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탔다. 신은지가 고개를 숙여 발목을 보려 하자 이미 육정현이 먼저 몸을 숙여 그녀의 종아리를 잡았다. 남자의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육정현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부은 발목 주위를 가볍게 누르자, 신은지는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며 무의식적으로 발을 뒤로 빼려 했다. 육정현은 그녀를 꼭 잡고 고개를 들어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찌푸린 신은지를 보았다. 육정현의 눈에 순간 격렬한 어떤 감정이 솟구치는 듯했으나 바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움직이지 말아요.” 육정현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깊고 부드러웠다. 육정현은 신은지의 신발을 벗기고 그녀의 발목을 잡고 좌우로 돌리며 물었다. "아파요?” 신은지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뼈는 다치지 않았지만 근육이 다쳐서 조심해야 해요.” 육정현은 방금까지 껑충껑충 뛰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간 분노가 올라왔다. “최소한 한 달은 걸을 생각하지 말아요.” 신은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앞좌석에서 열심히 운전하는 비서를 보고 말을 삼키고, 육정현의 손에 붙들려 있던 발도 뺐다. "육 대표님, 충고는 고맙지만 제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의사가 판단해 줄 거예요.” 육정현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만스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 "시간을 두고 오래 쉬는 것이 좋아요.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후유증으로 절름발이가……” "콜록...…” 앞좌석의 비서가 심하게 기침을 하며 육정현의 말을 끊었다. "신은지 씨, 육 대표님이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나중에 고생하면 안 되잖아요.관절 부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돼요. 만약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앞으로 바람이 조그만 차갑거나 날이 조금만 흐려도 아플 수 있어요.” 육정현은 비서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신은지의 배로 시선을 돌리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임신 중이니 앞으로 그렇게 뛰지 말아요.” 신은지는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육 대표님, 지금 선을 넘으셨어요. 그건 제 전 남편이 신경 써야 할 일이에요.” 육정
신은지는 자꾸만 참견하려 드는 육정현 때문에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차마 나유성이 있어 대놓고 육정현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감시 카메라를 24시간 붙여놓은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매번 타이밍 맞게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튀어나오는 육정현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어떻게 아셨죠? 저랑 대표님이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제가 다친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요?"그녀는 육정현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경쟁 대상에 대한 조사는 철저히 하는 편이라서요. 신은지 씨가 몇 번 다쳤는지는 물론, 댁 가정부가 몇 시에 출퇴근하는 것까지도 다 알고 있어요.""...."육정현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때, 옆에 있던 나유성이 답했다. "집에서 키우는 개도 주인이 위협을 당하면 짖는데,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는 낫네요."낯익은 대사였다. 전에 육정현이 나유성을 비꼴 때 했던 말이었다. 외과 진료센터는 1층에 있었다. 나유성은 신은지를 진료실 근처 의자에 내려준 뒤, 진료 접수를 위해 신은지한테 신분증을 넘겨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준서가 육정현에게 말했다. "대표님, 신분증 가져오셨어요? 이리 주시면, 제가 대신 가서 접수할게요."왕준서는 민망함에 최대한 나유성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물어봤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까지만 해도 팔이 아파서 들지도 못하겠다며 병원으로 가자던 사람이, 눈 깜짝한 사이 신은지를 안고 병원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건 꾀병이었다. 하지만 상사였기 때문에, 병원까지 온 이상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나유성이 육정현을 위아래로 스캔하며 말했다."대표님도 다치셨어요? 사고는 다른 사람이 당했다고 들었는데, 놀라서 허리라도 삐끗하셨어요?"나유성은 신은지한테 거절까지 당한 마당에,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난...."육정현은 체면이 구겨졌으나, 부상의 핑계로 신은지와 함께 병
나유성이 신은지를 안고 떠난 뒤, 육정현과 기민욱도 병원을 나섰다. 왕준서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기민욱이 억울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굳은 육정현의 얼굴을 바라봤다."형, 표정 안 좋네? 설마 은지 누나 다친 것 때문에 그래? 아니면...."그리고는 뜸을 들이더니, 육정현이 보지 못할 각도에서 입술을 잠시 꽉 깨물었다."누나 옆에 있던 남자를 질투하는 거야?"걸음을 멈춘 육정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기민욱을 바라봤다."신은지 씨한테 특별한 감정이라도 가진 거 아니지? 왜 자꾸 신은지 씨에 대한 얘기만 물어봐?""?"기민욱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얼른 해명하려 했지만, 육정현이 먼저 그의 말을 끊으며 덧붙였다."민욱아, 네가 어릴 적부터 엄마 없이 커서 연상한테 약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형 말 들어. 이건 옳지 않아. 여자로서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한테 못 받은 사랑 때문에 집착하는 건지, 구분해야지. 더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얼른 끊어."육정현이 기민욱에게 해명할 틈도 주지 않으며 단정지었다. "안 그래도 아버지까지 해외에 계시는데, 지금 우리는 서로밖에 없잖아. 난 형으로서 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거 용납할 수 없어. 이따가 아버지 오시면 나보고 뭐라 하겠어? 하나뿐인 동생 잘 못 돌봤다고 엄청 혼내실걸?""...."기민욱은 순간 사고가 멈추고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육정현이 그를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되물었다."그럼 형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신은지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해 육정현이 자신에게 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기민욱은 기꺼이 호감있는 척 연기할 수 있었다.육정현이 표정을 구길 뻔한 걸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차라리 내가 신은지 씨랑 결혼할게. 내가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너의 마음을 단념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 신은지 씨가 네 형수가 된다면, 너도 자연스럽게 단념하겠지.""안 돼. 형이 저 누나랑 결혼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육정현이 화를 내며 말했다."신은
술집에서 작업 거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절하거나 마음에 들면 함께 나가거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민욱은 결벽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글래머러스하고 예쁜 미녀가 와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남이 닿는 것을 싫어했다. 여자가 몸에 닿는 순간, 기민욱은 거의 발작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여자는 눈치 없게도 계속 그에게 치근덕거렸다. "오빠, 이런 거 처음이구나? 에이, 부끄러워할 거 없어....""이 걸레 같은 년이, 감히 나 몰래 밖에서 딴 놈을 만나?"그런데 이때, 갑자기 덩치 큰 남자가 술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어쭈, 게다가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네? 오늘 한번 제대로 알게 해 주지. 밖에서 딴 놈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그는 기민욱에게 상황을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다. 남자는 딱 봐도 운동을 꽤 많이 한 듯 다부진 몸매와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기민욱은 그의 주먹에 반응할 틈도 없이 날아갔다. 기민욱은 어린 시절 풍족하지 않은 보육원 생활을 해온 터라 위장이 많이 약한 편이었다. 비록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 많이 좋아진 상태였지만, 음식 자체를 많이 먹지 못했다. 당연히 그에 따라 몸도 다른 또래의 남자들보다 마르고 약했다. 안 그래도 체격 차이가 많이 났는데, 남자의 쉴틈없이 날아오는 주먹과 발차기에 기민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작위로 때리는 것이 아닌 아픈 곳만 골라서 때렸다. 기민욱은 온몸이 퍼렇게 물들며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드디어 남자가 분풀이를 마쳤는지 몸을 숙이며 기민욱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다음엔 여자 잘 보고 골라. 괜히 임자 있는 여자 건드렸다가 오늘처럼 호되게 처맞지 말고. 알겠어?"화려한 조명 속에 아까 치근덕거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전과 달리 매우 겁을 먹은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민욱은 맞아서 눈이 퉁퉁
곽동건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에 헤드폰, 후드티 위에 야구점퍼까지, 전형적인 대학생 새내기의 모습이었다.진유라는 단번에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청년은 다름 아닌 자신의 동생, 진영수였다. 그녀는 진영수가 무슨 이유로 곽동건 앞에서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진영수, 너 왜 여기 있어? 지금 학교 수업 들을 시간 아니야?"진영수는 곽동건에게 진로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저번에 그 쓰레기 때문에 감옥 갈뻔한 것을 계기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폭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약자가 되지 않으려면 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피해자가 가해자라는 덤터기를 쓰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그는 한참 흥미진진하게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나가 여긴 어쩐 일이야? 놀라서 심장마비 걸릴뻔했잖아."평소에 진유라였다면 진영수를 바로 혼냈겠지만, 곽동건이 앞에 있는 모습을 보고 얼른 태도를 바꾸었다. "우리 영수, 그랬어? 이 누나가 목소리가 너무 컸구나? 놀라게 해서 미안해. 얼른 앉아. 내가 여기서 제일 비싼 거로 사줄게. 넌 우리집의 보물이니까."여자가 마마보이를 싫어하는 것처럼, 곽동건은 브라콤에 걸린 여자를 제일 싫어했다. 진유라는 일부러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연기하기 시작했다. 진영수는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진유라의 출현에 놀랐는데,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며 다정하게 자신을 대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재빨리 진유라가 뻗어오는 손으로부터 몸을 피하며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나 사고 친 거 없어. 오늘 여긴 온건 다 누나를 위해서야. 전에 둘이 선을 봤다며 엄마가 하는 얘기 들었어. 그래서 도와주려고...."전공 변경하고 싶어서 곽동건에게 상담받고 있었다는 얘기는 죽어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진영수는 뼈도 못 추리고 진유라한테 두들겨
"빨리 학교로 돌아가 수업이나 들어. 또 땡땡이치면 다리 하나 부러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진유라는 진영수를 째려보며 경고한 뒤, 고개를 돌려 신은지에게 물었다. "우리 이만 갈까?"나유성한테서 전화를 받자마자 온 탓에 진유라는 아직 밥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제야 신은지가 휠체어에 앉은 것을 발견한 진영수가 물었다."은지 누나, 다리 왜 그래요?""실수로 좀 삐었어."신은지는 진영수에게 말한 뒤, 곽동건에게 인사를 건넸다."곽 변호사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곽동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쪽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핸드폰이나 이런 전자 기기는 해킹 위험이 있으니, 앞으로 이런 부탁 있으면 가급적 대면으로 해요."변호사로서 많은 경험을 해온 사람의 조언이었다. 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오늘 통화할 때 박용선에게 육정현이 박태준인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앞으로 더 조심히 움직여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두 사람은 나온 김에 밖에서 식사를 대충 해결한 뒤, 다시 신은지 자취방으로 향했다.가는 길, 차 안에서, 신은지는 곽동건에게 받은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민욱, 현 22세. 아버지는 한때 재경 그룹의 주주였으나 횡령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 바다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며,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한 걸로 알려졌다. 이후, 7세에 보육원에 맡겨졌으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8세에 보육원 교사한테 학대에 죽을뻔했지만, 박용선을 만나 잠시 거주지를 바꿨으나 이내 10세에 해외로 보내졌다고 적혀 있었다. 신은지는 눈썹을 찡그린 채 내용을 읽었다. 열 살에 박용선이 기민욱을 해외로 보냈다니, 그녀는 문득 전에 강혜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박태준에게 형제는 없지만, 동생이 생길뻔 했던 적은 있다고. 그렇다면 기민욱이 바로 그 입양할 뻔했던 아이인걸까? 온갖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서류를 살피는
진유라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을 본 신은지가 물었다. "왜 그래?"진유라가 핸드폰 화면을 뒤집으며 신은지 앞으로 내밀었다. "실수로 육 대표한테 전화가 걸린 것 같아.""...."공식적으로 육정현과 신은지는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이 번호는 얼마 전에 입찰 건 때문에 연락하려고 신은지가 따로 진영웅에게 알아봐달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용선이 막아서서 직접 연락이 닿은 적은 없었다. 신은지는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연결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에요?"스피커를 틀지 않았음에도 육정현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들렸다. 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진유라가 긴장된 목소리로 외쳤다."이런, 피가 나잖아!"그런 다음 재빨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신은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되물었다."어디서 피 나는데?"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괜찮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 피가 베어 나왔던 걸까? 신은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긴, 네 마음에서 나지."진유라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그 사람이 박태준이 맞는지 알고 싶다며? 오면 박태준이고, 안 오면 육정현인 거야. 그럼 다시는 이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박태준이 실종된 뒤로, 진유라는 신은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때로는 나쁜 생각을 할까 걱정될 정도로 신은지의 상태는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약 박태준이 죽은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면, 진유라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도 아니고, 굳이 남의 신분으로 뭔가 처리해야 한다면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부부 사이에 그 정도 신뢰도 없으면, 헤어져야지."본인인 거 밝힐 수 없다면, 최소한 일을 마무리한 다음에 찾아와야 할 거 아닌가?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진유라는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인데도 화가 치밀어올랐다.하지만 신은지는
밤을 새우고 새벽 5시에 해 먹는 김치볶음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잘 익은 묵은지의 새콤함과 기름에 볶아진 밥의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요리 솜씨 점점 늘어나는데?"신은지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볶음밥을 조심스레 입으로 넣으며 감탄했다. 그 말을 들은 진유라가 흥하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요즘 밖에서 사 먹으면 얼마인 줄 알아? 아주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요. 그런데 급여는 그대로지, 이러다가 밥만 퍼먹고 살게 생겼다니까? 정말 젊은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됐어. 우리 세대는 죽으면 아마 자식한테 물려줄 것도 없을 거야. 아니지, 출산율이 세계 최악인데 물려줄 필요 없겠구나? 정말 말세야, 말세."그녀의 말을 들은 신은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네가 그 젊은이에 속하는 줄 알겠다."진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도 뭐 다를 줄 알아? 요즘 세대면 다 비슷하지 뭐."이때, 소란스럽게 울리던 구급차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진유라와 신은지의 눈동자가 동시에 동그랗게 떠졌다."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너. 이번에야말로 좋게 넘어갈 생각하지 마.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해."진유라는 습관적으로 현관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기다리던 육정현은 온데간데없고 병원 구급대원 모습만 보였다. 그제야 진유라는 아까부터 울렸던 구급차 소리를 떠올렸다."...."뜻밖의 등장에 진유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 찾으세요?""저희는 구급대원입니다. 좀 전에 임산부가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신고자분이실까요? 임산부는 어디에 있어요?"육정현이 직접 오는 대신, 구급차를 부른 모양이었다. 진유라는 속으로 그를 향해 욕설을 날리며, 겉으론 미안한 미소를 지은 채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아, 죄송해요. 아까 다른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