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 씨, 급한 일 없으면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협력 건에 대한 얘기도 나눠야 하고, 비서보고 식사 예약 해놓으라고 했어요.신은지는 사실 송 사장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며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자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그럼 육 대표님이 오시면 출발하시죠."송 사장이 예약한 레스토랑은 예약이 필수인 프라이빗한 중식당이었는데, 골프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다 같이 출발했는데 막상 레스토랑에 도착하고 보니, 세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육정현 옆뿐이었다.결국 어쩔 수 없이 나유성이 육정현 옆으로 앉으려고 할 때, 핸드폰을 보고 있던 육정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여기 앉으시게요? 신은지 씨 파트너 자격으로 이곳에 온 거 아니에요? "육정현은 앉은 자세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둘 사이에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누구도 먼저 물러나는 것 없이, 대치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이때, 진영웅이 재빨리 의자를 끌어당기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저도 재경 그룹 사람이니, 이쪽에 앉아도 되죠?”육정현은 신은지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정당당하게 구애하지 않고, 사사건건 재경그룹 일에 끼어들며 방해했다. 이를 지켜보던 진영웅은 육정현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박태준이 없는 이상, 그도 신은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육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흘겨본 뒤, 송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영웅은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박태준이 떠올라 기분이 살짝 울적해졌다. 만약 박태준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그의 행동에 칭찬했을 테니까. 이어서 신은지와 나유성도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본 송 사장이 주문을 시작했다."먼저 대게 두 마리 주문할게요. 지금 대게가 제철이라 아주 통통하고 맛있거든요. 신은지 씨도 한번 드셔보세요.""신은지 씨
강혜정의 안색이 안 좋아진 것을 본 박용선이 급히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잘못되진 않았어. 하지만...."그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단숨에 진실을 내뱉았다. "잘못될 수가 없는 게, 은지가 임신하지 않았거든. 그때 당신이 하도 상황이 안 좋아서, 뭐라도 먹여야 하는데.... "박용선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았다. 괜히 말을 끌었다가 강혜정이 숨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뒷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강혜정은 충분히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애가 없어졌다는 거 아니야?"박용선이 정정했다. "없어진 게 아니지, 처음부터 없었던 거지.""같은 말 아니야?""엄연히 같은 말은 아니지…."있었던 것이 없어진 거랑 처음부터 없었던 건 매우 달랐지만, 박용선은 차마 더 말할 수 없었다. 강혜정의 눈빛이 너무 애절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선 그녀의 기분을 달래는 것이 먼저였다. "아냐, 아냐. 당신 말이 다 맞아...."다음날, 신은지는 일어나자마자 진영웅의 연락을 받았다.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오늘 아침 경제 뉴스 보셨어요?""아니요."대답하는 동시에 신은지는 얼른 뉴스를 틀었다. "무슨 일 있어요?"현재 재경그룹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작은 비바람에도 휘청일 수 있었다. 진영웅의 말투에 담긴 다급함을 느낀 신은지는 덩달아 같이 긴장했다. "어제 저희가 협력하려 찾아갔던 그 광영 그룹 말이에요. 그 회사에서 생산된 제품에 큰 문제가 있어서 언론에 고발당했어요. 오늘 아침에 대대적인 수사가 들어가고 난리가 아니었대요."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약 안 하길 잘했어요."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에 이슈가 터진 광영 그룹과 엮였다면 더 크게 휘청였을지도 몰랐다. 그 말을 들은 신은지는 어제 육정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송 사장과 사업 얘기를 하러 왔다면서, 골프 치고 밥만 먹고 갔다. 어디에 봐도 사업에는 큰 의지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
신은지가 결연한 표정으로 단호히 답했다. "아니요. 박태준은 죽지 않았어요. 제가 증명할 거예요.""...."그가 다시 입술을 비틀며 비꼬듯 말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그걸 당신한테 대답해 줘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요?""그런데 박태준 대표와 이혼한 상태라면서요? 그렇게 좋으면, 왜 재결합하지 않았어요?"신은지가 그의 바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바지 벗어주면 알려줄게요."매우 건조하고도 진지한 말투였다. 그래서 육정현은 그녀가 다른 마음이 있을 거라 오해하지 않았지만,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살아있었다면, 신은지 씨와 아이를 왜 만나러 오지 않았을까요?"육정현이 신은지의 배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비꼬듯 말했다. "제가 진짜 박태준이라면 굳이 육정현인척 연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무 이득도 없는데.”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손길은 매우 다정했다. 신은지는 그의 행동에 점점 더 헷갈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남자는 아직 육정현의 신분이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한쪽 손이 아직 잡혀 있었던 탓에 발이 꼬이고 말았다. 신은지의 몸이 뒤로 넘어가려던 순간, 육정현이 다급히 그녀를 감싸안으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신은지는 순식간에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시큼한 고통이 코를 통해 찌르르 전해졌다. "아!""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육정현이 매우 당황한 듯 물었다. 하지만 차마 더 다칠까 봐 신은지를 밀어내지 못하고 자리에 굳어버렸다. 신은지는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급해진 육정현이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며 눈을 마주쳤다. "신은지 씨,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익숙한 얼굴에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더 이상 그녀를 다정히 은지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태준아."그런데 이때, 육정현은 알 수 없는 열기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기민욱은 육정현이 서류를 살펴보는 것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재경 그룹이 파산하는 날, 축하하러 오신대" 육정현은 서류 페이지를 넘기며 응답했다. "근데 잘 연락이 안 되는 거 보니, 이번에는 꽤 외진 곳으로 가셨나 보네?" “응”기민욱이 대답하며 약병을 꺼냈다. "형, 약은 먹었어?" "응, 먹었어." 대답을 들은 기민욱은 약병을 치우고 비서가 가져온 케이크로 향했다. 케이크 한 입을 먹는 순간, 그의 얼굴엔 만족스러움이 가득 찼다.한편, 육정현은 서류 작업과 전화 통화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민욱은 케이크를 먹으며 턱을 괸 채 육정현이 일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디저트를 다 먹은 기민욱은 지루함을 느낀 듯 육정현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제야 육정현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이마를 문질렀다.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대화가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두통을 일으키고 있었다."아직 성과가 없어?""의지가 너무 강하고 협력하지 않아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래 사람들에게 압박을 더 가하라고 지시할게. 아무리 강인해도, 강철이 아닌 이상 결국엔 무너지게 마련이니까." 가을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상처들은 이미 딱지가 앉았지만, 고통은 여전히 생생했다. 재경 그룹의 주차장에 도착한 신은지는 지쳐 운전대에 이마를 기대였다. '진짜 태준이가 아니었던 걸까?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절호의 기회였는데, 놓친 것 같아 속상함이 밀려왔다. 혼란 속에 잠겨 있을 때, 갑작스레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신은지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바라보니, 친숙한 나유성의 얼굴이 보였다. 신은지는 창문을 내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 네가 여긴 웬일이야?"나유성이 대답했다. "박 이사님께 전할 말이 있어 잠시 들렀어. 아까 네가 지나가는 걸 보고 손을 흔들었는데, 못 본 것 같더라고." "아, 미안해.
전화 너머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나유성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물, 마음에 들어?"신은지가 산처럼 쌓여있는 용품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짚었다."유성아, 임산부 용품이고 유아용품이고, 나 다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줘.""조금 지나면 다 쓸 일이 생길 텐데, 그냥 두지. 너 회사 다니느라 이런 거 고를 시간도 없잖아."나유성이 서류를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차피 환불 안 되는 물건이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정 마음에 걸리면 며칠 뒤에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거기 갈 때 입을 연회복이나 좀 골라줘.""유성아, 나 임신 아니야. 그러니까 정말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나유성이 더듬거리며 물었다."임신이… 아니라고?"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은지가 다시 한번 확고히 진실을 전했다."응, 임신 아니야. 태준이가 실종된 뒤로 주주들이 자꾸 딴 마음을 품으니까, 아버님이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공표하신 거야."비록 본격적으로 나연그룹 경영에 참여한지 1년밖에 안 됐지만, 나유성은 어렸을 적부터 이쪽 업계에 발을 들여놓고 산 사람이었다. 신은지가 너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나유성이 머리를 짚으며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환불은 안 될 거야. 거기 직원들도 힘들게 물건들을 가져왔을 텐데, 다시 가져가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필요 없으면 내가 가져가서 다른데 다가 기부할 테니, 그대로 둬.”물건을 산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신은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물건이면 아이가 일년을 써도 다 쓰지 못할 것 같은 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임산부용 옷이며, 귀저기며…. 40평이나 되는 거실에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뭐가 많았다.통화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유성이 도착했다. 신은지가 전화할 때만 해도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많구나. 빨리 옮기긴 해야겠다
'다 들어놓고, 이제 와서 사과는, 재수 없어.'진유라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물잔을 들었다. 그러는 사이 곽동건이 또다시 훅 치고 들어왔다."전 여자를 사귄 적도 없고, 바람 맞아본 적도 없고 다른 여자한테 고가의 차를 선물한 적도 없어요."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곽동건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혼인신고서 언제 낼까요?""풉."진유라는 자기도 모르게 머금고 있던 물을 뿜고 말았다.굵은 물방울이 그의 준수한 얼굴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진유라는 당황한 나머지 바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려다가, 아차 하고 얼른 옆에 있던 티슈를 꺼내주었다. 곽동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티슈를 받아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진유라가 당황하며 사과를 건넸다."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네요. 다음에 농담하실 때 제발 깜빡이 켜고 좀 들어오세요."하지만 곽동건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어떻게 깜빡이 켤까요?""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최소한 마음 준비는 할 수 있도록."진유라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녀는 속으로 부디 곽동건이 이 일로 트집 잡지 않길 바랐다. 곽동건은 항상 진지한 편이었고, 진유라는 당황한 나머지 자각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이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신은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둘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었다. 곽동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알겠어요. 다음엔 미리 알려드릴게요."달달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신은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진유라도 안절부절, 곽동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도... 이만 가봐도 될까요?"“오늘 예정됐던 맞선 상대, 저예요.”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뭐라고요?""어머님께 어떻게 전해드리면 될까요? 자기 여자한테만 꼬리를 흔
신은지는 순간 이해를 못 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나유성이 그녀의 이름으로 기부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제 받은 선물 중에 옷도 포함되어 있었긴 했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나유성의 성격상 선의를 베풀어도 어디서 자랑하고 다닐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기부한 물건들이 다 고가이긴 했지만, 몇 트럭씩 기부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그런데 이 사실을 육정현이 알고 있다니, 이상한 상황이었다.“우연히 들었어요."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그냥 써도 됐을 텐데, 왜 기부했어요?"육정현은 어찌 되었든 경쟁상대였고, 그녀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재경그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성이가 너무 많이 사서, 도무지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기부했어요. 썩혀 버리느니,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육정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나유성 씨가 선물한 거라고요? 누가 그러던 가요?"하지만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신은지는 계속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물건 배달 온 직원에게 물어보니까, 굉장히 다정하게 생긴 사람이 샀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그 말에 부합하는 인물은 유성이 뿐이라서요.""하."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따지기 시작했다. "유아용품 사러 가는 사람 중에 다정한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다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물건을 사러 갔을 텐데,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겠어요? 신은지 씨, 생각을 너무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신 것 같네요."신은지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요...."육정현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해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기분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이때, 갑자기 그가 물었다. "나유성 씨는 신은지 씨가 어떤 취향인지 잘 아나 봐요?"신은지는 어떻게 이 질문에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물건이 포장 온대로 다시 돌려보냈기 때문에, 나유성이 그녀의 취향대로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식도에서 시작된 열기가 점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윤정현의 얼굴에 어느덧 홍조가 일렁였다. 그가 마신 술의 도수는 무려 52도였다. 그 독한 것을 멋모르고 원샷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표님. 술 잘 드시네요."진영웅이 옆에서 육정현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온갖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그가 계속해서 술잔을 들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흔한 수법에 당할 육정현이 아니었다. 워낙 잘난탓에, 웬만한 입바른 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진영웅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쉽사리 다시 잔을 들지 않았다. 끄떡없는 육정현의 모습에 진영웅은 필살기를 써보기로 했다."육 대표님, 원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고 빠른 시일 내에 소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진영웅은 이 말을 하는 동시에 신은지와 육정현을 번갈아 봤다. 그 눈짓을 알아차린 육정현은 괜히 울컥하고 화가 치솟아 올랐다.그렇게 창과 방패, 술을 먹이려는 자와 술을 거부하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육정현도 서서히 술에 취한 듯 눈빛이 풀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덩달아 진영웅과 육정현의 비서도 함께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유일하게 신은지만 임산부로서 배려받아 술을 안 마신 탓에 멀쩡했다. 신은지는 기사를 불러 진영웅과 육정현의 비서를 호텔로 보낸 뒤,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그런 다음 다시 육정현을 챙기기 위해 룸으로 돌아왔다. "걸을 수 있겠어요?"육정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풀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취한 육정현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하고 순종적이었다. "이제 가요. 가서 쉬셔야죠."신은지가 앞서 나가며 말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육정현이 바닥에 앉은 채 그녀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못 걷겠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신은지가 살짝 짜증을 담아 말했다."다리만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