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는 평소 고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창백해진 얼굴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그녀도 고개를 돌려 고연우를 바라보다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시 창밖을 쳐다보면서 쉰 목소리로 답했다.“응.”“내가 그렇게 싫어?”신경이 곤두서 있던 정민아는 고연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회피했다.“나 더 잘래, 도착하면 깨워줘.”그녀의 아이러니한 태도가 고연우의 심기를 더 건드렸고,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싫어해? 네가 애초에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나와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가 없었을 거잖아.”고연우는 정민아가 2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보인 무관심 때문에 그녀가 자기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다시 소용돌이치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평소보다 더 어둡게 변했다.잠시 후, 정민아는 경멸의 시선으로 고연우를 보면서 까칠한 태도로 반문했다,“네가 날 차갑게 대한 걸로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해? 고연우...”차가 집 앞에 멈추자, 정민아의 언성이 전보다 더 높아졌다.“그래, 2년의 결혼 생활 동안 넌 나한테 항상 무관심했고,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아가는 여자들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었어. 이런데도 내가 널 미워하면 안 돼?”“정민아, 네가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알아? 다시 말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널 증오해.”그러나 이 정도의 언어 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을 정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태연하게 섬섬옥수 같은 자기 손가락을,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피면서 살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삶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죽을 때, 날 저주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함께 데려갈 테니까, 내가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하느님이나 부처님께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고연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주차를 마저 끝낸 다음 무덤덤하게 말했다.“다 왔어, 내려.”정민아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가늘고 촘촘하게 흩날리는 빗줄기
정민아의 한마디가 고연우한테 대시하려던 사람들의 미움을 샀고, 그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순식간에 최고치에 달했다.“...”룸 안의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 조용해졌고, 고연우는 차가운 얼굴로 술을 마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고연우의 냉담한 반응에 기가 죽거나 상처를 받을 정민아가 아니었다.그녀는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사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는 데다가 말도 가려서 하지 않는 정민아가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건 어쩔 수 없었다.옆에 앉아 있던 박태준이 고연우에게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이때, 정선아는 사람들이 정민아에 대한 억한 감정이 거세지게 하려고 일부러 불쌍한 척 연기를 했다.“난... 난 그냥 언니를 생각해서 한 말이지 다른 뜻은 없었어. 언니가 평소에 이런 사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아서 불편해할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건 것뿐이야. 날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먼저 말을 건넨 내 잘못이야, 미안해...”정선아의 가여운 연기에 놀아난 사람들은 너도나도 정민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정씨 가문의 양녀가 무슨 자격으로 선아 씨를 괴롭혀? 선아 씨가 착하게 대해주니까 자기가 정말 잘난 줄 아나 봐, 나 같았으면 엄청나게 괴롭혔을 거야!”“다들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존중해주니까 정말 자기가 정씨 가문의 큰 아가씨라고 착각하고 있나 봐.”“정말 뻔뻔해!”“이렇게 교양 없는 여자를 양녀로 들였으니 정씨 가문도 정말 재수 없긴 해. 우리 집 같았으면 진작에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쫓아냈을 거야!”시간이 갈수록 언성은 점점 더 높아졌고, 그들은 말할수록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이때, 정민아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기분 나빠.”정선아가 그녀의 말에 반문했다.“뭐라고?”“네가 나한테 왜 왔냐고 물었지, 오늘따라 기분이 더러웠는데 혹시나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아서 온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정민아는 낯익은 얼굴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전에도 이 몇 명이 똑같이 낡고 더러운 골목길에서 정민아의 앞을 가로막고 거들먹거리며 비웃은 적이 있었다.“너 같이 근본도 없는 애가 감히 우리 착한 선아를 괴롭혀? 난 정말 진씨 가문에서 무슨 생각으로 너를 입양했는지 모르겠어.”“하하하, 남들보다 뛰어난 구석이 있었나 봐, 안 그래? 양아버지를 남자로 보고 꼬셨을 수도 있잖아.”그들의 입에서 나온 온갖 더러운 말들이 정민아의 새로운 삶에 대한 부푼 기대를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렸다.정민아가 벽에 기대어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들은 그녀가 두려움에 떠는 줄 알고 욕을 내뱉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찌검까지 하기 시작했다.정민아는 혼자 힘으로 그 사람들을 상대할 수 없을 거로 판단하고 정신력 하나만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견뎌내야 했다.그러나 영양실조로 많이 여윈 상태였던 그녀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그 틈을 타, 정민아한테 맞아서 바닥에 넘어졌던 여자가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발로 그녀의 얼굴을 세게 밟으면서 말했다.“정씨 가문에서 널 입양했다고 네가 정말 그 집 식구가 된 줄 알아? 내가 지금 여기서 널 죽인다고 해도 그 집식구들은 날 추궁하지도 않을 거야.”“연우 도련님과 혼인신고를 했다고 해서 그의 아내가 됐다는 착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정민아는 데자뷔 같았던 옛 기억에서 빠져나와 양손으로 팔짱을 끼면서 짙은 화장의 한 여자를 째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난 한 번도 어디 가서 내가 고연우의 아내라고 말한 적 없어. 그렇다면 네가 그 사람 아내야, 아니면 정선아?”“연우 도련님은 너한테 전혀 관심 없어, 체면이라도 지키고 싶으면 더 비참해지기 전에 그한테서 떨어져.”정민아는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에도 전혀 자극을 받지 않고 무덤덤하게 답했다.“난 체면 따위 필요 없어.”화가
집에 돌아온 후, 정민아는 바로 위층 작은 방에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멍든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는 계란으로 멍 자국을 찜질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문을 두드리려던 송씨 아주머니와 마주쳤다.그녀의 멍이 든 얼굴을 본 송씨 아주머니가 놀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연우 도련님과 같이 외출하신 거 아니었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심하게 다치셨어요?”그러나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정민아는 송씨 아주머니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고 거부감마저 들었다.잠시 후, 송씨 아주머니의 진심이 통했는지 경계심이 많던 정민아의 목소리가 어느새 부드럽게 변했다.“아주머니, 그냥 작은 상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계란으로 찜질하면 금방 나아질 거예요.”그러나 송씨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예쁜 얼굴이 파랗게 멍들고 부었는데 어떻게 작은 상처라고 할 수 있어요! 아가씨, 여자한테는 얼굴이 생명이니까 아무리 작은 상처라고 생각해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돼요. 나중에 흉지면 평생 후회할 거예요.”정민아는 송씨 아주머니의 쉴 새 없는 잔소리를 들으면서 조금도 귀찮거나 반감이 들지 않았다.이때, 송씨 아주머니가 자기 머리를 콩 쥐어박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제가 깜빡했네요! 연우 도련님께서 왕 박사님을 부르셨어요. 지금 아래층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시니까 내려가서 얼른 진료받아요.”“연우가 왕 박사님을 불렀다고요?”정민아는 매일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을 달고 사는 송씨 아주머니가 두 사람의 화목한 부부 생활을 위해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다.“당연하죠,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관심하는데요. 오늘 왕 박사님께서 가족과 함께 교외 리조트로 휴가를 떠났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렸을 거예요. 도련님께서 시간을 잘 맞춰 연락해서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저는 부부 사이에 해결하지
정민아는 원래 나긋나긋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금세 인내심을 잃고 그에게 따졌다.“나랑 이혼하길 바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또 이혼 안 하겠다는 거야! 너 설마 고통을 즐기는 이상한 취미가 있어? 아니면 나랑 자면서 정이라도 든 거야?”너무나 노골적이고 저속한 말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교류가 그것밖에 없는 건 사실이었다.고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고,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졌다.“얼굴 상처가 언제면 나아진대?”정민아는 기가 막혀 눈살을 찌푸리면서 헛웃음을 지었다.“설마 날 걱정하는 거야?”“꿈을 많이 꾸면 몸에 해로우니까 저녁에 잘 때 높은 베개를 베지 말도록 해. 네가 이런 얼굴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내가 널 폭행했다고 오해할 거야, 최근에 아주 중요한 계약 건이 있으니까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안 돼.”“설마 이혼을 반대하는 것도 그 계약 건 때문이야?”“그런 게 아니면, 설마 정말로 너한테 정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정민아도 지금 당장은 이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돌아서서 서재를 나갔다.그녀가 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날 밤, 고연우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이튿날.정민아는 멍이 든 얼굴로 출근하면 고객들이 불편해할까 봐 며칠 휴가를 냈다.마침, 목요일이라 주말까지 집에 박혀있을 계획이었던 그녀는 오후쯤 주소월한테서 걸려 온 연락을 받고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정씨 가문으로 향했다.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더 심각해진 얼굴의 멍 자국을 가릴 생각도 없이 밖을 나갔다.저녁 식사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한 정민아가 문을 두드리자, 주소월이 버선발로 나와 문을 열어주면서 푸념을 털어놓았다.“민아야, 선아 남자 친구가 선아한테 이별 통보를 했다는데, 이 일이 너와...”주소월은 정민아의 멍든 얼굴을 발견하고 흥분하면서 폭풍 질문을 퍼부었다.“민아야,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됐어? 무슨 일이야? 누가 그랬어?”그녀의 얼굴 상처는 한눈에 봐도 사람한
장기태와 정선아는 연인 사이였고, 상처 입은 모습을 집안 어른들한테 보일 수 없었던 그는 정선아의 본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어젯밤 산책을 하던 주소월은 우연히 장기태와 마주쳤고,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 누가 그랬는지 궁금했었다.‘민아가 저렇게 만들어 놨을 줄이야...’그녀는 정민아가 1미터 80센티미터의 건장한 남자를 무참히 짓밟았다는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이때, 집안에서 정철진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루 종일 사고를 치는 것 외에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빨리 들어오지 못해?”정철진은 군인 출신이라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주소월은 정민아를 데리고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고, 소파에 앉아 있던 정철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정민아를 보면서 한마디 했다.“선아를 좀 따라 배워, 어디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남자랑 주먹다짐해! 네 주위를 둘러봐봐, 다들 얼마나 조신해.”정민아는 가소로운 듯 나지막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도둑질을 좋아하는 친엄마와 술과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친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유전자가 어디 가겠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착한 딸 행세는 바라지도 마세요!”정철진은 두툼한 손바닥으로 원목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노발대발했다.“그래서 네가 지금 선아의 결혼을 망치겠다고? 정민아, 네가 이렇게 나오면 연우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남들이 고씨 가문이랑 정씨 가문을 어떻게 보겠어!”“정선아가 내가 자기 결혼을 망쳤다고 하던가요?’“넌 어쩜 어려서부터 선아한테 덮어씌우려는 버릇은 변하지 않니? 네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남자 쪽에서 갑자기 네가 좋다면서 이별 통보를 한 거야.”정민아는 기가 막혀서 실소를 터뜨렸다.“장기태가 내가 자기를 유혹했다고 했어요? 아니면 아버지께서 간통을 저질렀다고 나도 그놈이랑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건가요?”정철진은 군대에 있을 때, 갖은 무례한 말을 들어봤지만, 정민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내가 무슨 자격으로 때리냐고? 내가 쟤 아버지야. 그래도 때릴 자격 없어?”정철진은 군대에서 신병을 훈계하는 자세로 나왔다.“쟤가 하는 꼴 좀 봐. 온 세상이 자기한테 빚진 것처럼 모든 게 불만이야. 산골 아이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여줘야 했어. 그에 비하면 얼마나 유복한데, 뭐가 불만이야?”“산골의 부모는 자기 친딸을 양딸로 키우지는 않아요.”이 말이 떨어지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거실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너...”주소월은 정민아가 알고 있을 줄 몰랐는지, 놀라서 목소리 톤까지 바뀌었다.하지만 정선아가 아직 옆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하려던 말을 삼키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민아야, 남이 함부로 나불대는 소리를 듣고 오해한 것이 아니니? 다른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먼저 아버지에게 사과해. 의사 선생님이 지나치게 흥분하면 안 된다고 했어.”주소월은 평생 군인의 아내로 살았고 자신도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 처세술에 강한데, 이렇게 억지스러운 말로 화제를 돌리는 걸 보니 정말 당황했나 보다.정민아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더 이상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그녀가 사실상 양딸이 아니라 친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런 결과가 있을 줄 알았다. 그들은 정민아를 키우고 부모의 책임을 다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양딸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정민아는 눈을 내리깔아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었다. 모든 날카로움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세상만사가 귀찮았다.“죄송해요. 의사 선생님께서 저는 정신병이 있다고 했어요. 정신병은 더더욱 자극받으면 안 돼요.”그녀는 이 집에 1초도 더 있기 싫어서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정민아는 전혀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뺨을 만지며 그녀는 심지어 이쪽 얼굴을 때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맞은 자리에 또 맞았을 거니까.주소월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정민아는 그녀가 내민 손을 보지 못한 듯 빠르게 걸어갔다.밖으로 나오니, 마침
정민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손을 뺀 후 그를 건너서 가버렸다.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시끌벅적했다. 대부분 식사가 끝나고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는데, 다들 편안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함께 걷고 있었다. 도로에 줄지어 달리는 차들과 거리를 온통 채운 네온사인이 이 도시의 번화함을 부각시켰다.그녀는 처음 정씨 저택에 왔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정철진과 주소월이 직접 그녀가 있는 작은 도시로 데리러 왔고, 여기 도착했을 때 딱 이 시간이었다. 처음 대도시에 온 그녀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정씨 저택의 문이 눈앞에서 천천히 열렸고, 안에서 소년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유행되는 신상 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색이 바래고 늘어난 데다 키가 크면서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짧아진 옷을 입고 있었고,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는 뼈만 앙상해 초라하고 꾀죄죄했다. 그녀는 그 집, 그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선아야, 언니야. 우리가 새로 입양한 아이.”정민아는 나중에야 이 잠깐의 멈춤이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았다.정민아를 데려오기 전에 부모님은 이미 정선아에게 이를 이야기했다. 정선아가 이 일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많이 울었기에 그녀가 들어섰을 때 애들은 하나같이 배척과 경멸의 시선을 보내왔다.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정민아는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에 특히 민감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그녀는 그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그 후에 겪은 일들은 그녀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마당 뒤편에는 빈 벽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아무도 가지 않던 곳이었다. 정민아가 오고 나서 그 벽은 온갖 욕설로 도배됐다.[오늘 똥개를 보았니?]맨 위에 있는 큼지막한 제목이다.[똥개는 바람기가 있는 천한 여자다.][오늘 내가 똥개에게 구정물을 끼얹었더니 화를 냈어. 하하하! 그 옷은 우리 증조할머니가 봐도 촌스럽다고 싫어해. 시골 촌뜨기나 보물로 여기는 거지. 웩!][천한 년이 감히 내 남자친구를 유혹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