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량이 너무 많아 사모님의 머리가 멍해진 듯 보였고 손에 든 채소도 다듬는 것을 잊고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사모님은 담담하게 채소를 씻고 있는 정민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일부러 남편을 데려와서 교수님의 잔소리를 들려주려고 한 거야?”“교수님과 사모님을 뵈러 온 것은 연초에 정해진 일이었고 고연우는 단지 함께 온 것뿐이에요.”밖에서는 교수님이 여전히 한숨을 쉬며 정민아의 재능을 낭비했다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고연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고연우가 정민아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교수님의 끝없는 잔소리에 지쳐서 대꾸하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남편이 너를 안쓰럽게 생각하게 하려고 그런 건가?”사모님은 나이가 들면서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기 어려워졌다. 정민아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혼란스러웠다.“그런데 왜 직접 얘기하지 않았니? 네가 당사자이니 세부적인 상황을 설명하면 교수님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정민아는 손에 든 채소를 씻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어떤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을 때 더 충격적일 때가 있어요.”자신이 직접 말하면 마치 하소연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사모님은 아무 말 없이 복잡한 눈빛으로 정민아를 바라보았다. 때때로 정민아의 손을 힐끗 보기도 했다. 사모님은 의사는 아니지만, 남편이 은퇴 전까지 훌륭한 외과의사였기 때문에 손이 그들의 업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이렇게 재능 있는 아이가 손 부상 때문에 평생 의사가 되지 못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정민아는 사모님이 자신의 손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제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아니야.”사모님은 정민아가 오해할까 봐 급히 부정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망설이며 물었다.“혹시 네 손이 네 남편에 의해 다친 거야?”만약 그렇다면 정민아는 정말 불행한
정민아가 고연우에게 반박하지 않은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오늘 정민아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교수님 몰래 학업을 그만둔 일은 정민아의 마음속에 늘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지난 두 해 동안 정민아는 교수님과 연락을 피하고 교수님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교수님의 실망한 눈빛을 볼까 봐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이제야 정민아는 마음의 짐을 비로소 덜어낼 수 있었다.두 사람이 경인 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넘었다. 정민아는 일찍 일어난 데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차에 타자마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가벼운 흔들림에도 통증이 있었다. 정민아는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고 환경에 예민했기에 익숙한 고씨 저택에서도 긴 시간이 필요했으며 차 안에서는 더욱 힘들었다.차 안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몸의 피로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차가 고씨 저택에 도착하자 갑작스러운 불빛이 한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었다. 운전사는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대표님, 최 씨네 아가씨입니다.”최민영은 저택 입구에 서서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머리 장식부터 옷차림까지 정성스럽게 꾸몄고 얼굴에도 화려한 메이크업을 했다. 최민영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정민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너와 생일을 함께하고 싶어 온 거겠지.”고연우는 얼굴을 굳히며 정민아를 쳐다보았다.“비꼬지 말고 제대로 말해.”차가 고씨 저택 앞에 멈추자 최민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연우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최민영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추위에 떨었던 탓에 그 미소는 오히려 슬프게 보였다.고연우가 말했다.“오면 연락이라도 해야지”고연우의 태도는 냉담했고 고씨 그룹의 직원들에게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최민영은 뜨거운 감정이 차가운 물에 식은 듯했다. 이미 추운 바람에 떨고 있던 최민영은 마음마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혹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고연우가 최민영에게 말을
고연우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에 정민아는 담배를 끄고 쿵 소리를 내며 창문을 닫아버렸다.“...”고연우는 무표정으로 최민영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미신에 의존하지 마. 일이 잘 풀리느냐는 생일 소원을 빌었느냐와는 상관없어. 운전사에게 너를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할게.”최민영은 고연우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케이크를 쥔 손을 꽉 움켜쥐고 억울함을 삼켰다. “연우 씨, 이제는 내 생일조차 같이 보내줄 수 없는 거예요?”이럴 때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애처로운 눈빛으로 고연우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그래야만 정민아와의 차이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도전적인 여자를 좋아할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다.그러나 최민영은 너무 조급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정민아가 최민영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정민아가 단지 정씨 가문과의 양부모 관계만으로도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였는데 고연우까지 정민아를 보호한다면 자신은 철저히 짓밟히고 말 것이다.이 몇 년간 해외에서 지내며 먹고 입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혼자서 떠나는 것과 쫓겨나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최민영은 굳이 고연우와 함께하지 않아도 좋지만, 고연우가 정민아과 함께하는 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최민영의 인생은 완전히 끝날 것이다.“민영아”고연우는 미간을 만졌다. 오늘 두 도시를 오간 탓에 피곤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도 짜증이 났다.“나는 이제 결혼했어. 단둘이 생일을 보내는 건 부적절해.”“무, 무슨 말이에요?”큰 충격을 받은 최민영은 마치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연우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연우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전에도 깊은 감정이 없었고 지금도 후회나 아쉬움은 없었다. 고연우는 신사적으로 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아버님과 어머님께 안부 전해드려. 며칠 후에 찾아뵙고 인
최민영의 엄마는 마치 상사가 부하를 훈계하듯 거들먹거리며 말했다.“민아 씨, 선아 씨 말로는 민아 씨가 어릴 때부터 외진 시골에서 자랐다면서요? 친부모님께서도 학문이 깊지 않으셔서 예절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민아 씨 양부모님이 명문 출신이라는 점에서 선의로 조언 하나 드릴게요. 어른을 공경해야 사랑받는 착한 사람이 되는 거랍니다.”최민영의 엄마는 자리에 앉기 전에 자신이 앉을 자리가 정말로 우연히 선택된 자리인지 주위를 살펴 확인한 후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다른 사람들은 최민영이 예전에 한 말을 믿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최민영의 엄마는 그 말을 믿었다. 딸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공부도 많이 배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성도 형편없었죠. 살아 있다면 벼락을 맞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만큼요.”정민아는 독한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표정은 밝게 미소를 지었다.“어릴 때 저에게 예절을 가르치려던 사람들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이모도 정말 저를 가르치고 싶으신가요?”역시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 그런지 예의도 없고 교양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최민영의 엄마는 속으로 정민아는 민영이와 비교도 안 되겠다고 비웃었다. “민영이도 외국에서 2년 동안 아주 힘들었어요. 민아 씨가 어떻게 다치셨는지 우리도 다 알고 있잖아요. 정씨 가문을 생각해서 고연우 씨가 민아 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거예요. 민영이가 외국에서 2년을 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차갑게 한 마디 던진 후 최민영의 엄마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덧붙였다. “물론 우리 집은 약속을 어기는 집안이 아니에요. 합의했던 시간은 3년이었으니 이제 반년 남았네요. 원하는 보상을 말씀해 보세요. 체면이 서는 직장, 돈, 차, 집, 저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 들어드릴게요.”최민영의 부친께서 승진을 앞두고 있어서 정민아 문제로 일이 꼬일까 봐 최민영의 엄마가 직접 나서게 된 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민아를 만나러 올 일
정민아는 대답 대신 고연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은 마치 고연우의 말을 동의하는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고연우는 어이없었다.“...”고연우의 관자놀이가 팽팽해져서 아팠고 시선은 정민아가 웃고 있는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연우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저렇게 큰 고씨 저택에서 살기로는 아직 부족해? 왜 하필이면 최씨 가문의 집을 받으려고 하는 거야? 최민영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그들이 너에게 집을 줄 거라고 생각해?"“나 때문이라고?”정민아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 내가 없었다면 최민영은 돈을 함부로 쓰고 사치품을 하루에 하나씩 바꾸는 생활을 하지 못했겠지.”최씨 가문은 정치계에서 활동하며 국내에서는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항상 감시를 받았다. 돈이 많아도 과시하지 않았지만, 해외에 가면 상황이 달랐다. 최민영은 완전히 고삐가 풀려서 탕진하는 생활을 누렸다.정민아의 손이 망가진 것과 중단된 사업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추고 사죄의 의미로 말했다.“미안해.”정민아가 말했다."사과할 필요 없어. 너는 너의 진심을 말할 권리가 있어."“...”어느 정도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솟구쳤다. 고연우는 이를 갈며 정민아를 쳐다보았다. 정민아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 지능과 지능 지수가 전부 미모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었으니 이쁘지 않을 수가 없다.고연우는 정민아의 손을 거칠게 잡아 강제로 일으키고 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정민아가 물었다.“어디로 가는 거야?”정민아는 다른 약속이 잡혀 있었다.고연우는 냉소하면서 말했다.“너를 데리고 가서 안목을 좀 넓혀 줘야겠어. 사람들 말에 속아 삼천 원짜리 사탕에 현혹되지 마. 한남동 집 한 채로 네 남편을 팔아넘기는 걸 보면 넌 정말 대단하구나.”이걸 생각할 때마다 고연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짜증이 났다. 하루에 몇억을 버는 고씨 가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단지 얼굴만으로도 그 금액을 초과할 수 있었다.고연우는
서은혁 쪽에 조금 시끄러운 상황이어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조용한 장소로 옮겨 물었다.“가문에서 그런 계획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실행될지는 미지수예요. 왜요?”이 순간, 정민아는 서현란을 너무 안타까워했다. 서현란이 생전에 늘 가족들을 걱정하며 살았는데 서현란의 죽음을 이용해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 이제 서현란의 적과 결혼까지 하려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너의 언니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알고 있니? 서현란이 그렇게 너를 아끼고 사랑했는데 이제 너는 서현란을 해친 사람과 결혼하려는 거야?수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정민아는 서은혁과 최민영의 결혼 여부는 자신이 개입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정민아는 마치 서현란이 죽었던 그날 밤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서씨 집 거실에서 무릎을 꿇고 서현란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반복해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하며 이마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가 눈썹을 따라 흘러 눈에 스며들어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아저씨, 사적으로 합의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현란도 당신의 딸이에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도 현란을 위해 정의를 찾지 않을 거예요.”정민아는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박았고 이마에서 흐르는 피는 점점 더 심해졌다.방금 가해자들의 부모가 왔을 때 정민아는 밖에서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후, 원래 딸을 위해 정의를 찾겠다고 외치던 서현란의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정민아는 그들이 분명 어떤 조건을 협상해 합의하기로 했을 것으로 생각했다.“아저씨, 만약 그들의 형사 책임을 추궁해 주신다면, 제가 그들이 약속한 모든 조건을 해결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아저씨와 이모를 제 친부모처럼 여기고 은혁을 제 친동생처럼 생각하며 은혁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합의하지 말아 주세요.”서현란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아이들 다 아직 어리잖아요. 14세도 안 된 아이
정민아는 고연우의 얼굴에 남아 있는 선명한 손자국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픈 손바닥을 문질렀다. 정민아는 전화기 너머에서 여전히 걱정하며 장민아의 상태를 묻는 서은혁에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끊을게요.”“그런데 방금...”서은혁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민아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연우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정민아가 아파 보이는 모습에 화를 내기보다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정민아가 전화를 끊자 고연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가 왜 너에게 전화했어?”정민아는 고연우의 불쾌한 표정을 무시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내가 전화했어.”“...”정민아의 시선이 고연우가 맞은 쪽 얼굴에 머물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연우가 정민아가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 때, 정민아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침묵한 채로 돌아섰다.고연우는 재빨리 정민아를 붙잡았다. 정민아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로 극도의 분노를 느꼈지만, 그 감정을 억누르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고연우는 이를 악물고 한참을 참고 겨우 입을 열었다.“이렇게 무작위로 사람을 때리고 사과 한마디 없이 가는 게 맞나?”“미안해.”형식적인 사과에 고연우는 더욱 화가 났다. 그런데도 정민아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다.정민아는 고연우가 잡고 있는 손을 뺐다. 원래라면 고연우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았겠지만, 정민아의 얼굴에서 불쾌감을 느낀 고연우가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정민아는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정민아는 원래 약속했던 사람과의 만남을 가지려 했으나 지금은 기분이 내키지 않았고 그 사람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쇼핑몰을 나와서 차를 몰고 거리를 조용히 드라이브했다. 이 도시에서 10년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10년이 지나도 이 도시에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정민아는 무심코 차를 저택으로 몰고 들어가 서씨 가문 본가 앞에 주차했다. 차가운 바람을
주소월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텅 빈 거실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가족이 함께 웃고 떠든 시간 속에서 언제나 말없이 배경처럼 서 있던 정민아는 늘 조용히 무시당했다.그러나 정민아가 처음 집에 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정민아는 먼저 대화를 시도하고 가족과 어울리려 애쓰며, 따뜻하게 엄마라고 불렀다. 정민아가 언제 말수가 줄고 온몸이 가시투성이가 되었는지 주소월은 알 수 없었다.주소월은 문을 붙잡고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흘러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죄책감, 자책, 후회가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라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어 몇 걸음 떨어진 서재 앞으로 갔다. 결혼 후 문을 두드리지 않고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정철진은 주소월을 힐끗 보고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민아가 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는군요.”주소월이 정민아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정철진은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다. 비록 정민아가 어릴 때부터 함께하지 않았지만, 고집 센 성격은 정철진과 똑 닮아 있었다.주소월은 정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민아의 신분을 공개하고, 모두에게 민아가 우리의 친딸임을 알리려고 해요.”정철진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굳히고 서재 문을 닫았다. 정철진의 얼굴에는 진지한 표정이 가득했다. “지금 정민아가 우리의 친딸이라는 것을 공개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그것은 과거에 제가 조직에 거짓말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가벼운 처벌로는 이 자리를 퇴임할 때까지 버텨야 할 것이고 아니면 강등될 수도 있다고요.” “그럼 민아는 어떻게 되죠? 계속 양녀라는 신분으로 살아야만 하나요?”주소월은 실망한 얼굴로 정철진을 바라보았다.“민아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당했는지 아세요? 사람들이 민아가 우리 친딸이라는 것을 알면, 절대 그렇게 대하지 못할 겁니다.”정철진은 주소월의 어깨를 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