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온병을 막 내려놓고 돌아선 윤혜인의 눈에 바로 이준혁이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그 역시 문현미를 보러 온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혜인의 옆을 지나가며 이준혁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윤혜인은 잠시 멍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불렀다.“준혁 씨.”그제야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감정 없이 ‘응'이라고 답했다.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더욱 차갑고 냉정하게 보였다.윤혜인은 아름이를 데리고 문현미를 한번 보고 싶었다. 예전에 문현미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든 간에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구해주었으니 마땅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게다가 이준혁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문현미만이 윤혜인을 믿어주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이준혁이 불쾌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간절히 요청했다.“아주머니를 잠깐만 뵐 수 있을까요?”“안 돼.”이준혁은 냉담하게 말했다.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했다.“정말 잠깐만 볼게요. 방해하지 않을게요...”하지만 윤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볼일 없으면 떠나. 외부인은 받지 않으니까.”‘외부인...’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윤혜인은 손이 떨렸다.그들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외부인'이라는 말로 전부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조금 전까지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경호원들에게 말했던 윤혜인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녀는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해해서 죄송합니다.”곧 떠나려는 순간, 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외부 물건을 받으라고 했어?”그러자 경호원이 서둘러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사모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버려!”남자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돌아설 때, 윤혜인은 자신이 4시간 동안 끓이고 손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정성 들인 국이 병원의 쓰레기통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동안 그녀는 이준혁을 보통의 사고방
왜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윤혜인을 이리도 상처받게 한 것이냐고 말이다.아름이는 울면서 마음속에 있던 말을 참지 못하고 쏟아냈다.“나쁜 아빠! 엄마를 슬프게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아빠를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는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예요!”아름이는 울며 발끝을 세워 이준혁을 향해 주먹질하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순간 바닥에 엎어지며 아이는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여은이 재빠르게 움직여 윤혜인보다 먼저 아름이를 안아 올렸다.그들이 서 있던 위치에서 봤을 때 마치 이준혁이 아름이를 짜증스럽게 밀어낸 것처럼 보였다.이 행동에 윤혜인은 즉각 분노를 터뜨렸다.“준혁 씨, 뭐 하는 거예요?!”그녀는 이준혁을 세게 밀쳤다. 예상치 못한 것은 그 키 큰 남자가 윤혜인이 밀쳤다고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그러나 그 순간 윤혜인은 이런 디테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윤혜인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준혁 씨, 내가 정말 잘못 봤어요. 당신을 믿은 내가 바보였어요!”그가 냉담하게 대했을 때, 심지어 자신이 끓인 국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조차 그녀는 울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윤혜인은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왜 우리 아름이까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굵은 눈물이 한 방울씩 그녀의 뺨을 타고 떨어졌고 그 눈물은 하나하나 이준혁의 심장을 때렸다.이준혁은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르며 자신을 애써 무심하게 서 있게 만들었다.여은이 울고 있는 아름이를 안은 채 윤혜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아가씨, 우리 가요.”윤혜인은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 단호하게 돌아섰다.그 뒤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준혁이 서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고 그의 턱 근육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겉으로는 냉정한 척하며 그는 다시 한번 아름이와 윤혜인을 지나쳐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마자 그의 큰 몸이 갑자기 ‘쿵'하며
하지만 이준혁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 윤혜인과 아름이의 안전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어야 했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버렸다고 말이다.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평생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을 직접 밀어내야 한다는 고통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이준혁은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며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구운은 갔어?”“갔습니다. 아까 모퉁이에서 전부 지켜보더라고요. 사모님을 따라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주훈의 말을 가로채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그 호칭, 앞으로는 절대 쓰지 마.”습관이 되어 윤혜인을 종종 사모님이라 부르던 주훈은 즉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혜인 씨라고 부르겠습니다.”그제야 이준혁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이 시점에서 한구운도 감히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여은이 있는 한, 쉽게 이득을 볼 수 없을 거고.’주훈은 계속해서 보고했다.“이 매니저님께서는 간호사를 매수해 병실 상황을 알아보려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미리 준비해둔 대로 잘 대처했고요.”병상에 누워 있는 여자는 문현미와 닮은 점이 7할이나 되었다.하지만 진짜 문현미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이미 해외로 이송돼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문현미가 깨어났다고 발표한 것은 이천수가 겁먹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주훈은 덧붙였다.“그리고 주진희 씨가 살해당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시신은 800㎞ 떨어진 저수지에서 발견됐습니다.”그러자 더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이준혁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금은 건드리지 말고 소문을 막은 상태에서 주 집사님의 장례를 잘 치러 줘.”“알겠습니다, 대표님.”이준혁은 마비된 다리를 움직여 억지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머릿속이 어지러워 하마터면 균형을 잃을 뻔했다.주훈은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조금 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윤혜인은 한 걸음 물러서며 검사지를 뒤로 숨기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쪽이랑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한구운은 손을 헛짚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왜 혼자 검사를 받았어, 혜인아?”“이구운 씨, 우리는 서로 친하게 지낼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지난번 아름이 일 이후로, 윤혜인은 한구운을 마음속에서 이미 임설희나 원지민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고 있었다.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한구운은 더욱이 영리하게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짙어진 눈빛으로 그는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남도 아니잖아, 그렇지?”윤혜인은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실감하며 지난번에 자신을 그렇게 협박해놓고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구운 씨가 말하는 남도 아니라는 게, 제 딸이 실종됐을 때 그 소식을 이용해 저를 협박했던 일을 말하는 건가요?”“...”한구운은 그녀의 반박에 말문이 막혔고 입술을 떨며 해명하려고 했다.“그건 오해였어, 혜인아. 난 너를 협박하려고 한 게 아니었어. 나는 단지 네가 내 곁에 있어 주길 원했을 뿐이야. 그 납치범에 대해서도 나는 당시 잘 몰랐고 조사 중이었어...”“됐어요.”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대화할 기운이 없었는지라 차갑게 말했다.“이구운 씨가 말하는 오해라는 건, 제 딸이 실종됐을 때 찾아와 저를 협박하고 제가 파렴치한 불륜녀로 전락하길 바랐던 그 일을 말하는 건가요?”그러자 한구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뭐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맞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미안해.”고민 끝에 이준혁은 사과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낸 건 내 잘못이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때 한 말로 너를 화나게 했던 것 같아.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윤혜인은 한구운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
그리고 이준혁은 이씨 집안이 원지민의 아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게 무슨 신호일까?한 남자가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그 여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아마도 이준혁은 원지민이라는 말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지민은 이제 그들과 확실히 선을 긋고 더 이상 그들의 계획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하지만 윤혜인은 그럴 수 없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만으로도 그녀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야.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구운은 여전히 의심을 품은 채 윤혜인을 지켜보고 있었다.윤혜인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이준혁이 정말로 윤혜인을 버렸다면 그녀는 더 이상 큰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윤혜인은 손목을 힘껏 뿌리치며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산부인과만 눈에 보여요? 거기는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여성의학과도 있는 곳이에요. 못 보셨나요?”곧 한구운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실제로 그곳은 산부인과 외에도 여성의학과가 함께 있는 곳이었다.윤혜인은 한구운이 극도로 교활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침착하게 반문했다.“아이를 낳은 성인 여성이 여성의학과 검사를 받는 게 뭐가 이상하죠?”“좋아, 내가 잘못 봤다 치자. 그럼 방금 VIP 병동 앞에서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겠지?”윤혜인이 창백해지는 것을 본 한구운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그 자식은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거야? 차라리 나를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몇 명의 여자와 잠깐 놀더라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이구운 씨, 제가 무엇을 하든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윤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전에 제가 충분히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확실히 알려줄게요! 나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친구조
“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요?”윤혜인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이구운 씨가 그 비열한 수단을 쓴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준혁 씨와 비교할 자격을 잃었어요.”“왜 내가 자격이 없다는 거야!?”한구운의 눈동자는 뒤틀린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이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참지 못했을 것이다.맑은 눈빛으로 윤혜인은 그를 꿰뚫어 보았다.“그 사람은 회사를 위해 좋은 일을 했어요. 하지만 이구운 씨와 이천수 씨는 대체 어떤 업적을 세웠나요? 주주들을 회유하고 회사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할아버지의 유언을 위조하고 외부 세력과 결탁해 이선 그룹의 주식을 헐값에 팔아치우면서 더 많은 지지자를 얻으려고 했죠...”그녀는 경멸하듯 말했다.“당신이 한 일 중에서 준혁 씨와 비교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말을 마친 윤혜인은 한구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떠났다.표정이 극도로 일그러진 채로 한구운은 윤혜인의 등을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후회하게 될 거야! 너를 버린 남자를 그렇게 감싸다니...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그러자 윤혜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했다.“나는 그저 사실을 말한 거예요. 우리 둘 사이의 감정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한구운은 할 말을 잃었다.“이구운 씨, 많은 일들이 한 번 잘못되면 끝없이 잘못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충고할게요.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가지 마세요.”해야 할 말을 다 한 윤혜인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떠났다.집에 돌아온 후, 윤혜인은 하루가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오늘 아름이가 충격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윤혜인은 아이의 방에 가서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아름이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고 홍 아줌마가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다. 가끔씩 질문을 하며 아름이는 여전히 활발하고 사랑스러워 보였고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은 것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윤혜인은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아름아, 엄
‘내가 준혁 씨를 오해한 거였어...’ 윤혜인의 마음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아름이가 다쳤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이 모든 것이 오해였다니!아름이는 윤혜인의 복잡한 표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가 화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작은 손을 뻗어 윤혜인의 손가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작게나마 말했다.“엄마,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 네?”윤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름이의 손을 다시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화난 게 아니야. 엄마가 삼촌을 오해한 거였어.”“그럼 엄마가 삼촌한테 사과하는 거 아니예요?”아름이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아이는 어릴 때부터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윤혜인은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가 기회를 봐서 사과할게.”“사과하고 나서도 아름이는 엄마랑 같이 삼촌을 미워할 거예요.”아름이는 작은 주먹을 꼭 쥐며 결연하게 말했다.“왜냐하면 삼촌이 엄마의 국을 버리게 했잖아요.”윤혜인은 아름이의 순진한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하루 종일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많은 순간 아름이는 작은 어른처럼 느껴졌다.윤혜인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도 아름이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름아, 엄마가 할 얘기가 있어.”“뭔데요, 엄마?”“사실은...”조금 불안한 듯 윤혜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엄마 뱃속에 작은 아기가 있어.”아름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뱃속에요?”아직 어린아이에게는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아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윤혜인의 잠옷을 들어 올리며 여기저기 살펴보았다.“엄마, 아기는 어디 숨었어요? 아름이는 왜 못 봐요?”윤혜인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아름아, 아기는 아직 아주 작은 배아 상태라서 배 속에 있는데 네가 볼 수는 없을 거야.”아름이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주 작아요? 저 어렸을 때처럼 작아요?”“응.”윤혜인은 동화 같은 말투
아이의 순진한 말에 윤혜인은 순간 멈칫했다.그녀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지금은 잘 모르겠어.”아름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럼 엄마, 왜 아빠한테 아기 얘기 안 했어요? 아빠도 나처럼 아기를 많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사실은 엄마랑 아빠가 지금 조금 사이가 안 좋아서... 엄마는 이 아기들이 정말 좋아.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조금 힘들어.”“아기들이라고요? 두 명이라는 거예요?”아름이는 흥분하며 물었다.“우리 반에 있는 영우랑 영준이 형제처럼 똑같이 생겼어요?”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그렇대.”“엄마, 정말 대단해요!”아름이는 한동안 들떠 있었지만 곧 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엄마, 아기들을 원하지 않는 거예요?”윤혜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기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아름이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과 갈망이 강했기 때문에 새로 태어날 아기들도 같은 문제를 겪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그녀는 아이들이 다시 아빠 없이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엄마, 저 작은 의견 하나 말해도 돼요?”아름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물론이지. 말해 봐.”“사실 아기 아빠가 우리처럼 아기를 많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아요.”애교 섞인 말로 아름이가 말을 이어갔다.“우리에겐 엄마가 있잖아요. 그리고 삼촌도 외할아버지도 홍 아줌마도 지윤이 이모도 있고요...”아름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말했다. 마침내 손가락이 다 채워지자 두 손바닥을 펴서 윤혜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엄마, 봐요.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그러니까 엄마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윤혜인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마음속이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졌다.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아기들이 아름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 보니 아름이가 걸어온 길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아름이는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그리
소원이 집을 나선 후,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영숙에게 연락해 선미의 거처를 물었다.주소를 받은 소원은 택시를 타고 선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소원은 내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사실 처음에는 소진용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소진용은 늘 강인한 사람이었다.한이 그룹이 그동안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었지만 소진용은 늘 이를 버텨냈었다.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한 번은 큰 실수가 발생해 회사가 파산하고 수십억대의 빚을 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버지는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었다.“걱정하지 마라.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일 뿐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있잖아. 파산하면 어때? 천천히 갚으면 되고 집을 팔고 전세로 가도 괜찮아. 결국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결국 그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고 소진용의 뛰어난 스트레스 대처 능력과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큰 힘이 되었다.그런 소진용이 왜 그때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파산과 청산을 맞닥뜨린다 해도 과거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게다가 그녀와 전미영에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은 소진용답지 않은 행동이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문투성이였다.머리가 터질 듯 아픈 소원은 눈을 감고 천천히 진정하려고 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잠시 후 소원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차량이 멈춰 있는 순간, 옆 차선의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현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소원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지만 ‘현재야’하고 나지막한
“알겠어요, 언니. 꼭 그렇게 할게요.”강민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둘은 어느새 안상철의 집 근처까지 도착했다.이곳은 20년 넘게 재개발되지 않은 오래된 동네였다. 현재는 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만약 철거가 시작되고 나서 이곳에 왔다면 안상철의 집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안상철의 집은 매우 낡은 삼층짜리 오래된 건물 안에 있었다.소원은 3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과연 안상철이 여전히 여기 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게다가 안상철이 정말로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었다.잠시 후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나타났다.노인은 물었다.“누구를 찾으시는 겁니까?”소원은 노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집 안을 둘러봤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르신, 혹시 여기가 안상철 아저씨 댁인가요?”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상철? 그런 사람 모르오.”소원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어르신, 이 집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그러나 노인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우리 집에는 나랑 아내밖에 없소.”소원은 다시 물었다.“그럼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노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곧 소원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어르신,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돈 달라는 거요? 돈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찾으시오.”그러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소원은 한숨을 쉬었다.“...”안상철은 이미 이사 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단서가 끊긴 것이다.강민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제가 나중에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안상철 가족의 출입국 기록을 한번 확인해볼게요.”하지만 강민혜는 팀장이 아니라 일반 경찰관이었기에 이런 일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 했다.이번에는 주소를 얻은 후 바로 오긴 했지만 그녀
“찾을 수 있을 거예요.”소원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그건 예전에 안상철의 딸 덕분이었다.한 번은 그 아이가 병을 앓던 날, 폭우까지 내리던 날씨 속에서 안상철이 딸을 데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마침 그때 소지용이 안상철에게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걸었고 통화 중 안상철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소진용은 사정을 듣고 바로 차를 몰아 그 아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줬다.소원 역시 그때 차에 동승했으며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이를 돌봐줬던 기억이 있었다.“그럼 다행이네요.”강민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그녀는 당찬 성격으로 팀에서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소원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었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민혜 씨, 괜찮으면 저를 언니라고 불러요. 소원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게 들리잖아요.”강민혜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했다.“그럼 제가 소원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강민혜는 소원과 자신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소원은 명문가의 장녀였고 자신은 후원이 필요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생활 방식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하지만 다른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공적인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그녀도 소원만큼은 다르게 느꼈다.직접 만나본 소원은 소진용처럼 정직하고 선하며 강한 사람이었다.소원 가족은 강민혜에게 은인이었고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민혜 씨 같은 동생 있었으면 참 좋았겠어요.”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렇게나 버거운 시간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더 안정적이었을 것이다.소원은 강민혜를 보며 어릴 적 부모님이 동생을 낳으셨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난 아기가 떠올랐다.그 사건으로 온 가족이 한동안 큰 슬픔에 잠겼었다.비록 아무도 그 아기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잊지 못하
“알겠어요, 여보.”윤혜인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 그리고 다음 주에 센디오로 출장 가야 해.”윤혜인은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비록 이씨 집안은 재력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산후 우울증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이다.일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다행히 이준혁은 그녀의 복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다른 남편들처럼 집이 넉넉하니 아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며 남편을 보살피라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윤혜인의 복직을 먼저 제안한 사람도 이준혁이었다.그는 그녀의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말했다.“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일하러 나가도 돼.”윤혜인은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다음 주?”이준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일정 조정해서 데려다줄게.”“괜찮아요. 당신 일도 중요한데요.”윤혜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을 제쳐 두는 게 부담스러웠다.“걱정 마. 잘 조정할 테니까. 내 아내만큼 중요한 건 없어.”이 말에 윤혜인의 가슴은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알겠어요. 내 일도 이틀 정도 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 이번 기회에 휴가처럼 보내요.”아이가 생긴 이후로 둘이 함께 여행을 간 건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게다가 집에는 문현미와 홍승희를 비롯한 여러 도우미들이 있어 아이들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좋아. 벌써 기대돼.”이준혁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여보, 지난번에 내가 사준 그 잠옷 가져갈 수 있어?”“그거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그 잠옷은 일종의 코스튬 같은 옷이었다.그녀가 과거 이선 그룹에서 이준혁의 비서로 일했을 때 입던 정장을 변형한 스타일이었다.하지만 원래 정장보다 훨씬 노출이 심했고 필요한 부분이 다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응. 난 당신이 그거 입은 모습이 너무 좋아.”그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그 잠옷을 입은 윤혜인을 보면 그는 스스로를
소원은 육경한이 회사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는 간단한 집안 차림새를 하고 있었고 서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한참 동안 서재에서 일하고 있었던 듯했다.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소원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머리도 제대로 못 빗고 뭘 이렇게 서둘러?”소원의 심장이 조여왔다.강민혜와 함께 조사하려는 일이 그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가 눈치채지 않게 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혜인이가 같이 잠깐 나가자고 해서.”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육경한은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는 도우미의 손에서 국을 받아 들고는 말했다.“기운 좀 보충해. 어젯밤에 힘 좀 썼잖아. 마시고 나가.”소원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가 의심할까 봐 얌전히 국을 받아들고 마셨다.“다 마셨어.”곧 도우미가 다가와 그릇을 치웠고 육경한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잠깐 기다려. 옷 갈아입고 데려다줄게.”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소원이 급히 말했다.“아니, 괜찮아.”“응?”육경한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원은 손바닥을 꽉 쥔 채 아무 설명 없이 말했다.“그냥 싫어.”육경한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알겠어. 그럼 기사 불러줄게.”소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혜인이가 차 보내줬어.”그 말을 듣고서야 육경한은 걱정을 조금 내려놓았다. 윤혜인의 집안 차량이라면 안전도가 높아 별문제는 없을 테니 말이다.“그래, 다녀와.”그는 소원을 현관까지 배웅하며 그녀가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그녀는 미리 계획해 둔 덕분에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윤혜인의 스카이 별장은 이곳에서 멀지 않아 그녀가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량이 도착했다.소원은 전화를 걸었다.“혜인아, 고마워. 나 나왔어.”“고맙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야 해, 알겠지?”윤혜인은 소원을 걱정하고
소원은 육경한이 그렇게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결국 남자는 활이 이미 당겨진 상태라면 멈추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신체적인 변화는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소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그는 더 이상 손발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고 꽤나 얌전하게 행동했다.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듯했다.별장에 도착하자 소원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육경한의 손에 손목이 잡혀 멈춰야만 했다.육경한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내가 너를 봐줬는데 너는 나 안 도와줄 거야?”소원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계하며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줘? 설마 차 안에서 또 하려는 건 아니지?”“아니야.”육경한은 단호하게 부정하며 말했다.“내 방패가 돼 달라는 거야.”소원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사이 육경한은 차에서 내려 소원을 품에 안아 올렸다.그러자 소원은 육경한의 품에 움츠러들었고 그가 그녀에게 덮어준 재킷이 적당히 민망한 것을 가려주었다.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했다.소원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기에 그를 자극하면 자신의 행동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남자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간 후 침대에 던지듯 올려놓았다.쿵 소리가 나며 소원은 부드러운 침대에 깊이 파묻혔다.“뭐 하는 거야!”놀란 소원이 외쳤고 육경한은 몸을 숙여 그녀를 눌렀다.“숙제 계속해야지.”소원은 몸부림쳤다.“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남자는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피를 빨아낼 듯 굶주려 있었다. 소원은 찌릿찌릿한 통증을 느꼈다.“차 안에서는 안 한다고 했지. 집에서는 안 한다고는 안 했어.”그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후 모든 말은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사라졌다.지칠 대로 지친 소원은 그만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육경한
육경한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옅게 미소 지었다.“넌 내 아내야. 아내랑 하는데 무슨 수단이 필요하겠어?”그는 소원의 부드러운 몸을 따라 손길을 내려보내며 신중하게 그녀의 모든 민감한 부분을 자극했다.두 사람의 몸은 이미 한 번 완벽히 맞아 들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지난번 그 불꽃 같은 밤 이후, 이 감정은 다시금 불타오르고 있었다.육경한은 그녀의 몸을 자기 몸처럼 잘 알고 있었다.어디를 만지면 그녀가 민감해질지, 어디를 자극해야 몸이 반응할지, 육경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소원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당... 당신 진짜 미쳤어! 이 손 치워!”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거칠게 반항하는 모습조차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곧 그는 소원의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가 부드럽고 달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불편해?”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으며 그녀의 목을 가볍게 흡입했다.잠시 후, 육경한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앞에 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불편해?”소원은 그의 손가락 끝에 맺힌 흔적을 보자 얼굴이 붉어졌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무슨 병 있는 거 아니야?!”육경한은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더욱 흐뭇해했다.“그래, 맞아. 난 너한테만 병이 있어.”그는 속으로 말했다. 그건 그리움의 병이었고 밤마다 소원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는 병이었다.소원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뼛속까지 각인된 병이었다.육경한은 늘 후회했다.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기회를 얻어 소원에게 더 잘 대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그녀가 자신을 사랑했던 그 마음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이다.소원은 육경한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그건 누구라도 반응했을 거야. 착각하지 마.”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육경한의 행동에 기가 차 웃음을 흘렸다.“뭐 이런 거로 잘난 척하는 거야? 차라리 클럽에 가서 남자 찾는 게 낫겠다. 그 사
소원이 이렇게 말하자 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에 한층 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알잖아. 난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그가 방민아와 결혼했던 건 단지 소원 때문에 완전히 망가진 마음 때문이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 선택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방씨 가문에 대한 미련은 이미 오래전에 끊어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죄책감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육경한은 방씨 가문의 구세주가 아니다.그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남매를 계속 뒤치다꺼리해줄 이유도 없었다.그가 방민아를 무시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하지만 방민아는 변해 있었다.사랑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바뀌는 걸까?누군가는 스스로 치유의 길을 선택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길을 선택한다.결국 방민아와 육경한은 닮아 있었다.둘 다 사랑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모한 존재들이었다.소원은 천천히 육경한을 올려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그렇겠지. 당신은 정이 없는 대신 누구에게나 쉽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잖아. 도처에 널린 것들에겐 아무런 도전심이 안 들겠지.”그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번뜩였다. 분노가 서려 있었다.그는 오늘만큼은 감정을 억누르고 소원의 말을 받아넘기려 했지만 그녀의 한마디는 육경한의 신경을 건드렸다.“그래, 맞아.”그는 낮은 목소리로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난 가시 돋친 걸 좋아하거든.”이와 동시에 그는 손을 들어 소원의 턱을 붙잡아 고정시켰다.“그래서 네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거야.”소원이 몸을 비틀며 불쾌한 듯 외쳤다.“이 손 놔!”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읍...!”소원은 온몸으로 저항하며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반항을 가볍게 제압했고 손놀림 하나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그의 손이 피부 위를 스치자 소원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그녀는 육경한의 입술을 물었고 겨우 두 마디를 뱉었다.“이...
소원은 육경한의 반응에 살짝 놀랐다.적어도 그녀를 질책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으니 말이다. 아니면 무언가 벌이라도 내릴 줄 알았는데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평온했다.마치 정말 단순히 소원을 데리러 온 것처럼 보였다.사실 방민아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육경한이 그녀가 원본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소원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그저 방민아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을 심고 싶었을 뿐이다.육경한은 조용히 차 문을 열었다. 소원도 거부하지 않았다.애초에 그녀는 오늘 육씨 가문의 차를 타고 온 상황이었다.운전기사가 앞 좌석에 앉아 차를 몰았고 두 사람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겉으로 보면 아름다운 남녀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벽이 존재했다.오랜 침묵 끝에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네가 맞췄어. 네가 원본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난 막지 않았어.”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영상을 방현수에게 넘겨줄 때,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소원이 그 영상을 터뜨리지 않을 거라는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왜냐하면 만약 영상이 퍼지면 방씨 가문과 밀접하게 협력하는 미우 그룹이 연루될 것이 분명했고 육연주처럼 가까운 가족도 휘말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너무 많은 문제를 동반한 일이었다.하지만 그는 도박에 졌다.소원의 마음속에는 육경한을 위한 단 1%의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미우 그룹 또한 그녀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왜 그 사람들의 죄악을 덮어주고 그들이 편히 살게 둬야 하지?”그날의 치욕을 떠올리자 소원은 눈빛이 붉게 물들었고 온몸이 떨렸다.“몇 번이나! 당신들 눈엔 다른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하찮은 거야?”“다른 사람은 나와 상관없어.”육경한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잘생긴 얼굴에는 얼음 같은 무표정만이 드리워졌다.소원은 그가 이제서야 그녀를 질책할 것이라 생각하며 말을 기다렸다.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하지만 이번엔 네가 있어서, 난 그냥 두 눈을 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