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준혁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 윤혜인과 아름이의 안전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어야 했다.이준혁이 윤혜인을 버렸다고 말이다.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평생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을 직접 밀어내야 한다는 고통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이준혁은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며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구운은 갔어?”“갔습니다. 아까 모퉁이에서 전부 지켜보더라고요. 사모님을 따라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그러자 이준혁은 갑자기 주훈의 말을 가로채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그 호칭, 앞으로는 절대 쓰지 마.”습관이 되어 윤혜인을 종종 사모님이라 부르던 주훈은 즉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혜인 씨라고 부르겠습니다.”그제야 이준혁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이 시점에서 한구운도 감히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여은이 있는 한, 쉽게 이득을 볼 수 없을 거고.’주훈은 계속해서 보고했다.“이 매니저님께서는 간호사를 매수해 병실 상황을 알아보려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미리 준비해둔 대로 잘 대처했고요.”병상에 누워 있는 여자는 문현미와 닮은 점이 7할이나 되었다.하지만 진짜 문현미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이미 해외로 이송돼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문현미가 깨어났다고 발표한 것은 이천수가 겁먹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주훈은 덧붙였다.“그리고 주진희 씨가 살해당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시신은 800㎞ 떨어진 저수지에서 발견됐습니다.”그러자 더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이준혁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금은 건드리지 말고 소문을 막은 상태에서 주 집사님의 장례를 잘 치러 줘.”“알겠습니다, 대표님.”이준혁은 마비된 다리를 움직여 억지로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머릿속이 어지러워 하마터면 균형을 잃을 뻔했다.주훈은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조금 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윤혜인은 한 걸음 물러서며 검사지를 뒤로 숨기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쪽이랑 상관없는 것 같은데요?”한구운은 손을 헛짚었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왜 혼자 검사를 받았어, 혜인아?”“이구운 씨, 우리는 서로 친하게 지낼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지난번 아름이 일 이후로, 윤혜인은 한구운을 마음속에서 이미 임설희나 원지민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고 있었다.모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한구운은 더욱이 영리하게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짙어진 눈빛으로 그는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남도 아니잖아, 그렇지?”윤혜인은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실감하며 지난번에 자신을 그렇게 협박해놓고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구운 씨가 말하는 남도 아니라는 게, 제 딸이 실종됐을 때 그 소식을 이용해 저를 협박했던 일을 말하는 건가요?”“...”한구운은 그녀의 반박에 말문이 막혔고 입술을 떨며 해명하려고 했다.“그건 오해였어, 혜인아. 난 너를 협박하려고 한 게 아니었어. 나는 단지 네가 내 곁에 있어 주길 원했을 뿐이야. 그 납치범에 대해서도 나는 당시 잘 몰랐고 조사 중이었어...”“됐어요.”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대화할 기운이 없었는지라 차갑게 말했다.“이구운 씨가 말하는 오해라는 건, 제 딸이 실종됐을 때 찾아와 저를 협박하고 제가 파렴치한 불륜녀로 전락하길 바랐던 그 일을 말하는 건가요?”그러자 한구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뭐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사실 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맞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미안해.”고민 끝에 이준혁은 사과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낸 건 내 잘못이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때 한 말로 너를 화나게 했던 것 같아.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윤혜인은 한구운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
그리고 이준혁은 이씨 집안이 원지민의 아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게 무슨 신호일까?한 남자가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그 여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아마도 이준혁은 원지민이라는 말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지민은 이제 그들과 확실히 선을 긋고 더 이상 그들의 계획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하지만 윤혜인은 그럴 수 없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만으로도 그녀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야.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구운은 여전히 의심을 품은 채 윤혜인을 지켜보고 있었다.윤혜인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이준혁이 정말로 윤혜인을 버렸다면 그녀는 더 이상 큰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윤혜인은 손목을 힘껏 뿌리치며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산부인과만 눈에 보여요? 거기는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여성의학과도 있는 곳이에요. 못 보셨나요?”곧 한구운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실제로 그곳은 산부인과 외에도 여성의학과가 함께 있는 곳이었다.윤혜인은 한구운이 극도로 교활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침착하게 반문했다.“아이를 낳은 성인 여성이 여성의학과 검사를 받는 게 뭐가 이상하죠?”“좋아, 내가 잘못 봤다 치자. 그럼 방금 VIP 병동 앞에서 있었던 일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겠지?”윤혜인이 창백해지는 것을 본 한구운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말했다.“그 자식은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거야? 차라리 나를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몇 명의 여자와 잠깐 놀더라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이구운 씨, 제가 무엇을 하든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윤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전에 제가 충분히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확실히 알려줄게요! 나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친구조
“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요?”윤혜인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이구운 씨가 그 비열한 수단을 쓴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준혁 씨와 비교할 자격을 잃었어요.”“왜 내가 자격이 없다는 거야!?”한구운의 눈동자는 뒤틀린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이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참지 못했을 것이다.맑은 눈빛으로 윤혜인은 그를 꿰뚫어 보았다.“그 사람은 회사를 위해 좋은 일을 했어요. 하지만 이구운 씨와 이천수 씨는 대체 어떤 업적을 세웠나요? 주주들을 회유하고 회사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할아버지의 유언을 위조하고 외부 세력과 결탁해 이선 그룹의 주식을 헐값에 팔아치우면서 더 많은 지지자를 얻으려고 했죠...”그녀는 경멸하듯 말했다.“당신이 한 일 중에서 준혁 씨와 비교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말을 마친 윤혜인은 한구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떠났다.표정이 극도로 일그러진 채로 한구운은 윤혜인의 등을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후회하게 될 거야! 너를 버린 남자를 그렇게 감싸다니...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그러자 윤혜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했다.“나는 그저 사실을 말한 거예요. 우리 둘 사이의 감정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한구운은 할 말을 잃었다.“이구운 씨, 많은 일들이 한 번 잘못되면 끝없이 잘못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충고할게요.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가지 마세요.”해야 할 말을 다 한 윤혜인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떠났다.집에 돌아온 후, 윤혜인은 하루가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오늘 아름이가 충격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윤혜인은 아이의 방에 가서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아름이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고 홍 아줌마가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다. 가끔씩 질문을 하며 아름이는 여전히 활발하고 사랑스러워 보였고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은 것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윤혜인은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아름아, 엄
‘내가 준혁 씨를 오해한 거였어...’ 윤혜인의 마음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아름이가 다쳤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이 모든 것이 오해였다니!아름이는 윤혜인의 복잡한 표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가 화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작은 손을 뻗어 윤혜인의 손가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작게나마 말했다.“엄마,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 네?”윤혜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름이의 손을 다시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화난 게 아니야. 엄마가 삼촌을 오해한 거였어.”“그럼 엄마가 삼촌한테 사과하는 거 아니예요?”아름이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아이는 어릴 때부터 잘못한 사람이 사과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윤혜인은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가 기회를 봐서 사과할게.”“사과하고 나서도 아름이는 엄마랑 같이 삼촌을 미워할 거예요.”아름이는 작은 주먹을 꼭 쥐며 결연하게 말했다.“왜냐하면 삼촌이 엄마의 국을 버리게 했잖아요.”윤혜인은 아름이의 순진한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하루 종일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많은 순간 아름이는 작은 어른처럼 느껴졌다.윤혜인은 다른 중요한 이야기도 아름이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름아, 엄마가 할 얘기가 있어.”“뭔데요, 엄마?”“사실은...”조금 불안한 듯 윤혜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엄마 뱃속에 작은 아기가 있어.”아름이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뱃속에요?”아직 어린아이에게는 이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아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윤혜인의 잠옷을 들어 올리며 여기저기 살펴보았다.“엄마, 아기는 어디 숨었어요? 아름이는 왜 못 봐요?”윤혜인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아름아, 아기는 아직 아주 작은 배아 상태라서 배 속에 있는데 네가 볼 수는 없을 거야.”아름이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주 작아요? 저 어렸을 때처럼 작아요?”“응.”윤혜인은 동화 같은 말투
아이의 순진한 말에 윤혜인은 순간 멈칫했다.그녀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지금은 잘 모르겠어.”아름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럼 엄마, 왜 아빠한테 아기 얘기 안 했어요? 아빠도 나처럼 아기를 많이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사실은 엄마랑 아빠가 지금 조금 사이가 안 좋아서... 엄마는 이 아기들이 정말 좋아.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조금 힘들어.”“아기들이라고요? 두 명이라는 거예요?”아름이는 흥분하며 물었다.“우리 반에 있는 영우랑 영준이 형제처럼 똑같이 생겼어요?”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그렇대.”“엄마, 정말 대단해요!”아름이는 한동안 들떠 있었지만 곧 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엄마, 아기들을 원하지 않는 거예요?”윤혜인은 말문이 막혔다. 아기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아름이가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과 갈망이 강했기 때문에 새로 태어날 아기들도 같은 문제를 겪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그녀는 아이들이 다시 아빠 없이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엄마, 저 작은 의견 하나 말해도 돼요?”아름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물론이지. 말해 봐.”“사실 아기 아빠가 우리처럼 아기를 많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아요.”애교 섞인 말로 아름이가 말을 이어갔다.“우리에겐 엄마가 있잖아요. 그리고 삼촌도 외할아버지도 홍 아줌마도 지윤이 이모도 있고요...”아름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말했다. 마침내 손가락이 다 채워지자 두 손바닥을 펴서 윤혜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엄마, 봐요.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그러니까 엄마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윤혜인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마음속이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졌다.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아기들이 아름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 보니 아름이가 걸어온 길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아름이는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그리
윤혜인은 아름이가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칭찬했다.“우리 아름이 정말 똑똑하구나!”아름이가 잠든 후,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그러나 방을 나서자마자 윤혜인의 얼굴에는 다시금 무거운 표정이 드리워졌다.그날 하원하고 나온 아름이는 유치원 문 앞에서 팔던 각양각색의 사탕에 눈이 멀었다.그 사탕들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인형이나 작은 동물 모양 등 다양한 디자인이 있었다.아름이는 그 사탕들을 무척 좋아했지만 늘 말을 잘 듣는 편이라 하원 후에는 함부로 뛰어다니지 않았다.그렇게 아름이가 홍 아줌마와 함께 차로 가려던 순간, 그 사탕을 팔던 아저씨가 갑자기 오토바이에 치였다.주변에는 차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아저씨를 돕지 않았다.그때 아름이는 홍 아줌마의 손을 잡고 그 아저씨에게 달려갔다.아름이는 아저씨의 상태를 확인한 후, 홍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하려 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아저씨에게 말을 건네자마자 아이는 강렬한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고 곧이어 차가 와서 그 두 사람을 납치했다.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윤혜인은 여전히 오싹함을 느꼈다.‘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남의 선한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악랄한 목적을 달성하려 하다니...’나중에 경찰은 강에서 납치범들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들은 차와 함께 강에 빠져 있었다.윤혜인은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들에게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가엾은 사람에게도 밉살스러운 점은 있으니 말이다.이러한 악한 자들은 ‘호랑이’와 협력하여 남을 해치려 했으니 그들이 이런 최후를 맞이한 것은 그들 자신의 자업자득이었다.이번 납치 사건은 비록 범인들의 시신이 모두 발견되었지만 그 배후에 있는 사람의 수법에서 윤혜인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깔끔하고 철저하게 처리된 방식, 이는 온진 그룹의 방식과 매우 닮아 있었다.겉으로는 이 사건을 잊은 것처럼 보였지만
윤혜인은 변지호의 두 친구가 도착하자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 한 사람은 아내와 함께였다.변지호가 윤혜인을 소개하자 두 사람은 그녀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해주었고 명함도 교환하며 앞으로 사업 기회가 있을 때 꼭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변지호 친구의 아내와 윤혜인은 금세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고 시간도 아직 이른 저녁 8시 정도였기에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중간에 변지호의 친구 부부가 먼저 자리를 떠났고 떠나기 전, 그 아내는 윤혜인과 며칠 뒤에 그녀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윤혜인은 기쁘게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문 앞까지 부부를 배웅하고 돌아오자 원래 앉아있던 자리 근처에서 낯익은 인물이 변지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남자는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반쯤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으나 앉은 자세가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하얀 셔츠의 목깃은 살짝 풀어져 있었고 드러난 쇄골이 눈에 띄었다. 소매도 반쯤 걷어 올려진 상태였으며 길고 탄탄한 팔뚝에 보이는 근육과 혈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그가 앉아있는 위치는 등지고 있는 조명 때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윤혜인은 비록 최근 이준혁의 소식을 일부러 피하고 있었지만 이선 그룹의 큰 뉴스는 동료들로부터 들을 수밖에 없었다.소문에 따르면 이선 그룹은 현재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 중이며 이천수를 비롯한 그 지지 세력들도 이준혁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고 한다.원래 중립에 서 있던 사람들마저도 이준혁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천수에게 투항했지만 이준혁의 계획적인 행보 덕분에 그들은 모두 노출되었고 이제 이선 그룹은 철저히 정리된 상태가 되었다.이제 이천수와 한구운은 회사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이며 이준혁이 그들을 몰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그래서인지 지금 이준혁은 전혀 걱정 없이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그 잘생긴 얼굴을 보며 윤혜인은 잠시 동안 자신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