이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갈라놓았다.소원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그쪽에서 눈길을 뗐지만 서현재가 아직도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에 소원은 수치스러웠다.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유리 벽으로 가려져 있어서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이건 결국 정신 승리에 불과했다. 서현재는 소원이 악마에게 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내 서현재가 휠체어를 타고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육경한은 지금 무슨 기분인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소원을 차에 내려줬다.조수석에 오른 순간 육경한은 씩씩거리며 그녀 위로 올라타더니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읍...”소원은 갑자기 들이닥친 키스에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입술이 막혀 숨을 내쉴 수가 없었던 소원은 곧 질식할 것 같았다. 손으로 육경한을 밀어내려 했지만 강압적인 육경한은 힘이 무시무시했다. 소원이 상대하기엔 너무 강력한 상대였다.소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어 얼른 육경한을 얼굴을 손톱으로 긁기 시작했다. 보름 정도 기른 손톱이라 귓가에 긴 손톱자국이 나고 말았다.찢어질 듯한 아픔에 육경한이 정신을 조금 차렸다. 하지만 이내 소원의 턱을 꽉 잡고는 화를 내뿜기 시작했다.“서현재가 그렇게 좋아? 그날 받은
소원이 너무 매혹적이라 당장이라도 맛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소원은 육경한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화들짝 놀라더니 불같이 화내며 욕설을 퍼부었다.“육경한,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벌건 대낮에 문도 닫지 않고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려 하고 있다.육경한은 욕구가 달아오른 상태라 소원을 너무 갖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오늘은 일단 용서해 줄게. 너 몸조리 끝나면 그때 보상하는 걸로 해.”소원은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정말 미친놈 같았다.육경한은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어째서인지 상태가 아까보다 훨씬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소원이 이번에 배신한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배신하고 칼로 찌르긴 했지만 이걸로 소원을 향한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줄었다.벌도 줄 만큼 주었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소원이 지내는 아파트에 도착한 육경한은 문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경계했다. 혹시나 아까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문 앞까지야. 들어오면 안 돼.”소원이 소녀처럼 교태를 부린 건 참 드물었다. 육경한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마른기침했다.“나도 며칠 밤을 꼬박해서 체력이 안 돼.”“거짓말하지 마.”소원이 육경한을 반박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아까 욕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육경한이 멈칫하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소원이 돌아온 뒤로 육경한은 처음 이렇게 많이 웃어봤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성격은 변하기 힘들었다.“소원아,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지?”소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비아냥댔다.“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는데 내가 없다고 해봤자 믿어줄 것도 아니잖아.”육경한이 오히려 되물었다.“믿어도 돼?”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육경한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다.“소원아, 믿어도 되냐고.”육경한이 고집스럽게
모든 증오를 그녀는 더 깊고 먼 곳으로 숨겼다.두 사람이 헤어지려 할 때, 처음으로 묘한 감정이 솟구친 육경한은 긴 다리를 뻗어 문을 막으며 웃으며 말했다.“정말로 들어가게 안 해 줄 거야?”소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아까 분명 약속했잖아.”하지만 육경한은 성큼 한 발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이 화를 내려는 순간 그는 그녀를 풀어주며 가볍게 웃었다.“알아.”곧 육경한은 예의 바르게 물러나 문틀에 기대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내일 밤 데리러 올게.”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감정이 실린 ‘쾅’하는 문 닫는 소리였다.육경한은 꽉 닫힌 문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떠났다.그는 알지 못했다. 문 뒤에서 소원은 시종일관 영상 초인종을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려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 그녀는 창가로 달려가 육경한의 차가 떠나는 것도 직접 확인했다.검은색 마이바흐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마자 소원은 즉시 찬장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해 금고를 열고 별 기능이 없는 구식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아주머니, 아침 6시 비행기 표를 예약했어요. 지금 짐을 챙기세요. 조금 있으면 차가 아주머니와 유진이를 공항으로 데리러 갈 거예요. 도착 후에도 차가 준비되어 있을 테니 우리는 도착 후에 다시 만나요.”전화를 끊은 후, 소원은 유심 카드를 뽑아 라이터로 칩을 까맣게 태운 뒤 반으로 쪼개서 변기에 흘려보냈다.핸드폰 케이스는 칼 손잡이로 부숴 쓰레기봉투에 담아 가져갈 준비를 했다.그런 다음 미리 준비해 둔 짐을 꺼내 검은색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신중한 판단으로 소원은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가지 않고 아파트 단지의 임시 주차장으로 가서 눈에 띄지 않는 폭스바겐 차에 올랐다.그렇게 차를 몰고 뒷문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경비실의 사람들
당황한 표정으로 소원은 서현재를 바라보며 말했다.“서현재, 네가 왜 여기에...”하지만 서현재는 아무 말도 없이 지팡이를 꺼내 들어 몸을 일으킨 후 지팡이를 내려놓고 방금 지팡이를 짚었던 왼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주었다.소원은 그가 오른 손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일어서자마자 그녀는 서현재의 손에 이끌려 옆에 있던 한 대의 SUV에 탔다.걸어가는 도중, 소원은 서현재가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쪽 다리도 심하게 다쳐서 절뚝거리며 걷는다는 것을 발견했다.소원의 마음이 아려왔다.“현재야,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일단 차에 타요.”소원이 차에 오르자 서현재는 고개를 숙여 손을 내밀며 말했다.“키 줘요.”“키?”“네. 줘요.”그러자 소원은 멍하니 차 키를 건넸고 서현재는 차 키를 받아 짐가방을 실어 넣었다.차 문을 닫고 그는 뒷좌석에 앉으며 말했다.“비행기 타려고 했어요? 타지 마요. 내가 친구한테 부탁해서 가짜 탑승 기록을 만들어놨어요. 유진이 쪽도 비행기 기록을 취소했고 누나가 말한 장소로 유진이랑 아주머니를 데려가도록 차를 준비했어요.”그러더니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아마 지금쯤 출발했을 거예요.”소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서현재, 너 미쳤어? 나랑 엮이지 말고 빨리 떠나. 사람들이 보기 전에...”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차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서현재는 소원은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으며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했다.“가려면 같이 가요.”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흉터를 보자마자 소원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너 바보야? 진짜...”서현재는 한 손으로 소원은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그래서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우리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약속했잖아요. 누나 나 버리려는 거예요?”더 이상 소원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넌
이 순간, 어떤 감정 때문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아마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연민일 수도 아니면 무엇인가가 질적으로 변하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서현재의 손에 안심하고 맡겼다.서현재는 소원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차는 빠르게 달려 남안 도로로 들어섰다.소원은 열려 있는 선루프를 통해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을 바라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비현실감을 느꼈다.“우리 정말로 도망쳐 나온 거야?”“네. 나왔어요.”소원이 물었다.“넌 내가 오늘 밤 떠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오늘 간호사가 나한테 쪽지를 전해준 후에 짐작했어요.”떠나기 전에, 그녀는 서현재도 같은 병원에 있다는 걸 알고 간호사에게 쪽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그 쪽지에는 서씨 집안을 떠나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서진태는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 비록 친가족이라도 중요한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버릴 사람이었다.소원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1분이었다.그녀는 앞에 있는 LCD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저 화면으로 뉴스 볼 수 있지?”“볼 수 있어요.”“켜봐.”그녀가 말했다.화면이 켜지자 뉴스 속보, 경제 속보, 연예 속보에서 폭발적인 뉴스를 일제히 보도했다.유민 그룹의 대표와 한 여성이 클럽에서 촬영된 고화질 영상이 공개된 것이었다.화면 속 남자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했고 거의 학대에 가까웠다.밑에는 뜨거운 반응의 댓글들이 쏟아졌다.[이게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노는 방식인가?][이게 유민 그룹 대표 육경한이라고? 이건 좀 변태적인데?][여자가 자발적이었다 해도 이렇게 더러운 방식으로 놀면 안 되지...][육경한은 말을 너무 독하고 악랄하게 해. 협박처럼 들리는데? 그리고 명확하게 보이는 화질은 아니지만 누군가 맞고 있는 것 같은데?]“봤지?”소원이 말했다.“그날 내가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어.”소원은 육경한과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피할 수 없
그날 밤 이후로 윤혜인은 며칠 동안 이준혁을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같은 도시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혜인은 만약 이준혁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아마 평생 다시는 그와 마주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그날 밤 이준혁의 차가운 태도와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이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밤이 되어 눈을 감기만 하면 윤혜인은 이준혁이 폭약이 가득 실린 차에서 자신을 밀어내던 그 순간의 결연한 눈빛이 떠올랐다.그때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눈빛과 지금의 차갑고 무관심한 눈빛.‘지금의 준혁 씨는 정말 그 사람이 맞는 걸까?’오후가 되어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름이는 또다시 자신을 구해준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아마도 혈연의 끈 때문인지 아름이는 구출된 이후 몇 번이나 문현미의 상태를 물어보았다.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윤혜인은 아름이를 데리고 문현미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준혁이 내린 금지령 때문에 그녀는 아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우리 음식을 좀 만들어서 할머니 병실 밖에 두자. 그때 엄마가 들어가 볼게. 들어갈 수 없다면 우리 마음만 전해도 괜찮아.”그러자 아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 아름이 말 잘 들을게요.”딸의 순종적인 모습에 윤혜인의 마음이 아려왔다.사실 아름이는 아빠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홍 아줌마에게 전했었지만 곧 윤혜인과 이준혁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걸 눈치채고 윤혜인 앞에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윤혜인은 직접 국을 끓였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한 탓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윤혜인은 뜨거운 국에 데어 손에 물집이 두 개나 생겼다.그녀는 간단하게 붕대로 감싸고 국을 들고 아름이와 함께 여은이 운전하는 차에 타 병원으로 향했다.문현미가 있는 VIP층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문현미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혹여 아이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하여 윤혜인은 경호원에게 아름이를 언급했다.어쨌든 그녀가 목숨을 걸고 구한 아이이니 아름이를 보고 싶지 않을 이유
보온병을 막 내려놓고 돌아선 윤혜인의 눈에 바로 이준혁이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그 역시 문현미를 보러 온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혜인의 옆을 지나가며 이준혁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윤혜인은 잠시 멍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불렀다.“준혁 씨.”그제야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감정 없이 ‘응'이라고 답했다.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더욱 차갑고 냉정하게 보였다.윤혜인은 아름이를 데리고 문현미를 한번 보고 싶었다. 예전에 문현미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든 간에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구해주었으니 마땅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게다가 이준혁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문현미만이 윤혜인을 믿어주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이준혁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간절히 요청했다.“아주머니를 잠깐만 뵐 수 있을까요?”“안 돼.”이준혁은 냉담하게 말했다.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했다.“정말 잠깐만 볼게요. 방해하지 않을게요...”하지만 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볼일 없으면 떠나. 외부인은 받지 않으니까.”‘외부인...’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윤혜인은 손이 떨렸다.그들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외부인'이라는 말로 전부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조금 전까지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경호원들에게 말했던 윤혜인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는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해해서 죄송합니다.”곧 떠나려는 순간, 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외부 물건을 받으라고 했어?”그러자 경호원이 서둘러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사모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버려!”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돌아설 때, 윤혜인은 자신이 4시간 동안 끓이고 손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정성 들인 국이 병원의 쓰레기통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동안 그녀는 이준혁을 보통의 사고방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
“누가 그만둔다는 거예요?”그때 남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고개를 돌린 방민아는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경한 씨, 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겠다고 난리인데 유진이 오늘 몸 상태가 별로라 거절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버티면서 손찌검까지 하려 해요. 얼른 경비에게 끌어내라고 해요.”방민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육경한의 팔을 잡으며 위안을 얻으려 했지만 육경한이 티 나지 않게 팔을 거두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넋을 잃은 방민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준다.’“멀쩡해 보이는 데 왜 때린대요?”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상황 파악이 안 된 방민아가 여전히 이간질했다.“맞아요. 나 때리려 들면서 아이는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당신이 뭔데 막아서냐고, 경한 씨가 있어도 막지 못할 거라고 하더라고요.”육경한은 소원에게 묻는 대신 경비에게 물었다.“소원이 방민아 씨 때리려 했다는데 너희들도 봤어?”방민아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경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곳의 여주인이 누군지 안다면 경비도 그렇게 눈치 없이 굴진 않을 것이다.게다가 방민아가 서 있는 곳은 육경한 뒤였기에 경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함부로 그런 적 없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보안 팀장을 매수했으니 다른 경비들에게도 지시를 내렸을 거라고 생각한 방민아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아니요. 사모님은 방민아 씨 때리려고 한 적 없습니다. 방민아 씨가 사모님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어요.”경비가 대답했다.방민아는 이 모든 게 환청이라고 생각했다.‘이 경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호칭이 틀렸잖아. 소원 씨랑 사모님이어야지.’사모님이라고 부르기엔 살짝 이른 감이 있었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호칭이었다. 정신 승리를 마친 방민아가 약간 멍한 표정의 경비를 바라봤다. 그래도 눈치는 있다는 생각에 마른기침하며 경비에게 당부했다.“
방민아의 안색이 변했다.‘어젯밤이랑 오늘이랑 어떻게 같아?’여긴 육경한의 집이라 곳곳에 CCTV와 보이지 않는 눈들도 가득했기에 방민아의 말투도 다소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나 유진이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모함할 생각하지 마요.”“허허...”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아니. 어딜 들어가요.”방민아가 계속 질척거리는데 잠금장치까지 걸어간 소원이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열더니 자동문이 스륵 열렸다.“소원 씨가 어떻게... 어떻게 여길 들어갈 수 있지?”방만아가 넋을 잃고 묻자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세상이 변했거든요. 방민아 씨.”“그게... 무슨 말이에요?”방민아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으로서는 애써 그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방민아는 철저한 사람이라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내 뜻은 이따 유진이랑 아주머니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게 밝혀지면 내가 당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소원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댈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이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되레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에게 도망과 인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맞서서 싸우는 게 제일 빠른 효과적이었다.방민아는 소원이 뭘 믿고 설치는지 몰라 넋을 잃었다.‘뭔데 이렇게 당당해? 여기 경한 씨 집 앞인데. 내 미래 남편 집 앞이잖아. 어떻게 감히.’방민아는 소원을 얕잡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무슨 수로 나를 처단해요?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텐데?”방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혀가 쥐 날까 무섭지도 않아요?”“두고 봐요.”“뭘 두고 본다는 거예요...”소원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해서 방민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방민아 씨, 곧 후회한다에 한표 걸려는데 믿어볼래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잘만 하면 꼭 만나게 해줄게요.”방민아가 말했다.소원이 망가질 거라는 희열에 잠겨있는 방민아가 느긋하게 보충했다.“어차피 망가질 몸 차리리 우리 오빠에게 망가지는 게 낫지 않아요? 남자구실을 못 하니 사실 잤다고 해도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건 아니니까.”‘허...’방민기는 남자구실을 못 하긴 했지만 변태 성욕이 강한 사람이라 몸을 쓰지 못할수록 사람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일반인도 견뎌내지 못하는 걸 소원이 버텨낸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방민아가 바라는 것도 딱 그거였다.“방민아 씨는 언제 보나 말을 참 잘해요.”소원이 촘촘한 치아를 들어내고 웃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어떡하죠?”“못 믿을 게 뭐가 있어요.”방민아는 그런 소원이 그저 우습다고 생각했다.“내 말 듣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요?”“지금은 안 돼요.”방민아가 단칼에 거절했다.“일단 오빠 달래주고 3달 뒤에 다시 보여줄게요.”“3달이요?”소원이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 석 달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방민아를 속내를 들켜도 전혀 난감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왜 못 버텨요? 버텨야죠.”“사실 남자는 달래기 쉬워요. 오빠는 조금만 잘해주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방민기 씨든 방민아 씨든 더는 못 믿겠어요. 꿍꿍이가 좀 많아야 믿죠.”“당신 정말...”방민아는가 욕설을 퍼부으려다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평생 아이 볼 생각하지 마요.”“오늘 꼭 아이를 봐야겠다면요?”소원이 말했다.“웃겨라. 무슨 자격으로요?”방민아는 소원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니,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방민아는 소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당신이 왜 여기에.”어젯밤 방민기에게 호되게 당했을 사람이 멀쩡하게 이곳에 서 있는 게 이상했다.방민아가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방민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방민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이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도 어젯밤 방민기에게 당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멍이 든 걸 봐서는 당해도 호되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방민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방민아 씨.”소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방민아를 또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또 만났네요 같은 인사말은 생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민아가 소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어딜 들어가요.”방민아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문을 여는 카드가 먹통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육경한에게 전화하려는데 미처 전화하기도 전에 소원을 발견한 방민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 말했다.“들어가서 유진이 좀 보고 올게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민아의 손을 뿌리쳤다.“누가 보여준대요?”방민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따라 갑자기 이상하게 나오는 소원이 신기했다.‘여기가 언제 소원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곳이 됐지?’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하라는 대로 하면 유진이 보여준다면서요.”방민아가 그런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소원이 말했다.“네. 했어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유진이 보여준다고요.”방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소원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왜 갑자기 헛소리하고 그래요?”소원이 대꾸했다.“열은 안 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방민아의 태도는 소원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방민아는 애초부터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소원을 모욕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유진을 앞세웠을 뿐이다.분명 방민아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었고 육경한을 보면 멀리 피해 다녔지만 방민아는 그래도 소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단순
통화를 마친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여보, 아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대상에 당첨됐다며 세계 일주 비용을 협찬해 주겠대.”“정말?”“정말이야. 미우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검색해 봤더니 정규적인 대기업이더라고.”소원이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선 육경한을 바라보자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데 어떡해.”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늘하던 아까와는 달리 딴사람이 된 육경한은 어딘가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소원은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대뜸 이렇게 물었다.“이제 유진이 보러 가도 돼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 거기가 우리 집이 될 거야.”말 한마디에 육경한은 소원의 향후 생활을 결정해 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했고 아까 봤던 모습은 그저 착각이었다.소원은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가 왜 병에 들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차 안.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백업 동영상은 내게 맡겨.”육경한이 토론이 아닌 명령을 내리자 소원이 멈칫했다.“왜 너한테 맡겨야 하는데?”소원은 꿍꿍이 많은 방민아가 아줌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일단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방민아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벗겨내 더는 착한 척할 수 없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영상을 쓸 필요는 없어. 아직 육씨 가문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고. 이때 영상을 터트리면 다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 동영상은 절대 유포할 수 없어.”육경한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잇속만 챙기는 약삭빠른 장사꾼이었다.소원은 두 사람이 비록 거래했지만 그녀가 방씨 가문에 해를 입히는 건 육경한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방민아는 결국 육경한의 아내가 되지 못했지만 뼈는 끊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